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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삼월에 있었던 김영훈의 서원철폐령은 전 조선에 크나큰 태풍(颱風)을 몰고
왔다.
힘없는 일반 백성들에게는 서원과 향사의 횡포를 더 이상 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커다란 기쁨으로 다가왔으나, 그동안 양반입네 하면서 온갖 특권을 누리고 살았던
양반 사대부들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수많은 유생들이 서울로 몰려가서 돈화문 밖과 운현궁 밖에서 농성하고, 항의하고,
상소를 올려보았지만 한 번 내려진 서원철폐령은 물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농성하던
유생들을 공권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해산시켰으니, 백성들은 제 세상을 만난 듯
환호했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 것과 같은 충격을 받은 양반 사대부들의
한숨은 깊어만 갔다.
날씨는 이제 완연한 봄날이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 지는 벌써 옛날이며 조선 팔도의 논이란 논은,
서원철폐령으로 신명이 날대로 난 부지런한 농부들의 손에 의해 모내기를 끝마친 지
한참이 지났다.
대궐이라고 해서 따뜻한 봄기운이 비껴 가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대궐 안의 소문난 정원인 후원의 주합루와 좀 더 깊은 곳에 있는 관람정(觀纜亭)
과 반도지(半島池), 존덕정(尊德亭)을 비롯한 곳곳이 기화요초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요즘 들어 이상하게 어린 임금의 발길이 뜸한 부대부인 민씨의 처소인 성정각(誠正閣)
에는 부쩍 외부인의 출입이 눈에 띠게 늘어나고 있었다.
어린 임금은 요즘 운우(雲雨)의 기쁨을 흠뻑 안겨주고 있는 영보당 이씨의 처소에
거의 살다시피 했으니 어디 문안인사 드리러 올 짬이나 있겠는가.
지금 부대부인 민씨의 처소인 성정각에는 젊은 사내 둘이 부대부인 민씨와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민승호 민겸호 형제가 바로 그들이다.
"누님, 박씨한테서는 어떤 기별이 없었습니까?"
"아직 별다른 소식이 없다네. 그 사람이 하는 얘기로는 남종삼 대감은 다른 뜻을
품고 있는 것 같다는데..."
"다른 뜻이라니요? 남종삼 대감이 다른 뜻을 품고 있다는 말씀이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부대부인 민씨의 말에 놀란 민승호가 이렇게 민씨에게 따져 물었지만 부대부인
민씨는 묵묵부답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민승호가 다시 재촉을 하려고 하는데, 부대부인 민씨가 마침내 입을
연다.
"이보시게, 동생. 자네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내가 잘 알고 있으나 꼭 그 일을
해야하겠는가? 난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네..."
"이제 와서 이러시면 어떻게 합니까? 이미 상당수의 인사들이 우리와 뜻을 같이
하기로 하였는걸요..."
"히...유..."
민승호의 이런 말을 들은 민씨는 긴 한숨을 토해내며 내키지 않아 하는데,
"매형님께서 불의의 변을 당하시지만 않았어도, 저 들이 어떻게 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저들이 지금 하고 있는 꼴들을 보십시오. 이것은 숫제
지 세상인양 활개를 치며 나대는 꼬락서니하고는...에잉..."
"휴--... 동생들의 뜻이 정 그렇다면 내가 다시 한 번 박씨를 불러 남종삼 대감께
연통을 넣어보라고 이르겠네."
막상 이렇게 말한 민씨였지만 얼굴에는 어쩔 수 없이 한다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부대부인 민씨가 이렇게 곤혹스러워 한다는 말인가?
흥선과 함께 구름재에 살고 있을 때 부대부인 민씨는 지금의 어린 임금인 명복을
낳고 젖이 부족해서 젖어미(乳母)를 둔 적이 있었다. 바로 박씨였다.
어린 임금의 유모인 박씨는 어려서 세례를 받은 천주교 신자로 본명은 말타,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서는 박말타라고 불리 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박말타의 남편이 바로
홍봉주(洪鳳周)였다. 여기에 전 도승지 남종삼과 또 다른 천주교 신도인 이신규(
李身逵)를 포함하면 당대의 조선 천주교인들 중에서 주도적인 인물들이 되는 것이다.
일찍이 박말타를 통해서 천주교를 접했고, 흥선이 불의의 변을 당하고 나서 한층 더
천주교에 마음이 쏠리고 있는 부대부인 민씨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민승호와 민겸호
형제는 민씨에게 청을 넣어 박말타로 하여금 조선 천주교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남종삼을 끌어들이기 위한 공작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남종삼은 박말타와 박말타의 남편인 홍봉주의 끈질긴 설득에도 넘어가지
않았으니, 남종삼의 의중에는 지난해부터 시작된 북방의 아라사의 접근을 계기로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아책(防俄策러시아의 남침을 막는 대책)으로 섭정공
김영훈에게 접근하여, 아라사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다른 오랑캐인 법국의 힘을
빌리자는 생각을 피력함으로써 조선에서의 천주교 선교(宣敎)의 자유를 보장받으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조선에서의 선교의 자유는 물론이고 일거에 오랑캐를 물리친
공로를 인정받아 당당하게 천주교를 하나의 종교로서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민승호 민겸호 형제가 계획하고 있는 모든 일은 수포로 돌아갈 공산이
컸으니 두 사람이 이렇게 애가 닳아 있을 만도 했다.
민승호와 민겸호 형제는 천주교 신자인 남종삼을 설득하여, 남종삼이 끌어들일 수
있는 법국의 힘과 자신들이 포섭한 인사들의 힘을 합하여 김영훈이 이끄는 천군을
무너뜨리려고 하고 있으니 참으로 간도 큰놈들이다.
부대부인 민씨가 이렇게 곤혹스러워 하고 있는데 밖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들린다.
"마님, 쇤네이옵니다."
"누구냐? 유몬가?"
"예, 마님."
"어서 들게나"
잠시 후 후덕하게 생긴 인산의 아낙이 들어온다.
"편안하셨사옵니까? 마님."
"어서 오게... 그렇지 않아도 자넬 부르려던 참인데 잘 왔네."
박씨가 앉기 무섭게 말부터 꺼내는 민씨다.
"왜요? 무슨 일이 있사옵니까?"
민씨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박씨가 되묻는데 그런 박씨에게 말을 건네는 것은
한 쪽에 앉자있던 민승호다.
"마침 잘 오시었소. 그래, 남종삼 대감께서는 아직도 뜻을 바꾸지 않으셨소?"
"실은 쇤네가 이렇게 마님을 찾아 뵌 것은 그 일을 의논하려고 해서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혹 남종삼 대감의 심경에 무슨 변화라도 있다는 말이오이까?"
여태 잠자코 있던 민겸호가 민승호를 제치고 이렇게 물었다.
민승호와 민겸호 형제의 따가운 시선을 본의 아니게 한 몸에 받게된 박씨는 그런 두
사람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눈길을 민씨에게로 돌리며 이렇게 말한다.
"실은 어제 저희 집 양반이 남종삼 대감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대부인 민씨도 뒤의 얘기가 궁금한지 자세를 바로 하며 이렇게 물었다.
"남종삼 대감이 두 분 나으리들을 한 번 만나 뵙고 싶어하십니다. 오늘밤 에요."
"우리를 말입니까? 그것도 오늘밤 에요?"
"그렇습니다. 남종삼 대감이 오늘 밤 저희 집에 장 주교님을 모시고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 때 두 분을 만나 뵙고 말씀을 들어본 연후에 결정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장 주교님이?"
박씨의 이러한 말에 놀란 것은 다름 아닌 부대부인 민씨였다.
그동안 유모 박씨로부터 말로만 들었던 장 주교님을 뵈올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장 주교님을 뵌 적이 없는 민씨로서는 어떻게든 장 주교님을
한 번 뵙고 싶었다. 그리하여 이토록 불안한 마음을 위로 받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