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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정공 김영훈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지자 조선 팔도가 발칵 뒤집혔다.
일단 시범적으로 그동안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던 충청도 괴산 땅의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친위천군이 접수하고 토지와 재산을 몰수하여 토지는 일반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재산은 모두 국고로 귀속한다는 발표가 있자 전국의 힘없는 백성들은
환호작약(歡呼雀躍)했다. 그러나 반대로 양반 사대부를 비롯한 유림의 여론은 비등(
飛騰)했다.
유생이 둘만 모여도 섭정공에 대한 성토로 날을 지샜으며, 셋만 모이면 어린 임금과
섭정공 김영훈에게 항의하러 서울로 올라가자는 얘기가 주를
이루었다.
충청도 유생 720여명이 연명으로 작성한 상소가 대궐에 당도한 것을 필두로 각지에서
올라온 상소가 답지했으며, 서울로 몰려든 유생들의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돈화문으로, 또는 운현궁으로 행했다.
수천의 유생들이 돈화문 앞에 주저앉아 아이고 아이고 통곡하며,
"서원철폐령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하고 통곡하며 어린 임금이 있는 창덕궁이 떠나가라 외쳤으며,
"조선의 진시황(秦始皇) 섭접공은 폭거(暴擧)를 중단하라!"
하면서 운현궁 앞에서 연좌(連坐)에 들어갔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놀란 중신들이 김영훈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운현궁으로
하나둘 찾아왔다. 국무대신 정원용과 법무대신 조두순, 내무대신 김병학이 탄 남여가
운현궁으로 들이 닥쳤고, 다른 대소신료들의 남여가 줄줄이 운현궁으로 들어왔다.
여기에 서울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는 경무청장 이경하가 탄 말이 일진광풍을 몰고
운현궁에 당도했다.
아재당에 있으면서도 밖의 소란스러운 상황을 보고를 통해 익히 알고 있는 김영훈은
여러 중신들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찾아온 것을 보고 눈살부터 찌푸린다.
"무슨 일들 있으시오?"
이미 왜 왔는지 익히 짐작하고 있는 김영훈이었지만 일부러 모르는 채 하며 이렇게
물었다.
막상 운현궁으로 찾아오긴 왔으나 딱히 누가 나서서 말을 올려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 중신들이었다. 이미 김영훈의 서원철폐령은 떨어졌고, 만동묘와 화양서원은
친위천군이 접수한 지 오래였다.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사수하려는 유생들을 몽둥이와
창검으로 위협하며 접수한 것이 이미 수삼일 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유생들의 뜻을 받아들여 가납(嘉納)하여 서원철폐령을 거두어
달라고 주청(奏請)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지난번 중신회의 석상에서 서슬 퍼런 김영훈의 눈빛과 위엄을 기억하는
중신들로서는 고양이 목에 방울을 거는 일이나 진배없었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쉽게 입을 못 떼고 있는데 김영훈이 다시 말한다.
"여러 중실들께서 무슨 일로 오셨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겠소. 허나 서원철폐령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철회되는 일은 없을 것이니 그리들 알고 돌아들 가세요."
김영훈의 말투는 싸늘했다.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듯한 김영훈의 말에 움찔 놀라던 정원용이 무겁게 입을 연다.
"하오나, 합하. 지금 운현궁 밖에 운집한 유생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사옵니다.
이미 운현궁 밖에 운집한 유생들의 수가 오백을 넘었으며, 창덕궁 돈화문 밖에는
수천을 헤아린다 하옵니다. 자칫 저들을 이대로 방치하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크게 벌어질 듯 싶사옵니다."
"허면 국무대신 대감께서는 이 몸이 저들을 무력으로라도 해산시켜야 한다는
말씀이오이까?"
정원용이 하고자 하는 말의 진의가 무엇인지 뻔히 알고 있는 김영훈이었지만 오히려
이렇게 말함으로써 정원용의 진의를 왜곡하면서 말문을 막히게 만들었다.
정원용은 입맛이 썼으나 다시 한 번 노구(老軀)를 조아리며 말한다.
"합하, 신의 말의 뜻이 그런 것이 아닌 줄은 합하께오서 더 잘 알고 계실 것이옵니다.
지금 유생들이 저렇게 여론을 선동하는 것을 보면 저들도 단단히 벼르고 왔을
것이옵니다. 차라리 저들을 살살 달래면서 야금야금 하나씩 둘씩, 알게 모르게
조용조용 서원을 철폐하는 것이 어떠하겠사옵니까?"
정원용도 지난 1년 동안 많이 변했다.
지난 갑자년 신년하례식 때 김영훈이 의정부와 육조를 폐하고 12부로 개편한다고
했을 때만해도 입에 거품을 물면서 김영훈의 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하였으나, 이제는
나름대로 계책이란 것을 내 놓으면서 김영훈의 정책에 충실하려는 노력을 하였으니,
그의 집안도 지난해에 있었던 천군의 혼인정책으로 엮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김영훈과 천군이 실권(失權)을 하게 되면 그의 집안도 자동으로 실권을 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 죽으나 사나 김영훈과 천군을 위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정원용의 나름의 계책을 듣고 있던 김영훈은 정원용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가타부타 대답을 주지 않는다. 잠시 후 김영훈은 정원용이 아닌 김병학을 찾는다.
"내무대신 대감."
"신 내무대신 김병학 예 있사옵니다."
"지난번에 제가 지시한대로 내무부에서는 각 부처와 협의하여 전국의 서원에 대한
철폐를 단행할 준비가 되었겠지요?"
"이미 각도의 고을마다 합하의 명을 빠짐없이 전달하였으며, 서원 철폐에 대한
준비도 소홀함이 없사옵니다."
"그럼 당장 실시하도록 하시오. 제가 지난번에 지시한대로 전국 650여 개에 이르는
서원 중에 몇 몇 사액서원을 비롯한 47개소만 남겨놓고 모조리 철폐하도록 하세요.
반드시 올해 안으로 끝마쳐야 합니다. 방법은 지난번 중신회의에서 제가 말씀드린
대로하면 됩니다.
서원의 모든 토지는 몰수하여 토지를 경작하던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눠주도록 하고
서원과 향사에 속한 노비는 모조리 해방시키세요. 아울러 나머지 재산에 대해서도 다
몰수하도록 하고요."
"명을 따르겠사옵니다."
김병학에게 이렇게 지시한 김영훈은 이번에는 이경하를 부른다.
"경무청장 이경하 영감은 들으시오."
"하교하시옵소서, 합하."
"이경하 염감께서는 즉시 수하의 경무관들을 인솔하여 운현궁과 돈화문 앞에서
연좌농성하고 있는 유생들을 해산시키도록 하시오. 방법은 영감께서 알아서 하세요.
만일 영감의 공무를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모조리 국법으로 다스리도록 하고,
영감께서 보시기에 유생들의 우두머리라고 짐작되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잡아들여
엄히 문초하여 그 배후를 캐도록 하시오."
잔잔하면서도 힘있는 목소리로 이경하에게 이렇게 지시하는 김영훈의 말은 쉼이
없었다.
"감히 지엄하신 주상전하의 어명을 거역한 저따위 썩어빠진 유생들에게 자비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일벌백계(一罰百戒)로 다스려서 다시는 이와 같은 불측(不測)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시오. 아시겠습니까?"
"합하의 명을 따르겠사옵니다."
이경하는 무장 출신답게 듬직했다.
이미 지난 1년 동안 좌포장으로 재직하면서 김영훈의 명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얻은 '
낙동광풍(落洞狂風)'이라는 별명에 걸맞는 몸가짐이었다.
이경하는 이미 운현궁으로 오기 전부터 휘하의 경무관들을 대기시키고 있었다.
김영훈의 명이 떨어졌으니 이제는 자신의 일만 충실히 하는 일이 남았을 뿐이다.
그 일이란 다름 아닌 돈화문 앞과 운현궁 앞에서 농성하는 유생들을 해산하고
주동자들을 해산하는 것이었으니 경무청장 이경하는 어깨춤이 절로 나는 듯 하였다.
경무청의 경무관 1000여명과 만일을 위해 지원 요청하였던 소방청 소속의 소방관
500여명이 삽시간에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1500명의 대병력은 이경하의 지시로 인원을 둘로 나누어 돈화문 앞과 운현궁 앞의
유생들을 에워쌌다. 이제 농성 유생들은 낙동광풍 이경하 앞의 꺼져 가는 촛불에
지나지 않았으니, 그동안 거들먹거리는 유생들에게 등골이 휘도록 고혈이 쥐어
짜였던 힘없는 백성들에게는 실로 통쾌하고 후련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으나,
아직도 이 나라 조선이 자신들의 쌈지 속에 있다는 착각 속을 헤매고 있던 썩어빠진
유생들에게는 간담이 서늘할 정도의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