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79화 (77/318)

운현궁의 증축이 시작되었고, 9개월만에(1864. 9) 노락당과 노안당 건물의 준공을

보았다고 한다.

당시 대왕대비 조씨는 호조에 명하여 운현궁에 매달 쌀 10섬과 100냥씩을 보내고,

운현궁의 증축 비용으로 17,830냥을 지원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렇게 해서 운현궁이 준공되었을 때 고종은 대왕대비 조씨와 왕대비를 모시고

운현궁 낙성식에 참여하였다. 이 때 고종은 자신이 그 곳에서 살던 때를 생각하여

근처의 선비와 소년들에게 임시 과거시험을 보게 하고 선비 50명, 소년 497명을

선발해서 시상하는 등 운현궁의 준공을 기념 축하하였다고 한다.

본래 흥선군의 사저였을 때 운현궁의 위치는 창덕궁과 경복궁의 중간부근으로 지금의

운현궁과 덕성여대 자리에 해당된다. 그러나 증축하여 규모가 가장 커졌을 때는 주의

담장 길이가 수 리(理)나 되고 네 개의 대문이 웅장하여 마치 궁궐처럼 엄숙하였다고

하는데, 현재의 덕성여대, 구(舊) TBC방송국, 일본문화원, 교동초등학교, 삼환기업

일대라고 한다.

이럴 정도의 크기였으니 두 대신이 눈이 휘둥그레지며 놀라는 것이 무리는 아니었다.

"근데 이번에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 열 군데에 세워지는 사범학교의 교수들에 대한

선발은 어떻게 되나? 오랫동안 지방에 가 있는 일이 많았던 나로서는 도대체

학생들을 가르칠 교수들은 어떻게 수급할 것인지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네. 혜강,

자네는 문교부를 책임지고 있으니 알고 있겠지?"

"하하하, 알다 뿐인가, 나도 교수진이 교육받을 때 같이 신학문에 대한 교육을

받았는걸..."

"그랬었나? 허--어, 이런. 지방 출장만 가지 않았던들 나도 그 신학문을 배우는 건데.

.."

"대신 자네는 천군 출신 차관과 지리학자들로부터 지리학(地理學)이란 것을 배우지

않았나. 욕심도 많은 사람이로세..."

"하하하...그런가..."

절친한 두 대신이 이런 얘기를 주고받고 있을 때 어느덧 대정원 입구에 접어들었다.

대정원은 영로당을 나와 몇 개의 문을 지나야 할 만큼 운현궁의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조선의 모든 정보와 해외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다루는

곳이기에 그러하리라.

"어서 오십시오. 두 분 대감."

두 사람이 대정원 한 쪽에 마련된 작은 정자에 들어서자 한상덕 대정원장이 이렇게

말하며 두 사람을 맞았다.

"허-어, 우리 두 사람만 늦었나 봅니다."

"그러게 말일세."

"어서 오시지요."

이렇게 분분하게 인사를 나누고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한상덕의 주재로 내무대신

김병학, 국방대신 김병국, 합참차장 신헌, 재경대신 김기현, 농림대신 김인호,

문교대신 최한기, 건교대신 김정호 등이 참석한 관계기관 대책회의가 시작된다.

이번 관계기관 대책회의의 참석자들은 김영훈의 멸을 이행할 방도를 논의하는데,

먼저 서원 철폐령에 대해서는 국방부와 내무부, 그리고 합참에서 동원 가능한 모든

병력과 인원을 총동원하여 먼저 철폐할 서원과 보존할 서원의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고 실행에 옮기기로 했으며, 군역 문제는 농림부에서 파악한 정확한 호구를

대비하여 국방부와 재경원에서 국방력의 강화와 세수의 증대를 위한 세부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시행에 들어가기로 결정한다. 아울러 토지개혁에 대한 문제는 농림부와

건교부에서 주관하여 토지개혁에 대한 안(案)을 김영훈에게 제출하고 김영훈의 최종

승인이 떨어지면 바로 토지개혁에 들어가는 것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범학교와 성균관 대학교, 사관학교에 대한 토론을 하는데,

"내가 잠깐 듣기론 사범학교의 교수 인원에 대한 선발이 다 끝났다고 들었소만,

그것은 어떻게 마무리가 됐는지 궁금하군요."

아까 대충 최한기로부터 얘기는 들었지만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김정호가 문득 이런

말을 꺼내며 한상덕에게 물었다.

한상덕은 그런 김정호의 의문이 당연하다는 듯 그 부분에 대한 설명을 하기 시작한다.

"교수 인원에 대한 신학문의 소양교육은 모두 끝냈습니다. 섭정공 합하의 명으로

지난 1년 동안 열었던 운현궁의 사숙(私塾)에서 천군에게 충분한 교육을 받았기에 그

점은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겝니다."

"그렇군요. 한데 그 숫자가 얼마나 되기에...?"

"아! 여태 그것을 모르고 계셨군요. 죄송합니다. 다른 대신들께서는 이미 아시고

계시는 부분이었기에 대감께서도 아시고 계시는 줄 알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먼저

운현궁의 사숙에 대한 말씀부터 드려야겠군요."

지난 갑자년(1864년)부터 운현궁에서는 사숙이 문을 열었는데, 상공대신 박규수와

재경대신 김기현 및 그 외에 몇 몇의 대신들이 주장하여 천군의 교육을 받은 우수한

인재를 조선의 개혁을 위해 쓰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런 사숙에서는 1년 동안 500명 이상이 운현궁에 머물면서 신학문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조선의 젊은 인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자료는 천군이 가지고 있었기에 선발하는데

지장이 없었고 부족한 인원은 박규수를 비롯한 몇몇 대신들의 추천을 받았으며, 일반

상민과 천민들의 자제들도 선발하여 교육하였는데 그들은 주로 동학교주 최제우의

천거를 받은 인물들이었다.

섭정공 김영훈은 이번에 문을 여는 서울을 비롯한 수원, 공주, 전주, 강릉, 대구,

평양, 함흥, 해주, 의주 등 열 곳의 사범학교 교수인원으로 각각의 사범학교에 최소

15명에서 최고 20명을 준비하고 있었다.

총 500명이 넘는 인원 중에서 성적이 우수한 일부는 성균관 대학이나 사관학교로

진학을 시키고 그보다 약간 성적이 떨어지는 일부는 서울을 비롯한 각 지방의

사범학교의 교수인원으로 배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렇게 문을 여는 사범학교에서는 그동안 조선에서 배우지 못한 신학문 위주의

교과목이 중심이 되었는데 국어, 한문, 영어, 수학, 역사, 지리, 물리화학, 체육,

음악, 농업, 상업 등이었다.

비록 1년이란 짧은 기간의 운현궁 사숙에서의 교육이었지만 숙생(塾生)들 대부분은

내노라하는 조선의 인재답게 특별한 문제없이 교육을 마칠 수 있었는데, 숙생들이

가장 적응하기 힘들고 어려웠던 과목은 과학분야와 음악분야였다.

그 중에서도 음악분야는 조선에서는 생소한 음률로 이루어진 노래가 대부분인 관계로

대부분의 숙생들이 그 어려움을 호소할 정도였다. 더더군다나 중인환시(衆人環視)

리에 큰 소리로 노래한 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한 숙생들의 고생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그 노래라는 것을 한 번 듣고 싶구려..."

한상덕이 한참 김정호에게 설명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합참차장 신헌이

이렇게 말하며 흥미를 나타냈다. 신헌은 주로 외직(外職)으로 나돌았기 때문에

운현궁 사숙에서 배웠다는 신학문에 대한 관심이 많았으며, 특이나 노래라는 것에

관심이 갔다.

"하하하, 언제 기회가 생기겠지요..."

"하하하"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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