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에잉...어찌 이런 일이...에이..."
운현궁에서 있었던 중신회의에 참석하고 자신의 집 사랑채로 돌아온 흥인군 이최응은
자리에 앉자마자 이렇게 혼잣말을 내뱉으며 짜증을 냈다.
새파랗게 젊디젊은 놈이 섭정공 이랍시고 거들먹거리는 꼴도 보기 싫었으며, 근본도
모르는 한낱 양이(洋夷)에 불과한 족속들을 천군이라고 떠받드는 짓거리도
눈꼴시었다.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점점 이 나라 조선이 이씨의 나라가 아닌 김씨의
나라가 되가는 것이었다. 비록 임금의 나이가 어려 김영훈에게 대리(代理) 섭정토록
어명이 내려졌다고는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 자리는 자신의 동생이 앉아야 하는
자리가 아닌가 말야,
실상 흥인군이 중신회의에서 사사건건 김영훈의 정책에 반기를 든 이유는 다른 곳에
있지 않았다. 흥인군의 마음 깊은 곳에는 '네가 감히 누구덕분에 그 자리에 올랐는데'
하고 김영훈을 깔보는 마음이 깔려 있었다.
자신의 동생인 흥선이 올랐어야 할 자리에 대신 오른 주제에 어찌 감히... 하는
생각이 깔려 있었기에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고 그 심기가 표출된 것이 오늘
있었던 중신회의 석상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흥인군은 장죽을 물었다.
물려진 장죽에는 이미 담배가 재어져 있었다.
장죽을 입에 문 흥인군은 놋쇠 재떨이 옆에 있는 네모난 곽 성냥을 집어든다.
그리고는 한 알의 성냥을 꺼내 불을 당긴다.
"그래도 그 천군인지 지랄인지 하는 것들이 재주는 있단 말이야..."
장죽에 불을 당기며 길게 한 모금 빨아 당긴 흥인군은 자신의 손에 있는 타다만 성냥
알을 바라보며 이렇게 읊조렸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천군이 도래한 후로 조선 백성들의 생활은 몰라볼 정도로
급격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천군이 세운 무슨 도감이며 무슨 공장이며 하는 것들에서
연일 새로운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고, 시장경제의 활성화 덕분에 그런 것들이 전국
어디서나 돈만 있으면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되었다.
흥인군이 이런 생각을 하며 맛있게 담배를 빨고 있는데 밖에서 소리가 들린다.
"백부님 소질 순팔(舜八)이옵니다."
"어서 들어오시게."
흥인군의 말이 떨어지자 순팔이라는 사내와 또 다른 젊은 사내 둘이 따라 들어온다.
"어서들 오시게나."
"편안하셨사옵니까? 흥인군 대감."
"오랜만에 뵙겠사옵니다. 대감."
이렇게 인사를 나누며 자리에 앉는 것이 이미 한 두 번 만난 사이가 아닌 듯 싶다.
흥인군은 이들이 자리에 앉자 순팔이라 칭한 사내에게 묻는다.
"그래 갔던 일은 어떻게 됐는가? 경평균(慶平君)이 승낙하던가?"
"아무래도 경평군은 힘들 것 같사옵니다."
"뭐야! 이런...에잉..."
흥인군은 순팔이란 사내의 대답에 이렇게 혀를 차면서 안타까워했다.
순팔이란 사내와 그를 따라 들어온 두 사람의 건장한 사내, 그리고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경평군이 누군가 하면, 순팔이라 불린 사내는 흥인군의 조카요, 어린 임금의
종형(從兄)이 되는 젊은 종친의 한사람으로 안동 김씨 일파의 세상에서도 이조참의(
吏曹參議)의 벼슬까지 올랐을 정도로 처세에 밝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파악하는데
재주가 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관운(官運)은 김영훈이 천군을 이끌고 조선에 옴으로써 끝나고 말았으니,
안동 김씨 일파의 세도에도 살아남아 승승장구하던 친 안동 김씨 일파인 그를 그냥
놔둘 김영훈이 아니었다. 결국 안동 김씨 일파의 숙청 사건 때 그도 함께 관직에서
쫓겨나 지금은 하는 일 없이 빈둥대면서 김영훈을 비롯한 천군에게 이를 가는 것으로
소일하고 있었다.
원래 이름은 이재원(李載元)이고 순팔은 그의 자(字)이고, 흥선의 형인 흥녕군
이창응(李昌應)이 그의 아버지였다.
이재원을 따라 들어온 젊은 두 사람은 각각 민승호(閔升鎬)와 민겸호(閔謙鎬)였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여흥 민씨로 어린 임금의 생모인 부대부인 민씨의 인척이었으며,
민승호는 역사에서 고종의 비(妃)가 되는 민자영의 오빠다.
그리고 이들이 입에 올린 경평군은 이세보를 말하는 것이다.
경평군은 유명무실한 종친 중에서도 가장 덕망 있고, 학식 있는 종친이었으니, 안동
김씨 일파의 손에 죽은 도정 이하전, 그리고 어린 임금의 생부인 흥선과 함께 헌종(
憲宗) 사후에 가장 강력하게 거론되던 임금 후보였으나 안동 김씨 일파의 견제로
유배까지 경험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꼭 경평군이 필요합니까? 소질이 보기에 그자는 이미 천군에 포섭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왜? 무슨 일 있었나? 혹 경평군이 무슨 눈치를 챈 것은 아닌가?"
흥인군은 이재원의 말에 퍼뜩 놀라며 이렇게 물었다.
만일 경평군이 천군에게 포섭되어 자신들에 대한 얘기를 흘리기라도 한다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재원과 민승호, 민겸호 형제는 흥인군이 중신회의에 참석한 사이, 경평군의
집에 찾아가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핑계로 넌지시 천군과 김영훈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경평군의 뜻을 모르는 이상 함부로 자신들의 뜻에 동참을 권유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평군의 입에서 "그런 소리를 할 것이면 다시는 내 집에 얼씬도 마시오.
천군이 등장한 후로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윤택해졌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요?" 하는
무안을 당하고 말았으니, 경평군은 진실로 나라와 백성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그런
종친이었다.
그런 경평군을 자신들이 획책하는 일에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것이나, 어디 경평군이 그런 시덥잔은 일에 동참할 인물이던가.
"그것은 아니옵니다만, 그자가 하는 소리가 예사롭지는 않은 듯 싶어서..."
"그럼 됐네. 그나저나 경평군이 동참하지 않으면 누구와 손을 잡는다...?"
흥인군과 이재원이 이런 소리를 하며 걱정을 하는데 잠자코 듣고만 있던 민승호가
한마디한다.
"외무차관 민치상 대감은 어떻습니까?"
"민치상 대감을...?"
"그렇습니다. 민대감은 우리와 같은 여흥(驪興) 민문(閔門)으로 섭정공이 이끄는
조정에 출사하였다고는 하나 저들의 정책에 불만이 많은 것으로 아옵니다만...?"
"나도 그런 느낌이 들었네...하지만 나는 민치상 대감과는 그다지 교통이 없는지라...
"
이렇게 말하면서 오전에 있었던 중신회의 석상에서의 일을 얘기한다.
흥인군은 세 사람에게 김영훈이 내린 서원 철폐령과 군역문제, 마지막으로 토지개혁
문제에서 민치상이 격렬하게 반대하는 것을 얘기한다.
흥인군의 얘기를 들은 민승호는,
"그것 보십시오, 민치상 대감은 나름대로 천군에 대한 불만이 있다니까요."
"그럼, 자네들이 한 번 민치상 대감을 만나서 설득해 보게. 아무래도 자네들은 같은
문중의 사람들이니 나보다야 훨씬 수월할 게 아닌가?"
"알겠습니다. 소인들이 민치상 대감을 찾아뵙지요."
흥인군과 세 젊은 사람은 이렇게 뭔가를 꾸미고 있었는데, 실상 흥인군은 자신이
민씨 형제의 손에 놀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우유부단(優柔不斷)한 성격의 흥인군이 이렇게 섭정공 김영훈과 천군에 반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큰 결심이 필요했는데, 그 결심을 하게끔 부추긴 이들이 바로
흥인군의 앞에 있는 민승호와 민겸호 형제였다. 그리고 두 사람의 사주를 받은
부대부인 민씨까지 흥인군에게 나설 것을 종용하였으니, 삽시간에 자신이 정국변화의
핵심에 선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고, 자신의 조카가 이 나라의 임금인데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누가 나설까 하는 만용까지 생겨나게 되었으니 이래서 사람은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헌데 우리의 세력이 너무 적지 않겠나? 아무리 우리가 세를 규합한다고 해도 저들에
비해서는 태부족인 실정이니..."
막상 민씨 형제들의 꾀임에 넘어가서 일을 벌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는 없었다. 그런 흥인군의 마음을 아는지 민승호는 한 바탕 웃어재끼며 말을
한다.
"하하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감. 이제 우리는 시작입니다. 아직까지
저들은 우리 조선을 완전히 장악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앞으로 좀
더 준비만 한다면 머지 않아 저들을 무너뜨릴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내심으로 불안한 흥인군의 말은 어딘지 힘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으니 이것을 일러 기호지세(騎虎之勢)라고 한다던가?
그런 흥인군의 내심을 알고 있는 민승호는 다시 한 번 장담한다,
"그렇지 않구요. 더군다나 저들이 이번에 서원을 철폐하라고 명한 것은 스스로 제
무덤을 판 꼴이 될 겝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는 그 세력만 우리 일에 동참한다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