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이제 아까 김병국 국방대신 대감이 건의한 군정의 문란에 대한 여의 명을 내리겠소.
먼저 국방대신 대감의 아까와 같은 건의는 참으로 가상한 건의라 칭송하지 않을 수
없소. 여가 주상전하를 대리하여 섭정한 지난 1년 동안 받았던, 여러 건(件)의 건의(
建議) 중에서도 가장 혁신적이고 참다운 민본사상(民本思想)에 입각한 건의였소.
그러한 건의를 한 국방대신 대감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오."
"망극하옵니다. 합하."
김영훈의 때아닌 칭찬에 오히려 황송한 김병국이다.
아까 김영훈에게 무안을 당한 흥인군 이최응은 두 사람의 그런 작태가 눈꼴이 신지
고개를 돌리는데 그런 흥인군의 모습을 놓칠 김영훈이 아니다.
잠시 흥인군을 말없이 응시하던 김영훈은 입을 열어 새로운 명을 내린다.
"국방대신 대감께서 이미 말씀하셨듯이 군정의 문란은 힘없고 어리석은 백성들의
가슴에 얼마나 많은 절망과 좌절과 원망을 심어 주었는지 모르오. 해서 여는
국방대신 대감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동안 상민 이하 일반 백성들에게만 부과하였던
군포납입의 의무를 양반 사대부를 포함한 모든 백성들로 확대하여 사농공상(士農工商)
사민(四民)에게 모두 부과할 것을 결정하는 바이오. 여기에 예외는 없소.
왕족(王族)이라고 해서 군역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며 권문세가(權門勢家)의 자제(
子弟)라 하여 군역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오. 말 그대로 조선의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모든 양인정남(良人丁男)은 이로서 동등한 군역의 의무를 지게 되는 것이오.
그 군포는 이미 화폐의 통용이 완성된 현 시점에 맞춰 군포만큼의 세금을 현금으로
받도록 하겠소.
만일 집안의 형편이 곤궁하여 군포를 내지 못하는 백성이 있을 시에는 3년 간의 군
복무로 그 의무를 대신할 수 있소. 이 말은 3년 간 복무를 한 양인정남은 더 이상
군역의 의무를 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오.
여는 이것을 실시하여 국방력 강화와 재정 수입의 증대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생각이오. 국방부를 비롯한 관련부처에서는 여의 이러한 뜻을 받들어 한치의
소홀함도 없도록 하시오."
김영훈의 명이 떨어지자 중신들이 분분하게 명을 받잡는다는 말을 한다.
잠시 만감이 교차한 김영훈은 불쑥 이런 말을 한다.
"군정의 문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정다산(丁茶山)의 시(詩)가 있다고 들었는데
누구 아시는 분이 계시오?"
난데없는 정약용의 시를 묻는 질문에 중신들이 의아함을 나타내는데, 그런 중신들
사이에서 최한기가 나선다.
"합하 군정의 문란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정약용의 시로는 애절양(哀絶陽)이
있사옵니다."
최한기는 천천히 애절양에 대해 설명을 한다.
애절양이란 말 그대로 "양물(陽物-자지)을 자름을 서러워함"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목민심서에 보면,
[이것은 1803년 가을 내가 전라도 강진에 있으면서 지은 시이다. 갈대밭에 사는 한
백성이 아이를 낳은 지 사흘만에 군적에 등록되고 이정이 소를 빼앗아가니 그 사람이
칼을 뽑아 생식기를 스스로 베면서 하는 말이 '내가 이것 때문에 곤액을 당한다'
하였다. 그 아내가 생식기를 관가에 가지고 가니 피가 아직 뚝뚝 떨어지는데 울며
하소연했으나 문지기가 막아버렸다. 내가 듣고 이 시를 지었다.]
하였으니 군정의 문란이 극에 달하여 백골징포(白骨徵布)니, 황구첨정(黃口簽丁)이니
하는 갖은 방법으로 가렴주구를 일삼는 관헌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하였다.
'哀絶陽'(생식기 자름을 슬퍼함)
갈밭마을 젊은 아낙의 곡소리 기나긴데
현문 향해 곡하고, 푸른 하늘 향해 울부짖누나.
"남편이 출정나가 돌아오지 않음은 오히려 있을 법 하건마는
예로부터 사내가 생식기 잘랐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오
시아버지 돌아가셔 이미 상복을 입은 데다, 아이는 아직 배냇물도 씻지 않았는데
세 사람의 이름이 군보에 올랐다나요
처음으로 호랑이같은 문지기에게 가서 하소연해 보려함에
이장이 포효하며, 마굿간에서 소를 끌고 나갔지요
칼을 갈아 방에 드니, 피가 자리에 흥겅한데
아이 낳아 곤궁을 만났다고 스스로 한탄하던 걸요"
더운 방에서 궁형을 행하는 것이 어찌 허물이 있지 않으리요
민나라 사람들이 자식을 거세했던 일도 진실로 또한 슬픈 일이라오
산 것이 살고자 하는 이치는 하늘이 부여해 준 것이라서
하늘의 도는 사내를 만들고 땅은 계집을 만들거늘,
소와 돼지 거세함도 오히려 슬프다고 말할진대
하물며 백성들이 자손 이을 것을 생각함에서랴.
세도 있는 집에서는 일년 내내 풍악을 울리지만
쌀 한 톨, 비단 한 조각 축나는 일 없다네.
우리 백성들 똑같아야 하거늘 어찌해서 가난하고 부유한가?
나그네는 창가에서 거듭 시구편을 읊조린다오
최한기가 읊조리는 애절양을 들으며 김영훈은 마음이 아팠다.
힘없고 어리석은 백성들이 당하는 수탈에 마음이 아팠으며, 자신의 선조들도 그러한
고통을 당했으리라는 생각에 역시 마음이 아팠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김영훈은 중신들에게 말한다.
"모두 들으시오. 혜강 대감이 읊조린 애절양이라는 시에 나오는 힘없는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모든 중신들은 여의 뜻을 받들어 양반 사대부를 포함한 모든 백성들의
군포납입이 차질없이 시행될 수 있도록 일로 매진하여 주시기 바라오. 아울러
대정원에서는 전국으로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힘없는 백성들의 등골을 빼먹는 못된
무리들을 적발하여 민생을 안정시키도록 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