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73화 (7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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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훈이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접수할 것을 명한 이유는 따로 있지 않았다.

바로 이 두 서원이 전국 서원의 영수(領袖) 격인 서원이었기 때문이다.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명나라 신종(神宗)을

제사지내기 위해, 1704년(숙종 30) 충북 괴산군 청천면(靑川面) 화양동(華陽洞)에

지은 사당으로 당시 조선의 4대 서원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노론(老論)의 소굴이

되어 상소와 비판을 일삼았고, 비용을 염출(捻出)하기 위해 양민을 토색(討索)하는

등 민폐가 심하였다.(*1)

화양서원은 노론(老論)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을 제향한 서원으로, 1696년(숙종 22)

9월 사액(賜額)을 받았고 전국의 서원 중에서 가장 유력한 서원이었다.

특히 화양서원은 제멋대로 발행하는 화양묵패(華陽墨牌) 때문에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묵패란, "서원에 제수전(祭需錢)이 필요하니 아무 날 아무 시간까지

얼마를 봉납(奉納)하라."는 식의 고지서(告知書)에 묵인(墨印)을 찍어 군(郡) ·현(

縣)으로 발송하는 것이지만, 이 묵패를 받은 자는 관(官) ·민(民)을 가리지 않고

전답이라도 팔아서 바쳐야 했다. 또, 1862년 3월에는 이곳 유생들이 원우(院宇)를

수리 ·개축한다는 명목으로 협잡배들과 전라도 지방에까지 출몰하여 재물을

거두어들여서 물의를 일으켰다. 참 개 같은 놈들이었다.

죽은 흥선은 젊어서 이 화양서원의 유생들에게 뭇매를 맞은 경험이 있었는데,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어린 임금은 화양서원 만큼은 반드시 없애버릴 것을 원하였으나

김영훈의 청으로 뜻을 거두었으니, 김영훈은 이렇게 철폐된 서원에 학교와 지방

대학을 유치할 생각이었다.

"처음 서원과 향사(鄕祠)가 만들어질 때에는 훌륭한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철따라

제사를 지내며 학문을 익히고, 향촌(鄕村)의 교화를 맡은 훌륭한 뜻으로 만들어졌다.

참으로 가상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고인 물은 반드시 썩게 마련인 법,

처음의 그 고귀한 뜻은 어디에 가고 작금(昨今)에 와서는, 서원과 향사에 딸린

토지가 면세되는 점을 악용하고, 조정에 출사한 선배 유생들과의 연줄을 잡을

목적으로 이놈저놈 너도나도 중구난방(衆口難防)으로 서원과 향사를 세우게 되었다.

이에 따라 어떤 유학자의 자손이나 제자들은 그 유학자의 서원을 세우는 것이 가장

든든한 양반 밑천이 되었고, 향촌에서 존경받고 행세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이리하여 별 내세울 만한 학문적 업적이나 행적이 없는 인물이라도 자손들이나

제자들이 돈푼이나 있고 권력의 줄이 있으면 서원을 제멋대로 세웠다.

이런 결과로 작금에 이르러서는 좀 크다 싶은 마을에는 서원이 하나씩은 다 있고, 좀

적다 싶은 동리(洞里)에는 향사가 생겨나게 되었다.

서원과 향사에서 지내는 제수를 빙자하여 힘없는 백성들을 수탈함이 이루 말 할 수

없었으며, 크고 작은 행사를 빌미로 관, 민을 가리지 않고 공갈과 협박을 일삼았으니,

처음의 그 고귀하고 순결한 뜻은 다 어디로 가고 이제는 군역기피자와 협잡

모리배의 소굴로 전락(轉落)한지 오래였다.

그러나 무능한 조정의 중신들은 서로 나 몰라라 책임을 떠넘기면서 누구도 그에 대한

감독과 지도를 할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백성들은 서원과 향사의 수탈에 신음하던 말던 제 배만 부르면 된다는 심보가 아닐

수 없으니, 실로 아조의 크나큰 치부(恥部)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주상전하의 명으로 섭정공의 자리에 오른 여(余)는 백성들의 서원과 향사에 대한

원성이 하늘을 찌름을 익히 알고 있었음에도, 그동안 다망(多忙)한 국사를 핑계로

그런 서원과 향사의 횡포를 묵인하였으니 실로 그 죄만(罪萬)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저 간악하고 극악무도(極惡無道)한 서원과 향사를 철폐하지 않고서는 백성들의

편안한 삶은 물론이요, 나라의 안정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이제 여는 깨달았으니

어찌 좌시하겠는가.

이제 여는 조정에 명을 내려 전국의 서원과 향사를 철폐하고 백성들의 곤궁한 삶을

어루만질 생각이다. 조정의 모든 대소신료(大小臣僚)들은 이러한 여의 뜻을 헤아려

한치의 어긋남 없이 공명정대하게 평가하여 극악무도한 서원과 향사의 철폐를

명하나니 만약 이런 여의 뜻에 불만이 있는 자는 앞으로 나서라. 여가 친히 그런

자들을 징치(懲治)하여 본으로 삼을 것이니..."

좌중의 중신들과 종친부 인사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듣기만 하였다.

대부분의 중신들은 김영훈의 "서원철폐령"은 낭랑하게 퍼지며 좌중을 압도하였고,

이미 지난 1년 동안 김영훈과 천군의 행보에 공감하고 따르게 된 대부분의 중신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최응같이 떫은 감 씹은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리는 자들도 없지는 않았다.

김영훈은 준비한 "서원 철폐령"을 모두 읽더니 잠시 좌중의 중신들을 하나하나

쳐다본다. 만감이 교차한다는 표정이다. '진정한 개혁은 이제부터다' 라는 의지의

표현인지도 몰랐다.

"내무대신 대감은 들으시오."

"명을 내리시옵소서. 합하."

김병학은 김영훈의 부름이 있자 재빨리 대답을 한다.

"내무대신은 각 고을마다 여의 "서원 철폐령"을 내리고, 한글로 방을 붙여 조선의 천

육백만 백성들이 알아보도록 하시오. 그리고 각 부와 긴밀하게 협의하여 빠른 시일

내로 철폐할 서원과 남겨둘 서원의 구분을 짓도록 하고 시행토록 하시오.

아울러 여의 "서원 철폐령"에 반기를 드는 자들이 있으면 국방부와 합참 등 관련

부처의 협조를 받아 가차없이 징치하여 백성들에게 본을 보이도록 하시오. 또한

이렇게 몰수된 서원과 향사의 토지는 모두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에게 고루

나눠주도록 하고, 나머지 재산은 국고로 귀속시키도록 하시오."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이렇게 김병학에게 명을 내린 김영훈은 다시 국방대신 김병국과 대정원장 한상덕에게

내무대신을 도와 서원 철폐령이 제대로 시행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아끼지 말

것을 지시했다.

이렇게 서원 철폐에 대한 명령체계가 어느 정도 정해지자 김영훈은 국방대신

김병국이 건의한 군포대납의 폐지 또는 징병제의 실시에 대해서 명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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