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으....으..."
머세슨 상회의 종업원들에게 몰매를 맞은 사내는 화란인(和蘭人) 의사가 치료하고
돌아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신음소리를 내며 깨어나기 시작한다.
사내의 옆에서 지키고 있던 정운두는 사내가 깨어날 기미가 보이자 전준호를 부른다.
아무래도 서양말을 못하는 정운두로서는 사내와 대화를 통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전준호가 들어오고,
"이보시오, 정신이 드시오?"
"으...아...여기가...?"
"여기는 쥬신상사 안이오. 아무도 당신에게 위해(危害)를 가하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시오."
거지 사내는 전주호의 유창한 영어를 듣자 어느 정도 안심을 하는 모양이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고,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자신이 누워있는 곳을 살펴보는
것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하는 모양과 똑같았다.
"저 좀 일으켜 세워주시겠습니까?"
"알겠소. 자...이렇게 조심하고..."
사내는 전준호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전준호는 그런 사내가 편하도록 사내의 등에 베개를 밀어 넣어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런 봉변을 당하셨소? 우리 부 지점장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하였오이다."
"저를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물 좀 있으면..."
"아-- 물 여기 있소. 혹시 배가 고프지 않소? 요기할 꺼리라도 드릴까요?"
"그래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전준호는 사내가 먹을 것을 요구하자, 직접 주방으로 가서 먹을 것을 준비한다.
전준호는 주방으로 가면서도 정운두에게 사내를 잘 보살피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
한국에 있을 때부터 요리가 취미였던 전준호는 나가사끼에 와서도 직접 요리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주방에는 항상 요리 재료가 떨어지질 않았다.
정운두는 그런 전준호에게 남자가 무슨 청승이냐면서 핀잔을 주기도 했지만
페미니즘의 활동이 왕성한, 남자로서 살아남는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당시의
한국에서는 전준호처럼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 출입을 하는 남자를 보는 것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것을 천하의 팔난봉이자 철저한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이 머리 속에
깊이 박혀있는 조선남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정운두에게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주방에 들어간 전준호는 한참을 딸그락거리더니 커다란 쟁반에 음식을 담아 가지고
나온다.
"자 이것 좀 드시오."
전준호가 내온 커다란 쟁반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크림수프가 있었으며, 다른
조그만 접시에는 오물렛과 소시지 그리고 먹기 좋은 크기로 잘려진 마늘 빵이 놓여져
있었다.
사내는 전준호가 내민 커다란 쟁반을 받아 들고는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전준호는 사내의 갑작스런 울음에 당황하며,
"왜 그러시오? 음식이 마음이 안 드시오?"
"아닙니다...흑흑... 너무도 오랜만에 보는 따뜻한 음식이라..."
"식기 전에 어서 드시오. 그리고 뭐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얘기하고."
어느새 울음을 그친 사내는 허겁지겁 음식을 먹기 시작하는데, 며칠을 굶은
모양이었다.
"후루룩...후루룩, 냠냠...쩝쩝..."
"천천히 드시오, 그러다 체하겠소."
사내가 음식을 다 먹자 전준호는 음식 쟁반을 한 쪽으로 치우며 궁금한 것을
물어본다.
"당신은 누구요? 그리고 머세슨 상회와는 무슨 일이 있길래 그런 봉변을
당하셨소?"
"..."
사내는 말이 없다.
답답한 마음에 정운두가 더 설친다.
"아따, 참말로 답답하네, 뭐라고 말 좀 해보시오."
사내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답답한 마음에 한
소리였다.
한참을 생각하던 사내는 드디어 결심을 한 듯 전준호와 정운두를 한 번 쳐다보더니
천천히 말을하기 시작한다.
"내 이름은 토마스 플렉 글로버(*1)입니다. 전에는 글로버 상회라는 무역상회를
운영했었지요."
"아니, 당신이 토마스 글로버란 말이오?"
전준호는 사내가 토마스 글로버란 것을 알자 깜짝 놀랐다.
토마스 글로버라면 지금 조선공사관이 들어선 글로버 저택의 주인이자 2년 전에
파산한 글로버 상회의 주인이지 않는가.
정운두는 전준호가 그렇게 놀라는 이유가 궁금했다.
"아따, 지점장 나으리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군데 그렇게 놀라시오? 놀라기는...?"
"아-- 이 사람은 토마스 글로버라는 사람인데 한 때 이곳 나가사끼에서 잘 나가던
무역상이었소. 내가 전에 얘기했을 텐데..."
"아니, 그럼 이 사람이 그 토마스 글로버란 말인가요? 그때 지점장 나으리께서
말씀하셨던...?"
"그렇소."
정운두는 나가사끼에 오기 전부터 전준호에게 나가사끼의 유명한 무역상이며, 서양
여러 나라의 사정에 대해서 어느 정도 공부를 했기 때문에 글로버 상회를 알고
있었다.
전준호와 정운두가 자신의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한 토마스 글로버는 천천히
자신의 얘기를 계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