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67화 (65/318)

62.

독일영사 브란트가 자국 군함을 타고 상해로 떠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쥬신산사의

나가사끼 지점장 전준호와 부 지점장이자 회계담당자인 정운두는 다른 서양 여러

나라의 상관이 밀집되어 있는 오무라 해안의 한 저택을 구입하였다.

그곳은 오무라 해안 중에서도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

쥬신상사가 구입한 저택의 바로 앞에는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자딘 머세슨 상회의

가게가 있을 정도로 오가는 행인도 많고, 도로가 발달한 오무라 해안의 중심지였다.

전준호와 정운두는 그곳에 쥬신상사의 간판을 내 걸었다.

드디어 쥬신상사가 조선의 상인으로서는 최초로 왜국에 지점을 연 것이다.

막부의 행정청에서는 이번에도 조선의 상인들에게 여러 가지의 편의를 제공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는데, 개업식이 있던 날은 막부의 나가사끼 행정관이 친히 행차하여

축하를 해 주었을 정도였다.

쥬신상사가 간판을 내 걸고 정식으로 영업을 시작한지도 벌써 보름이 지났다.

때는 꽃피는 춘삼월, 야시시한 기모노를 입고 살랑살랑 궁둥이를 흔들어대며

걸어가는 왜녀의 육감적인 몸매를 가자미눈을 뜨고 보는 것으로 나른한 오후를

소일하는 쥬신상사의 회계담당자 정운두는 쥬신상사 앞 도로변에 펼쳐놓은

안락의자에 앉아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실제 외국상인들, 왜국상인들과의 상담과 계약은 대부분 오전 시간을 이용하여

이루어졌기에 오후에는 상대적으로 한가한 때가 많았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는 정운두의 모습은 여느 조선 사람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으니 우선 머리 모양이 달라진 것과 수염이 없는 것이었다..

정운두는 처음 나가사끼에 오던 때의 상투를 틀어 매고 탐스런 수염을 자랑하던 보통

조선 사람의 모습이 아닌 전준호를 비롯한 천군과 같았으니, 쥬신상사의 간판을 열고

정식 영업을 개시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전준호의 설득과 협박에 못 이긴

정운두의 모진 결심의 산물이었다.

어느 날 오후 그 날의 일과와 상담을 모두 마친 전준호는 정운두를 불러 세우고 일장

연설을 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름 아닌 '서양의 여인들과 왜국 여인들은 머리가 짧은

사내를 좋아한다 커더라, 특히 여인들이 싫어하는 사내는 알량한 수염과 이가

득시글거리는 덥수룩한 머리의 사내라 카더라.'하는 카더라 통신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왜국에 처음 도착한 날 밤, 나긋나긋 감겨오는 히까다야의 왜국

기녀를 품지도 못했던 정운두에게는 서양 여인들의 잘록한 허리와 풍성한 머리칼이

눈앞에 아른아른 거리는 것이 이만저만한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괜한 객기로 독일 수병들과 어설픈 사고를 치고 나서 그에 대한 벌칙으로 한

달간 유곽 출입 금지라는 일생일대의 고통을 당해야 했던 당시의 정운두로서는 실로

살아가는 낙이 사라진 것과 진배없었다.

전준호는 여기에 한 술 더해, 만약 단발(斷髮)과 면도를 말끔히 한다면 당장 유곽

출입금지 벌칙을 해제하여 준다는 달콤한 유혹을 덧붙였으니, 그렇지 않아도 천군의

영향으로 머리를 자를까 하는 생각을 하던 정운두에게는 울고 싶은데 뺨 때리는

격이었다.

그 날 당장 머리를 짧게 자른 정운두는 단발의 기념으로 그렇게도 원해마지 않던

유곽 출입과 동시에 쌓였던 회포를 마음껏 풀었던 것이다.

짧게 자른 단정한 머리에 조선에서 가져온 개량한복을 입고 안락의자에 앉아서

지나가는 서양여인들과 왜국여인들을 훔쳐보는 것으로 나른한 오후를 소일하던

정운두에게 이상한 광경이 눈에 띄었다.

바로 길 건너편에 있는 자머 머세슨 상회 앞에서 서양인 사내하나가 머세슨 상회의

왜인 종업원에게 몰매를 맡고 있었다.

때꼬장 물이 줄줄 흐르는 얼굴에 산발한 머리, 그리고 여기저기 헤어지고 구멍난

옷을 봐서는 영락없는 거지였다. 그 옆에는 자머슨 상회의 지배인으로 보이는 서양인

하나가 뭐라 뭐라 하면서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봐서는 거지 형색의 사내가 무엇을

훔쳤는지도 모른다.

잠시 그 모양을 지켜보던 정우두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그쪽으로 걸어간다.

아무래도 이 인간이 특유의 의협심이 발동한 모양이다.

"이보시오! 도대체 무슨 일인데 사람을 그렇게 개 패듯이 패는 것이오? 당장

멈추시오."

정운두가 이렇게 조선말로 큰 소리를 쳐도 머세슨 상회의 종업원들과 지배인으로

보이는 사내는 어느 집 개가 짖느냐는 듯 일체의 대꾸도 없이 자기들 볼 일을

계속해서 본다.

순간적으로 정운두는 화가 났다.

자신의 말에 일체의 대꾸가 없는 것에 화도 났지만 사람이 사람을 인정사정 없이

패는 것에 더 화가 났다.

드디어 정운두가 왜국 종업원들을 밀치려는 순간, 서양인 지배인이

"됐다. 이쯤 했으면 제 놈도 더 이상 얼쩡거리지 않겠지."

라고 왜국 말로 말하자 왜국 종업원들은 서양인 거지 사내를 그 자리에 내 팽개친

채로 안으로 들어간다.

왜국 말이 서투른 정운두는 왜국 종업원들과 서양인 사내가 자신들의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일단 쓰러진 사내를 살핀다.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서양인 거지는 한 눈에도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정운두는 일단 사내를 들쳐업고 쥬신상사로 들어간다.

정운두가 크 소리를 치며 안에 있는 전준호를 부르며 들어오자 전준호는 이 인간이

그새를 못 참고 또 사고를 쳤나 하는 생각에 밖으로 튀어나온다.

"무슨 일인가! 정운두씨."

"이 사람 좀... 어서 이 사람 좀 봐주십시오. 지점장 나으리."

전준호는 왠 피투성이의 사내를 정운두가 들쳐업고 들어오자 드디어 이 인간이

사고를 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피투성이 사내를 한 쪽에 마련된 기다란 의자에 눕히고 정운두에게 묻는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실은 앞에 있는 머세슨 상횐지 먼지랄 상횐지의 종업원들에게 죽도록 맞고 있던

것을 제가 업고 왔습니다."

"뭐야? 머세슨 상회에서...?"

"그렇습니다요."

"자네가 때린 게 아니란 말이지? 확실하겠지?"

"하이고, 왜 지점장 나으리께서는 저를 그렇게 못 믿습니까요. 참말로 섭섭하네요."

"알았어, 알았어. 내가 잘못했네. 그나저나 이 사내를 어쩐다."

"의원을 부를까요?"

"그래, 종업원을 시켜 의원을 부르도록 하고, 자네는 빨리 깨끗한 물과 수건을

가져오게..."

"알겠습니다요."

정운두는 이렇게 대답하며 옆에 있는 왜국 종업원에게 의사를 불러올 것을 지시하고,

자신은 수건과 물을 준비하기 위해서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

개혁(改革)의 첫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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