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66화 (64/318)

61.

윤정우는 처음에 수교를 원한다는 말을 꺼내놓고 여지껏 그에 관련된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변죽만 울리고 있었다.

과거 해군 시절의 윤정우였다면 단도직입(單刀直入)으로 협상 안을 꺼내 놓고

가부간의 결정을 강요하였을 것이나 이제 윤정우는 군인이 아닌 외교관의 신분이었다.

조선통신사 부사의 경험과 막부의 실력자 구리모도 죠운, 막부의 대 집정(大執政)

오구리 다다마사 등과 막후에서 무역 통상과 외교를 통솔한 경험이 쌓였기에 이제는

어엿한 외교관의 풍모가 엿보였다.

그것은 오늘 회담에서도 잘 나타나 있었으니, 외교관 경험이 일천(日淺)한 윤정우가

외교관 생활에 있어서 대 선배라고도 말할 수 있는 브란트를 압도하면서 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가고 있었다.

독일영사 브란트가 내심으로 변죽만 울리고 본질에 대한 접근은 서서히, '나는 급할

것 없다'는 식으로 하고 있는 윤정우의 행태에 불만이 생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태는 보통의 외교적인 행보에 지나지 않았으니 그저 속만 끓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브란트의 속내를 눈치챈 윤정우가 씨익 하고 한 번 웃으면서 말을 꺼낸 때는,

브란트가 양국의 수교협상에서 조선이 원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이냐고 물어보려는

찰라였다.

"이번에 아국 조정에서는 서양 여러 나라 중에 최초로 귀국 정부와 정식 수교를 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만일 귀국에서 원한다면 오직 귀국만을 위한 개항장(開港場)을

제공할 용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선결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브란트는 다시 긴장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내심으로는 흠칫 하긴 했지만, 브란트 역시

외교관으로서의 잔뼈가 굵을 대로 굵은 사람이었기에 일말의 표정 변화가 없었다.

"첫째 아국이 원하는 만큼의 차관을 무상 또는, 장기(長期) 저리(低利)로 제공하여

주는 것입니다.

영사께서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아국은 가난한 나라입니다. 비록 아국의

섭정공께서 집권하신 후에 나라의 재정이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서양의 여러

나라에 비하면 새 발의 피요,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브란트는 윤정우가 하는 말을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조족지혈(鳥足之血)의 의미를 모를 브란트가 아니었다.

비록 번데기가 뭔지, 그게 주름을 잡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아듣지는

못하였지만, 조선의 재정이 넉넉하지 못하다는 말은 충분히 알아들었다.

윤정우의 말은 계속된다.

"둘째는 아국과 귀국 사이에 정식 수교가 이루어진 연후에 귀국의 선교사들이 귀국

정부를 등에 업고 선교라는 수단을 동원하여 아국 백성들을 현혹하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영사께서는 아국이 왜 유럽의 강대국인 법국을 제치고 아직까지 나라가 통일되지

않아 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는 귀국을 선택한 것인지 본 공사의 이 말을 듣고 어느

정도의 짐작은 하셨을 줄 압니다."

"으...음, 알겠습니다."

"영사께서도 아시겠지만 서양의 천주교라는 것은 아국의 근본 윤리 도덕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선조(先朝)의 위패(位牌)와 영령(英靈)을 모시는 제사(祭祀)에 대한 의미와

그에 따른 시행 문제로 마찰이 있는 것일 뿐이지요. 아국 조정에서는 귀국이 수교

후에 선교사를 파견하여 아국의 윤리와 도덕을 크게 헤치는 경우가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귀국 정부와 공사각하께서 무엇을 우려하고 계시는지 정확히 이해하였습니다. 계속

말씀하시지요."

"셋째는 귀국의 발전된 과학기술과 산업기술, 기계기술을 모방하고 습득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협조를 아끼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국의 관헌들이나

학생들을 귀국에 대거 유학을 보내고 싶다는 말입니다.

넷째는 만약 아국과 서양의 어느 나라와 국제적인 분쟁이 발생할 시에 귀국

정부에서는 아국에게 최대한의 협조를 다하여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아국과 서양의 여러 나라간에 협력과 이해로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지만 어디 그것이 말처럼 쉽겠습니까?"

윤정우는 이렇게 말하고 크게 한 번 웃는다.

이처럼 태연하게 말하는 윤정우와는 달리 브란트는 크게 놀랐다.

"공사각하의 그 말씀은 귀국과 전쟁을 준비하는 국가라도 있다는 말씀입니까?"

"아니지요. 그런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칼은 평화로울

때 갈아라.' 본 공사가 알기론 서양의 속담인 줄로 아오만...?"

"그런 말이 있기는 하지요. 그렇다면 귀국의 조정에서는 아국과 전면적인

군사협력까지도 생각하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처음에 영사께 말씀드렸지만 아국 조정에서는 아국의 개화 파트너로 귀국을

생각하였습니다. 이 말은 곧 아국과 귀국과의 전면적인 교류를 원한다는 것으로

해석해도 무방합니다. 정치뿐만 아니라 군사 사회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협력할 수

있는 항구적인 동맹을 뜻하는 것이지요."

"으...음..."

브란트는 깊은 침음성(沈吟聲)과 함께 생각에 잠긴다.

그런 브란트의 상념을 깨는 윤정우의 소리가 다시 들린다.

"이외에 필요한 사항이 있으면 귀국 정부의 정식 훈령을 받고 오는 특명전권대사와

협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본 공사는 이미 아국 조정으로부터 양국

간의 수교협상을 총괄할 아국의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되었음을 말씀드립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너는 본 공사와 외교상, 신분상의 격이 맞지 않는 존재이니 어서

가서 니 윗사람을 데려오던지 아니면 너희 나라 정부의 훈령과 전권을 위임받아 다시

찾아오라는 말이었다.

조선공사관을 방문했던 브란트를 비롯한 독일외교관들은 조선공사 윤정우의 따뜻한

환송을 받으며 조선공사관을 떠났다. 조선공사관에 발을 들여놓을 때만해도 독일

외교관들의 얼굴은 침통하기 그지없었으나 떠날 때의 얼굴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가득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브란트는 본국에 조선의 제의를 전하고 그에 대한 훈령(

訓令)을 받기 위해 독일 아시아함대가 주둔하고 있던 상해(上海)로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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