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65화 (63/318)

60.

"사실 아국 조정에서도 고심을 많이 하였습니다.

개화는 시대의 대세인데 우리 조선만이 쇄국(鎖國)을 함으로써 너무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윤정우의 말은 도도하게 이어진다.

브란트를 비롯한 독일의 외교관들은 아직 윤정우가 제의한 조선과 독일연방 간의

정식 수교 문제에 대해서 통밥을 굴리기에 여념(餘念)이 없었다.

"영사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우리 조선은 오랫동안 청국의 속국 아닌 속국 노릇을

해왔습니다."

"귀국과 청국과의 특수한 관계는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청국이

귀국을 침략하여 귀국에게 씻을 수 없는 수모를 주었다지요. 그리고 당시의 귀국

세자저하께서도 페킹(北京)에 인질로 잡혀 계셨고요."

"그렇습니다. 이번에 아국 조정에서 개화의 파트너로 귀국을 선택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동안 우리 조정이 쇄국을 한 이유는 따로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솔직한 이유로 두려웠습니다.

서양 제국(諸國)이 두려웠고, 서양 여러 나라와 잘못 수교를 하여 청국 꼴이 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영사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서양의 여러 나라들이 동양으로

몰려오면서, 동양 삼국 중에 가장 큰 나라인 청나라가 순식간에 서양의 여러 나라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것은 왜국도 마찬가지였지요.

아국의 조정 대신들은 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경악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서양과 잘못 수교를 하였다가는 청국과 왜국처럼 국본(國本)이 흔들리고, 나라의

경제는 피폐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게 되었지요.

서양인인 영사께서는 당시의 동양인들이 느꼈던 충격을 헤아리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아국이 문을 닫아걸고 살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아국의 인접국인 청국과 왜국이 서양의 여러 나라와 수교를 하고 개화를 받아들인

상태에서 아국 혼자서 그 도도한 개화의 물결을 거스를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그동안 아국 조정에서는 어떻게 하면 국본이 흔들리지 않고, 어떻게 하면 정치 경제

문화 사회적으로 큰 혼란 없이 개화 할 수 있느냐를 두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였습니다.

또한 아국 조정에서는 아국의 안녕(安寧)과 번영(繁榮)을 위해 협력할 수 있는

나라가 과연 어느 나라인가를 두고 고심하였습니다.

영국과 수교하자니 저들의 포악한 성정(性情)으로 미루어 보건데, 자칫 잘못하면

청국 꼴이 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없을 수 없었으며, 법국과 수교하자니 그들이

신봉하는 종교의 침투가 내심으로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렇다고 미국과 수교하자니

미국은 지금 내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역시 적당하지 않습니다. 러시아는

말 할 것도 없고요.

하여, 아국의 조정에서는 귀국을 주목했는데 그 이유는 서양 여러 나라 중에서도

비교적 동양문화에 대한 이해가 엿보였기 때문입니다."

"공사각하의 말씀에 사의(謝意) 표하는 바입니다."

가만히 윤정우의 말을 듣고 있던 브란트는 조선 정부의 그러한 우려와 두려움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신도 익히 짐작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한편으로 브란트의 내심은 흡족했다.

윤정우의 얘기를 들어보니 은근히 경쟁상대인 영국과 프랑스를 깔아뭉개고 독일을

우대하는 것이 아닌가.

"사실 아국과 귀국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나라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오랫동안 동양에 있으면서 나름대로 동양의 문화와 역사에 해박하다고 자부하던

브란트였으니 윤정우의 말이 무슨 뜻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사실 아국인이 서양인과 최초로 접촉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습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아국인이 최초로 접촉했던 서양인 바로 귀국인이었다는 말입니다."

"예?"

브란트는 해연(駭然)히 놀란다.

나름대로 동양의 역사에 해박하다고 자부하던 브란트였으나 윤정우의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브란트가 이렇게 놀라자 윤정우는 빙그레 웃으며 부연 설명을 한다.

"혹시 영사께서는 청국 조정에서 흠천감정(欽天監正)이란 벼슬까지 지낸 탕약망(

湯若望)이란 독일인 신부를 아십니까? 독일 이름은 아담 샬 (Johannes Adam Schall

von Bell1591-1666)이라고 하오만...?"

"아담 샬 신부라면 본인도 이름을 들어 알고 있습니다. 예수회의 신부로 청조 강희제

때 청국 조정에 있으면서 서양력을 본 딴 대청시헌역법(大淸時憲歷法)을

편찬하였다지요. 헌데 그 아담 샬 신부가 어떻게 귀국인과 교류를 하였다는 것인지...

?"

"아담 샬 신부는 당시 청국 조정에 있으면서 청국에 볼모로 잡혀있던 아국의

소현세자(昭顯世子)와 깊은 교분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이때의 교분을 바탕으로

아국에서는 서양의 학술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이 생겨나게 되지요."

"아--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브란트는 처음 듣는 소리였으나 실상 아담샬이 조선에 끼친 영향은 적다고 할 수

없었다.

당시 청국에 볼모로 잡혀 있던 소현세자는 아담 샬과 교류하면서 서양의 문물을

접하고 새로운 학문을 익혔으며, 그 과정에서 천주교 교리도 함께 배우고 문답하였다.

소현세자가 1644년, 7년 동안의 볼모 생활을 끝내고 귀국하자 아담 샬 신부는 석별의

정을 나누며 자신이 지은 천문(天文) 산학(算學) 성교정도(聖敎正道) 등의 서적과

천주상(天主像)을 선물했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귀로(歸路)에 얻은 병으로 인해

조선에 온지 70일만에 죽게 되었고, 소현세자가 죽자 그가 생전에 아담 샬과

교류하면서 배우고 익혔던 서학이나 과학은 빛을 발하지 못하고 묻히게 된다.

실상 조선에 독일에 대한 존재가 알려진 것은 소현세자와 아담 샬의 만남보다 30년을

더 거슬러 올라간다.

광해군 시절의 학자 이수광(李磎光, 1563~1628)은 그에 저서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독일에 대한 얘기를 수록하였는데 지봉유설에 보면 "독일인국은 백옥으로 성을 쌓은

나라이다. 獨逸人國白玉城 以白玉委之" 고 서술하였으니, 이것이 독일을 조선에

처음으로 알려진 글이다.

그러나 조선과 독일은 앞에서 언급하였던 청국 땅에서의 잠시의 민간 교류가 있었을

뿐 제대로 된 교류는 한 번 도 없었다. 그러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독일인이 최초로

조선 땅을 밟게 되는데 바로 카알 구츠라프(Karl Friedrich August Gutzlaf)라는

신교도 목사였다.

카알 구츠라프는 1832년(순조32년)에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러 온 영국상선 암허스트(

The Lord Amherst)에 승선하여 조선 땅을 밟게 되는데 당시 카알 구츠라프 목사는

별다른 일을 시도하지 않은 채 조선을 떠나게 된다.

조선이 이렇게 독일에 관한 소개가 빈약했던 것과는 달리, 독일에서는 조선에 관한

언급을 하였던 기록이 꾸준하게 발견되는데, 암스텔담에서 발간된 마르티노 마르티니(

Martino Martini)의 Novus Atlas Sirnernsis (einschl Korea 1653년)에서 조선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 것이 독일에 소개된 최초의 조선에 관한 기록이다. 이 책이

독일어로 번역 출간된 때는 그로부터 2년 후인 1655년이었다.

번역본이 아닌 순수문학 작품 속에 조선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1669년에

발간된 그림멜스하우젠(Grimmelshausen)의 "모험적인 짐플리치시므스(Der

abenteuerliche Simplicissimus)" 라는 글이다. 이 글의 473쪽을 보면 "나는

조선에서 대단히 소중한 사람으로 대우를 받았다. 그 이유는 사슴사냥 칼을 소유한

사람은 나 외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또 내가 조선왕에게 어떻게 하면 과녁을

등진 채 총신을 어깨에 올려놓고 과녁을 맞출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또 함부르크에서 발행되던 주간지 <유럽수요신문>은 1674년 1월 7일자 기사에 "

조선에서 쫓겨난 로마 교황청의 신부들이 중국으로 되돌아갔다"는 내용을 실었다.

우리도 익히 알고 있는 독일의 대문호(大文豪) 괴테는 1818년 7월 7일자 일기에 바실

홀(Basil Hall)이라는 영국인이 쓴 "조선 서부해안 여행(Reise nach der Westk ste

von Korea)"이라는 책을 읽었다고 기록하였고, 1827년 7월 15일자 일기에는 ''

영국연대기(British Chronicle)"에서 조선과 멕시코 광산에서 채굴되는 광물종류에

관한 내용을 읽었다고 기술하면서 'koreanisch'를 'koreisch'라고 오기 하였다고

한다.-이 내용은 성신여대 독문과 정규화 교수의 "한독 문화교류 120년사"라는

글에서 인용하였다. 정규화 교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꾸벅.

이러한 양국 간의 관계가 오늘의 만남을 계기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으니,

조선인이 최초로 교류한 서양인도 독일인이었고, 조선이 최초로 수교하는 서양국가도

독일연방이 되는 특별한 관계로 이어지게 되니, 참으로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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