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64화 (62/318)

59.

"어서 오십시오. 제가 조선 공사 윤정웁니다."

독일어를 모르는 윤정우로서는 영어로 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인사를 한 윤정우는 옆에 서있는 서기관 김기수와 역시 서기관인

박정양, 경비책임자인 한성호를 인사시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쥬신상사의 나가사끼

지점장인 전준호를 소개한다.

윤정우가 이렇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권하자 브란트 독일 영사와 그 일행 역시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자리에 앉았다.

윤정우가 먼저 주인 된 입장에서 말을 꺼낸다.

"먼저 지난밤에 있었던 귀국(貴國)의 수병들과 아국(我國) 공사관 직원들 사이에

있었던 충돌 사건에 대한 정중한 사과를 드립니다."

당당하면서도 겸손한 윤정우의 사과 말에 브란트도, 웃는 얼굴에 차마 침을 뱉지는

못하고 정중한 그러나 약간은 독일식 악센트가 섞인 영어로 인사를 한다.

"오늘 아침에 저희 직원에게서 사건에 대해서 보고를 받았을 때만해도 황망하고 분한

마음을 가눌 길 없었으나 이렇게 공사각하의 사과말씀을 들으니, 그러한 마음이 봄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렇게 본인이 외교상의 심각한 결례를 무릎

쓰고, 찾아온 이유는 공사각하께서도 짐작하시겠지만 바로 그 사건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공사각하께서 그 일에 대한 사과를 하였기에 본인도 공사각하의 사과를

정중하게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브란트는 노련한 외교관다웠다.

눈앞에 있는 당장의 작은 이득보다는 좀 더 큰 이득을 바라는 속내가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우리 조선이 이렇게 왜국에 공사관을 설립만 해 놓고, 그동안 왜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과의 통상이나 외교관계 수립을 극도로 꺼려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나라안의 사정이 좋지 못하였기 때문이지요. 초대 왜국 공사로

취임한 본인도 본국의 훈령이 그동안 없던 관계로 여러 나라의 외교관들과 별다른

교분을 맺지 못하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윤정우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브란트의 눈이 갑자기 커지며, 윤정우의 말을

끊는다.

"공사각하의 그 말씀은 귀국 정부에서 새로운 훈령이라도 내려왔다는 말씀입니까?"

어찌 보면 심각한 결례라고 할 수 있었으나, 윤정우는 별 꼬투리를 잡지 않고 빙그레

미소만 띄운다.

브란트가 놀랄 만도 했다.

그동안 윤정우를 비롯한 조선외교관의 행보는 이미 서술하였듯이 나가사끼 외교가의

큰 관심이었다. 그래서 일부 나라의 외교관은 노골적으로 조선공사관에 접근하려는

시도를 하였고, 그동안은 보기 좋게 거절을 당했었다.

그런 조선공사가 본국에서 새로운 훈령이 내려왔다는 듯이 얘기를 하는데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잠시 뜸을 들이던 윤정우는 브란트가 자신의 답을 기다리는 눈치를 보이자 서슴없이

말한다.

"그렇습니다. 바로 어제 새로운 훈령이 도착하였습니다. 그것을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여러분들께 다짐을 받고 싶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이 자리에서 아국과 귀국의 외교관 사이에 오가는 어떠한 말도 외부로

유출하지 않는 다는 다짐입니다. 어떻습니까? 다짐을 해 주시겠습니까?"

"...."

브란트는 잠시 망설인다. 도대체 저 인간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저리도 강하게

나오는 거지 하는 생각을 한다.

한 참을 생각하던 브란트는 일단 윤정우의 말을 듣기로 한다.

"좋습니다. 다짐하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지금부터 본인이 말하는 내용이 함부로 유출될 시에는 아국과

귀국 사이에 어떠한 외교적인 접촉도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동의하십니까?"

아뿔싸 내가 이 인간의 술수에 말려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든 브란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나 이미 쏘아진 화살이요, 엎질러진 물이었다.

"동의합니다."

"그럼, 영사께서 동의하시니 본국에서 내려온 훈령과 그에 따른 세부사항을

말씀드리지요."

브란트의 목에서 마른침이 꼴깍하고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노련한 브란트였지만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조선국은, 독일연방과 직접 수교하기를 원합니다."

"예-에?"

브란트는 정신이 없었다.

6년이 넘는 기간을 동양에서 있었지만 이렇게 놀라기도 처음이었다.

그동안 그렇게 두드려도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던 빗장이 하루아침에 제거되면서

자신에게 처음으로 문호(門戶)를 개방하는 순간이었으니 어찌 놀라움이 없을까.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 조선국은 정식으로 독일연방과 수교를 하고 싶으며, 하루라도 빨리 양국의

특명전권대사(特命全權大使)가 자리를 함께 하여 허심탄회하게 양국의 주된 관심사와

양국의 선린우호(善隣友好) 관계를 증진시킬 수 있는 방안에 대한 논의를 하고

싶습니다."

내심으로 당황한 브란트였으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생각에 잠긴다.

처음에는 폭행사건을 빌미로 조선공사와 안면이나 틔우자는 생각으로 조선공사관을

찾았으나, 이것은 안면이나 틔우는 정도가 아니었다. 늑대를 잡으려다 호랑이를 잡은

격이었다.

대한제국기(大韓帝國記)-42 개혁(改革)의 첫걸음...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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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改革)의 첫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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