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62화 (60/318)

57.

"중대장님! 저기 막부 순찰조(巡察組) 무사들이 오는데요?"

박지현이 이렇게 말하자 그렇지 않아도 더러운 한성호의 인상이 완전히 똥 씹은

표정으로 변했다.

"이런 씨팔! 그나저나 이놈들은 어느 나라 놈들이야. 당최 뭔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네"

"내가 볼 때 독일-프러시아- 놈들 같은데..."

전준호가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양이 선원인지, 수병인지 모를 인간들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독일 놈들요?"

"그래, 영어나 불어는 죽어도 아니고, 말투가 딱딱하고 이놈들 체격이 상당히 큰

것이 영락없는 독일 놈들인데."

공사관 경비 책임자인 한성호는 똥 밟은 표정이다.

독일 놈들이든 양키 놈들이든 상관이 없었다.

이유야 어찌됐든 외국인과 시비가 붙어 그들을 묵사발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선원인지 수병인지 모를 인간들은 여기저기에 널 부러져 신음 소리와 함께 알아듣지

못할 말을 뭐라고 씨부렁거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가관이다.

"어떡하죠?"

"어떡하긴 어떡해. 쟤네들이 오면 오히려 잘됐지."

"그래도, 이렇게 걸레를 만들어 놨으니..."

"됐어! 신경 끊어, 어차피 우리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나저나 정운두씨는 괜찮나?"

"전 괜찮습니다."

어디에 있었는지 싸움이 벌어지는 동안에는 보이지 않던 정운두가 나타나 말했다.

하기야 그저 밀쳐 넘어진 것뿐이데 어디가 다칠 이유가 없었다.

전준호와 한성호가 이렇게 잡담하고 있는 사이에 순찰조 무사들이 다가왔다.

순찰조는 일종의 경찰과 같은 조직으로 막부령인 나가사끼에서는 거의 무소불위(

無所不爲)의 권력을 행사하는 조직이었다. 조선 공사관 직원들은 일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열 댓 명쯤 되는 순찰조 중에서 조장으로 보이는 자가,

"아니! 조선공사관 분들이 아니십니까?"

"그렇소. 우리를 아시오?"

"이곳 나가사끼에서 조선공사관 분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한성호의 말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로 순찰조 조장은 조선공사관 직원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지난해에 있었던 히가시혼간지의 싸움 덕분이었다.

죠슈번 유격대와 신선조와의 격돌로 유명한 히가시혼간지의 싸움은 이미 왜국의

무사들에게 널리 알려진 싸움이었다. 공사관 경비 책임자로 임명된 한수길과 함께

박지현은 히가시혼간지의 영웅으로 그 이름을 날리고 있었으니, 어지간한 왜국의

무사 치고 한수길과 박지현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이곳 나가사끼에 없었다.

특히 박지현은 훤칠한 키에 곱상한 얼굴의 소유자답게 나가사끼의 왜녀들 사이에

이미 그 이름이 회자되고 있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거기에는 한성호를 따라다니며 마루야마의 유곽이란 유곽은 다 섭렵하고 다녔던 것도

한 몫을 하였다.

더군다나 막부의 나가사끼 주재 관청에서는 조선공사관에 대한 특별 대우를 시행해

오고 있었기 때문에 막부 순찰조 무사들이 조선공사관 직원을 모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또한 신선조의 지방 하부조직이랄 수 있는 순찰조에서 한성호와 박지현을 모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곤도 이사미가 누군가! 바로 천연이심류의 달인이자 당대 막부 경찰 조직인 신선조의

총 책임자가 아닌가! 그런 곤도 이사미와 신선조를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준 이들이

바로 한성호와 박지현을 비롯한 조선의 군관-천군- 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어찌 모를 수 있을까.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상대방이 의외로 친절하게 나오자 한 시름 놓은 한성호는 자초지종(自初至終)을

세세하게 이야기한다.

한성호의 말을 다 들은 순찰조 조장은,

"이들에 대한 조치는 저희들이 알아서 하겠습니다. 조선공사관 분들은 일단

공사관으로 돌아가도록 하시지요."

"정말 그래도 되겠소?"

"이들의 복장을 보아하니 독일인들 같습니다. 나중에 독일 영사관에서 사건 전말에

대한 조사를 의뢰해 올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저희가 사람을 보낼 테니 그때 조사에

응해주시면 됩니다."

"정말 이대로 돌아가도 아무 문제없겠소?"

한쪽에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던 전준호가 가까이 오더니 다시 물었다.

전준호를 알리 없는 순찰조 조장은,

"누구 신지...?"

"아! 이분은 우리의 옛 상관이십니다. 오늘 아침에 막부의 후지야마호를 타고

나가사끼에 오셨지요."

한성호가 전준호를 소개하는 말을 하자 그때서야 알아들었다는 듯 감탄사를 토하며,

"아! 그렇군요. 몰라봐서 죄송합니다. 여기의 일은 저희에게 맡기고 그냥 가십시오.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하며, 깍듯이 인사를 한다.

아마도 후지야마호가 부산에서 막부에 인도하는 물건을 싣고 온 것을 아는 모양이다.

순찰조 조장의 지나친 저자세에 의아한 생각이 들기도 하였으나, 전준호를 비롯한

조선인들에게는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었다.

순찰조 조장이 이렇게 조선공사관 직원들에게 깍듯한 이유는 아까도 언급했지만

막부의 배려 덕분이었다.

당시 왜국 막부에서는 조선에서 수입하는 양식보총의 성능에 크게 만족하고 있었다.

또한 막부에서 계획하고 있는 죠슈번 토벌에 있어서 막강한 양식보총의 활약을 다시

한 번 기대하고 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 무렵 막부 정권이 가장 기대고 있는 대상이 조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원래 왜국에 가장 먼저 발을 딛은 유럽의 나라는 포르투칼과 네덜란드였으나, 이

무렵의 포르투칼은 이미 국운(國運)이 기울어진지 오래였으며, 네덜란드는 왜국의

정치상황에 큰 관심 없이, 오로지 무역에만 힘을 쏟고 있었다. 그리고 무역부문에

있어서도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후발국에게 선두자리를 넘겨 준지 이미 오래였다.

영국 같은 경우에는 왜국의 특수한 정치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지나치게

막부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꺼려하고 있었으며, 오히려 사쓰마번과 같은 각

지방 번국에게 우호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비록 프랑스가 막부를 지지하고는 있었지만, 당시의 프랑스는 워낙 벌려 놓은 일이

많았기에 왜국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리고 지난해에 있었던 통신사의 왜국

방문을 계기로 막부와 조선이 가까워진 것을 눈치챘는지, 이 무렵의 막부와

프랑스와의 관계는 소원한 편이었다.

미국도 마찬가지로 막부가 기댈만한 언덕은 아니었다.

미국은 자국에서 벌어진 내전 때문에 당시에는 왜국의 내정에 신경 쓸 힘이 없었고,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러시아에 기대자니 러시아의 팽창정책과 검은 야욕이 꺼림칙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막부의 든든한 버팀목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은 유일하게 조선뿐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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