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얼큰하게 취한 한성호를 비롯한 조선 사람들은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급할 것
없다는 듯 천천히 걷는다.
히끼다야에서는 웃고 떠들었던 조선 사람들이었으니 그 분위기가 밖으로
나왔다고 해서 깨지는 게 아니었다.
왁자지껄 떠들면서 어깨동무를 하고 마루야마 유곽촌을 빠져 나오는데 저 앞 오무라
해안 쪽에서 역시 건장한 한 무리의 사내들이 흐느적거리며
오고 있다.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갓 나가사끼에 상륙한 양이 상선의 선원들 같다. 아니면
수병들이던지... 두 무리의 술 취한 사내들은 흐느적거리는 걸음이면서도 서서히
거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한성호를 비롯한 조선 사람들은 괜한 시비에 휩쓸리고 싶지 않았기에 도로의 한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저쪽의 사내들이 숫자가 더 많았기에 도로 한쪽으로
피한다고 해서 서로의 몸이 안 부딪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가장 가장자리에 있던 정운두가 양이의 선원의 어깨에 부딪치며
나가떨어졌다. 원래 체격이 큰 공사관 관헌들이라면, 그렇게 나가떨어지지도 않았을
것인데, 보통 조선 사람의 작은 체격인 정운두로서는 운이 없었다.
또 하나 정운두로서는 운이 없었던 게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난생 처음 왜국에 와
처음 맞이하는 밤에 추한 꼴을 보였다는 나름대로의 자격지심(自激之心)이었다.
"이런 육시럴..."
정운두가 눈을 부라리며 상대방에게 이렇게 욕을 하자, 원래부터 동양인들을 우습게
보고 있던 양이 선원은 그 큼지막한 손으로 정운두의 얼굴을
밀쳐 버린다.
당연히 정운두는 나가떨어졌다.
그것을 본 한성호 이하 조선 사람들은 격분했다.
전준호가 먼저 나섰다.
"무슨 짓들이냐? 당장 사과하지 못할까?"
순간, 정운두를 밀쳤던 양이 선원은 어리둥절했다.
지금까지 동양에 온 이후 이렇게 정확한 발음의 영어는 들어보지도 못했으며, 또
전준호처럼 이렇게 자신들에게 당당한 동양인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선원은 만용을 부렸다.
원래부터 동양인을 안중에 두지도 않았기에 주저함이 없었다.
"Vertlucht!"
하는 소리와 함께 정운두를 밀친 그 손을 다시 전준호에게 휘둘렀다.
그러나 그 선원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전준호가 비록 특수수색대의 정예 요원은 아니더라도 엄선된 해군항공대의
요원이었다.
날아오는 주먹을 가만히 맞고만 있을 전준호가 아니었다.
허리를 살짝 숙이며 주먹을 피한 전준호는 오른 손으로 상대의 복부에 깊숙이 한
방을 먹였다. 이어서 상대가 배를 움켜쥐고 허리를 숙이는 순간 뛰어오르며 무릎으로
상대의 면상을 올려쳤다. 물찬 제비가 따로 없었다.
순식간에 상대는 나가 떨어졌다.
자기편이 그렇게 허무하게 나가떨어지자, 가만있을 양이들이 아니었다.
어차피 자기들이 숫자도 많겠다, 저쪽은 인간 같지도 않은 노란 원숭이들이었다.
볼 것 없었다. 순식간에 몇 이서 전준호에게 달려들었고, 나머지 양이들은 옆에서
구경하던 조선 사람들에게 달려들었다.
시비는 이렇게 삽시간에 양편의 패싸움으로 번졌다.
조선 사람들이라고 가만있을 수 없었다.
전준호가 허접한 양이 몇 놈들에게 당할리는 없었지만 두고볼 수만은 없었다.
한성호가 가장 먼저 뛰어들었다. 한성호는 큰 소리로 욕을 하며 뛰어들었다.
"이런 개 상녀러 새끼들이."
UDT/SEAL 출신의 한성호에게 허접한 양이 놈들 몇 놈쯤이야 우스웠다.
이런 놈들은 열명이 달려든다고 해도 한성호에게는 아침 해장거리도 못되었다.
순식간에 뛰어든 한성호는 뛰어든 탄력으로 한 놈의 낭심을 냅다 올려 차더니 다시
오른 발을 허공으로 끌어올려 그 놈의 뒷덜미를 발뒤꿈치로 찍어버린다.
쓰러진 놈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다른 상대를 찾는 눈빛이 야수와 같다.
언제 술에 취해 해롱해롱 했느냐는 듯 한성호의 움직임은 민첩하기가 범과 같았다.
아니, 한성호는 한 마리 범이었다.
또 다른 상대가 주먹을 내지르자 그 주먹을 왼손으로 흘려 잡으면서 오른손으로는
상대의 빈 겨드랑이를 쑤셔버린다. 그 상태에서 한성호는 몸을 빙그르 돌리며 그
탄력으로 상대의 뒤통수를 오른 팔꿈치로 후려 팬다.
다시 한 놈이 나가떨어진다. 한성호의 쇳덩어리 같은 주먹에 연이어 급소를 가격당한
상대는 괴물 같은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진다.
한성호가 그런 상대를 신경쓰지 않고 다른 상대를 물색하고 있는 순간, 쾅하는
소리가 들린다. 깜짝 놀란 한성호가 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자 한 놈이 나뒹굴고
있었고, 그 놈이 쏘았던 권총(拳銃)은 멀찌감치 퉁겨져 나가 있었다.
히가시혼간지의 영웅이자 천군 중에 가장 막내인 박지현이 놀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한성호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있을 때 박지현은 차분하게 눈을 돌리며
싸움터을 주시하고 있었다. 한성호가 막 한 놈의 뒤통수를 강타하는 순간 세(勢)가
불리한 것을 눈치챈 양이 한 놈이 총을 빼드는 것이 포착되었다. 순간 나는 듯
뛰어든 박지현은 그 놈이 빼어든 총을 차버렸고, 그 충격에 총이 발사되었다. 당연히
그놈은 박지현의 손에 걸려서 반 죽었다.
총소리가 울리자 모든 것은 순식간에 끝났다.
양이의 선원들은 태반이 총소리에 놀라 얼어붙었는데, 그 기회를 놓칠 조선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때까지 뒷짐만 쥐고 있던 다른 천군 출신 공사관 직원들이 달려들자
싸움은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단 1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모든 양이들이 나뒹굴고
말았다.
"이런 상녀러 새끼들이 어디서 함부로 총을 쏘고 지랄이야! 지랄이."
아직 분이 덜 풀린 한성호가 총을 쏜 놈에게 달려들어 발길질을 하고 있는데 멀리서
막부의 병사들이 달려오는 모습이 박지현의 눈에 보인다.
대한제국기(大韓帝國記)-41 개혁(改革)의 첫걸음...12
개혁(改革)의 첫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