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60화 (58/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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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부에서 제공한 내륜기선 후지야마호를 타고 전준호와 쥬신상사의 직원들이

나가사끼에 도착한 때는 신기도감에서 한참 신무기 시연회가 열리던

을축년 2월 16일이었다.

전준호와 쥬신상사의 직원들은 임시로 조선공사관에 여장을 풀고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찾아온 반가운 조선 사람들을 가만 놔둘 공사관 직원들이 아니었다.

특히 치누크의 부조종사 출신의 전준호를 모르는 공사관 소속 천군은 없었으니, 당장

그날 밤 조선에서 온 귀한 손님들을 이끌고 나가사끼의 유명한 유곽인 마루야마

유곽촌(遊廓村)으로 몰려갔다.

나가사끼의 마루야마하면 에도의 요시와라, 교또의 시마바라와 함께 왜국의

삼대유곽으로 각광을 받는 곳이다.

유럽 열강들의 상관(商館)이 몰려 있는 오무라(大甫) 해안을 지나 마루야마

유곽촌으로 가는 길은 이국적인 나가사끼의 풍경에 걸맞게 무진등(無盡燈)이라는

램프등(燈)이 켜져 있었고, 나가사끼가 원산인 큼지막한 자연석이 깔려져 있는 넓은

포장도로였다.

조선공사관의 직원들과 쥬신상사의 전준호와 직원들이 찾아간 곳은 조선공사관

직원들이 단골로 드나들던 마루야마 제일의 유곽 히끼다야였다.

히끼다야에 들어서자 하인이 나와서 반갑게 인사를 하며 자리로 안내를 한다.

곧이어 주연이 벌어졌다. 기녀(妓女)가 사람 숫자대로 나와서 옆에 앉아서 음식을 떠

먹이고 술을 따라주는 등 시중을 들었다.

모두들 웃고 떠들고 즐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고국 손님들이나 공사관 직원들 모두 신나게 먹고 마시고 놀았다.

누구보다도 신이 난 것은 쥬신상사의 젊은 회계담당자 정운두였다.

쥬신상사의 직원인 정운두는 선우재덕과 전준호를 비롯한 천군 몇이 쥬신상사를

세우면서 가장 먼저 스카웃 한 송상의 회계담당자였던 알아주는

난봉꾼이었다.

정운두는, 한양에 두고 온 젊은 마누라가 그리운 전준호보다도 더 마루야마 유곽에

가는 것을 기뻐했는데 그는 히끼다야에 도착해서도 옆에 앉은 기녀는 거들떠보지

않고 묵묵히 술만 마시는 전준호와는 달리 양옆에 두 명의 기녀를 끼고 앉아 한 손은

이쪽 기녀의 젓 가슴을 더듬고, 나머지 한 손은 다른 쪽 기녀의 기모노를 푸느라

정신이 없었다.

조선에 있을 때부터 그런 쪽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정운두였으니 이건 마치 물 만난

고기가 따로 없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발음도 시원치 않은 왜국 말로 옆의 기녀에게 이름을 묻는데, 그 기녀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만 흔들 뿐 알아듣지 못하였다.

하기야 전준호로부터 겨우 몇 마디의 왜국 말을 배운 것이 겨우 열흘 남짓인데

어떻게 그 사이에 왜국 말을 온전하게 할 수 있을까?

"네가 오늘 밤 이 나으리의 수청을 들겠느냐?"

역시 마찬가지로 돌아오는 것은 백치 같은 웃음뿐이다.

"이런, 답답한 노릇이 있나?"

정운두가 이렇게 혼자서 답답해하고 있는데 그들을 지켜보던 공사관 경비대 책임자인

한성호가 한마디한다.

"어이, 정형. 오늘은 많이 마셨으니 그쯤 하시오. 그리고 오늘만 날이 아니니,

어차피 정형도 이곳 나가사끼에 있으면서 신물이 나도록 출입할 것 같은데... 나중에

우리끼리 다시 한 번 옵시다. 그때는 정말 뼈와 살이 녹아나도록 질펀하게 한 번

놀아봅시다."

정운두는 왜국에서의 첫날밤을 멋지게 보내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아직 나가사끼에 상관도 설치하지 않았고, 살집도 마련하지 못하여 당분간

조선공사관에 얹혀 지내야 하는 처지로 공사관 수비책임자 한성호의 말을 거절할

용기가 없었다.

더구나 자신의 상사인 전준호도 취기가 오르는지, 정운두를 만류하며 돌아가자고

하자,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히끼다야를 빠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공사관 관헌과 쥬신상사 직원들은 히끼다야의 문을 밀고 빠져 나오는데 정운두의

시중을 들던 기녀 하나가 뛰어나오더니 정운두의 까칠한 볼에 뽀뽀를 하며, 뭐라고

속삭인다.

그러나 그 말을 알아들을 정운두가 아니었다.

"이 아이가 뭐라고 하는 겁니까?"

"정형이 마음에 들었답니다. 다음 번에 또 오래네요."

"정말입니까?"

"그렇다니까, 누군 좋겠시다---"

이런 야유 아닌 야유를 들은 정운두는 기분이 좋았다.

오늘은 비록 첫날이라 내 이렇게 물러나지만 다음 번에는 기필코 너를 타고 말리라

하는 다짐을 하며 오른 손으로 기녀의 엉덩이를 철썩 때리고

돌아선다.

"기다리거라. 내 다음에 올 때는 꼭 너를 기쁘게 해줄 것이니.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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