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하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은 김병학은 일과가 끝나자 서둘러 사동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한 김병국의 모습을 본 김병학의 부인이 오늘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 좌불안석(坐不安席)이시오? 하고 물어도 김병학은 묵묵부답(
默默不答)이다.
다만 사랑으로 건너가며, 밤이 되면 동생 병국이 올 것이란 말뿐이 하지
않았다.
사랑채로 건너간 김병학은 여전히 좌불안석이다.
담배를 태우기 위해 장죽에 담배를 꾹꾹 눌러 담는 손도 떨리고 있었으며, 성냥불을
키는 손도 떨리고 있어 쉽사리 불이 붙질 않았다.
간신히 불을 당긴 김병학이 양 볼이 오목하도록 담배를 빨아들이다가, 긴 한숨과
함께 파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는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른다.
하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고, 자신의 목이 잘리는 상상에 치를 떨었다.
지난 1년이 참으로 꿈만 같이 느껴졌다. 모든 김씨 일파가 아녀자(兒女子)를
제외하고 목이 잘리거나 귀양을 간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오금이 저려왔다. 그런
자신이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이제 와서 그 아이가 찾아왔단 말인가?
김병학이 그 아이를 생각하고 있는데 밖에서 하인의 소리가 들린다.
"대감마님! 영어(穎漁)대감께서 오셨습니다요."
"어서 뫼 시어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드르륵 하고 문이 열리면서 김병국과 한 아이가
들어선다.
"어서 앉으시게. 자중(子中)이도 게 앉고."
자중이라 불린 아이는 이제 겨우 열 예닐곱 살이나 되었을까? 김병학이 앉으라고
하였건만 앉기 전에 절부터 먼저 한다.
"숙부님,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그래, 어서 앉거라."
자중이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김병학은 허둥대고 있었다.
자중이란 아이가 자리에 앉자 대뜸,
"동생 어땠는가? 설마 누구에게 미행(尾行)을 당하지는 않았겠지?"
"여부가 있겠소.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그때서야 안심을 한다는 듯 안정을 찾은 김병학은 자중이란 아이에게,
"그래 자중이 너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
"소질(小姪)은 두 분 숙부님께서 보살펴 주신 덕분으로 무탈하였사옵니다."
"으...음...험."
잠시 무안해진 김병학은 헛기침을 몇 번하더니,
"그래, 네가 한양에서는 왠 일이야? 설마...형님이 복수를 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왜요? 두 분 숙부님께서는 소질이 돌아가신 아버님과 할아버님의 복수라도 할까
걱정이시옵니까? 아니면 두 분의 권세가 떨어질까 걱정을 하시는 것이옵니까?"
"네 이놈! 예가 어디라고 그런 망발을... 감히 네가 숙부를 능멸하려는 것이냐? 이런
천하의 고이얀 놈 같으니..."
어린 조카인 자중의 도발적인 언사에 역시 성질 급한 김병국이 차지 못하고 언성을
높인다. 도대체 자중이란 아이가 누군데 이런 말을 한단 말인가?
자중은 바로 김병기의 막내아들이다.
두 해 전 김병기와 김씨 일파가 주동한 흥선대원군 시해 사건에 모든 김씨 일파의
장정들과 추종자들이 목이 달아나고 귀향을 간 와중에 열 네살 어린 나이라는 이유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사내아이였다.
당시에 살아남은 김씨 일파의 아녀자들은 겨우 경기도 여주의 작은 시골
마을에 터를 잡고 살았는데, 그동안 김병학과 김병국은 이들의 처지가 안쓰러워 음(
陰)으로 양(陽)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
겉으로 드러나게 행하지는 못하였으니 행여 천군의 이목(耳目)에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무슨 사단이 일어날줄 몰랐기 때문이다.
김영훈을 비롯한 천군이 비록 김씨 일파의 아녀자들을 살려주었다고는 하지만 언제
마음이 바뀌어 탄압할지 모르는 것이었기에, 시쳇말로 알아서 기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김영훈과 천군을 몰라도 한 참 모르는 소인배의 행동이나
다름없었으니, 이런 경우를 일컬어 소인배의 배포로 감히 군자(君子)의 도량을
가늠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물론 김병학이 소인배도 아니고 김영훈도 군자가 아니었지만, 일테면 그렇다는
얘기다.
"송구하옵니다. 숙부님."
"아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그 변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 두 형제만 살아남았으니 그런 생각을 품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야."
사실 그동안 김병학은 말을 안 했다 뿐이지 상당한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왔다.
가문의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수많은 인척들이 목이 절리거나 귀양을 갔다.
그리고 그들이 보유했던 수많은 문전옥답(門前沃畓)과 재산이 몰수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자신과 동생인 김병국 만이 살아남아 지금까지 부귀(富貴)와 영달(榮達)을
누리고 있었으니 인간인 이상 어찌 죄책감이 들지 않으리오.
"그래, 네가 상경한 진정한 이유가 무엇이냐?"
"솔직히 말씀드리면 두 분 숙부님과 섭정공을 위시한 천군에게 어찌 원망하는 마음이
없겠사옵니까? 비록 아버님이 주상전하의 생부를 시해한 책임이 있다고는 하지만
어찌됐든 저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분이시옵니다. 그런 불행한 일로 할아버님과
아버님을 비롯한 문중의 어른들은 군기시 앞에서 참수(斬首)되어 저잣거리에 효수(
梟首) 되었사옵니다. 제가 자식된 도리로 어찌 그 원한을 잊을 수 있겠사옵니까?"
열 여섯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김자중의 말은 당당했고, 또 당돌했다.
"그러나 섭정공을 위시하여 천군이 모든 실권을 틀어쥐고 주상전하를 대리하여
섭정한다는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움켜쥐고 있는 현 상황에서 이대로 있다가는
돌아가신 아버님과 실추된 가문의 명예는 찾을 길이 없사옵니다. 하여..."
"하여...?"
김병학과 김병국 형제는 침에 마르고 있었다.
비록 김영훈이 집권한 후로 세상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전 같으면 반역을
도모한다는 오해를 사기 딱 좋은 말이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섭정공 김영훈의 밑에는 대외정보원이라는 막강한 정보조직이 있어, 구신(
舊臣)들과 조선 전역에 걸쳐 그야말로 물샐틈없는 사찰(査察)과 감시(監視)를 하고
있는 것을 번연(蕃衍)히 알고 있는 두 사람이었기에 어린 조카의 당돌한 말에 침이
마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여, 소질은 어떻게든 실추되고 더렵혀진 아버님과 가문의 명예를 회복시킬
생각이옵니다."
"어떻게 말이냐? 설마 모반(謀反)이라도 획책(劃策)할 생각이더냐?"
김병학, 김병국 두 사람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드디어 이 아이가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싶었다. 죽으려면 혼자 죽지 왜 여기까지
찾아와서 자신들에게까지 화가 미치게 한단 말이냐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소질이 그런 뜻을 품었다면 예까지 찾아오지도 않았사옵니다. 두 분 숙부님께서는
고정하시옵고, 소질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시옵소서."
"으...험...험."
"험..."
잠시 무안해진 김병학과 김병국이 어느 정도 진정하는 기미가 보이자 김자중은 말은
계속한다.
"소질의 미천한 생각으로는 돌아가신 아버님과 몰락한 가문을 일으키고,
실추된 명예를 회복할 방법은 단 하나뿐이 없는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소질이 관직에 등용되어 저들보다 더 뛰어난 재주를 보일 때만이 가능할
것이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아직도 김병학과 김병국은 김자중의 말을 못 알아듣고 있었다.
"소질이 듣기로는 이번에 조정에서는 성균관을 확대 개편하여 신학문을 배우는
대학교로 만든다고 알고 있사옵니다."
"그런데...?"
"하여 소질은 그곳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우고 익혀, 관직에 정정당당하게 올라,
저들에게서 배운 신학문으로 저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고 싶사옵니다. 아울러
나중에 소질이 조정에 출사하게 될 그 날이 오면 지하에 계시는 할아버님과
아버님께서도 편히 눈을 감으실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정녕 네 뜻이 그러하더냐?"
"그렇사옵니다. 숙부님."
김병학과 김병국은 내심으로 안심한 모양이다.
"그런데 너의 특수한 신분으로 입학이 가능할까?"
"그래서 이렇게 두 분 숙부님을 찾아온 것이옵니다. 입학을 위한 시험을
치른다고 알고 있사온데, 부디 두 분 숙부님께서는 섭정공에게 청(請)하여 소질이
입학 시험을 치를 수 있는 자격을 득(得)하게 해주시옵소서."
두 사람은 말이 없다.
비록 끔찍한 일을 획책하기 위하여 찾아온 조카가 아니지만, 경원과 사찰의 대상인
김씨 일파의 잔당이라면 잔당이랄 수 있는 김자중에게 섭정공 김영훈이 그런 자격을
줄지가 의문이었다.
"알았다. 내가 내일 섭정공을 찾아뵙고 청을 넣어 보도록 하마."
"감사하옵니다. 숙부님."
다음날 김병학과 김병국은 운현궁으로 찾아가 자신들이 찾아온 이유를 소상히 아뢰고
선처를 호소하였는데 섭정공 김영훈은 의외로 흔쾌히 승낙하여 두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