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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은 보위부의 안내문대로 뒷간에 가서 일을 보고 나서 그
뒤처리를 떠간 물 한 바가지로 해결하기 시작한지, 겨우 한달 하고 보름만에 이십 년
고질이었던 치질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믿기지 않았다. 별 수단을 다 써보아도 요지부동(搖之不動)이었던 것이 물로
뒤처리를 한지 겨우 한달 보름만에 완치가 되다니.
처음에는 약간 찜찜한 기분도 적잖게 있었다.
더러운 그놈이 묻어있는 밑을 물을 뜬 왼손 손 바가지로 처리하다니...에그...
그냥 눈 질끈 감고 밑에 대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물컹한 그놈이 느껴졌으나 이왕 버린 몸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서둘러 마쳤다.
그리고 약간은 찜찜한 기분이 있었지만 일을 마치고 서둘러 우물가로 가서 손을
씻었다.
신기도감에서 나온 비누라는 물건으로 깨끗이 씻었다. 그리고 왼손을 코로 가져가서
냄새를 맡아보았다. 그놈의 냄새는 없고 뭔가 향기로운 냄새가 폴폴 풍긴다.
신기했다.
신기도감이라더니 별 신기한 것을 다 만들어내네 하는 생각을 잠깐 하다가, 이렇게
물로 뒤처리를 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 그러더니 결국 물 뒤처리의 신봉자가 된
최시형이었다.
아침부터 표주박에 물을 떠가지고 뒷간에 가서 시원하게 볼 일을 보고 온 다녀온
최시형은 잠시 방으로 들어가 모자란 잠을 청하기 위해 자리에 누웠다.
막상 자리에 다시 누웠으나 쉽게 잠이 다시 오지 않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문득 지난해의 일들이 떠오른다.
지난해 운현궁을 떠난 최제우와 그 일행은 즉시 전국으로 흩어져 동학을 각 지방에
전파하는데 앞장섰다. 이미 동학이 어느 정도 퍼져있는 삼남 지방보다는 동학의
교세가 미미한 북쪽을 주 대상으로 삼았다.
최시형은 조선에서도 가장 높은 고원(高原)인 평안도 강계까지 왔다. .
조선에서 가장 높은 개마고원(蓋馬高原)이 펼쳐져 있는 말 그대로 첩첩산중(疊疊山中)
인 곳이다. 그러나 이런 곳에도 어김없이 사람이 살고 있었다.
최시형은 이곳에서 1년을 보냈다.
처음에 그를 경원하던 주민들도 이제는 그의 뜻에 따라 모두 독실한 동학교도가
되었다. 낮에는 주민들과 함께 고원지방에서 잘 자라는 고랭지(高冷地) 채소와 담배,
감자, 고구마, 옥수수, 토마토 등을 키웠다. 원래부터 타고난 농사꾼인 최시형은
강계에서도 잘 적응했다. 농사일이 끝난 밤에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할 일없이
빈둥대거나 삼삼오오(三三五五) 모여 투전판을 벌이기 일쑤였다.
그러던 것을 최시형이 바꿨다.
운현궁에 있으면서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배움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최시형이었다.
즉시 최시형은 주민들을 설득해서 야학을 세웠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까막눈을 못 면한 현실에서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가난을, 못 배운 한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일반 백성들이었다.
하나 둘 야학에 나오는 주민들과 자녀들이 늘어가면 늘어갈수록 동학이 주민들에게
파고드는 것이 쉬웠으며, 그런 점이 눈이 띠면 띨수록 최시형은 신바람이 났다.
아울러 최시형은 백성들의 계몽(啓蒙)에도 힘썼다.
또한 보위부의 안내문을 솔선하여 지키고 지도하였으니, 지난 1년 동안의 노고(勞苦)
는 말로 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 모든 어려움을 동학 전파에 대한 희망과 새
시대에 대한 기대로 버틸 수 있었다.
다른 지방의 동학교도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지방으로 파견된 동학교도들은 최제우와 최시형의 지도로 각지에 야학(夜學)을
세우고 동학사상과 한글, 그리고 기본적인 우리 민족의 역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두려움도 없지 않았다. 섭정공 김영훈의 보장이 있었지만 관에 대한
이유없는 두려움은 어쩔 수 없었다.
언제 관아에서 쳐들어와 역적의 무리로 몰아 세울지 몰랐기 때문이다.
사실 기존 조선 사회에서는 단 열 사람만 모여도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지나 않을까
색안경을 쓰고 보기 일쑤였고, 여차하면 역적의 무리라는 오명을 뒤집어 씌워
탄압하기 일쑤였다. 그 만큼 역대 조선의 위정자(爲政者)들은 민중의 결집된 힘을
두려워하고 경원(敬遠)하였다.
그러던 것이 달라졌다.
천군이 등장하고 세상이 달라지기 시작하더니, 더 이상 민중이 결집하는
것을 탄압하지 않았다.
평소에 일반 백성들의 삶에 군림(君臨)하던 관아와 아전들의 퍼렇던 서슬은 어디
가고 이제는 동학이 하는 일이라면 알아서 협조해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모두가 천군
덕분이었다.
지난해 가을 전라도 남원 땅에서 일부 지주(地主)와 결탁한 아전과 관리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높은 소작세(小作稅)를 작인(作人)들에게 물리고 수탈을 일삼던
일이 있었는데, 동학의 고변(告變)으로 하루아침에 쪽박을
차는 신세가 되었다.
천군은 그런 것에 인정을 두지 않았다.
누구라도 힘없는 백성을 수탈하는 자가 있으면 본보기로 엄벌에 처했다.
그런 일이 몇 번 더 있고 나자 더 이상 힘없는 백성들을 봉으로 생각하던 관리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울러 동학에 대한 경원과 감시도 늘어갔다. 그러나 처음부터
조정의 갖은 탄압에 익숙했던 동학교도들은 그런 일에 이미 익숙했다. 더구나
천군이라는 든든한 우군(友軍)이 뒤에 버티고 있음에야...
이런 생각을 최시형이 하고 있는데 밖에서 최시형이 거두어 데리고 있는
막동이의 소리가 들린다. 이제 일어났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