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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최시형이었으나 보위부에서 내려온 '백성들의 보건 위생에 대한 안내문'
덕분으로 이제는 은근히 배설의 쾌감을 즐기는 경지에 이르렀다.
사실 보위부에서 내려온 '백성들의 보건 위생에 대한 안내문'은 간단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누구라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을, 누구라도 쉽게 알아보도록 한글로 작성한
안내문은 열 가지밖에 되지 않았다.
백성들의 보건 위생에 대한 안내문
1) 집에 들어가서는 반드시 손과 발을 깨끗이 씻는다.
2) 목욕은 가급적 자주 한다.
3) 마시는 물은 반드시 끓여서 마신다.
4) 야채와 과일은 반드시 깨끗한 물로 씻어서 먹는다.
5) 뒷간은 반드시 우물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설치한다.
6) 뒷간에서 볼일을 보고 나서는 반드시 물로 그 뒤처리를 한다.
7) 하수(下水)가 흐르는 도랑을 정비한다.
8) 하수가 개천(開川)으로 유입되는 곳에는 반드시 연꽃, 갈대, 부들, 줄, 큰고랭이
등 각종 수생식물(水生植物)을 대량으로 심어서 자연(自然) 정화력(淨化力)을 키운다.
9) 각 지방 관아의 수령(首領)은 반드시 어리석은 백성들로 하여금 이와
같은 일을 시행하도록 지도하고 관리 감독할 책임이 있다. 만일 이러한 이것의
시행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 고을에 대해서는 그 고을의 수령에게 모든 책임을
묻는다.
10) 보위부에서 파견되는 관리에 대해서는 각 고을 관아의 수령은 모든 편의를
제공할 것이며, 그들의 지도에 따라서 백성들의 보건 위생에 대한
교육을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이다.
사실 당시 조선의 백성이나 관에서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바로 역병(疫病)이었다.
17세기 중반(1660년)에서 19세기 중반(1864년)사이의 약 200년 간 사망자를 많이
발생한 역병을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보면 모두 79차례나 있었고, 이 중 10만 명
이상 사망한 경우만도 6차례나 되었다. 어떤 해는 인구가 7~8%나 감소하였고, 안동
김씨 일파의 세도 정치가 한창인 19세기 전반기에는 18년 동안 인구가 100만 명이나
감소된 경우도 있었다.
한 번 역병이 돌면 한 마을이 쑥대밭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으며 심하면 한 고을이
완전히 몰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의 주된 역병으로는 콜레라, 장티푸스, 이질, 홍역, 천연두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콜레라와 천연두-흔히 말하는 두창(痘瘡)-의 창궐(猖獗)이 가장 큰 피해를
끼쳤다.
이렇게 역병이 한 번 창궐하면 다른 치료 방법이 없었다.
당시의 낙후된 위생과 의료수준으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저 더 이상 역병이 번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때는 가장 좋은 방법이 도망이었다.
그저 역병이 발생한 지역을 멀리 떠나는 것이 최고의 수였다.
역병이 심한 경우에는 한 성의 약 9할의 주민이 도망을 가는 바람에 성이 텅텅 빈
경우도 있다고 한다.
사실 이렇게 역병이 창궐한 가장 큰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당시 조선 사회의 빈약한
위생관념(衛生觀念)에 있었다.
천성적으로 이발과 목욕을 자주 하지 않는 당시의 사회분위기에서는 역병이 창궐할
수밖에 없었다. 전통적인 유교사회의 영향으로 인해 이발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며, 그나마 목욕은 일부 양반 사대부의 전유물이다시피 했다.
일반 백성들에게 목욕이란 그야말로 사치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었으니, 일반 백성이
목욕을 하는 경우란 정말 1년에 손을 꼽을 정도로 빈약했다.
당시 조선은 상수도(上水道)가 없던 관계로 마을마다 공동 우물을 사용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는데, 그 우물물을 끓이지 않고 그냥 마시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것은
장마철에 비가 많이 와서 토우(土雨)가 끼게 되어도 변함이 없었다.
야채와 과일을 씻지 않고 그냥 먹는 것도 이유의 하나였다.
시골에서는 밭에서 방금 캔 무를 아낙네들이나 아이들이 씻지도 않은 채 그냥 옷에
한 번 쓱쓱 문지르고 먹기 일쑤였다.
마지막으로 우물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뒷간을 들 수 있다.
우물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뒷간은 그 특성상 지하에서 올라오는 우물물을 쉽게
오염시킬 수 있었는데, 당시 조선 사회는 이상할 정도로 그런 것에 무관심했다.
이런 상태에서 역병의 창궐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으며, 그 역병의 퇴치에 대한
것도 전 근대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역병이 집안으로 침입하지 못하도록 금줄을 치는 경우는 물론이고, 사이비 무당의
주술적인 굿과 부적을 신봉하는 일이 당시 조선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였다.
일반적으로 역병은 역신(疫神)이 붙은 것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귀신을 겁주어서 쫓아내는 방법(축귀:逐鬼)과 살살 달래서 풀어주는 방법(굿)
등이 역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수단이었다.
이러한 역병의 근원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철저한 위생상의 예방이
최선이었다.
이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보위대신 유홍기는 조선 백성들의 부족한 위생관념을
바꾸기 위해 앞에서 언급한 '백성들의 보건 위생을 위한 안내문'을 전국에 배포하고
천군 의무대에게 교육받은 의원들과 보위부 관리들을 각지에 파견하여 계도(啓導)
하기에 이르니 이미 전국에 퍼져 있던 동학교도들이 그 선봉에 선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