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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갑자기 혼인연령은 왜...?"
이상한 생각이 든 한상덕이 이렇게 묻자 김영훈은 심중에 있는 말을 꺼내 놓는다.
"솔직히 오늘 내가 좀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이 어린 꼬맹이라고만 알고 있던
주상전하께서 벌써 여자를 알아버렸고, 또 혼인얘기가 나올 정도라니요. 허---참...
한국에서는 내 조카의 나이가 열 네 살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 또래의 주상전하가
여자라니요. 그리고 혼인이라니요. 허---참..."
아무래도 김영훈이 단단히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아직 어리광만 부리는 자신의 조카 같은 어린 임금이 여색(女色)을 알고 밤마다 그
이 나인이라는 아이와 황음(荒淫)을 일삼을 것을 상상하니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한원장은 당장 법무부와 내무부, 경무청에 내 명의로 명(命)을 내리세요.
내용은 앞으로 어떠한 경우라 하여도 사례편람에 규정된 혼인연령을 어기는 사람이나
집안은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엄벌에 처할 것이라고 말이에요."
"알겠습니다."
한상덕이 알겠다고 말하며 아재당을 나서려고 하자, 김영훈은 한 가지를 더 첨가한다.
"한가지 더, 혼례 시에 주고받는 혼수(婚需)에 대한 조사도 철저히 하도록 하세요.
요즘 세간에는 과다한 혼수를 주고받는 일이 무슨 큰 자랑이나 되는 듯 너도나도
따라하고 있는 모양인데, 앞으로는 경무청에서 철저히 조사하여 관련자들을 엄중(
嚴重) 문초(問招)하라고 이르세요."
"알겠습니다. 하오나..."
"하오나, 뭡니까?"
"사령관님께서도 아시다시피 남자 포졸이 혼인과 혼수를 조사하기에는 규방(閨房)의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라서리..."
"아니 한원장은 우리가 한국에 있을 때 즐겨보았던 다모(茶母)라는 사극을 그새
잊어버렸소? 그 누구냐 하지원인가 뭔가 하는 가시나가 나오는 사극 말입니다. 그
DVD도 지금 있소만."
다모란 조선시대에 지방관청에서 차(茶) 시중을 하던 관비(官婢)를 말한다.
원래 비(婢)와 기(妓)는 같은 부류인 바, 조선시대에 지방관청에 매인 관기의 수는
최하 목(牧)에 20명에서부터 최고 평양감영의 200명까지 있었으며 여기에 경기(京妓)
까지 합하면 그 수효는 전국적으로 볼 때 공식적 숫자가 2만명을 헤아렸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 이 관기 중에는 인물과 재주에 따라 수령(守令), 방백(方伯)의 부실(副室)
역할을 하는 수청기(守廳妓)서부터 물긷는 급수비(汲水婢)까지 있는데 다모(茶母)는
차를 끓일 뿐 아니라 그 시중까지 하는 관계상, 이름에는 ‘모(母)’자가 붙어
있으나 젊은 여성이며 인물도 출중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다모는 때로는 남성이 할
수 없는 은밀한 규방(閨房)의 일을 탐문하고 다녔으니, 지금으로 말하면 여경(女警)
의 시초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모의 실재 신분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관비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신분의 보장은 물론이요, 때로는 기생처럼 술시중과
잠자리 시중을 드는 일이 다반사(茶飯事)였다.
김영훈이 이렇게까지 얘기하자 간신히 알아들은 한상덕이 무릎을 친다.
김영훈의 말은 계속된다.
"지금 이 시간 부로 전국 각 관아와 중앙 관청에 있는 모든 기생과 관비, 다모를
해방(解放)시키세요. 다시 말하면 오늘 이 시간 부로 관기제도(官妓制度)를
폐지한다는 말입니다. 한원장은 즉시 각 관련 부서에 이러한 나의 명을 전하고
세부적인 실행계획을 수립해서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시행하라고 이르세요. 그래서
쓸만한 관기나 다모가 있으면 경무청에서 흡수하여 여경으로 만들도록 하세요. "
약간은 즉흥적이라면 즉흥적일 관기폐지 정책이 이렇게 시행되었다.
어린 임금이 여색을 접했다는 소식에 마음 상한 김영훈이 즉흥적으로 일을 추진한
면이 없지는 않았으나, 이미 천군 내부에서 준비하였던 정책에 불과했으니, 그동안
시행 시기를 두고 고민하였던 정책의 하나였다.
소위 말하는 기생(妓生)이라 하면 조선시대에 존재했던 팔천(八賤 사노비, 광대,
무당, 백정, 승려, 기생, 상여꾼, 공장) 중의 하나로 천민계층이다.
기생도 종류에 따라 몇 가지로 나뉘는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관기는 지방관아에
부임하는 수령방백(守令方伯)을 위로하기 위해 지방관아에 소속된 기생을 말한다.
조선시대의 지방관들은 대부분 가족들을 떼어놓고 홀로 임지에 부임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런 방백들과 관기와의 불장난이 얘기 거리 삼아 인구(人口)에 회자(膾炙)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또 약방기생(藥房妓生)이란 것도 있었다.
양반 집 부녀자가 아플 때 남의(男醫)에게 진찰을 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아픈
곳을 제대로 진찰 받지 못하여 죽는 수가 있으므로 여자들에게 의술을 가르쳐 주어
부인들의 병을 진맥하게 한 것이다. 태종 6년(1406)에 처음 의녀를 두었는데 이것이
약방기생의 유래이다.
상방기생(尙房妓生)이란 것도 있었는데 궁중 내에서 대궐의 의복을 지으면서 내연(
內宴)에도 참가하는 기생을 일컫는다.
이 약방기생과 상방기생을 합쳐 양방기생이라 하며 이들을 기생재상(妓生宰相)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기생으로서 가장 출세한 것이기도 하며 재상이 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해서 하는 말이기도 했다.
기생에게도 등급이 있어 1패(牌), 2패, 3패로 나뉘는데,
1패란 궁중에서 여악(女樂)으로 어전(御殿)에 나아가 가무(歌舞)를 하는 일급기생을
일컫는다.
2패는 관가나 재상집에 출입하는 급이 낮은 기생으로서 은군자(隱君子) 또는
은근짜라고 하며 내놓고 몸을 팔지는 않지만 은밀히 매음(賣淫)도 하는, 즉 겉으로는
기생의 품위를 유지하면서(기생은 이론적으로는 술좌석 또는 연희의 흥을 돋우는
연예인이므로) 숨어서 매음하는 류(類)의 기생으로서 대개 이들이 관리의 첩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은근짜하다는 말의 어원이 2패 기생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도 흥미로운 사실이다.^^
3패는 술좌석에서 품위 있는 기생의 가무 같은 것은 하지 못하고 잡가나 부르며
내놓고 매음하는 유녀(遊女)를 가리킨다.
이때부터 내의원에 소속된 의녀(醫女)는 본래의 업무 외에 술자리의 참석을 강요받는
일이 없어졌으니 허준에 나오는 예진아씨가 알았다면 지금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음을
한탄하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렇게 해서 의녀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할 수 있었고, 나아가서는 조선 최초의 양식
간호사와 여의사의 출발이 있을 수 있었다.
또한 상당수의 다모가 경무청에 흡수되어 정식 교육과 훈련을 거치면서 조선 최초의
여경(女警)으로의 탄생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 여경이 조선 아녀자들의 일등
직업으로 인식되는 것은 후일의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폐지된 관기제도 덕분에 갈 곳을 잃은 지방 관기들이 서울
장안으로 상경(上京)하면서 전혀 새로운 기생제도의 출발을 불러오는데 바로
기생권번(妓生券番)의 출현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은 나중이다.
우리가 흔히 들었던 한성권번(漢城券番), 대동권번(大同券番), 경천권번(京川券番),
조선권번(朝鮮券番) 등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또 우리가 역사 속에서 익히 알고 있던 명월관(明月퉓), 국일관(國一퉓), 식도원(
食道園) 등의 유명 기생집의 출현도 이때부터 시작되니, 이렇게 역사의 흐름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리하여 김영훈은 그의 사후(死後) 기생들의 아버지로 대대로 기억되며, 그를
기리는 기생들의 제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하니 과연 김영훈은 이러한 일을 예측하고
관기를 해방시켰을까나? 궁금도 하구나...
대한제국기(大韓帝國記)-37 개혁(改革)의 첫걸음...8
번호:4897 글쓴이: yskevin
조회:952 날짜:2003/10/28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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