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김영훈은 할 말을 잃었다.
이제 겨우 열 네 살 어린아이가 여색(女色)을 경험한 것도 모자라 푹 빠져버린
지경에 이르렀다니,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하긴 중이 고기 맛을 보면 절간의 빈대 한
마리도 남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마치 온 몸이 공중에 붕 뜨고, 가슴속이 아리아리하고, 저 깊은 밑바닥에서 먼가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그 쾌감의 나락(那落)을 어찌 쉽게 떨쳐버린단 말인가.
누구도 쉽지 않은 일이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면 모를까.
성인(聖人)도 아닌 한낱 어린아이가 그 맛을 봤으니 아마도 첫정에 흠뻑 취했으리라.
생각해보니 오늘 낮에 부용지에서 어린 임금이 자신에게 뭔가를 얘기할 듯 하다가
말았는데 바로 그것이 아닌가 싶었다. 뭔가 할 말이 있었는데 부끄러운 듯
감추었으니...
김영훈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장현덕의 말은 계속된다.
"뭐 주상전하의 아버님이신 흥선대원군께서도 열 세 살에 혼인을 하였으니,
주상전하께서 유달리 빠른 것은 아니지요."
"그렇긴 하지..."
이렇게 말하는 김영훈이었지만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 어린 임금의 그러한 행동이
탐탁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여, 뭔가 특단의 조치를 생각하는데, 먼저 한상덕에게 묻는다.
"한원장, 이번에 편찬된 대전회통에는 남녀의 혼인연령(婚姻年齡)에 대한 규정이
있습니까?"
난데없는 김영훈의 물음에 이상한 생각이 든 한상덕이었으나,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한다.
"대전회통에는 그것에 대한 규정이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지난 헌종 때에 간행(刊行)
된 사례편람(四禮便覽)의 내용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고 합니다."
"사례편람요?"
"예, 그렇습니다."
지난 헌종 10년인 1844년 이재(李縡)가 사례(四禮)에 관하여 편찬한 책이 바로
사례편람이다. 사례편람은 흔히 말하는 사례에 대한 정확한 정의와 주자(朱子)의
가례(家禮)의 허점을 보완하면서 이를 현실적으로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엮었는데,
지금은 없어진 관례의식(冠禮儀式)만 제외하면 현대에까지 행해지는 혼례(婚禮),
상례(喪禮), 제례(祭禮)가 이 책의 간행을 계기로 면면히 이어오게 된다.
참고로 사례란 관례, 혼례, 상례, 제례를 말함인데, 관례는 머리에 갓을 써서 어른이
되는 의식이다. 옛날에는 남자 나이 20살이 되면 관례를 행하고, 여자 나이 15살이
되면 머리에 비녀를 꽂았다. 혼례는 혼인하는 예법(禮法), 상례는 상중(喪中)에
행하는 예법, 제례는 제사(祭祀)지내는 예법이다. 수(隋)나라 때 왕통(王通)이
저술한 문중자중설(文中子中說)에 사례에 대한 말이 보이고, 소학감주(小學紺珠)
인륜류(人倫類) 사례에, 사례는 관·혼·상·제라고 했다.-사례편람의 내용은
네이버에서 인용하였다.
조선 최초의 대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남자는 15세 이상, 여자는 14세
이상이라야 하고 사정이 있으면 여자는 12세 이상으로도 혼인을 할 수 있다 하였으나,
서(淚)와 부(婦) 및 주혼자(主婚者)가 기년(朞年) 이상의 복상(服喪)이 없어야 성혼(
成婚)할 수 있다 하였다.
이재의 사례편람에서는 경국대전의 이것을 더 강화하여 남자는 16세로부터 30세
사이에, 여자는 16세로부터 20세 사이에 의논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 세간(世間)의 풍습은 이러한 규정이 잘 지켜지지 않았던 것 같다.
조선말기에는 조혼(早婚)이 성행하여 남자 나이 12 · 13세에, 여자 나이는 남자보다
5 · 6세 이상이 보통이었고, 심지어 10세 미만의 신부에, 신부보다 10세 이상
연상의 신랑과의 조혼 등 각양각색이었다. 그러니 나이 어린 신랑이나 신부는 제
구실을 할 수 없었으니 혼인생활이 기쁨보다는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서울
육백년사에서 인용.
또 대대로 교분이 있던 집에서는 상대방의 조부모나 부모가 병이 들거나 늙어서
자손의 혼취(婚翠)를 한(限)이 되게 바랄 때 강보유아혼(襁褓幼兒婚)이라 하여
포대기 안에 있는 아이를 혼인시키는 일도 있고, 아이를 낳기도 전에 태중(胎中)의
생명체를 두고 혼인할 것을 약속하는 회잉혼약(懷孕婚約)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혼약은 득보다는 폐해가 더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