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43화 (41/318)

38.

그런 흥인군 이최응이 뭐 주워 먹을게 있다고 부대부인 민씨를 자주 찾는단 말인가.

김영훈과 한상덕이 이런 흥인군의 얘기를 주고받고 있는데 밖에서 소리가 들린다.

"사령관님, 장현덕입니다."

곧이어 장현덕은 안으로 들어오고 그의 얼굴에는 미안함과 무안함이 교차되고 있었다.

"어서 오시게."

"어서 오세요."

"죄송합니다. 사령관님."

자신의 죄를? 잘 알고 있는 장현덕이었으니, 들어오자마자 대뜸 죄송하다는 말부터

꺼낸다. 그리고 김영훈에게 합하라는 경칭(敬稱)을 쓰지 않고 사령관이라는 경칭을

사용하는 것이, 이미 김영훈의 노기(怒氣)를? 어느 정도 헤아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얍삽한 놈 같으니...

"장 원장이 죄송한 일이 어디 있소? 오히려 축하할 일이지. 사실 나도 궐내(闕內)의

상궁(尙宮) 나인(內人)이나 내관(內官)의 숫자가 너무 많다는 생각을 진작부터 하고

있었어요. 물론 그에 따른 폐해(弊害)도 익히 알고 있고요. 뭔가 변화의 바람이 불

필요가 있었는데 잘 되었지요."

조선 시대 상궁 나인은 궐내에 상주하면서 임금을 비롯한 왕실 식구들의 시중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각각 지밀(至密), 침방(針房), 수방(繡房), 세수간(沈水間),

소주방(燒廚房), 세답방(洗踏房), 퇴선간(退膳間), 생과방(生果房) 등의 소속으로

나뉘면서 적을 때는 300명에서 많을 때는 500명까지 있었다.

궐내의 상궁 나인은 해가 뜨면 각 처소와 맡은 부서에서 각자의 맡은바 소임을

다하다가, 해가 지면 낮에 그렇게 바쁘게 소임을 다하였던 것이 언제냐는 듯 임금의

승은(承恩) 기회를 얻기 위한 일대 경염장(競艶場)을 연출한다.

예를 들어 소주방 궁녀들은 임금이 드시는 연시(軟枾)를 내놓을 때 혀로 핥아서

깨끗하게 닦고, 시침을 모시는 젊은 궁녀는 임금의 회춘을 위해 대추를 입안에서

불린 다음 임금에게 진어(進御)한다. 이것은 타액수수(唾液授受)의 한가지

방법이었다. 이런 경우 직접적인 성적(性的) 교합(交合)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기(氣)

교합이라고 불렀다.

이렇듯 궐내의 늙고, 젊고, 어린 상궁 나인들이 오로지 임금 한 사람만을 위해 청춘(

靑春)을 불사르고 있었으니 어찌 보면 굉장히 불합리한 구조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역대로 이런 상궁 나인들과 권세를 잡으려는 세도가(勢道家)

사이에는 끈끈한 밀착관계가 형성되어 궐내의 세력 판도(版圖)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적도 적지 않았다.

내관도 역시 마찬가지로 폐단이 있었다.

내관이 처음 등장한 고려시대와는 비할 수 없이 그 권력이 약해지긴 했지만

궐내에서는 누구도 내관의 영향력을 무시하지 못하였다.

전조(前朝) 고려 내관의 전횡(專橫)을 잘 알고 있던 태조(太祖) 이성계는 개국

초부터 내관의 세력을 적극 억제하였다. 내시부(內侍部)를 설치하여 그 숫자를

140명으로 제한하였고, 궐내의 각종 잡다한 사무만 보고 정사에는 일절(一切) 관여를

못하도록 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살펴보면 궐내 음식물 감독, 왕명 전달, 궐문 수직, 청소

등이라고 규정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궐내의 모든 잡무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품계가 높은 내관들은 궐 밖에 사가(私家)를 얻고, 부인과 양자이긴 하지만

자식까지 두어 대를 이었으니, 그 식구들을 간수하기 위해서 각종 부귀(富貴)를 탐(

貪)하였다.

불알이 없는 내관의 특성상, 해소할 수 없는 성욕(性慾)의 갈구(渴求)보다는 부귀와

권력(勸力)을 탐하고, 갈구하는 것이 고래(古來)의 내관들의 습성(習性)이었으니,

그것은 조선의 내관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권력에 대한 진출이 원천봉쇄(

源泉封鎖)된 조선에서는 그 대신으로 부귀를 탐하는 정도가 극심하였다.

이러한 폐해(弊害)를 잘 알고 있는 김영훈은 언젠가는 궐내의 상궁 나인과

내관에게까지 개혁의 칼을 휘두를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장현덕의 이런 행동으로

궐내에도 어느 정도의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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