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숙부(叔父)-- 어서 오세요, 어이하여 그동안 격조(隔阻) 하시었습니까
? 숙부."
어린 임금이 김영훈에게 이렇게 말하며 뛰어오자 수행원들이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달려온다. 만승(萬乘)의 귀하신 몸인 임금의 옥체(玉體)가 행여 상하지나 않을까
두려운 마음에서이리라.
"전하, 그동안 강녕(康寧)하셨사옵니까?"
"과인(寡人)은 잘 있지 못하였어요."
아직은 어린 임금인지라 약간은 새침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데,
"아니, 그것이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강녕치 못하셨다니요?"
"숙부가 과인을 자주 찾지를 않으니 그럴 수 밖 에요."
어린 임금의 이런 말에 다만 송구스럽다는 말을 할 수밖에는 없었다.
이어서 경연관인 화서 이항로도 김영훈과 그의 처 조씨에게 인사를 하고
덕담(德談)을 나누는데,
"어이하여 장원장은 보이지 않사옵니까? 전하."
의당 어린 임금의 최측근에서 수행하여야 할 장현덕이 보이지 않자 이상한 생각인 든
김영훈이 어린 임금에게 묻는다.
"장원장만 보이지 않나요? 또 누구 보이지 않는 사람은 없나요?"
이렇게 말하며 싱글벙글 웃고만 있는 어린 임금이었으니, 김영훈은 이 무슨 귀신 씨
나락 까먹는 놀음인가 하는 생각을 잠시 하다가 이내 어린 임금의 말뜻을
알아차리고는,
"그러고보니...지밀상궁(至密尙宮)도 보이지 않사옵니다. 전하. 어찌된 영문이온지...
?"
"후후후... 실은 장원장과 안상궁이 정분(情分)이 났답니다. 그래서 과인이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었지요."
의기양양(意氣揚揚)한 어린 임금의 말을 들으니, 그때서야 알아듣는 김영훈이다.
사실 지난 해 여름에 자신을 비롯한 대부분의 천군이 혼인을 하였는데도
유독 장현덕만이 혼인을 하지 않아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장현덕과 안상궁은 궁에 들어온 그 날부터 서로에게 호감(好感)을 느끼면서,
가슴앓이만 하고 있었는데, 지난 여름의 대대적인 혼인의 행사에서
유독 장현덕만이 완곡하게 거절하는 것을 모두들 이상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현덕과 안상궁이 눈빛을 주고받는 모습을 어린 임금이 보았는데, 그때 그
심상치 않은 두 사람을 본 어린 임금이 장현덕을
추궁?하여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듣게 되었다.
이미 장현덕의 독특한 훈육의 결과로 사랑하는 두 남녀를 갈라놓는다는 것이 어떠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아는 어린 임금은 장현덕과 안상궁에게 특별히 성은(聖恩)을 내려
두 사람의 사랑을 허락한 일이 바로 지난 정초였다. 아직까지 내외에 공표(公表)
하지는 못하고, 주변 사람 몇 몇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나, 조만간 두 사람이
백년가약(百年佳約)을 맺는 것은 어김없는 사실로 모두들 받아들이고 있었다.
원래 상궁이라 하면 어린 나이에 대궐에 들어와 생각시 시절을 거치며 엄격한 훈육과
궁중 법도를 익히면서 오로지 임금 한 사람만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고,
그것은 지금껏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천군이 등장하고 장현덕을 비롯한
일부 천군이 대궐에 상주(常住)하면서 달라지기 시작하였으니, 사내라고는 불알 없는
내시와 꼬맹이 임금밖에 없었는 구중궁궐(九重宮闕)에, 젊고 훤칠하고 당당한 천군이
대궐에 상주함으로서 이러한 일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올해 겨우 스물 일곱의 나이인 지밀상궁 안상궁이 상궁의 봉첩(奉牒)을 받은 일은
전례(前例)가 없던 파격적인 일로 그 또한 지난 변란 때 몸을 사리지 않고 임금을
옹휘한 공이 인정되어서 승차(陞差)한 것이었으니, 입궁(入宮) 후 대체로 삼십 오륙
년이 되어야 왕으로부터 정5품의 상궁 봉첩을 받는 역대의 전례를 비추어 봐서는
엄청나게 빠른 승차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래저래 천군이 등장한 후 조선의 사정은 전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화(
變化)하기 시작하였으니, 그 변화의 바람은 구중궁궐이라고 해서 비껴가지는 않는가
보다.
이렇게 임금에게 공인된 커플이 대궐에 등장한 일은 조선 오백 년 역사상 전무후무(
前無後無)한 일이었으니, 새삼 어린 임금의 마음씀씀이가 많이 개화(改化)한 것을
느끼는 김영훈이었다.
만일 이 일을 종친부(宗親部)에서 알면 난리가 날 것임을 예감하였으나,
조대비의 든든한 후원이 이럴 때 필요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는
김영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