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38화 (36/318)

33.

이렇게 화기애애(和氣靄靄)한 가운데 모든 점심상이 물려지자, 김영훈은

오늘 찾아온 용건을 본격적으로 꺼내기 시작한다.

"마마, 신(臣)이 오늘 이렇게 마마께 문안인사를 여쭌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위로는

마마와 보령(寶齡) 유충(幼沖)하신 주상전하와 아래로는 어리석은 이 나라 만 백성을

위하여 한 말씀드리고자 해서이옵니다.

지난 계해년(癸亥年) 섣달 우리 천군이 이 나라 조선에 와 지금까지 1년하고도 2개월

남짓이 흘렀사옵니다. 그 사이 이 나라 조선에서는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사옵니다.

선대왕마마께서 어이없이 승하(昇遐)하시고, 새로운 주상전하께서 등극하셨으며, 이

나라 조정의 실권을 60년 동안 움켜쥐고, 가렴주구(苛斂誅求)와 폭정(暴政)을 일삼던

안동 김씨 일파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사옵니다.

참으로 망극하옵게도, 어리석은 신이 섭정공이란 광영(光榮)된 자리에 올라 보령

유충하신 주상전하를 대리(代理)하여 섭정을 하면서 나름대로 이 나라 억조창생(

億兆蒼生)과 만 백성을 위하여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를 하였사옵니다. 그러한

결과로 피폐했던 나라의 재정은 어느 정도 회복하였으며, 굶주리던 백성들도 어느

정도는 그 굶주림을 면할 수 있었사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나라 조선에는

어리석은 백성들의 고혈(膏血)을

쥐어짜고, 자신들의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채우는데 급급한 무리들이 참으로

많사옵니다."

조대비는 물 흐르듯 도도하게 흘러나오는 김영훈의 말을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듣고만

있었다. 김영훈의 여러 가지 말 중에 흥선의 변에 대한 얘기가 빠졌음을 알고는

자신을 배려하려는 조카사위의 세심한 마음씀씀이에 감복(感服)하기도 하였지만 차마

내색하지는 못하였다.

김영훈은 그런 조대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말을 이었다.

"신은 그러한 가증스러운 무리들을 절대 좌시(坐視)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신은 이 나라 조선의 천 삼백만 백성들이 진실로 편안한 삶을 구가(謳歌

)하고, 이 나라 조선의 천 삼백만 백성들이 진실로 주상전하와 왕실(王室

)의 덕(德)을 마음깊이 숭상(崇尙)하는 그 날이 올 때까지 개혁(改革)의 기치(旗幟)

를 거두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때로는 관용(寬容)으로, 때로는 무자비한 철퇴로, 개혁의 걸림돌들을 하나하나 헤쳐

나갈 것이옵니다. 그리하여 마마의 천세(千歲)후에도 이 나라 조선이 영원토록 할

것이옵니다. 그것이 곧, 멀리 북변(北邊)에 나가 있는 성하 처남과 옆에 있는 이

사람과 영하 처남, 그리고 마마의 친정 식구들 모두에게 이로운 일일 것이기

때문이옵니다.

마마, 신은 모든 일을 광명정대(光明正大)하고, 공평무사(公平無私)하게

처결할 것이옵니다. 그것이 곧 자애로우시고, 관후(寬厚)하오신 마마와 주상전하를

바로 모시는 길이기에 신의 하찮은 이 몸이 분골쇄신(粉骨碎身)하는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이루고야 말 것이옵니다. 부디 신의 이러한 뜻을 명찰(明察)하시고, 신에게

힘을 실어주시옵소서."

좌중은 숙연(肅然)했다. 조대비도 침묵(沈默)하였고, 조영하와 김영훈의

처 조씨도 말이 없었다.

조대비는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김영훈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을

한다.

"내, 그대만 믿겠소. 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대와 그대의 천군이 하는 일에 아낌없는

성원과 지지를 보내겠소.

부디, 이 아이들만은, 이 아이들만은 그대가 잘 보살펴 주시오."

오늘 이렇게 섭정공 김영훈이 조대비를 찾아와 문안인사를 드린 이유는 이로써 어느

정도의 성과를 보이게 되는데, 그것이 앞으로의 김영훈이 취할 개혁정책에 있어

하나의 커다란 장애물이 사라지며, 백만의 원군(援軍

)보다도 더 큰 힘으로 작용하게 될지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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