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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 무슨 생각을 그리도 골똘히 하시옵니까?"
조대비가, 아침부터 미친년 속곳을 본 동네 머슴처럼 헤벌레 웃으며 한참을 말이
없자, 참지 못한 김영훈의 처 조씨가 이렇게 묻기에 이른다.
순간 정신이 돌아온 조대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며 앞에 있는 해주반(海州盤)에
한 상 가득 차려져 있는 음식을 권한다.
네모 반듯한 해주반에는 김영훈이 좋아하는 꿩 가슴살을 저민 전골이며, 어린 소의
중육(中肉)으로 만든 육회(肉膾)며, 편육(片肉), 약식(藥食), 한과(韓菓), 전유어(
煎油魚)며 하는 것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곁상으로 준비된 것도 해주반이었는데,
역시 김영훈이 좋아한다는 노란 계란(鷄卵) 고명이 뿌려져 있는 하얀 떡국이 있었다.
참으로 변화무쌍하고, 시류(時流)에 영합(迎合)하기 좋아하고, 간사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더니, 궁중의 하찮은 상차림에도 나타나 있었다.
60년 세도를 자랑하던 안동 김씨 일파의 시대 때만해도 궁중의 모든 상은 물론이고,
반가(班家)와 일반 백성들이 교자상도 나주반(羅州盤) 일색이었으니, 그것은 안동
김씨 일파의 수장 김좌근의 애첩(愛妾)인 나주 출신의 양씨와 그 측근들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의 발로(發露)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그렇게 세도를 자랑하던 안동 김씨 일파가 하루아침에 자신을 비롯한 천군의
손에 모조리 도륙(屠戮)나자 그동안 모든 상차림에서 주빈(主賓)으로 대접받던
나주반의 신세마저도 된서리를 맞게 되었고, 궁중의 모든 상과, 반가의 모든 상이
하루 아침에 모조리 해주반으로 교체되는 일대 파란(波瀾)을 겪게 되었으니, 어찌
그것이 나주반의 못남에서 비롯되고, 어찌 그것이 해주반의 빼어남에서 비롯된다는
말인가 하는 짧은 고찰을 해보는 김영훈이다.
이 모든 풍파(風波)가 시류에 영합하는 어리석은 사람의 잘못이었으니
...
김영훈이 이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지, 조대비는 손수 김영훈에게 술을
권하니, 술 또한 김영훈이 좋아한다고 알려진 송순주(松荀酒)다.
"자! 이 처숙모(妻叔母)의 술 한 잔 받으시오."
조대비가 손수 술을 쳐주자, 당황한 것은 오히려 김영훈이다.
"황공하옵니다, 마마."
"이 술 한 잔 받으시고, 이 못난 처숙모의 지난 과(過)를 모두 용서해 주시면
고맙겠소, 아울러 우리 조카들도 잘 보살펴 주시고..."
조대비는 이렇게 술을 권하며 옆에 앉아 있는 김영훈의 처 조씨와 조성하가
함경감사로 부임하자 새롭게 대비전 승후관(承逅官)으로 임명된, 또
다른 자신의 조카 조영하(趙寧夏)를 쳐다보며 희미한 웃음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