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28화 (26/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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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북학파(北學派)의 거두 박제가(朴齊家)는 1772년 청나라에 다여 온 후

집필한 북학의(北學議)에서 오묘하고 아름다운 청국(淸國) 자기(瓷器)와 거칠고

울퉁불퉁한 조선 자기를 비교하며 이렇게 저술했다.

"한갓 도자기의 품질이 나쁘다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문제는 나라의 모든 일이 이를 닮아간다는 것이다.

마땅히 도공(陶工)들에게 단단히 경고해서 법도에 맞지 않은 그릇을 시장에 내놓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청국을 방문한 박제가는 청국에서 직접 목격한 효율적이고 견고한 수레, 배, 성,

벽돌, 기와, 자기 등의 문물을 조선의 낙후된 현실과 일일이 견줘가며 시대를

아파했다고 한다

흔히들 도자기는 인류문화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당시의 문화와 기술 수준을 알

수 있는 한 가지 척도가 된다고 얘기한다. 이런 도자기를 인류는 역사 이전의

시대부터 꾸준히 만들어서 실생활에서 써왔으나, 토기(土器), 도기(陶器), 석기(石器)

수준을 뛰어넘는 진정한 자기(瓷器)로 승화시킨 나라는 인류의 역사상 아주 드물다.

특히 조선과 청국은 그 몇 안 되는 나라 중에서도 수 백년을 앞서서 자기를

만들어냈다. 요즘 세계 도자기 시장을 주름잡고 있는 왜국(倭國)과 유럽은 각각

17세기와 18세기에야 비로소 자기를 만드는 기술을 터득했다. 왜국같은 경우에는

조선의 도공들이 건너가 왜국 도자기 산업을 부흥시키지 않았다면, 자기 수출을 통한

부의 축적이 있을 수 없었으며, 부의 축적이 없는 상태에서의 명치유신의 완성은

불가능하였다. 유럽의 경우에는 그 낙후의 정도가 더욱 심하였다. 대대로 왜국과

꾸준한 교류를 하였던 네덜란드의 동인도 상회는 왜국의 자기를 유럽에 수출함으로써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그렇게 수출된 왜국의 자기는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되었다. 유럽 여러 나라의 왕가(王家)에서는 어떻게든 왜국 자기의 소장을

원하였으며 프로이센 드레스덴의 군주였던 작센공(公) 아우구스트는 1천6백 점에

달하는 보물 급 왜국 자기를 수집했을 정도였다.

작센공 아우구스트는 왜국 자기에 매료된 나머지 드디어 자기의 독자적 개발을

명하기에 이르렀다. 왜국 자기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모방을 거쳐 드디어 1710년

유럽 최초의 자기가 독일 마이센에서 완성된다. 이후 유럽 자기는 동양에서 발명된

자기에 서양적인 장인정신과 합리성을 가미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특히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자기가 일반에게까지 널리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근대화와 산업혁명을 이끈 유럽의 합리주의에 힘입은 바 컸다. 우리가 항상 애용하는

접시, 커피 잔 등 식기들도 원류는 동양이지만 유럽인들이 개량한 것이다. 유럽

도자기들은 왜국과 함께 오늘날 세계의 고급 도자기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

네이버에서 인용.

박제가의 그런 아픔과, 왜국에 끌려가 핍박받으며 도자기 산업을 일으킨 한 맺힌

조선 도공(陶工)의 절규를 잘 알고 있는 선우재덕은 다시는 그런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천군이 보유한 모든 자기 산업의 지식을 자신이 구입한 사요의

도공들에게 전수했다.

비록 자기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선우재덕이었으나, 도공들에게 이론을 통한

기술 전수를 하다보니 어느 정도 자기를 보는 안목도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의

도공들은 그동안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끝까지 천직(天職)인 도공으로서의 삶을

버리지 않고 오늘날까지 묵묵히 살아왔던 만큼 아무리 조선 도자기 산업이 전보다

쇠퇴했다고 하더라도 그 근본 기술과 실력은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도공들이었으나 처음 선우재덕이 멀쩡하게 생긴 기존의 조선식 자기보다

희안하게 생긴 찻잔이며 그릇이며를 만들라고 했을 때는 이 사람이 무늬만 천군이지

실은 속빈 강정인가도 생각했다. 그러나 진심을 가지고 자신들을 대하는 선우재덕의

모습에 결국은 감복하게 되었고, 누가 감독하지 않아도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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