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26화 (24/318)

21.

[주단, 지물, 포목의 여러 큰 점포가 종로를 끼고 있으며, 기타는 모두 여러 곳에

흩어져 있다. 모든 시장에 나오는 사람들이 새벽에는 이현 및 소의문(昭義門서소문)

밖에 모였다가 오정 때면 종로거리로 모여든다. 도성 안에서 많이 수요되는 것은

동부의 채소와 칠패의 생선이 제일이다. 남산 밑에서는 술을 잘 빚고 북부에서는

떡을 파는 집이 많아서 남주북병(南酒北餠) 이라고들 말한다] 유득공(柳得恭)의

경도잡지(京都雜志)에서의 한 귀절.

아침부터 선우재덕과 전준호는 바빴다.

전준호는 선우재덕과 함께 치누크의 부조종사 일을 그만두고 쥬신상사(주)를 설립한

창업 동지였다.

이들이 종로에 점포 한 채를 마련해 쥬신상사라는 간판을 걸어 놓은 지도 벌써 두

달이 지났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투자를 상담하기 위해서 쥬신상사에

몰려들었으며, 기존 조선의 거대 상단들인 송상이나 만상은 그들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종로의 쥬신상사를 떠난 선우재덕과 전준호는 말을 몰아 경기도 광주로 향했다.

두 사람이 지금 가고 있는 광주에는 두 달 전에 자신들이 매입한, 사요(私窯)가 하나

있었는데, 오늘의 목적은 그곳에 가서 지난달에 주문한, 조선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모양새의 자기들이 완성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원래 도자기산업은 고려, 조선시대를 통하여 전업(專業)적인 수공업 중에서 가장

발달한 부문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고려청자(高麗靑瓷)와

별개 계통으로 발전하여 유명한 조선백자(朝鮮白磁)를 낳게 하였다. 농민수공업에서

분리된 전업적인 수공업에 의하여 도자기가 제조되었으나 이것이 관사의 직영 또는

엄한 감독 아래 진행되었던 것이다. 즉 옹점장인(瓮店匠人)은 공조에서 취세수용(

取稅收用)하고 사옹원(司饔院)은 380명의 사기장(沙器匠)을 두고 있어 자기(磁器)를

일년에 두 차례씩 진상하였는데 광주(廣州), 양구(楊口), 곤양(昆陽) 등지의 번토(

燔土)가 원료로 최적이었다고 한다. 사기의 진상은 조선초부터 대단하였지만 사밀장(

私密匠)의 수효는 빈약하였던 모양이다.-서울 육백년사 도자기제조에서 인용.

이렇듯 조정에 납품하는 관요(官窯)가 대부분이었고 그에 따라 발전을 거듭했던

조선의 도자기산업이었으나, 임란이후 많은 도공들이 일본에 끌려갔고, 그 이후로

관의 횡포도 더 가세하여 도자기의 생산기술은 쇠퇴하여 사양길에 접어들었던 것이

이제까지의 현실이었다. 그러던 도자기산업이 이제는 사요의 확산과 시장경제(

市場經濟)의 활성화로 인해 다시금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비단 도자기

산업뿐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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