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이 무렵 화서 이항로는 장현덕과 천군에게 배우고 있는 신학문에 나름대로
심취하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특히 이항로가 충격을 받은 것은 지난 번 증기선
풍백함의 진수와 이순신함에서의 하룻밤이었으니, 그곳에서 이항로를 비롯한 조선
중신들은 가히 별천지(別天地)를 본 것과도 같은 충격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의 뿌리깊은 남녀의 차이와 신분의 차별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었다.
일단 그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해결해 줄 것이었으나, 당장 운현궁 앞에서 농성하는
유생들은 어떠한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또한 영남유림의 초반 극렬한 반대 상소의 논조가 많이 누그러진 데에는
지난 갑자년 여름에 있었던 천군의 대대적인 혼인도 한 몫을 하였다.
이미 대부분의 천군이 혼인을 하여 일가(一家)를 이루었는데, 한상덕의 처(妻)가
바로 호남유림의 거두 기정진의 조카딸이었으며, 김기현의 처는
전 우의정이자 지난 갑자년에 청국에 다녀온 영남유림의 거목(巨木)이경재의 서녀(
庶女)였으니
, 그것은 비단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김영훈을 비롯한 거의 모든 천군이 장가를 들었는데 모두가 조정 중신들의 집안이나
지방 유림의 명문의 후예, 또는 유력한 집안의 딸들을 배필로 맞아들이게 되었으니,
어쩌면 그러한 혼인은 앞날을 위한 김영훈의 사전(事前) 정지작업(整地作業) 성격이
짙다고 할 수 있었다. 에구구, 무슨
고려 태조 왕건의 혼인정책에 의한 국정 안정책과 비슷하구만...^^
이렇게 천군과 혼인을 한 집안에서는 대 놓고 김영훈의 개혁안에 반대를
하지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 듯 할 수밖에 없었다.
"한원장은 나가서 저들의 대표를 이리 데려오세요. 당근을 쥐어주며 설득하면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가는 한상덕의 얼굴은 그래도 약간은 못마땅한 표정이 드러나
있었다. 어차피 유림에서 올리는 상소야 어린 임금의 앞으로 가는 것이기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앞에서 농성하는 유생들은 운현궁의 특성상 더 이상 농성이
진행되면 곤란한 측면이 있었기에 그들을 달래려는 생각이었으니,
한상덕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균관 유생들의 대표라고 하는 몇 명의 유생들이
한상덕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은 한참을 김영훈과 얘기를 나누더니 농성을 한 자리로 돌아가 동료 농성
유생들을 설득하더니 이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한다.
김영훈이 아재당에서 유생들의 철수 소식을 듣고 있는데 밖에서 춘삼의 목소리가
들린다.
"합하, 소인 춘삼이옵니다."
춘삼이가 자신을 찾을 일이 없었기에 의아한 기분이 든 김영훈이,
"무슨 일인가."
하고 말하자, 밖에 있는 춘삼이 다시 대답한다.
"잠시, 마님께서 찾으십니다요."
더욱 이상한 기분이 든 김영훈이었다. 그러나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춘삼의 말에
알았네 하고 말하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옆에서 듣고 있던 한상덕도 이상한지,
"대부인께서 무슨 일로...?"
"나도 모르겠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