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23화 (21/318)

18.

운현궁 밖에서는 수 십 명의 늙고, 또는 젊은 유생들이 성균관의 용도 변경과 이번에

시행하는 개혁안에 항의하는 연좌 농성을 하고 있었는데, 벌써 여러 날이 지났다.

"썩어빠진 위인들 같으니...."

아재당에서 김영훈과 함께 점심을 먹고 차를 나눠 마시던 한상덕이 밖에서 들리는

고함소리와 곡(哭)소리에 신경이 쓰이는지 이렇게 말을 한다.

"아직도 해산을 하지 않은 모양이군..."

김영훈도 이렇게 화답(和答) 하는데,

"그렇습니다. 사령관님. 저들을 그냥 저대로 놔두시렵니까?"

한상덕은 농성하는 무리들을 강제로라도 해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모양이다.

"그냥 두지 않으면...?"

"해산을 시켜야지요. 경무청장 이경하 영감을 부를까요?"

요즘 경무청장 이경하는 낙동바람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맹활약을 하고 있었으니,

특히 부패한 관리들이나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려는 수구(守舊) 사대부들에게는 마치

지옥의 판관과 같은 이름으로 통했다.

도성(都城) 안의 백성들은 이경하와 경무청 포졸들의 모습만 보아도,

"오늘은 또 어디에서 일진광풍(一陣狂風)이 몰아칠 것인가..."

하며, 촉각을 곤두세우기에 이르렀다.

그렇지 않아도 경무청의 조직 개편으로 분주하기 이를 데 없는데, 신화폐의 유통과

그에 따른 정국 불안 요인의 제거라는 특별한 임무에 불법 물물교환(物物交換)의

근절(根絶)이라는 새로운 과제까지 주어졌으니 이경하도 정신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김영훈은 유생들의 연좌농성을 강제로 해산시키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한상덕의 거듭해서 경무청장 이경하를 부를 것을 청하자,

"놔두세요. 어차피 한 바탕 치러야 할 홍역(紅疫)이니..., 새로 생기는 4년제 성균관

대학의 우선 입학을 보장한다면 저들도 쉽게 뜻을 거둘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한상덕은 그런 김영훈의 뜻이 심히 못마땅한지 다시 말한다.

"그러나...저대로 두면 저들의 기고만장(氣高萬丈)함이 하늘을 찌를 것입니다. 또한

앞으로 할 일을 위해서라도 저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앞으로의 할 일이란 춘삼월이 되면 시행할 생각인 만동묘(萬東廟)의 철폐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조정의 실권을 쥐고 있으면서, 조선을 개혁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김영훈은 그동안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서원(書院)의 철폐를

고려하고 있었으니,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순서라고 할 수 있었다.

"뜨거운 맛은 그때 보여줘도 됩니다. 그나저나 다른 일들은 순조롭게 진행되는지

모르겠군....?"

"다른 일이라면...? 무슨...?"

"아, 거 있잖아요. 이번에 시행하는 개혁안들... 사범학교와 의학교, 또 그 뭐시냐...

광혜원인지 하는 의료원 말이에요. 그리고 신화폐의 유통 문제도."

김영훈이 이렇게 말하자 그제서야 알아들은 한상덕이,

"의외로 다른 일들의 진행은 순조롭습니다. 한글을 실용화하는 방안에 대하여 유림의

극렬한 반대를 예상했으나, 기호유림(畿湖儒林)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고,

영호남유림(嶺湖南儒林)에서만 간간히 반대 상소를 올리고 있는데 그 논조도 초반의

극렬했던 논조와는 달리 많이 부드러워졌다고 합니다. 다만..."

"다만, 무엇이오?"

한상덕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이내 말을 한다.

"다만, 주상전하의 교육조서에 담긴 남녀의 차이와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는다는

대목을 문제삼은 인사들이 많다고 합니다."

"흐-음... 어리석은 위인들 같으니..."

김영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하자 한상덕이 다시 말한다.

"솔직히 기호유림의 반발이 없는 것이 약간은 의외입니다. 아마도 기호유림의 거두인

화서 이항로 대감이 경연관(經筵官)으로 있으면서 장현덕 추밀원장에게 단단히

영향을 받은 모양입니다."

"그럴 듯 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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