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21화 (19/318)

16.

농림부라고 새해가 되어서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난 갑자년에 농림부와 농림도감이 새로 생기고 어느 정도의 성과를 보았다고 해서

만족할 수는 없었다. 해가 바뀐 지금부터가 농림부의 본 실력을 보일 때였다. 그리고

새봄이 되어 농민들에게 보급할 각종 씨앗과 농사에 관련된 책, 농기구 등의 보완이

시급하였다.

또 한 가지의 일이 농림부에게 주어졌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가로수(街路樹)와

대규모 조림(造林)의 필요성이었다.

천군이 등장하고 건교부에서 주관한 도로망 확충사업이 어느 정도 실효를 거두자

그에 따라 증가한 것이 바로 행인(行人)과 우마(牛馬車) 이동의 증가였다. 행인과

우마차(牛馬車)의 통행량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에 따라서 증가하기 시작한 것이

다름 아닌 먼지였다.

아직 겨울이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지난 갑자년 가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먼지였지만 그냥 놔둔다면 문제가 심각해질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따로 농림대신 김인호는 건교대신 김정호와 상의하여 도성 안 간선도로와 각 지방의

도로 변의 가로수(街路樹)를 정비하기로 결정하고 실행하였으니 "백도혁신(百度革新)

을 위하여 백폐(百弊)를 삼제(芟除)하는 건"의 제49조에 도로 좌우에 수목을 식양(

植養)함을 권하고 매호(每戶)의 이내(籬內)와 공지(空地)에 과목(果木)이며 상목(

桑木)을 각별히 재식(裁植)할 사(事)하라고 규정하였다.

바로 '도로 좌우에 수목을 식양함'이라고 권한 것은 바로 가로수를 심을

것을 지시한 것이다. 그리고 도로를 침범하고 있는 가로미관(街路美觀)을 크게

헤치고 있는 가가(假家)(*5)를 정비하고, 가로미관(街路美觀)을 제고(提高)함과

아울러 가로수리비 예산도 책정할 것을 결정하였다.

조선의 조림사업은 개국 초부터 엄격하게 시행되었던 일종의 국책사업이었다.

무분별한 벌채의 억제와 삼양(森養)에 노력하는 한편 적극적인 식재조림(植栽造林)도

실시하게 되었다. 태종 때에는 남산과 태평관산지(太平館山地)에 100만여 그루를

식목하였고, 세종 때에 와서는 연해에 송림재식하고 서울 사산(四山) 소림(疏林)에

잣나무와 상수리나무를 파종 조림케 하였다. 또 세종 29년(1447)에는 서울 사산의

송충 피해처에 밤을 심게 한 일도 있었다. 세조 때에는 칠수(漆樹)를 키우게 하고,

성종 때에는 제주에 비자나무와 오동나무를 식재케 하였다. 최대규모의 조림사업은

정조 13년(1789)에서 순조 2년(1802)에 이르는 14년간에 파종 식재한 것인데 소나무

묘목 550여만 그루, 송자(松子) 75석여, 잣 93석여, 상수리종자 1,700석여, 가래나무

84석, 도토리 19석, 단풍나무씨 2두(斗), 밤 7석, 호두 6두 등에 이르렀다. 정조

때에는 이 외에도 많은 식림(植林)과 배, 자두, 살구 등의 과수재식(果樹栽植)도

실시하였고 송충 구제에도 힘을 썼다. 이 당시의 양묘(養苗)와 조림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있었음은『산림경제(山林經濟)』의 종수편(種樹篇)에서 살필 수 있다.-서울

육백년사에서 인용.

이와 같이 국가적으로 중요시 여기던 조림이었으나 좀더 체계적인 조림과 임업

관리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농림부에서는 조선 최초의 임산시험소(林産試驗所)(후에

임업시험소)도 설치하니 조림사업은 더욱 빛을 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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