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내무부와 국방부도 대대적인 개편작업에 들어갔다.
먼저 내무부는 한양 도성에만 설치하였던 좌우포도청을 하나로 합쳐 경무청(警務廳)
으로 만들고, 각 지방 감영에 설치되었던 토포사(討捕使)를 개편하여 지방 경무청의
설치를 의무화하였고, 한양의 경무청이 현재의 경찰청과 같이 각 지방 경무청을 지휘
감독하게 하였다. 그래서 각 지방관아의 군졸들의 일부와 과거에 군대에 있었던
인원들을 충원하여 교육시키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렇게 지방 경무청까지의 확충이
모두 완료되게 된다면 단일 행정 조직으로는 조선 최대의 조직이 될 것이니 만큼
내무대신 김병학과 초대 경무청장으로 임명된 이경하는 머리가 아플 정도로 바쁘게
돌아다녀야 했다. 또한 내무대신 김병학은 기존 조선의 정 1품과 종
9품의 18품계의 관등(官等)을 정 종의 구분 없는 단일 품계로 바꾸었다.
이런 결과로 약간의 혼란을 피할 수 없었기에 그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전임 우포장 이장렴도 바쁘기는 마찬가지였다.
좌, 우포청이 경무청으로 바뀌고 나서, 내무부에서는 새로이 신설한 소방청의
초대청장으로 이장렴을 임명하였는데, 대대로 소방기구가 경찰기구-구 포도청-의
하부 기관이었다가 이렇게 독립된 소방기구로 발족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으니,
새로운 소방청의 편재와 여러 가지 소방기구의 개발 등으로 분주하게 뛰어야 했다.
당시 조선은 목조건물(木造建物)이 주를 이루던 때이므로, 개국 초부터 화재에
대해서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리하여 금화령(禁火令)과 금화조건(禁火條件)
을 제정하면서 점차로 소방체제를 확립해 가면서 화재의 대비책을 세워 나간다. 이에
따라서 소방관청(消防官廳)도 여러 가지로 개칭하였다. 또, 수성금화도감(
修城禁火都監)을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로 개칭하면서 불을 끄는 멸화군(滅火軍)도
설치하였다. 그러나 소방기구가 독립된 기관이 아닌 포도청의 하부기관으로 존재하고
있던 때문이지 불이 난 곳으로 출동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때로는 신고를 받고
출동하여도 이미 불은 꺼진 경우인 때가 태반이었다.
이런 전차로 불이 난 곳을 조기에 발견하여 조기에 진화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었으나 새로운 소방청이 설치됨으로 해서 그런 어려움을 어느 정도는
극복하게 되었다.
이장렴은 한상덕이 제공한 현대 한국의 소방기구의 자료를 토대로 새로운 소방청의
신설에 매진하여, 우선 각 동리에 이장이나 통장이 불이 날 경우, 먼저 동네 주민을
동원하여 소화를 담당할 수 있도록 응급동원체계를 만들었으며, 기존 멸화군의 유급(
有給) 인원이 겨우 50명에 불과했던 것을 500명까지 충원할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방에까지 소방청의 신설을 위해 뛰어다니고 있었으므로 집에 들어가 마누라
궁둥이 두들길 새도 없었다.
국방부에서는 각 고을 관아와 감영의 군졸들이 빠져나간 공백을 메우기 위해
골머리를 싸매고 있었으니, 비록 일부 병력만 지방 경무청으로 소속을 이관한다고는
하나, 전력의 공백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방군의 전력이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거의 있으나 마나한 수준이었다고 해도 그 영향은 막대했다. 하여 국방대신
김병국이 당시 사대부로는 드물게 호포제(戶布制)의 전면실시나, 전면적인 징병제(
徵兵制)의 실시를 검토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즈음이었다.
양반 사대부의 반발과 저항을 의식하여 호포제나 징병제의 실시는 뒤로 미루어
졌지만 언제고 그 문제는 수면위로 부상하여 뜨거운 감자가 될 것이 분명했다.
국방대신 김병국은 일단 유사시 경무청에 빼앗긴 군졸들을 동원하여 군대화 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지만, 호포제와 징병제의 미련을 버리기가 아쉬웠다. 한 가지
다행한 소식은 어린 임금이 신년하례식에서 내린 교육입국조서로 인해 정식
무관학교와 남양만에 설립한 해군학교의 설치 근거를 마련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