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세월은 인간사(人間事)가 어떻게 돌아가든 신경 쓰지 않고 지나간다.
언놈이 죽어 나자빠지든, 언놈 아들이 왕이 되든, 신경 쓰지 않는다. 다만 무심하게
아침에 해뜨면 저녁에 그 해가 지듯이 그렇게 지나갈 뿐이었다.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던 갑자년이 지나가고 을축년(乙丑年)이 시작된지도 벌써
이레가 지났다.
지난 정초(正初)에 있었던 신년하례식(新年賀禮式)에서 어린 임금은 섭정공
김영훈에게 이른바 교육입국조서(敎育立國詔書)(*1)라는 것을 내렸는데, 그것은 바로
지난 갑자년 풍백함의 진수식 때 섭정공 김영훈과 몇 몇 대신들이 은밀하게 어린
임금에게 주청(奏請)한 것으로 그 내용이 가히 충격적이었다.
[세계(世界)의 형세(形勢)를 보면 부강(富强)하고 독립(獨立)하여 잘 사는 모든
나라는, 다 백성들의 지식(知識)이 밝기 때문이다.
이 지식을 밝히는 것은 교육(敎育)으로 된 것이니, 교육은 실로 나라를 보존(保存)
하는 근본(根本)이 된다.
교육은 그 길이 있는 것이니, 헛된 것과 실용(實用)적인 것을 먼저 구별하여야 한다.
단순히 옛날 책을 읽고 글자를 쓰는 것과 같이 옛 사람의 찌꺼기나 배우고 현재(現在)
의 세상에 어두운 자는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소용이 없다.
이제 과인(寡人)은 조정의 섭정공에게 명을 내려 널리 학교(學校)를 세우고, 인재(
人材)를 길러 새로운 백성들의 학식(學識)으로써, 국가 중흥(中興)의 큰공(功)을
세우고자 하니, 여러 백성들은 나라를 위하는 마음으로, 덕(德)과 건강(健康)과 지식(
知識)을 기를지어다.
왕실(王室)의 안녕(安寧)이 백성들의 교육에 있고, 나라의 부강(富强)도
백성들의 교육에 있을지니, 모든 백성들은 남녀의 차이와 신분의 귀천에
관계없이 모두가 평등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임금의 교육입국조서는 언문(言文), 한문(漢文), 국한문병용(國漢文倂用)의 세
가지 형태로 조선 팔도에 동시에 선포되었으니, 미리 각 고을 관아에 조서를 내리고
새해 벽두에 관아 앞에 방을 붙이는 것으로 선포되었다. 특히 맨 마지막의 남녀의
차이와 신분의 귀천에 관계없이 모든
백성들에게 교육의 문호를 개방한다는 말은 충격의 절정이었다.
이어진 섭정공 김영훈의 후속 조치는 더욱 충격적이었으니 그야말로 조야(朝野)가 그
때문에 들끓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섭정공 김영훈은 어린 임금의 임어(臨御) 아래 열린 신년 중신회의에서 어린 임금의
교서를 이행할 후속 조치와 앞으로의 개혁을 실행하기 위한 실질적인 실천방안으로, "
백도혁신(百度革新)을 위하여 백폐(百弊)를 삼제(芟除)하는 건"(*2)이라는 108개
항목의 개혁안(改革案)을 공포하여 조정의 12부와 조선 팔도의 각 읍과 각 관아에
시달하였는데 그 첫 번 째 항에 "언문이라는 저급(低級)한 명칭을 버리고 한글이라는
아름다운 우리말로 대신한다."라고 규정하였으니, 이로써 언문이라는 명칭을 쓰는
자는
지위고하(地位高下)를 막론하고 엄벌에 처해지게 되었다. 또한 언문이라는 명칭은
이때부터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주시경 선생한테는 정말
미안하다. 작가가 죽을죄를 졌다.^^
또한 김영훈은 최초의 현대식 교육법규라고 할 수 있는 한성사범학교 관제를
공포하였다.
그리하여 최초의 현대적 개념의 2년제 사범학교가 한양에 세워지게 되니, 이로부터
조선의 신학문 교육이 출발하게 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한 조선 팔도에는
한성사범 학교를 졸업한 여러 신진 인사들이 세우는 각종 신식학교가 세워지게 되니
관학(官學)에 대비되는 사학(私學)의 출발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기존의
문과, 무과 시험제도를 철폐하고, 성균관(成均館)을 폐지하여 문과(文科)와 이과(
理科)의 양대 학부과정의 4년제 대학교를 설립하고, 조선군의 무관을 양성할
목적으로 역시 4년제의 사관학교가 설립되게 된다.
이것은 성균관 대학과 앞으로 새로 생기게될 4년제 대학을 나온 자에게 조정에
관리로 임용될 기회를 제공하고 사관학교의 졸업생으로 조선군의 근간을 이루려는
생각이 나타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