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지금 경훈각 1층 입구에 있는 한 커다란 방에서는 어린 임금을 비롯하여 경연관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와 역시 경연관이자 추밀원장인 장현덕이 커다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둘러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위사들과 대전 내관들,
상궁나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는데, 오늘 이렇게 어린 임금이 친히 경훈각에 납신
것은 그동안 장현덕에게 말로만 듣던 증기터빈(蒸氣攄彬turbine)의 원리에 대한
공부를 하기 위해서 갑자기 경훈각으로 행차하게 된 것이다.
커다란 탁자에는 하얀 면포가 씌워져 있었고 그 위에 우리가 과학 실험실에서
봤음직한 물건들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천군이 한국에서
가져온 것으로 알콜화로(謁骨火爐알콜램프)와 비거(比巨beaker) 그리고 풍차(風車)와
비슷하게 생긴 작은 날개 바퀴였다.
알콜화로(謁骨火爐) 위에는 가는 철망이 세워져 있고 그 위에 비거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비거에는 얇은 관(管)같은 것이 날개 바퀴 앞까지 이어져 있었다. 어린
임금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장현덕이 말한다.
"이것이 제가 주상전하께 말씀드렸던 증기터빈(蒸氣攄彬)의 원리를 이해하기 위한
도구들이옵니다."
어린 임금은 장현덕의 말을 하나라도 놓칠새라 귀를 쫑긋 새우고 듣고 있었고,
그것은 요즘 신문물(新文物)에 매료된 이항로도 마찬가지였다.
이항로는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과 함께 율곡(栗谷) 이이(李珥) 이기일원론(
理氣一元論)의 계승자이자 당대 유림(儒林)의 양대산맥이랄 수 있는 성리학자(
性理學者)라고 할 수 있었다.
이항로와 기정진은 율곡의 이기론을 계승한 점에서는 같은 기호학파라고
할 수 있었으나, 서로 사는 곳의 풍토가 다른 관계로 이항로가 관직에 등용되는 일도
많았고, 섭정공 김영훈의 집권 후에 다시 등용되었던 반면에 기정진은 독자적인 논리(
論理)와 남인(南人)의 풍모를 닮아 조정에 출사하지도 않고 철저하게 양이척사(
攘夷斥邪)의 격렬한 상소(上訴)만 올리고 있는 것이 다르다 할 수 있었다. 또한
기정진은 어린 임금이 등극하고
, 김영훈이 섭정공의 자리에 올라 집권하게 되자 그에 따른 격렬한 반대 상소를 올린
것으로 이미 유명했다.
이러한 차이로 인하여 이항로와 기정진은 사사건건 대립하고 으르렁거리는 앙숙과
같았으니, 이미 이항로와 기정진은 율곡의 이기론의 해석 차이로 인하여 한 차례
격렬한 논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항로가 김영훈의 집권 후 조정에 다시
출사를 하자 기정진은 양이(洋夷)의 개라고 이항로를 매도하였고, 이항로는
이항로대로 세상물정 모르는 시골 촌구석 늙은이로 기정진을 폄하(貶下)하였다.
이항로가 이렇게 천군이 보여주는 신문물에 매료된 측면에는 그런 기정진에 대한
반감도 어느 정도는 작용하였는지도 모른다.
"이제 제가 이 알콜화로에 불을 당기겠습니다."
하며 손에든 지포발화기(至砲發火器zippo lighter)로 불을 당긴다.
지금 장현덕이 사용하는 지포발화기는 연희궁에 지어진 신기도감에서 생산한
발화기로 20세기에 유행하는 지포라이터를 모델로 하여 만들어진 것인데 아직
스테인레스 스틸의 개발이 안된 관계로, 조선의 이름난 청동(靑銅) 유기(鍮器)를
이용하여 만들었는데, 반들반들한 청동의 발화기는 손바닥에 착 달라붙는 작은
크기와 네모나면서도 범상치 모양새로 앞으로
조선 백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을 것을 모든 신기도감 장인(匠人)들이
자신하고 있었다. 참고로 지보발화기에 사용되는 휘발유는 왜국과의 교역으로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으나 아직까지 그 양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리고 투명한 유리관인
비거도 해주만에 세워지고 있는 제철소의 유리공장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장현덕이 불을 당기자 비거에 담긴 물이 조금씩 끓기 시작하고 장현덕의
설명이 이어진다.
"화서 대감! 이렇게 물이 끓고 있사온데, 물이 끓으면 무엇이 발생하게 되오이까?"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던 이항로는 장현덕의 물음에 깜짝 놀라며,
"그게 무슨 말씀이오? 무엇이 발생하다니...?"
"대감께서도 물이 끓으면 수증기(水蒸氣)가 발생한다는 것을 알고 계시겠지요?"
장혀덕의 계속되는 질문에 이항로의 얼굴에는 엷은 노기(怒氣)가 서리고, 노한
이항로가 장현덕에게 한 마디 하려는데 어린 임금이,
"추밀원장 대감, 그것을 누가 모르고 있나요? 하시고자 하는 얘기를 어서 하세요."
하며 말한다.
어린 임금이 이렇게 말하자 장현덕이,
"그렇사옵니다. 전하. 여기를 보시옵소서. 물이 끓으면서 발생한 수증기가 이 관을
타고 앞에 있는 날개 바퀴에 가게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를 잘 보시옵소서."
이렇게 장현덕이 말하는 순간, 달궈진 비거에서 발생한 수증기가 관을 타고 가더니
날개 바퀴 앞에서 분출되면서 그 날개 바퀴를 돌리기 시작한다.
어린 임금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그런 신기(新奇) 한 현상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데, 장현덕의 말이 이어진다.
"모두들 보셨겠지만 이것이 바로 증기터빈의 원리입니다. 이렇게 수증기를 발생하게
하고 그 발생한 힘을 이용하여 물체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바로 증기터빈의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현덕의 말이 끝나자 무안한 얼굴의 이항로가 장현덕에게 묻는다.
"그럼, 며칠 후에 남양만 조선소에서 진수(進水) 한다는 증기선(蒸氣船)에 저런
증기터빈의 원리가 이용된다는 말이오이까?"
"그렇습니다. 화서 대감. 지금 건조되어 진수하게 될 조선 최초의 증기선은 이러한
원리로 제작된 증기터빈을 배의 기관(機關)으로 채용하였습니다. 이미 건조가
완료되어 주상전하의 임어(臨御) 아래 거행될 진수식만 남겨 놓은 상태이니 그때가
되면 그 위용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는 장현덕의 얼굴에는 자랑스러움에서 드러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이렇게 장현덕이 좌중을 둘러보는데, 장현덕과 눈이 마주친 상궁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어린 임금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고 있는 지밀상궁(至密尙宮) 안(安)
상궁이었다.
장현덕은 안상궁과 눈이 마주치자 빙그레 웃음을 지어 보냈고, 그런 장연덕의 미소를
받은 안상궁의 얼굴은 발그레 붉어져갔다.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와 여태 남자라곤 모르고 살아온 안상궁이었으나,
천군이 조선에 오고 장현덕이 대궐에서 살게 되자 자연스럽게 장현덕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겨났으니 나이 스물 여섯이 되도록 남자의 손목도 만져 보지 못한
안상궁으로서는 가히 파격적인 변화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이들의 앞날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