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김기현의 설명이 끝나자 김영훈이 그런 김기현을 칭찬한다.
"고생하시었오이다. 재경대신 대감."
김영훈이 이렇게 덕담(德談)을 건네며 김기현을 치하하자 여기저기에서 김기현에게
덕담을 건네느라 정신이 없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박규수가 김기현에게,
"그런데 재경대신 대감. 내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어요."
"말씀하시지요. 환재 대감."
박규수는 그런 김기현을 바라보며,
"이번에 발행하는 신 화폐의 통화 관리와 발행을 전담하는 조선은행을 설립한다고
들었습니다...그런데 그곳의 책임자로 엄기영 차관(次官)을 내정했다고 하던데 그
말이 참이오이까?"
박규수로서는 상공부의 차관을 지내고 있는 천군 출신의 엄기영 차관을 뺏기는 것이
못내 아쉬운 모양이다.
엄기영은 KDI 출신의 경제학자로서 재경대신 김기현이 아끼는 후배이다. 비록
출신지나 학교는 달랐지만 어려운 나라 경제를 걱정하고 밤을 세워 토론하기
일쑤였던 말하자면 단짝과 같은 사이였다.
처음 원정단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 자신도 지원하고 싶었으나 혼자서는 지원할
엄두가 나지 않다가 김기현이 지원하겠다고 하자 선뜻 따라서 지원할 정도로 둘
사이는 각별했다.
조선에 온 후로 김기현이 재경대신으로 출사를 하게 되었고 천군(天君) 출신 중에
손꼽히는 경제통인 엄기영도 당연히 출사에 대한 권유가 들어오게 된다. 그러나
연치가 젊은 관계로 대신의 반열에는 오르지 못하고 상공대신 박규수 밑에 차관으로
들어가 여러 가지 상공업 정책에 대한 조언을 하는 것으로 임무가 결정되었다.
박규수의 밑에 들어간 엄기영은 열성적으로 상공부의 일을 돌보았다. 그리고
박규수를 도와 몇 몇 상공부의 신진 관료들을 교육시키는데 앞장섰던 말하자면
상공부에서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었다.
또한 상공대신 박규수가 아무리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손자이고,
당시 조선에서는 손꼽히는 개화한 관료라고 하더라도 기존 조선인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으니 박규수가 엄기영에게 배운 것이 참으로 많았다.
그런 엄기영에게 있어 시장 경제의 활성화와 새로운 통화의 발행은 하나의 기회로
다가왔다. 원래 한국에 있을 때부터 한국은행에 파견 나가서 금융 통화 위원회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었기에 누구보다도 적임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조선 최초의
은행인 조선은행(朝鮮銀行)의 초대 행장(行長)으로 내정되게 되었으니 박규수가
아쉬울 만도 했다.
이런 엄기영이다 보니 박규수로서는 여간 아쉬운게 아니었다.
"하하하!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환재 대감. 지금 조선은행의 책임자로 그만한
인물이 없습니다. 대감께서 양해해 주시지요."
이렇게 두 대신이 얘기하고 있는데 김병학이 김기현에게 묻는다.
"그럼, 재경대신 대감께서는 신 화폐의 유통을 언제부터 하실 생각이시오?"
그런 김병학의 의문은 내무대신으로서 당연한 의문이었으니, 아무래도 신 화폐가
유통된다면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일이 발생할 것을 염려하는 걱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김병학의 염려를 눈치챈 김기현이,
"대감의 염려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약간의 염려가 없는 것은
아니지요. 해서 몇 달 남지 않는 금년은 이대로 놔두고 신 화폐와 조선은행의 홍보에
주력할 생각입니다. 조선 팔도 방방곡곡의 백성들에게 이를 알리자면 약간의 시간이
있어야겠지요. 그리고 내년 초에 주상전하의 어명을 받들어 시행할 생각입니다.
무엇보다도 팔도의 감영(監營)이 위치한 고을에는 조선은행의 지점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도 있지요."
어차피 바로 시행하기에는 모든 준비가 완료되지 않았다. 우선 먼저 충분한 홍보가
절대 부족했다. 대정원 요원들이 전국을 돌며 여론을 조성했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완전하게 홍보가 된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은행이라는 것에 대한 인식이 조선의
백성들에게는 없었다. 하루하루 먹고살기에도 빠듯한 조선의 백성들에게는 남는 돈을
은행에 맡겨둔다는 것은 배부른 양반들이나 하는 짓거리로 치부되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