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首 영웅서거(英雄逝去)
-마두 나타나다
마침내 봉신방(封神榜)이 모습을 드러내다
쿠쿠쿠쿠…….
거대한 굉음이 산 전체를 뒤흔드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한순간이었고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튀어나왔다.
놀랍게도 그들의 시야를 가로막고 있던 그 거대한 암벽이 찰나간에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변의 지형이 크게 일렁이는 것 같더니 한순간에 변해 버리고 말았다. 저 멀리 산상(山上)의 눈 덮인 고봉(高峰)을 제외하고는 주변의 산봉이 모조리 사라져 버리고 그들이 있던 주위를 온통 거대한 원시림이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는 눈앞이 펑, 뚫린 정경.
분명히 눈앞도 원시림이지만 뭔가 달랐다. 원시림은 원시림이되, 어딘지 모르게 기이한 빛이 흐르고 있는 그런 숲, 숲으로는 길 한 가닥이 어른거리며 보인다. 그리고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아서 시야를 가로막던 그 절벽 대신 그들의 앞에는 높이 오 장가량의 바위가 우뚝 솟아 있었다.
그것은 그냥 바위가 아니었다.
강렬한, 정말 눈이 부시게 강렬한 인공이 가미된 바위였다.
<봉신방(封神榜)!>
거기에 새겨진 커다란 세 글자는 뭇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기에 족했다. 가슴이 뛰는 정도가 아니라 코가 벌름거리고 벌떡거리는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봉신방.
신비에 감춰져 있던 그 전설의 봉신방이 마침내 사람들의 눈앞에 드러난 것이다.
높이 오 장.
너비 일 장가웃.
산에 있던 바위를 그대로 깎아 만든 듯했는데 대체 어떻게 가공한 것인지 장방형(長方形: 직사각형)의 몸체는 유리처럼 반들거린다.
봉신방이라는 커다란 세 글자가 정중앙에 세로로 새겨져 있고 그 옆으로 작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살아서 신이 되고자 서원(誓願)한 사람 열이 있어, 여기에 그 흔적을 남기니 그 이름을 봉신방이라 하다. 후인이 있어 이것을 발견한다면 우리의 뒤를 따라 선계(仙界)에 들 수 있으리라.>
"마, 마침내 찾았군!"
만박노유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그 음성은 숨길 수 없도록 떨리고 있었다.
"어, 어떻게?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남해용왕이 곁으로 와서 물었다.
소리도 없이 십여 명의 노인들이 만박노유의 곁에 나타났다. 그들의 얼굴은 대춧빛이었지만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어 그들이야말로 나타나지 않았던 용화회의 반도들, 만박노유를 따랐던 사람들임을 알 수 있었다.
"저 길. 봉신방의 뒤로 난 저 원시림 사이로 보이는 길로 가면 됩니까?"
남해용왕의 말에 만박노유가 머리를 저었다.
"그렇게 쉬울 리가 있나? 이것은 대자연진세의 결계를 해제한 것뿐이야. 만약 저 길로 들어간다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될 게야. 진세를 해제해야만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지!"
"그럼 어떻게?"
그의 눈이 만박노유의 손에 들린 봉신지약을 향했다.
만박노유는 봉신지약을 들어 보이면서 말하였다.
"봉신지약은 말 그대로 열쇠지. 대자연진세를 여는……."
말과 함께 그는 봉신지약을 반 장가량 앞에 우뚝 서 있는 봉신방을 향해 밀어냈다.
소리도 없이 날아간 봉신지약은 스스릉 소리와 함께 봉신방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제 보니 봉신방의 하단에는 기묘한 생김의 홈이 있는데 그 홈으로 봉신지약이 들어간 것이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무런 변화가 일지 않았던 것이다.
감천형조차도 긴장된 표정으로 우뚝한 봉신방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순간.
쿠쿠쿠…….
진동이 다시 일며 봉신방이 아래로 꺼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것과 함께 앞쪽 원시림에서 기이한 빛이 소용돌이치면서 좀 전의 길이 명확하게 그 형체를 드러냈다. 원시림은 그대로이지만 원시림이 갈라지기라도 한 듯이…… 그 길에는 상화로운 빛이 가득하여 보기만 해도 신비롭기 그지없다. 분명히 어둡지 아니하고 밝은데도 빛무리만이 보일 뿐 원시림 저쪽으로 뻗은 길이 어디로 통하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좋아, 좋아……. 마침내 나타났군!"
만박노유가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모든 사람들의 가슴이 떨렸다.
만박노유가 한 걸음을 내딛었다.
"잠깐!"
날카로운 음성이 그 걸음을 막았다.
만박노유가 고개를 돌렸다.
개왕이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혼자 갈 셈인가?"
"……."
만박노유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사람들의 눈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그와 손을 잡은 사람들의 눈도 그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해용왕, 북해빙왕, 천축마왕, 그리고 독왕과 심지어는 오랜 세월을 그와 같이해 온 용화회의 고수들마저.
만에 하나 자칫 욕심을 부린다면 모두가 등을 돌릴런지도 몰랐다.
제아무리 그일지라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가고 싶은 자가 누군가?"
"……."
선뜻 나서서 말하는 사람은 없다.
"아무도 가고 싶지 않다는 겐가?"
그의 말에 개왕이 입을 열었다.
"차라리 남고 싶은 사람이 누군가를 물어보는 것이 옳지 않겠나?"
"당신도 가고 싶은가?"
냉소가 개왕의 얼굴에 떠올라 왔다.
"무슨 답이 듣고 싶은가?"
"평생을 두고 염원해 오던 일이 이루어지기 직전. 굳이 다툴 필요는 없겠지.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사람이 다 간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 가고 싶은 자가 누군지 나서라."
그가 주위를 둘러보자 멈칫거리던 사람들이 하나둘 나서기 시작했다.
'사숙! 대체 어디에 계시는 겁니까!'
감천형은 초조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감 맹주는 어찌할 작정이오?"
황엽이 옆에서 물었다.
"저는……."
감천형이 난감한 빛으로 채 말을 끝내지 않았을 때였다.
갑자기 빛의 통로 안쪽에서 한 사람이 불쑥 뛰쳐나오더니 다짜고짜 만박노유를 공격했다.
등을 돌리고 있던 만박노유는 대경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하니 안쪽에서 누가 나와서 그를 공격할 것을 제아무리 그라고 할지라도 어찌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인가.
"어떤 노옴……!"
부르짖던 그는 한 생각에 얼굴이 흙빛이 되어 황급히 뒤로 몸을 꺾으며 후퇴했다. 하나 그를 공격한 사람의 무공은 기고하여 피해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가 몸을 꺾으면서 후퇴한 것은 순간적이었지만 적의 공격은 이미 그의 코앞에 이르고 있어 의형수형(意形隨形)의 경지조차 넘어선 것임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손이 움직이기 전에 이미 기세가 사람을 공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쾅!
폭음이 터졌다.
"크윽……."
만박노유가 신음을 흘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철퇴가 가슴을 친 듯한 충격.
그가 버티지 못하고 뒤로 서너 걸음이나 물러났을 때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용화회의 회원이 나타난 사람을 공격했다.
"웬 놈이 감히!"
나이가 팔십이나 된 사람이다. 평생을 고련한 그의 무공이 어찌 평범할 것인가?
인영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과는 전혀 달랐다. 나타난 인영은 빙글 몸을 돌리는 가운데 이미 그의 공세를 해소해 내고는 지난날 번천객(륙天客)이라 불렸던 그의 면전에 도달하여 일권을 그의 가슴에다 내질렀다.
휴-웅!
기이한 소리가 이는 가운데.
"학……."
용화회의 회원은 두 눈을 부릅뜬 가운데 입을 딱 벌렸다.
헛바람과 함께 피거품이 섞인 핏줄기가 입에서 쏟아져 나오면서 그는 허물어지듯이 그 자리에 무너지고 말았다.
단 일 격에 천하의 고수 한 사람을 격살시킨 그 인영은 조금도 쉬지 않고 그를 친 탄력으로 다시금 만박노유에게로 쏘아져 가고 있었다. 가공할 위력이었다.
"네놈이 누구냐!"
만박노유가 고함을 치다가 상대의 기세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는 어깨를 흔들었다. 윙! 강력한 회오리가 일면서 그의 신형이 강기막에 휩싸였다.
팡! 파파팡!!
적의 공격을 호신강기로 막아내면서 그는 잇달아 후퇴했고 적은 기세를 늦추지 않고 계속해서 그를 공격해 갔다.
가히 전광석화(電光石火)!
어찌 그 빠름을 형용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인가.
만박노유가 채 대응도 하지 못하고 격살을 당할 것 같은 순간에 한 사람이 소리도 없이 나타난 인영의 뒤로 날아들었다.
검은 노을빛 광채가 강기를 이루며 인영을 덮쳤다.
독강이다.
오직 독왕만이 이루었다는 독강.
위기의 순간에 나타난 인영을 공격한 사람은 바로 묘강독왕이었다. 그는 그가 평생을 두고 고련(苦練)한 독강을 뽑아내어 인영을 덮쳐 갔다. 만박노유를 구할 수 있음을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독강은 단순한 독기를 뿜는 독공(毒功)과는 차원이 틀린 무공이다. 독의 순수한 정기(精氣)를 수련하여 정련(精練)한 것과 같으니 가히 독중지독(毒中之毒)! 철판이라고 해도 그대로 녹아내리는 가공할 위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독강이라 일반 독공은 물론, 보통의 강기류와는 그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적은 만박노유를 포기하고는 어깨를 흔들 하는 사이에 이미 그의 독강에게로 덮쳐 오고 있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준비된 상태에서 덮쳐 갔다고 오해할 만하도록 그의 역공세는 믿기 힘들 만큼 빨랐다.
팡! 파파파파…….
인영은 양손을 연달아 쳐내면서 독왕의 공세를 풀어냈다.
묵이랄까? 해면 속에 빠진 사람이 그것을 양손으로 헤쳐 내면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모습이었고 그 움직임은 실제로 뭐라고 형용키 어렵도록 신속무비하였다.
그리고 찰나간에 그는 대경하여 후퇴하려는 독왕의 가슴에다 회심의 일격을 가했다.
붉은빛의 서기를 띤 그것은 사납게 독왕의 가슴을 꿰뚫었다.
"크악!"
독왕이 가슴을 움켜잡고서 뒤로 튕겨졌다.
거의 찰나간에 십여 장을 튕겨져 나간 그는 믿기지 않는 눈으로 자신의 가슴을 움켜쥔 채로 신음을 흘렸다.
참고자 하나 참을 수 없는 고통이 그의 전신을 엄습한다.
독공이 파괴되면서 평생을 두고 수련했던 독기가 그의 전신으로 퍼져 나가니 어찌 고통스럽지 않을쏜가.
"네, 네놈이……."
땅을 짚은 손이 극통으로 덜덜 떨린다.
순식간에 두 사람을 날려보낸 가공할 존재.
그 인영은 그제서야 신형을 멈추고서 만박노유를 노려보았다.
사방에서 경악과 경탄의 음성이 들려왔다.
"저, 저럴 수가?"
"대체 저게 누구기에……."
"한효월……."
"사숙!"
나타난 사람을 알아본 감천형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홀연히 모습을 드러내어 단숨에 두 사람의 절세고수를 일패도지시킨 사람은 놀랍게도 한효월이었다.
그는 늠름하게 버티고 선 채로 별빛 같은 눈으로 사방을 쓸어보았다.
그의 체구는 감천형보다 호리했고 천축마왕보다 키가 작았다.
그러나 한효월이 보인 신위(神威)는 가히 하늘을 찌를 듯하여 장중 그 누구도 그 눈빛을 제대로 받아내기 힘들었다.
감천형을 힐끔 본 한효월은 미미한 웃음을 머금어 보였다.
"늦지는 않았지?"
그의 웃음은 언제나 보아도 눈이 부시다.
감천형은 남자를 보면서, 그로 인해서 목이 메일 수 있음을 가끔 경험한다. 바로 저 나이 어린 사숙 한효월을 보면서.
그는 뛰는 가슴을 감격으로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전혀…… 늦지 않았습니다."
"좋아."
한효월은 가볍게 고개를 주억거리곤 시선을 다시 만박노유에게로 돌렸다.
"처음 뵙는군요."
방금까지 죽이려 했다가 깍듯이 인사를 해오자 만박노유는 어이가 없지만 또한 가슴이 서늘해졌다.
한효월이 지금 보인 무위는 상상키조차 어려운 것이었다.
"네가…… 한효월인가?"
"그런 거 같군요."
말과 함께 한효월은 앞으로 나섰다.
만박노유를 향해.
살기가 다시금 크게 일었다.
순간, 좌우에서 마주 살기가 일어 그를 쏘아온다.
천축마왕, 북해빙왕, 그리고 남해용왕. 거기에 더해 다른 용화회원들까지 한 걸음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그들이 준비를 갖추는 것을 보자 한효월은 내심 탄식하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미 절호의 기회는 사라져 버린 것이다.
"왜 나를 죽이려 하나?"
"이 자리에서 굳이 그 대답을 해야 합니까?"
그 말에 만박노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필요없는 질문이군. 하지만 지금 죽을 수야 없지! 그 오랜 세월을 염원했던 일이 이렇게 눈앞에 있는데……. 하지만 네가
정말 한효월이라면 믿기 어려운 일이로군. 그처럼 강하다니? 어떻게 이처럼 강할 수가 있단 말인가? 설마 하니 네가 천하십성의
진전(眞傳)을 이었기라도 했다는 말이냐?"
그가 불신에 가득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효월을 모른다면 어불성설이다.
그렇기에 그가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고 해야 할 만박노유였다. 그런데 그런 한효월이 단숨에 독왕을
일패도지(一敗塗地) 땅바닥에 처박아 버리고 자신을 숨 쉴 틈도 없이 몰아붙였다.
그러한 무공은 절대로 현세(現世)에서는 볼 수 없었다.
오직, 천하십성에게서만 보였던 초월적인 무공.
그런데 그런 무공을 지닌 채로 한효월이 난데없이 진세 안에서 나타나자 그가 오해를 하는 것도 너무 당연했다.
"그렇게 보이시오? 만약 내가 천하십성이 남긴 것을 이었다면 어쩌시겠소?"
"그, 그럴 리는 없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어……."
만박노유는 머리가 떨어져 나가라고 흔들어댔다.
그사이에 감천형을 비롯하여 황엽, 개왕, 요동권왕과 고려검왕 등이 한효월을 중심으로 주변에 모여들었다.
대치 국면이 조성된 것이다.
한효월은 주위를 살펴보곤 암암리에 숨을 들이마시며 입을 열었다.
"대자연진세는 여기만 펼쳐진 게 아니오. 이 일대 백여 리 모두가 대자연진세의 범위 내에 들어 있소. 길만 안다면 이 외곽에서는 어디로든 출입이 가능하오."
비밀은 거기에 있었다.
마계가 열리고 그곳을 떠난 한효월은 공간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길이 바뀌고 수백 장 아래의 그 절곡이 돌연 산자락에 위치하게 된 것을 보고 경악해 마지않았다.
그렇게 그는 그 자리에서 대자연진세를 살펴보고는 마침내 이 자리에 당도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도 진세 내부에서 밖으로 빠져나오게 될 것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 말은?"
"나 또한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단 말이오."
"하하하…… 그렇다는 말이지?"
갑자기 만박노유가 크게 웃었다.
"그렇다면 네놈들을 모두 죽이고 안으로 들어가 보아야겠구나!"
"이미 늦었소. 모두를 죽이려면 내가 나타나기 전이라야 가능한 일이었소. 당신들로서는 이미 국면을 뒤집을 수가 없소."
"핫하하하…… 너 하나로서 말이냐?"
"시험해 보겠소?"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나? 네 무공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네가 천하십성의 진전을 이은 것이 아니라면 나는 너를 상대할 수 있다. 그럼 나머지 중독된 자들쯤이야……."
"나무아미타불…… 과연 그럴 수 있겠소?"
그 말을 끊으며 긴 불호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나타난 사람. 그는 한효월이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소림사의 대명.
그가 가사를 입고서 천천히 걸어나오자 수십 명의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다. 대명의 옆에는 화산의 진자양도 있었다. 누가 보아도 그들이 구대문파의 고수들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을 보자 만박노유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구대문파란 말인가? 하하하…… 구대문파도 여기에 한몫 끼어보겠다고? 정말 죽을 자리를 찾아서 잘도 왔구나. 구대문파라는 이름이야 세간에서나 통용되는 것인데 감히 절세이립(絶世而立)한 용화회의 일에 끼어들려고 하다니……. 내 오늘이 지나면 구대문파의 주춧돌 하나 남겨두지 않겠노라!"
그런 그의 광오함에 대명은 미간을 찡그렸다.
"당신은 잊어버린 모양이구료? 소림사에서도 용화회에 참여한 사람이 있었음을?"
"소림사에?"
만박노유의 안색이 조금 달라졌다.
"그럼 각전(覺全)이 아직도 살아 있었더란 말이냐?"
"그렇소. 그분께서 모든 걸 이 불민한 제자에게 주고 가셨으니 궁금하면 확인해 보셔도 되오."
대명이 합장하며 말했다.
그가 다시 소림사로 돌아가자 폐관에 들었던, 죽었다고 알려졌던 전대의 고수 한 사람이 그에게 모든 것을 남겨주고 죽었다. 그러한 그의 행적은 한효월과 연관되면서 여기까지 이어졌으니 감천형을 제외한 누구도 대명이 구대문파와 함께 이곳에 오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으음…… 그 망할 놈의 화상(和尙)이 아직도 죽지 않았었다니? 분명히 처리한 것으로 알았었는데…….'
만박노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만박노유가 안배한 모든 것이 허물어졌다고 속단할 수는 없었다. 아직은 충분히 싸울 만했다.
"모자란다면 더 보여줄 수도 있소."
한효월이 말했다.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것 같은 가운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한효월의 뒤에 와서 섰다.
그 무리 가운데 있는 천무의 모습을 보자 감천형이 놀라 입을 벌렸다.
천무가 자신을 향해 고개를 젓는 것을 보자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격동의 빛이 역력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의 복면인.
그의 기도가 심상치 않음은 누구라도 알아볼 수가 있었다.
"정말 만만치 않군! 너에 대한 보고를 처음 받았을 때 없애라고 이야기를 했어야 했구나. 하지만 그 정도로는 사태를 반전시킬 수
없을 것이다."
한효월이 미간을 찡그렸다.
"끝까지 아비규환의 소용돌이를 만들어가야만 하겠소?"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니까."
한 사람이 말하면서 앞으로 나섰다.
"선배님……."
그를 본 한효월이 중얼거렸다.
나선 사람은 개왕이었다.
개왕은 침중한 얼굴로 말했다.
"저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까지 얼마나 많은 나날을 기다려 왔는데, 설혹 이 자리에서 죽는다 할지라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는 말끝을 흐리며 한효월에게 전음으로 말을 계속하려 했다.
순간.
쾅!
"으악!"
한효월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사숙!"
감천형과 천무가 두 눈을 찢어져라 부릅뜨고서 소리쳤다.
놀랍게도 개왕이 한효월을 공격한 것이다. 바로 옆에서 갑자기 그를 공격했으니 한효월로서는 아무리 준비하고 있었다 할지라도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한 번이 아니라 일장을 휘둘러 한효월을 공격하자마자 뒤따라가면서 미친 듯이 양손을 휘둘러 잇달아 공격해 가고
있는데 얼마나 빠른지 손이 보이지 않았다.
쾅쾅쾅!
한효월의 무공은 이미 의형수형의 경지를 넘어 외부의 반응에 호신강기가 절로 반응하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그러한
무공으로서도 개왕의 급습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첫 번째의 공격에서는 충격을 받은 것에 불과했지만 채 정신을 차릴 여가도 없이
잇달아 계속된 공격에 한효월은 피를 토하면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찰나간에 십여 번의 공세가 그를 공격했다.
쇠라도 으스러져 버릴 충격이었다.
너무도 상상키 어려운 사태에 바로 그 뒤에 있던 천무조차도 멍청했다가 뒤늦게 고함을 치면서 몸을 날렸지만 그때는 한효월이
이미 피를 토하면서 하늘을 날아가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한효월은 그 와중에도 마지막 순간에 개왕이 후려친 최후의 일격을 막아내면서 몸을 뒤틀어 십여 장이나 떨어진 곳에
비틀거리면서 겨우 내려설 수가 있었다.
백지장처럼 창백한 얼굴에 핏물을 뿜어내고 있지만 그가 이렇게 땅에 내려설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그의 일신무공이 이미 세상을
놀라게 할 경지에 이르러 있었음은 알고도 남음이 있는 일이었다.
그때였다.
그가 내려선 자리.
그 숲에서 돌연 한 사람이 튀어나와 기다렸다는 듯이 한효월을 공격했다.
쾅!
등 뒤에서의 이 일격은 가히 치명적이었다.
"웩-!"
핏물이 폭포수처럼 입에서 튕겨 나갔다.
한효월은 그렇게 앞으로 튕겨져 나갔는데 앞으로 튕겨져 나가는 그를 기다렸다는 듯이 개왕이 손을 뻗었다.
마지막으로 숨을 끊겠다는 의미다.
조금의 사정도 두지 않는 정말 무서운 살수였다.
쾅!
"크으윽!"
신음과 함께 한 사람이 비틀거리며 뒤로 밀려났다.
"무슨 짓이냐!"
개왕이 노해 꾸짖었다.
그의 앞을 가로막은 사람은 뜻밖에도 개방의 방주, 황엽이었다.
황엽은 창백한 얼굴로 이를 악물고서 다시금 한효월을 가로막고 섰다. 그는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뜨고서 외쳤다.
"저야말로 물어야겠습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당장 비키지 않으면 널 쳐 죽이고 말겠다!"
"죽더라도 영문을 알지 못하면 비키지 못하겠습니다! 왜 그를 공격한 겁니까?"
황엽이 두 눈을 부릅뜨며 마주 소리쳤다.
"감히 네놈이……."
개왕의 얼굴에 살기가 이글거렸다.
그사이에 천무와 감천형, 복면인 대막사왕이 한효월을 가로막았고 대명과 고려검왕 등을 비롯한 사람들이 달려왔다.
"사숙! 사숙! 정신 차리십시오!"
감천형이 한효월을 부둥켜안고서 소리쳤다.
사색이 된 얼굴, 입에서는 선혈이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하지만 그는 아직 죽지 않았다.
억지로 눈을 뜨는 것을 보고 감천형은 감격에 겨워 그를 불렀다.
"사숙!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소용…… 없다……. 마지막 일격에…… 이미 심맥마저 끊어졌…… 쿨럭……."
한효월은 피를 게워내면서 쿨럭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잠력으로 간신히 버텨오던 삶이다. 그것이 일순간에 모조리 무너져 버린 것이다.
말 그대로 대라신선(大羅神仙)이 온다 한들 어찌 그를 살릴 것인가.
쾅! 콰쾅…….
뒤쪽에서는 연신 폭음이 터져 나온다.
한효월의 뒤쪽에서 그를 공격해 치명상을 입힌 자를 복면한 대막사왕이 맞아 싸우고 있는 것이다.
대막사왕이 적시에 나서지 않았다면 그는 계속해서 공격했을 것이고 한효월은 즉사를 면치 못했을는지도 몰랐다.
대막사왕과 싸우고 있는 자도 복면을 했다.
그때.
"이 더러운 놈……!"
요동권왕이 노호하면서 하늘을 날아 개왕에게로 덮쳐 갔다.
쾅! 콰쾅!
계속해서 개천벽지(開天闢地)의 굉음이 터진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싸우는 사람마다 불가일세의 고수들이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 싸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콰쾅!
고막이 터지는 굉음과 함께 신음을 흘리며 요동권왕이 튕겨져 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크으윽! 이, 이럴 수가? 이제 보니 좀 전에 준 것이 독약이로구나……."
피틀 토하면서 물러나는 요동권왕의 얼굴은 사색.
개왕이 냉소했다.
"그럼 보약을 줄 것으로 생각했었느냐?"
"그, 그런 일을……."
황엽은 안색이 창백해진 채로 전신을 떨었다.
망연자실(茫然自失).
넋을 잃은 듯한 모습이었다.
감천형의 부축을 받은 채로 그의 품에 안긴 한효월은 안간힘을 써서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역시…… 당신이었군요……."
그의 말에 개왕은 놀란 빛으로 그를 보았다.
"짐작하고 있었다는 말이냐?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일인데?"
"확신을…… 가…… 졌다면 이런 결과는 없었을……. 쿨룩! 하지만…… 뭔가 의심스러운 건…… 사실이었소. 집법존자로서……
당신이 한 일은 어딘지 불확실해 보였으니까……."
"빈틈이 있었다고?"
반문한 개왕은 머리를 저었다.
"아무런 빈틈도 누구도 알지 못하게 모든 것을 만들었는데…… 그래도 파탄을 찾을 수 있었다니 내가 마지막까지 한 수를 남겨두지
않았더라면 큰일 날 뻔했구나. 하늘이 너를 만들어내었으되, 수명과 운(運)을 주지 않았음이 다행이로다."
"내가…… 쓰러짐으로써 당신을 막을 사람은…… 크으으윽…… 사, 사실상 없소……."
힐끔 그를 본 한효월은 다시금 피를 한 모금 토해냈다.
거품이 이는 핏덩이다.
'살아날 수 없다…….'
그것을 본 개왕은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저렇게 피에 거품이 인다는 것은 회생 불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헐떡거리던 한효월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대항할 수 있는 사람도 사실상…… 구대문파와 내가 이끄는…… 사람들뿐. 하지만 그들도 당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 상황에서는 전멸시킬 수도 있을 것이오. 그러나…… 지금……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소?"
"살려주라는 게냐?"
"그렇소. 모두 죽인들…… 의미가 없지 않소?"
한효월은 눈이 감기는지 머리를 흔들며 안간힘을 썼다.
"어, 어차피…… 천하십성이 남긴…… 것을 얻는…… 다면 누, 누가…… 당신의 행보를…… 막을 수…… 있겠…… 지금에도 막을
사람이 없는데……."
"……."
개왕은 물끄러미 그를 보다가 머리를 저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놈이로구나. 너의 삶이 끝났는데, 그런데도 남을 위해서 그렇게 발악을 하면서까지 애원을 한단 말이냐?"
씁쓸한 웃음이 피투성이의 입술에 흘러간다. 한효월의 그 모습은 누구도 형용키 어려웠다.
"남을 위함이 아니오……. 어차피 한 번은 죽는 것……. 죽는 것에 후회도…… 애착도 없소. 그저…… 조금 빨리 가는 것일 뿐…….
그것이 옳다고 느껴졌었기 때문에 그 길을 갔을 뿐…… 부타악……."
그 말을 끝으로 말이 잦아들었다.
무엇인가 안간힘을 쓰면서 말을 하고자 하지만 말이 되지 않는다. 눈을 뜨고자 마지막 힘을 다해 끔벅거리지만 눈이 떠지지 않는다.
눈꺼풀이 이리도 무거울 줄이야.
…….
갑자기 정적이 찾아들었다.
"사숙!"
문득 감천형이 갈라진 음성으로 한효월을 불렀다.
하지만 한효월은 답이 없다.
감은 눈을 뜨지도, 그의 말에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다.
설마?
믿기지 않았다.
아무려면 사숙이, 그 위대한 사숙이 이렇게 죽을 리가…….
"소용없다. 그 녀석은 이미 죽었으니까."
개왕이 말했다.
"……."
휙!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감천형은 무서운 눈빛으로 고개를 쳐들고 그를 노려보았다.
만약 한효월을 안고 있지 않았다면 몸을 날려 개왕을 덮쳐 갔을 모습이었다.
한효월 주변의 수많은 군웅들 모두의 눈빛이 그러했다.
개왕은 냉랭한 눈빛으로 그들을 힐끔 보고는 머리를 저었다.
"한효월을 봐서 너를 비롯한 무리들의 한 목숨은 조금 더 연장해 주기로 하마. 그렇듯 죽음으로써 부탁을 하니 지금은 그냥
두기로 하지……."
말을 마치자 그는 한 걸음 나서며 오연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허름한 옷차림이지만 누구도 그를 우습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를 향해 만박노유가 허리를 굽혔다.
"그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대형(大兄)!"
"우리 사이에 무슨 인사는. 되었네. 자, 이제 가보기로 할까?"
만박노유를 향해 웃음 지어 보인 그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누가 같이 갈 것이냐는 무언의 물음이기도 했지만 사실 갈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너무나 오랜 기다림이었기에 그런 것조차 정해두지 않았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는 이중삼중의 복선을 깔고 철저하게 자신을 감추면서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반대파를 모두 제거했다.
이제 그를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태백산, 지금 이곳에 모인 사람들, 모습을 드러낸 사람만도 근 천 명에 이른다.
그들 모두는 무림을 대표할 만한 고수들.
하나 그들 중 그 누구도 그와 맞설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유일한 존재라고 할 수 있었던 한효월이 죽고 난 지금에는.
"감 맹주!"
대명이 굳은 얼굴로 감천형을 불렀다.
"정말 한 공자가……?"
차마 그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죽었는가를 어찌 물어볼 수 있겠는가.
그가 살았다면, 살아날 가망성이 있다면 결코 개왕이 저렇듯 쉽게 물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다른 사람도 아닌 그.
한효월이 어찌 이렇듯 어이없이 죽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는 이렇게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이렇게 죽어서는 아니 되는 사람이었다.
비분강개한 빛이 역력했다.
어찌 그뿐이겠는가.
구대문파의 사람들 모두가 죽음을 각오하고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기 위해서 달려왔다.
여기서 이렇게 꼬리를 말고 만다면 영원히 명예를 되찾을 가능성은 없었다.
모두 죽어도 좋았다.
그것은 화산 장문인 진자양도 마찬가지이고 다른 사람들도 같았다.
그들뿐 아니라 정의맹에 가담한 고수들도 다 그러했다.
한효월이 저렇게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그가 자신들의 목숨을 부탁하는 것을 보면서 어찌 아무렇지도 않겠는가.
모두들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의 목숨이 이 자리에서 초개처럼 흩어질지라도, 이렇게 굴복하고 말 수는 없다고.
피가 끓었다!
하지만.
"……."
감천형은 입술을 짓물면서 머리를 저을 뿐이었다.
'이대로 있으란 말이오?'
이미 그와는 암중에 연락을 했던 대명이었다. 한효월은 암암리에 많은 일을 했고 그 모든 것의 대부분을 감천형이 대행했었다.
감천형은 핏발 선 눈으로 대명을 바라보았다.
"사숙의 죽음을 헛되이할 순 없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이렇게 이대로……."
대명의 얼굴이 격동을 참지 못해 일그러졌다.
"감 맹주……."
옆에서 진자양이 참지 못하고 그를 다시 불렀다.
"……."
감천형은 다시금 머리를 저었다. 그리곤 입을 굳게 다물었다. 즈려문 입술로 핏물이 흘러내린다.
그 핏물을 보자 누구도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서 어깨를 떨고 있는 천무의 그 너른 등을 보면서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철혈호한(鐵血好漢)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누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누가 그들보다 더 슬퍼할 수가 있을 것인가.
위대한 별이 진 이 자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