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首 전설시현(傳說示現)
-전설이 드러나다
음모(陰謀) 속에 최후의 힘이 드러나다
태백산은 거대한 산이다.
수백 수천이 한꺼번에 몰려든다 할지라도 그 종적을 찾기 힘들다. 그 숱한 사람들을 다 삼키고도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거기 나타난 사람들이 워낙 엄청난 신분들인 까닭이다.
그들 개개인이 모두 무림 중에서는 종사(宗師)의 위치에 있었고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둘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나타난 사람만 오륙백이 넘고 암중에 몸을 숨기고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되는지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빙천설지(氷天雪地).
어디를 둘러보아도 얼음과 눈뿐이라 과연 이곳이 중원에 있는 산인가 의아할 정도이지만 하늘을 꿰뚫을 듯 치솟은 태백산의 위용을 보자면 이해가 갈 수밖에 없다.
태백산은 예로부터 따로 태일(太一)이라고도 불렸다.
유일한 산이라는 뜻을 받은 이 산을 일러 그 높이를 알지 못한다 하였다. 대체 수백, 수천 척이라는 높이를 모두 나타내면서 왜 이 태백산만은 그 높이를 알 수 없다고 한 것일까?
감천형은 태백산을 오르면서 그 기험한 산세를 보고 놀라고 감탄했다. 어쩌면 이곳에 지금 오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순간 그 누구도 경치를 보고 감탄할 마음의 여유는 없다.
그들의 앞으로 뜻밖에 커다란 호수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삼태백(三太白)이군……."
남해의 고수 두 사람이 멘 교자에 앉아 주위를 둘러본 만박노유가 말했다.
"삼태백이라…… 그렇다면 이태백, 일태백도 있단 말인가?"
요동권왕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태백이 있는 건 맞다. 하지만 일태백이 아니라 대태백(大太白)이라는 놈이 있지……. 높이대로 세 개의 호수가 있고 그 가운데에 아마 봉신방이 있을 것이야."
"가운데라고? 그럼 이 부근에 봉신방이 있다는 겐가?"
요동권왕의 얼굴에 흥분한 빛이 떠올랐다.
"지도대로라면 그렇지!"
만박노유가 세찬 바람에 추운 듯 털옷의 옷깃을 올리며 말했다.
사방에 눈이 쌓여 있고 불어오는 바람에 눈발이 날리면 정말 칼날처럼 찬 바람이 서릿발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호수가 얼지 않는 것은 신비다.
만박노유의 말대로 조금 더 가자 호수 하나가 다시 나타났다.
말은 호수이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크지 않다. 그리고는 저 멀리 눈 덮인 봉우리 사이로 푸른빛이 일렁임이 보인다.
또 하나의 호수.
그곳으로는 길조차 없다.
눈과 삼림으로 덮인 길을 그냥 통과해 올라가야만 한다.
그리곤 좌우로 병풍처럼 산세가 날개를 벌리고 있음이 보인다.
굳이 그것을 형용하자면 세 개의 호수가 조금 기울고 벌어진 역삼각형의 형상을 하고 있고 그 호수들을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정상까지는 더 올라가야 하고 정상은 눈으로 흰머리처럼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낙락장송이 눈을 이고 고고히 서 있는 모습은 경건함마저 느껴진다.
"어디까지 가야 합니까?"
감천형이 주위를 돌아보면서 물었다.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고려검왕이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다 온 것 같다고? 그럼 어디인지 한번 찾아보게나."
만박노유가 클클 웃음을 흘렸다.
"신수(神樹)를 찾는다면 봉신방은 찾은 거나 다름이 없을 거요."
"신수라? 그 전설이 사실이라고 믿나보군?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자네는 왜 장백산에 가서 놀고 있는가?"
만박노유가 냉소를 흘린다.
"장백산 또한 영산(靈山)이기 때문이오. 천손의 시작이 태백산 신단수(神檀樹)임을 대한수호신문에서 명백히 전해져 오고 있으니 그 옹졸한 지식으로 억지로 폄하하려 하지 마시오. 당신들의 그 위대한 역사는 대부분 날조되었으니 사가(史家)라는 자들마저 양심을 버린 지 오래임을 당신은 부인할 수 있소?"
고려검왕이 차갑게 힐난하자 만박노유의 얼굴에 노기가 어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넘어가려는 겐가? 역사가 날조되다니……."
"구당서(舊唐書)를 고쳐 신당서(新唐書)로 만들고 불리한 부분은 삭제하는 게 그간 중화로 일컫는 당신들의 일상(日常)이었는데 그걸 아니라고 강변한다면 당신의 학자적인 양심은 어디에 있단 말이오? 만약 그렇다면 당신을 믿어도 될는지 알 수가 없군……."
고려검왕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으음……."
만박노유는 음랭한 시선으로 그를 노려볼 따름, 말을 하지 않았다. 길게 가서 좋을 게 없으니 참자는 의미일까.
"핫하하…… 만박노유께서는 평생을 오직 한 길, 학문으로만 매진해 오신 분이오. 당신의 학문이 아무리 높다 한들, 어찌 노선생의 학문에 비할 바가 되겠소? 쓸데없는 논쟁은 그만두시오.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연 봉신지약에서 가리킨 곳이 어딘가 하는 게요!"
옆에서 남해용왕이 간섭했다.
"흥!"
고려검왕은 냉소하며 입을 닫았다.
어차피 말로 해서 수긍할 자들이 아님을 잘 알고 있는 까닭이고, 이곳에 그들과 말다툼을 하러 온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곳이 확실합니까?"
남해용왕이 물었다.
"그렇소. 아마 이 부근이 맞는 것 같은데……."
만박노유는 손에 들고 있던 봉신지약에서 뜬 탁본(拓本)을 들여다보았다.
<석조수영(夕照樹影).>
달랑 네 자가 글자라곤 전부다.
"석양에 비친 나무의 그림자라…… 큰 박달나무 하나를 찾아보시오. 천하십성이 남겼다면 아마 오래된 것이겠지. 수령이 가장 오래되어 보이고 홀로 서 있는 박달나무…… 그 그림자가 있는 곳에 아마 봉신방이 있을 테니."
그의 말이 채 끝나지 않아서 사람들이 흩어졌다.
멀리 갈 것도 없었다.
이 부근이라면 모두가 고수 아닌 자가 없는 형편이니 그처럼 확실한 목표를 찾아내지 못할 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소나무도 있고 박달나무도 보인다.
그러나 올연(兀然)히 모든 것들을 굽어볼 만한 그런 존재는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다 나름대로 풍취를 가지고 있지만 이거다! 할 만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한 가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감천형이 고려검왕의 곁으로 다가서면서 물었다.
"무엇인가?"
"신단수라는 나무가 실제로 존재합니까?"
"그렇네. 아니…… 그 오랜 옛날에 전설로 전해진 것이니 지금까지 그 나무가 여기 있으리라고 믿기는 사실 어렵네. 하지만 내가 보기로 봉신지약에 새겨진 지세라면 이곳이 분명해. 선조들의 진적(眞跡)을 찾기 위해서 여러 번 이곳에 왔다 갔었으니까."
"찾으셨었습니까?"
"그렇지 못했네. 그랬다면 이렇게 망설이고 있을 리가 없지 않겠나?"
"그렇군요……."
감천형은 미간을 찡그린 채 생각에 잠겼다.
'그렇듯 눈에 띄는 흔적이라면 보이지 않을 리가 없다. 진세로 보호되어 모습을 감추고 있다면 찾기가 불가능할 터…… 신단수라고 이름할 만한 무엇인가가 다른 모습으로 있는 건 아닐까?'
나무가 아니다?
나무이지만 나무가 아니다…….
감천형은 주위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도 봉신지약을 뜬 탁본을 가지고 있었다.
그 탁본을 보자 주변의 지세는 신기할 만큼 닮아 있었다. 백여 년 이상이 흘렀다면 어떻게든 변해 있을 텐데도.
"그렇다는 말이지?"
감천형은 이곳이 분명함을 확인하자 나름대로 방위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한 공자가 없으니 답답하군……."
옆에서 황엽이 중얼거렸다.
그것은 감천형도 그렇게 생각하던 중이라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도 한효월이 이곳에 있었다면 이 수수께끼를 벌써 풀었으리라.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무엇이건 해낼 수 있는 존재. 그들은 한효월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한 공자는 언제 오기로 했소?"
"늦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때까지는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흠…… 기다린다? 대체 어딜 갔기에 지금 상황에서……."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분의 행동을 저로서는 예측하기 워낙 힘들어서요."
"하긴…… 그런데 말이오. 정말 언제 한 공자가 올는지 모르오? 그가 왜 이렇게 신비스럽게 행동을 하고 나타나지 않는지?"
감천형은 주위를 힐끔 보더니 전음으로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제 사매인 경아를 구하기 위해서 가신다는 말씀만 하셨지, 어디로 언제 어떻게 하겠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셔서…… 제게 남긴 것은 시간에 늦지 않게 돌아올 테니 그때까지 기다리며 추이를 보라는 말씀뿐이었습니다.'
"흐음……."
황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문득 감천형의 눈이 빛났다.
그것을 놓칠 황엽이 아니다.
그도 감천형이 보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젠 저녁 무렵. 비스듬히 저녁 해가 비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저녁 햇살을 받으며 오연히 솟은 절벽.
그 절벽에 묘한 문양이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높이 십 장여에 이르는 나무의 모습. 실제의 나무가 아니라 석양에 드러난 음영(陰影). 하지만 분명한 나무의 모습이 거대한 팔을 뻗고서 오연히 드러나 있었다.
"저거란 말인가?"
황엽이 부지중에 중얼거렸다.
"맞을 것 같군요……."
감천형도 중얼거렸다.
석조수영.
그것은 석양에 비친 나무의 그림자가 아니라, 석양이 만들어내는 나무를 찾으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무산에서부터 감천형의 주위를 맴돌던 부해옥이 슬그머니 그들의 뒤를 따라왔다가 그것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세상에, 여기로군요!"
그녀는 감탄해서 소리친 것이지만, 그로 인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 주위로 몰려들었다.
감천형은 암암리에 혀를 찼다.
아직 한효월이 오기 전이니 좀 더 시간을 끌어도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생각을 알 리 없는 부해옥은 여전히 감탄한 눈으로 그를 보며 말을 걸고 있었다.
"대단하군요. 다들 나무의 그림자만 찾고 있는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었죠?"
"우연일 따름이오."
감천형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원, 좀 부드럽게 말하면 뭐가 부러지남?'
부해옥은 눈을 흘기며 속으로 투덜댔다. 하지만 그것도 멋지게 보이니 난감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절묘하군! 절묘해……. 여기가 대자연진세의 축이로군!"
그 자리에 와서 본 만박노유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면 이제 찾은 것이오?"
"물론이지."
만박노유가 교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는 멀뚱히 앞을 바라보아야 했다.
감천형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인가?"
"잠시 기다리시지요."
"왜?"
"아직 사숙께서 도착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숙? 자네 사숙이 누군가?"
"한효월. 설마 그 이름을 모른다고 하실 생각은 아닐 걸로 압니다만."
"알든 모르든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 있나? 나는 지난 세월 전설이었던 그 위대한 비밀을 풀어내고자 한단 말이야.
그런데 감히 내 앞을 가로막고서 그걸 방해할 텐가?"
"사숙이 오시면 막으라고 해도 막지 않습니다."
"한효월이 일세의 기재이기는 하지만 어찌 천하십왕이 대사를 앞에 두고서 그런 아이를 기다린단 말인가? 어림도 없는 소리.
어서 비키지 못할까?"
남해용왕이 미간을 찡그리고서 꾸짖듯 말했다.
"어림이 있지……."
요동권왕이 옆으로 다가오면서 입을 열었다.
"뭐라고?"
"나는 이번에 중원에 들어와서 제대로 된 사람은 몇 만나지 못했지. 그런데 그 한가 녀석은 유일하게 제대로 된 놈이었어.
이놈(감천형)도 상당히 쓸 만하긴 하지만…… 어찌 자네 같은 자와 비교할 수가 있겠나? 더구나 봉신지약의 한쪽은 그 아이의
것이었어. 주인을 기다려 줌은 당연한 예의지. 설마 그런 예의도 모르나?"
냉소가 짙게 깔린 요동권왕의 비웃음에 남해용왕의 얼굴이 음침히 가라앉았다.
"이 자리에서 해보자는 건가?"
"얼마든지."
요동권왕이 마다할 사람이 아니다.
미루었던 싸움일 뿐. 그가 팔짱을 풀었다. 눈에서 신광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한 길을 갈 사람들이 아니었다.
일촉즉발(一觸卽發)!
갑자기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아직은 싸울 때가 아닙니다. 잠시 참으시면 사숙께서 곧 오실 겁니다. 백여 년을 기다렸던 일입니다. 잠시를 더 못 기다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감천형이 나섰다.
"듣고 보니 그럴듯하군."
만박노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 주시니 고맙군요."
"그럴듯하다고 해서 그럴 수 있다는 건 아니지."
만박노유가 미간을 찡그린 채로 머리를 저었다.
순간, 다급한 외침이 감천형에게서 터져 나왔다.
"엇!"
퍼펑!
그는 급급히 손을 모았고 맹렬한 기파(氣波)가 그의 앞에서 터졌다. 놀랍게도 무형지기가 그를 공격하여 그 힘을 이기지 못한
감천형은 비틀거리다가 결국 두 걸음이나 물러나야 했다.
납덩이처럼 굳어진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서 앞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만박노유를!
"다, 당신이……."
"왜? 뜻밖인가?"
만박노유는 뒷짐을 진 채로 그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당신은 무공이 높지 않다고 하던데, 어떻게 심인상인(心印傷人)의 무공을 펼칠 수가 있단 말이오?"
감천형이 신음하듯 물었다.
그의 대응이 조금만 늦었다면, 그의 무공이 조금만 더 낮았더라면 그는 이 자리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말았으리라.
"무공이야 늘 수도 있지. 오랜 세월을 살다 보면 놀랍고 뜻밖의 일이야 늘 보고 들을 수 있는 거라네. 내가 무공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그게 뭐 그리 놀라운 일이겠나?"
그는 태연히 웃으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멈추지 않으면 그냥 있지 않겠다!"
노호가 들려왔다.
요동권왕이 두 눈을 부릅뜨고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강력한 기세를 어린아이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냥 있지 않으면? 한번 해보겠다는 겐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말과 함께 요동권왕은 앞으로 성큼,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그는 이미 일권을 앞으로 쳐냈다.
두 사람의 거리는 겨우 이 장여.
그의 권세는 가히 배산도해의 가공할 것이라야 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아무런 기세도 느껴지지 않아서 공연히 허장성세로 장난을 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감천형은 주변의 공기가 한순간에 진공으로 변함을 직감하고는 두어 걸음 옆으로 물러났다.
요동권왕 막풍은 만박노유가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알아보고는 무적패권 중의 가장 무서운 무형일기권(無形一ッ拳)을 쳐낸 것이다. 그것은 겉보기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의 필생 공력을 깃들여 쳐내는 것이라 생사대적(生死大敵)이 아니라면 결코 쓰지 않는 무공이었다.
만박노유 또한 한눈에 심상치 않음을 알아보았다.
천하십왕의 무공은 누구도 쉽게 보기 힘든 것이기에 그 또한 미간을 찡그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설마 요동권왕이 손을 쓰자마자 최강의 무공으로 공격해 올 것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기에.
"교활한 놈이로고."
말과 함께 그는 손을 뒤집어 요동권왕 막풍을 막아갔다.
쾅!
거대한 폭음이 일었다.
그 가운데 나직한 신음. 사방으로 경기가 소용돌이치며 산자락 여기저기에서 비명처럼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
세차게 소용돌이치는 경기 속에서 태산처럼 우뚝 선 채로 태연히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는 만박노유.
하지만 회심의 무형일기권을 쏟아낸 요동권왕은 일그러진 얼굴로 잇달아 대여섯 걸음이나 물러나야 했다.
"크으윽! 이, 이건……."
"왜 불복인가?"
만박노유가 웃으며 물었다.
그가 보여준 신위는 가히 천하를 진동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독왕! 네 이놈, 어디에 숨어 있는 게냐! 썩 나오지 못할까?"
느닷없이 요동권왕이 고함쳤다.
산 전체가 쩡쩡 울리는 그 고함 소리에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본왕을 찾아, 뭐 하나?"
이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을 듯한 기묘한 모습의 괴인 하나. 어눌한 발음과 함께 나타난 것은 바로 천하십왕 중의 하나인 묘강독왕이었다.
그가 불쑥 모습을 드러내자 감천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심상치 않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어, 언제 독을 썼느냐?"
요동권왕이 고함쳤다.
"케케케…… 무형지독 말인가? 독하긴 하지만 네놈이라면 뒈지지 않을 수도 있지 않나? 뭘 그리 광분, 지랄을 한단 말인고."
묘강독왕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눈길을 받은 사람들이 놀라 모두 한 걸음씩 물러나면서 암중에 운기하여 자신의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감천형은 굳은 얼굴로 독왕을 보다가 만박노유를 보았다.
"독왕과 당신은 무슨 관계요?"
"맞춰보거라."
만박노유는 느긋하게 말했다.
"그렇군…… 이제 알았다. 당신이 바로 남해용왕이 손잡은 암중인이로군. 허허실실. 겉으로는 힘이 없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당신이 주재자라는 말이었군 그래."
"손을 잡았단 말은 좀 이상하지만…… 주재자라고 생각한다면 틀린 말은 아니로구나. 오늘의 이 국면은 전적으로 내가 조성해 낸 것이니까……."
만박노유는 여전히 태연하였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감천형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은 결코 태연할 수가 없었다.
"오늘의 이 국면을 전적으로 조성했다? 그럼 설마 당신이 용화회의 지배자란 말이오?"
"하하하하하하하하……."
만박노유는 길게 웃음을 터뜨렸다.
…….
사람들이 긴장된 모습으로 그를 주시했다.
이윽고 그가 웃음을 그쳤다. 그의 얼굴에는 아직도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제법 가르칠 만한 놈이로구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았다면 이제 비켜날 수 있겠구나?"
"그럴 수는 없소."
"그럴 수가 없다? 상황을 알고도 말이냐?"
"……."
감천형은 침중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황엽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서서히 주변으로 모여들어서 세를 형성하고 있었다.
고려검왕은 이미 검자루에 손을 얹은 상태였다.
"이들로서 나를, 용화회를 막을 수가 있다고 생각한단 말이냐?"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더 불러올 수도 있소."
"하하하……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넌 자격이 없다."
만박노유는 정색을 했다.
그 말에 감천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일순, 그는 이내 안색을 풀며 껄껄 웃었다.
"맞소, 맞아! 감 모는 아직 자격이 없지……. 그러니 내 사숙이 오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어떠하시오?"
"그 아이가 특별나긴 하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어. 비켜라. 비키지 않는다면 더 이상은 사정을 봐주지
않겠다."
그가 싸늘히 꾸짖어 말했다.
"한 가지만 물어보겠소."
감천형은 그가 답할 기회를 주지 않고 다시 말을 이었다.
"정말 당신이 제천교를 조종하던 그 용화회의 주인이오? 저들의 배후이기도 하고?"
"용화회는 천하십성의 사후, 아니…… 이 말은 적절치 못하군. 어쨌든 그들이 사라진 이후 주인이 없다. 굳이 지금 용화회를 이끌고 있는 것이 나인가를 묻는다면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지. 비켜라. 그렇지 않다면 모두 몰살시켜 버리겠다!"
그가 차갑게 말했다.
이미 모습이 달라져 있는 그였다.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악연(愕然)한 빛으로 그를 바라보는 남해용왕의 얼굴을 보건대 그도 만박노유의 실체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그가 얼마나 치밀한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십의 자신이 없었다면 여기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의미.
"그렇게 자신이 있나?"
냉랭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모습을 보이는 사람. 그는 높다란 고송 위에서 낙엽처럼 천천히 밑으로 흘러내리듯 내려왔다.
그 경인한 신법과는 달리 허름한 옷차림의 그.
그 사람이야말로 개왕이었다.
"드디어 나타났군……."
그를 보고 만박노유가 냉소를 흘렸다.
"전부터 당신이 의심스러웠었는데, 잘도 나를 속였었군……."
개왕이 그를 쏘아보며 차갑게 말했다.
"하하…… 속이고 말고가 어디 있나? 필요하면 드러날 것이고 아니라면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니 과연 누가 누구를 속인 것인지는
두고 보아야 알 일이겠지?"
"그 교활한 짓거리로 잘도 세상을 속였지만 이젠 끝이란 걸 알겠지?"
"하하하…… 뭘로 말인가? 그 잘난 궁가방의 떨거지들로?"
"궁가방의 고수들은 단순히 개방의 정예가 아님을 잘 알 텐데?"
"므흐흐흐…… 그렇다고 한들, 그들로 제천교의 정예와 여기 이 사람들을 다 해치울 수가 있을까? 거기에 용화회의 고수들까지?"
"여기 사람들은 계산에 넣지도 않나?"
"중독된 자들이 과연 얼마나 힘을 쓸 수 있을 것 같은가? 힘을 쓰면 쓸수록 죽음이 빨리 다가올 뿐이니 암중에 숨죽이고서 해독할 방법을 찾아보는 게 최선이 아니겠나?"
만박노유가 웃음을 머금었다.
요동권왕도 그렇고 고려검왕도 그러했다.
그리고 감천형을 비롯하여 황엽, 주변의 나머지 개방이나 맹의 고수들도 모두 숨죽인 채로 자신의 중독 여부를 검사하고 운기하여 독을 몰아내기 위해서 다들 정신이 없다고 해야 옳았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모두를 쉽사리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일을 쉽게 생각하는 게 아닐까? 아무려면 이 늙은이가 일을 그처럼 간단히 생각하고 나타났을 리가 있겠나? 방주."
"말씀하십시오."
황엽이 나서자 개왕이 말했다.
"내가 맡겨둔 것을 모두에게 나눠 주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황엽이 고갯짓을 하자 개방의 고수들이 일제히 움직이면서 품속의 단약 하나씩을 주변의 고수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감천형과 고려검왕, 요동권왕에게는 그가 직접 약을 건네 주었다.
"……?"
뭐지, 하는 표정으로 그것을 보던 만박노유의 얼굴이 굳어졌다.
"맞아. 생각하는 것처럼 해독제일세. 아! 물론, 독왕의 독을 한순간에 다 해독할 수야 없겠지. 그러나 반나절 정도는 충분히 발작을 제지하면서 당신들을 죽일 힘을 쓸 수는 있게 될 게야."
"역시 교활하군……."
만박노유의 중얼거림에 개왕은 껄껄 웃었다.
"날더러 교활이라? 독왕이 나타나지 않았는데 거기에 대비함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닌가? 독왕의 졸개들이 암중에 따르고 있음을 이미 알아냈는데도 방비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바보일 터인데 그걸 교활이라니. 핫하……."
개왕은 어이가 없는 듯 웃었다.
궁가방의 고수들은 사실 아직 한 번도 전력을 다한 적이 없다.
그들의 힘은 미지수라 결코 쉽게 볼 수가 없어서 만박노유도 가볍게 발동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안색은 태연했다.
"대충 균형은 맞춘 듯하군. 어차피 그래도 몰살을 금치 못하겠지만……."
"누가 죽을런지는 해봐야 알 일이지. 여기 있는 사람이 다 죽는다면 그것도 사실 그리 나쁜 일은 아니지. 살아 있어봐야 나쁜 짓만 할 놈들을 다 죽이고 죽을 수 있다면 그것도 헛된 죽음은 아니지……. 하하……."
개왕이 크게 웃어댔다.
만박노유는 미간을 찡그렸다.
저렇게 나오면 켕키는 바가 없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여전히 태연할 뿐이다.
"그런가? 그럼 나머지 패를 보여줄 수밖에 없을 것 같군……."
그의 말과 함께 두 사람이 나타났다.
백의를 입고 얼굴 또한 얼음을 보는 듯한 사람 하나. 그는 서쪽에서 천천히 걸어나왔고 놀랍게도 그가 걸어오는 걸음 자국마다에 하얗게 서리가 맺혔다.
차가운 얼굴의 그를 보자 고려검왕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북해빙왕 냉천추……."
"……."
백의냉면인은 아무 말 없이 고려검왕을 힐끔 보고는 천천히 걸어서 만박노유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 섰다. 그의 뒤로 십여 명의 수하들이 모습을 드러내 그의 뒤에 늘어서는 것이 보인다.
"어이가 없군! 오기천세(傲氣千世)라는 북해빙왕까지 남의 명을 받드는 주구가 되다니……."
그의 그러한 모습을 보고 참지 못하고 고려검왕이 내뱉었다.
"본왕이 그의 주구라고 누가 그랬소?"
백의냉면인.
북해빙왕 냉천추가 음랭한 어조로 물었다.
"행동이 증명하지 않는가!"
"틀렸소. 나는 봉신방을 찾을 때까지, 천하십성의 유진을 찾을 때까지 협력하기로 했을 뿐이오. 본왕은 결코 그의 주구가 아니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입을 닫았다.
남해용왕이 거만하기로 유명하지만 그의 오연(傲然)한 모습은 그보다 더하였고 실로 서릿발 같았다.
"천축마왕까지……."
누군가가 신음을 흘렸다.
또 한 사람.
북해빙왕 냉천추와 함께 나타난 사람.
비쩍 마른 대나무 꼬챙이와 같은 체구에 키는 구 척에 이르는 장신. 몸에 두른 것은 검은빛의 제의(祭衣) 하나. 얼핏 보면 서역의 승려와 같은 모습이지만 전신에 어린 마기는 삼엄하다 못해 공포스럽기까지 해서 거대한 악마가 다가오는 것만 같다.
그도 만박노유의 곁으로 가 섰다.
'이자까지…….'
그가 한편인 것이 뜻밖인 듯 남해용왕은 암중 신음을 흘렸다.
남해용왕과 묘강독왕, 거기에 북해빙왕과 천축마왕까지. 천하십왕 중 넷이 거기에 있었다.
개왕 쪽에 고려검왕과 요동권왕 둘이 있는 것에 비해 전력의 차이는 명백했다. 비록 얼마 전 서역법왕이 떠나가긴 했지만 두 사람의 출현은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다.
비록 개방과 궁가방, 개왕 등과 감천형의 정의맹까지 그 인원을 모두 합한다 할지라도 제천교가 더해지고 용화회가 더해진 이상, 승리할 가능성은 십에 하나도 없어 보였다.
만박노유는 웃으며 개왕을 바라보았다.
"어떠신가? 이래도 다 죽일 수 있겠나?"
"……."
개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뭔가 말을 하고 싶지만 입을 열기가 힘들었다.
백 번 천 번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동귀어진을 하고자 해도 쉽지 않은 상태였다. 적이 너무 강한 것이다.
그때였다.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감천형이었다.
"뭐냐?"
"누가 봐도 당신의 세력이 더 강하군요. 그런데 왜 이런 세력을 가지고도 말만 하고 있는지…… 그게 궁금해서……."
만박노유가 흘흘 웃었다.
"빨리 죽여달라고 하고 싶은 게냐?"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
잠시 그를 바라보던 만박노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말하지. 용화회와 내가 그 오랜 세월을 기다렸던 것은 바로 봉신방을 찾기 위함이었다. 어쩌면 내 생전에는 그 일이
가능하지 않을는지도 모르겠다고 포기를 하려고 마음먹었던 적까지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이 눈앞에 있다."
그는 머리를 저었다.
"이 마당에 싸워서 적을 다 죽인다고 한들 무슨 큰 의미가 있느냐? 무림을 정복하는 것 따위는 언제라도 할 수 있는 것이고,
용화회에 몸을 담았던 사람들은 그까짓 것은 안중에도 없다. 지금 중요한 것은 방해받지 않고 빨리 봉신방을 찾고 천하십성이 과연
무엇을 얻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방해하지 않는다면 너희들을 그대로 두겠다는 말이다. 뒷일은 봉신방을 찾고, 천하십성이 남겨놓은 것을 찾은 다음에 해도 충분할 테니까."
말을 마치고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떤가? 그래도 죽을 때까지 싸워볼 텐가? 그러고 싶다면 얼마든지 해주지. 그 오랜 세월을 기다려 왔으니 잠시 늦출 수도 있어."
"……."
감천형은 개왕을 바라보았다.
"네 마음대로 해라."
개왕이 입을 닫았다.
요동권왕과 고려검왕도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누구도 실익이 없는 생사결을 지금 상태에서 하고 싶지 않은 것이고, 그것은 감천형 등에게 하나 손해 볼 일이 아니었다.
"좋습니다."
말과 함께 감천형은 뒤로 물러났다.
"보면 볼수록 맘에 드는 놈이군. 너는 내 편이 되지 못한다면 살려두지 말아야 할 놈이로구나."
만박노유가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감천형은 가슴이 섬뜩해져서 그를 보았지만 그는 이미 하늘로 치솟은 절벽의 나무 그림자 밑에 가 있었다.
절벽은 높이가 삼십 장가량 되었다.
그 가운데 나무의 그림자는 십여 장가량의 높이로 비치는데 석양이 강해짐에 따라서 나무의 모습도 좀 더 선명해진 듯했다.
"정말 신기한 능력이로군……. 그들의 능력은 여전히 나를 감동시키는군 그래."
만박노유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무의 그림자를 살펴보았다.
몇 군데를 살펴보던 그는 품에서 봉신지약을 꺼내서 이리저리 맞추면서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한 식경이나 흘렀을까?
"좋아, 좋아! 여기가 정말 대자연진세의 축이로구만!"
만박노유가 갑자기 껄껄 웃으며 한 곳을 내리쳤다.
쾅!
폭음이 일며 경색이 일변(一變)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