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首:남해신니(南海神尼)
-사부 나타나다
인연(因緣)의 흐름을 누가 막을 수 있으리오
한 사람이 앞으로 걸어가는 독고경의 앞으로 날아들었다.
그는 독고경의 앞을 가로막는 동시에 일장을 휘둘러 그녀를 쳤다.
펑!
"캬악!"
그의 일장에는 배산도해의 힘이 깃들어 있어서 보통 사람이라면 단숨에 형해(形骸)가 분쇄될 정도로 강력했다. 전신이 마기에 휩싸인 독고경이라 할지라도 버틸 재간이 없어 세찬 경풍에 휩싸여 비틀거리면서 잇달아 칠팔 걸음이나 튕겨져 나갔다.
"네놈은?"
그를 알아본 귀왕이 눈을 부릅떴다.
한효월이 나타난 것이다.
"귀왕! 이 아이는 당신을 믿었던 내 사형 독고해의 유일한 한 점 혈육이오. 그런데 당신이 어떻게 이렇게 할 수가 있소? 사형의
원망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시오?"
한효월이 성목(星目)을 부릅뜨고서 꾸짖었다.
"그의 호방함에 이끌려 해줄 만큼 해주었다. 더 무엇을 해주란 말이냐? 대체 여길 어떻게 알고 쫓아온 것이냐? 정말 귀찮은
놈이로구나! 하릴없이 무덤을 파다니……."
귀왕이 미간을 찡그렸다.
한효월은 비틀 물러난 독고경의 눈에서 혈광(血光)이 형체를 이루며 쏟아져 나오고 있음을 보고 가슴이 섬뜩했다.
'늦었단 말인가?'
"경아! 정신 차리거라. 나를 몰라보겠느냐?"
말을 하면서도 손은 쉬지 않는다.
그는 벼락같은 호통을 치면서 양손을 번갈아 휘둘러 그녀를 쳤다.
독고경은 전신에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마기를 받아들여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한효월이 공격을 하자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캬악!"
그녀의 입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마기를 받아들이면서 거의 금강불괴지신이 되어버린 그녀였는데도 고통을 느껴 비명을 지르는 것은 한효월이 지금 운용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항마신공인 부동명왕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고통은 그녀의 정신을 일깨웠다.
"캬악! 감히 네놈이 나를 공격하다니!"
그녀의 입에서 저주에 찬 외침이 흘러나오며 그녀의 신형이 훌훌 하늘로 떠올랐다.
"경아!"
한효월이 다시금 천둥처럼 외쳤다.
그 소리에 고통스러운 빛을 떠올린 독고경이 사납게 이를 갈아댔다.
"네놈의 입을 찢어버리고 말겠다!"
한효월의 음성에는 부동명왕공이 운기되고 있으니 그녀가 고통을 느끼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녀의 양손이 교차되면서 독고경의 신형이 허공에서 거꾸로 내리박혔다. 그녀의 손에서는 이미 명옥수가 극성으로 운기되어
있어 가공할 위세가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한효월은 그것을 피하거나 맞받으려 하지 않았다. 두 눈을 부릅뜨고서 자신을 공격해 오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녀의 장세가 사정없이 자신을 치는 순간에 전신을 떨었다.
호신진기가 부드러운 솜과 같이 그의 전신을 떨어 울리면서 받쳤다. 그 공포스러운 명옥수를 몸으로 받아낸 것이다.
"명(明), 왕(王), 현(現), 세(世)!"
천둥치는 음성과 함께 한효월은 독고경을 향해 두 손을 뻗었다.
미처 손을 회수하지 못했던 독고경의 양손은 한효월에게 꽉 움켜잡히고 말았다.
깍지를 끼듯 서로 양손을 잡아 쥐게 된 두 사람.
말은 긴 듯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찰나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파파팡!
그 충격을 말하듯이 한효월의 주위 땅이 크게 비명을 지르면서 거대한 울림을 토해냈다.
"미친!"
그것을 본 귀왕이 코웃음 쳤다.
제아무리 내공이 강하다 할지라도 사람으로서는 마기를 접한 명옥마녀와 겨룰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캬아아!"
한효월과 양손을 마주한 독고경이 미친 듯 고함치는 것이 아닌가.
그녀의 양손은 물론이고 전신이 옥을 깎은 듯 투명하게 변했음에도. 짜짜- 짜자장! 하는 공기의 찢어지는 파장이 연달아 터져
나옴에도, 한효월의 입에서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음에도 괴이하게 그녀는 고통스러운 듯이 이를 갈아대면서 전신을 뒤틀고 있었다.
그제서야 귀왕은 한효월의 전신에서, 그의 손에서 기이한 금빛 광채가 일어나 독고경에게 밀려가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끊임없이 일어나는 한효월의 읊조림.
"부동명왕(不動明王)?"
그것을 듣고 문득 안색이 달라진 귀왕은 노성을 터뜨리면서 몸을 날렸다.
"감히 네놈이 명옥마공을 깨려는 것이냐!"
명옥마녀 독고경은 이곳에 와서 또 다른 경지에 올랐다. 귀왕으로서도 이기기 힘들었다.
그런 그녀이기에 당연히 한효월을 이길 수 있으리라 버려두었던 귀왕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감을 보고는 당황해 한효월을 공격해
가는 것이다.
절대절명!
천하의 고수 두 명의 공세를 한 몸에 접하게 되었다. 게다가 한효월은 손이 묶여서 귀왕을 상대조차 할 수가 없다.
처음부터 너무 무리한 시도였었다.
순간, 한효월은 두 발로 땅을 굴렀다.
쿠웅!
큰 울림과 함께 그의 신형이 독고경과 함께 옆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귀왕이 그 정도로 피할 상대는 아니었다.
그는 코웃음을 치면서 허공에서 몸을 돌려 경력을 쳐냈다.
그는 조금도 사정을 보지 않고 그의 성명절학 귀왕음부인을 펼쳐 내고 있어 그 기세는 흉험하기 짝이 없었다.
쿠쿠쿠-
한효월이 다시금 옆으로 물러났지만 여세마저 피할 순 없어 금방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러자 부동명왕공에 제압되어 가던 독고경이 기세를 찾아 눈에서 혈광이 되살아났다.
갑자기 한효월이 소리쳤다.
"그를 막아라!"
흠칫한 귀왕은 이내 냉소를 흘리며 사정 보지 않고 한효월을 공격해 들어갔다.
선기를 제압했으니 단매에 쳐 죽이고 말려는 것이다. 이곳에서 누가 자신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가공할 기세가 그의 뒤에서 폭풍처럼 들이닥치는 것이 아닌가.
한효월을 쳐 죽이려면 그도 살아남기 어려운 기세였다. 자신이 죽는다면 한효월을 죽인들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무슨 이따위! 어느 놈이냐!"
대노한 그는 빙글 몸을 돌리면서 한효월에게 쳐냈던 공세를 그대로 돌려 뒤에서 공격해 오는 자를 쳤다.
쾅!
벼락치는 폭음.
엄청난 충격에 귀왕은 어깨를 떨면서 한 걸음을 물러나야 했다. 그는 대경실색, 앞을 바라보았다.
대체 누가 있어서 자신을 한 걸음 물러나게 했는지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의 앞에는 복면인 한 사람이 있었다.
한 걸음 반을 물러나 전신을 흔들고 있는데, 그가 공격을 했음을 감안한다면 귀왕이 반수가량 위에 있음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귀왕을 놀라게 하기에 족하였다.
저 당당한 체구의 복면인은 그와 비교해 별 차이가 없는 고수가 확실했기 때문이다.
그 복면인은 충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신을 한 번 떨고 나더니 두 눈에서 빛을 뿜어내면서 쿵쿵 힘차게 앞으로 육박해 왔다.
먼저 공격을 하지는 않지만 전신의 옷이 일제히 부풀어 올라 깃발처럼 펄럭여 기세를 불러일으키고 있음은 실로 놀라운 위세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는 누구냐?"
놀란 귀왕이 물었다.
복면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잔뜩 기세를 품고서 그를 노려보고 있을 따름이다.
그의 전심전력을 오로지 귀왕의 움직임을 차단함에 있어 한효월의 명을 충실히 지키는 것을 알아보고 남음이 있었다.
'대체 어떤 놈이길래 이런 능력으로 한효월의 명을 받는단 말이냐?'
그가 누구인지 짐작조차 하기 힘든 귀왕은 감히 태만할 수가 없어서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가운데 암중에 한효월과 독고경을
바라보았다.
좀 전 자신의 공격으로 독고경은 수세에서 일단 벗어난 듯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승세는 아니었다.
한효월의 부동명왕공이 워낙 그녀의 명옥마공에 상극이었기 때문이다.
불승불패의 국면.
바로 그때였다.
구오오오…….
난데없이 거대한 울림과 함께 열린 마경이 소용돌이치면서 더욱 커졌다.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은 핏빛의 강.
거대한 장강대하와 같은 흐름이 핏물과도 같이 쏟아져 나와 한효월과 독고경을 집어삼키듯 덮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캬아악!"
독고경이 전신을 떨었다. 두 눈이 꿈꾸듯 몽롱해졌다. 더하여 일신에 서린 살기는 더욱 무섭다.
"으으……."
한효월이 신음을 흘려낸다.
난데없는 변고에 잔뜩 맞서 있던 균형이 깨어져 버렸다. 등 뒤로부터 전해지는 마기는 너무 강력하다.
그러자 독고경이 힘을 얻고 그를 밀어붙이는 것이 아닌가! 그는 그 마기에 저항하면서 그녀를 상대해야 했다.
"캬캬…… 네놈을 나의 종으로 만들겠다!"
한차례 머리를 흔들어댄 그녀가 사악한 외침을 흘려낸다.
얼마 전까지 그를 알아보기도 하던 독고경이 이젠 전혀 알아보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정신 차려라!"
한효월이 천둥처럼 고함쳤다.
그의 전신에서 금광이 일더니 그녀를 핍박해 갔다.
하지만 그와 손을 맞잡은 독고경에게서는 미동도 없다. 느긋하기조차 한 표정에 사악한 미소가 떠오를 뿐이다.
"캬캬캬아아…… 이따위 항마신공 나부랭이로 나를 어찌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그녀의 전신이 변하고 있었다.
투명한 맑은 옥처럼 보이던 그녀의 몸이 핏빛을 머금은 투명한 옥처럼. 전신에서는 붉고도 흰 빛이 서리처럼 뿜어져 나오는데
주위에 하얗게 서리가 맺혀 한겨울이 찾아온 것만 같았다.
"으으……."
한효월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장소가 너무 좋지 않았다.
뒤에서 계속해서 마기가 쏟아져 나오고 이젠 흡력마저 느껴졌다.
흡력은 공포스러울 만큼 엄청나서 조금만 방심한다면 그대로 빨려들어 가버리고 말 터이다.
게다가 독고경에게는 계속해서 마기가 공급되고 있으니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강물을 홀로 막아야 하는 형국이었다.
만에 하나 그가 중조산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상태가 아니었다면 이미 견디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아약향지옥(我若向地獄)하니 지옥자소멸(地獄自消滅)하리라!"
한효월이 두 눈을 부릅뜨며 고함쳤다.
-내가 지옥으로 가니 지옥이 스스로 없어지리라!
한 자, 한 자가 천둥이 치고 온갖 삿됨을 산산이 부수는 위력을 가진 진언(眞言)!
그러나 한차례 몸을 떤 그녀는 사악하게 웃어대면서 양손을 떨었다.
한효월의 전신이 그 진동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그걸로 천마의 재림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녀가 몸서리치게 깔깔 웃어댔다.
"아약향수라(我若向修羅), 악심자조보-옥(惡心自調伏)……!"
한효월이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를 쳤지만 이미 그 음성에는 힘든 빛이 역력했고 잦아들고 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이었다.
'왜 이 순간에 마계가 열린 것인가!'
한효월은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을 따질 여유 따위는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경아! 손을 거두거라!"
무서운 기세를 가진 경풍 한줄기가 호통과 함께 날아들었다.
콰쾅!
그 위세는 사정없이 독고경의 등을 후려쳤다.
"크윽!"
뒤를 잇는 신음 소리.
독고경을 공격한 사람은 바로 천무였다. 그의 그 놀라운 무공으로도 독고경을 상해할 수는 없었다.
그는 차마 전력을 기울여 독고경을 칠 수는 없어 힘을 남겼지만 충격을 받은 것은 그였다. 맨손으로 송곳을 찌르면 이런 고통일까?
"어떤 놈이 감히 나를 공격한단 말이냐?"
독고경이 사납게 소리쳤다.
"경아! 정신 차려라! 나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겠느냐? 이사형이다!"
천무가 이를 악물고 고함쳤다.
그를 돌아본 독고경이 눈을 깜박였다.
"이…… 사형?"
"그래! 나를 알아보겠느냐?"
천무가 반색을 하며 앞으로 다가섰다. 그는 오래전부터 홀로 그녀를 가슴에 두고 있었지만 한 번도 내색한 적은 없었다. 그런 그였기에 이렇게 변한 그녀를 보자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
그를 보자 독고경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사, 사형…… 이리 와서 나를 도와주세…… 요. 나, 나는 나를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요…… 어서……."
"그, 그래. 내가 도와주마."
천무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섰다.
"안 돼! 물러나거라!"
그것을 보자 한효월이 다급히 부르짖었다.
"오호호호호…… 늦었다!"
독고경이 요기롭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한효월과 아직도 두 손을 잡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 가닥 투명한 혈광이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와 바로 앞에 당도한 천무의 가슴을 쳤다.
쾅!
"크악!"
천무가 피분수를 토하며 뒤로 튕겨졌다.
사오 장이나 훌훌 날아간 천무는 허공에서 몸을 뒤집어 땅으로 내려섰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신형을 비틀거리지만 굳건히 버티고 서는 그의 주위로는 그의 수하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호오…… 제법이군. 나의 명옥마기(冥玉魔氣)를 맞고도 쓰러지지 않다니?"
그것을 보자 독고경은 뜻밖이라는 듯 깔깔 웃어댔다.
"경아! 네 자신을 보거라! 너는 심마를 몰아낼 수 있다! 정신을 차리거라!"
한효월이 공력을 모아 부르짖었다.
독고경이 천천히 시선을 돌려 그를 보았다. 사악한 웃음이 그녀의 얼굴에, 눈 속에 가득 떠올라 있었다.
"뭘 보면 되지? 넌 뭘 보고 싶은가? 내 몸뚱이? 원한다면 주지. 가져. 여기 있으니까. 나를 가지고서 심마를 몰아내 봐…….
오호호호……."
그녀는 깔깔 웃으며 가슴을 앞으로 내밀었다.
한효월은 그녀의 몸짓에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양손을 꽉 맞잡은 상태라 어떻게 다른 방도를 취할 수도 없고 앞뒤로 밀려오는 마기를 어떻게 할 방법도 없어 속수무책이었다.
"이 몸을 가져. 얼마든지…… 얼마든지 주지. 그리고 널 내 종으로 삼으마. 호호호호……."
그녀의 눈에서 사악한 빛이 한효월을 향해 쏟아져 갔다.
이젠 그녀를 제도(濟度)함이 문제가 아니라 침습해 오는 마기와 싸움이 더 큰 문제가 될 지경이었다. 다급해서 가로막은 한순간의 판단착오가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나-무-아-미-타-불-! 그럴 순 없느니……."
심혼을 떨어 울리는 긴 불호 소리가 들려왔다.
난데없이 들려온 불호 소리.
그 소리에는 놀라운 항마척사지력(降魔斥邪之力)이 실려 있어서 명옥마공을 극한으로 일으키고 있던 독고경은 고통스러운 빛을
떠올리며 주춤, 한 걸음 물러났다.
"그는 네 사숙, 그것이 가당키나 한 소리더냐? 어찌 악마가 세상을 악으로 물들이려 하는고. 썩 물러나거라."
꾸짖는 음성과 함께 전단향이 일며 강대한 힘 한줄기가 소리없이 밀려와 독고경을 쳤다.
파앙!
"캬악!"
독고경이 비명을 질렀다.
지독한 고통이 그녀를 엄습했던 것이다.
"나무대자대비불! 하늘이 호생지덕을 내리나니, 어찌 삿됨이 정기를 침범할 수 있으리오!"
다시금 전단향이 일며 독고경을 쳤다.
"캬아악……."
그녀의 입에서 다시금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잇단 충격에 전신을 떨었고 세상을 뒤엎을 듯하던 그녀의 마기는 급격히 위축되었다.
정신을 차린 한효월은 때를 놓치지 않고 소리쳤다.
"내 비록 도산지옥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도산(刀山)이 절로 부서지리니 네 마음은 오직 너의 것임을 잊지 말라!"
눈을 부릅뜨고 고함치자 그 소리는 천둥과 같이 독고경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캬악! 캬아아……."
그녀는 손을 떨치려 몸부림쳤다.
그때 그녀의 등 뒤에서 그녀의 머리에 손을 올려놓는 사람이 있었다.
"아이야, 너는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선근(善根)이 있었으니 마기가 너를 고통스럽게 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를 해할 수는
없으리라. 사부가 너를 도와주리니, 네 몸에 깃든 마종(魔種)을 몰아내도록 하거라…… 나무관세음- 보살!"
자애하고 장중한 음성이 그녀의 그 괴로움에 밀려들었다.
장엄한 빛이 그녀의 전신을 덮어내리기 시작했다.
한효월은 이미 독고경의 전신을 지배하던 마기가 온통 뒤흔들리고 있음을 알았다.
뜻하지 않게 나타난 불문의 절대신공에 의해 다시없는 호기가 도래한 것이다.
"명왕의 힘으로 명하노니, 악마는 물러날지어다!"
한효월은 눈을 부릅뜨고서 전신의 모든 부동명왕공을 양손을 통해 쏟아냈다.
"끄아아- 아- 악!"
처절한 비명이 독고경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비명뿐이 아니었다. 그 입을 통해서 붉은, 마치 피처럼 붉은 광채가 안개와 같은
기운을 머금고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귀에서도 코에서도 전신의 모공에서도 그러했다.
"안 돼! 무슨 짓이냐! 멈추지 못할까!"
대노한 고함 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그 광경을 본 귀왕이 다급하여 부르짖었지만 이곳에서 그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매복했던 수하들은 대부분 죽었거나 바깥에 있었고 여기 왔던 수하들은 독고경에 의해 제물로 죽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를 가로막은 저 원수 같은 복면인은 절대로 만만하지 않아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아무리 발광을 해도 일시지간 그를 어찌할 수가 없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장중한 불호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털썩.
과도한 힘을 쏟아낸 한효월이 마침내 견디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그의 손에 잡힌 독고경도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손에는 이미 힘이 없었다.
전신에 서렸던 그 기운도 사라져 그녀의 몸은 마치 해물처럼 늘어져 있었다.
얼굴을 보자 그녀는 정신을 잃고 고개를 떨구고 있다.
그 머리에는 아직도 빛을 발하는 손이 올려져 있어 한효월은 그 손의 주인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나이가 몇이나 되었는지 알기 힘든 노니(老尼)였다.
그러나 자애한 얼굴에 장엄한 빛이 어려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도 남음이 있는 위의(威儀)가 그녀에게서 느껴졌다.
한효월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독고경의 손을 풀고는 몸을 일으켰다.
"혹시 남해 절진 신니이십니까?"
한효월이 묻자 노니는 미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세상 모두가 한 시주를 칭찬하더니 이제야 보니 오히려 그 칭찬들이 모자람을 알 수 있겠구려. 한 시주가 아니었다면 이
아이는 영원히 마경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을 것이오."
남해 관음초.
보타산에 은거해 있다는 절세의 기인. 독고경의 사부인 절진 신니가 뜻밖의 장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그보다…… 소생이 너무 과도히 손을 쓴 게 아닌가 싶습니다. 경아는 아마도…… 무공을……."
"무공이 있고 없고가 무슨 소용이 있겠소? 어차피 여인의 마음에서 정을 끊게 되면 그 여인은 죽게 되는 것이니…… 이제 이
아이는 속세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구료."
뜻밖의 말에 한효월은 얼떨떨해졌다.
"그 말씀은?"
"노니가 이 아이를 받아들인 것은 노니의 의발을 전수하기 위함이었다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속세의 인연을 끊어야만 했으니……
이 모진 고초는 모두가 이 아이의 마음속에 깃든 정(情)을 끊기 위함이오."
"그럼 경아를 출가시키시겠다는……."
"그것이 이 아이의 운명이라면 그리될 것이오. 괘념치 마시구려. 한 가닥의 정에 의지하여 평생을 괴로움에 묻혀 사는 것은 이
아이의 어미로서도 족했으니, 이 아이는 고불청등(古佛靑燈)을 벗삼아도 외롭지 아니할 것이오."
그녀는 한효월에게 정중히 합장하며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였다.
"나무관세음보살! 세상을 대신하여 한 시주의 숭고한 희생에 감사를……. 당금 세상에서 내가 지옥에 들어가지 않으면 누가 가리?
라는 화두를 몸으로 실천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소?"
한효월은 황급히 그녀에게 마주 합장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어차피 오래 남지 않은 생이니 헛되이 버림보다야 그것이 나으리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나무관세음보살…… 선재(善哉), 선재라……."
불호를 외운 그녀는 문득 미간을 찡그렸다.
"마계가 좀 있으면 완전히 열릴 것이오. 어서 이곳을 벗어남이 좋을 듯하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마기의 침습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니…… 마계가 열린다면 신계(神界) 또한 열렸다는 의미이니 봉신방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 같구료."
"역시, 그렇습니까?"
한효월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계와 마계는 전설이다.
하지만 봉신방이 생기면서 그 두 곳은 결계에 의해 닫혔다고 하였다. 비록 독고경이 명옥마녀로서 마기에 이끌려 찾아왔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개방된다는 것은 그 결계가 풀렸다는 의미.
감천형 쪽에 그가 안배한 것이 예정대로 흐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니 한효월은 절로 마음이 급해졌다.
"어찌하시렵니까? 소생은 지금 상봉으로 올라가 보아야 하겠습니다만……."
"노니는 세상을 떠난 몸. 지금 이 아이와 더불어 남해로 돌아가겠소. 나머지는 아마도 한 시주께서 어려움은 있으되, 해결할
수가 있을 것이오……. 나무관세음보살, 노니가 무능하여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만할 뿐이오."
"별말씀을…… 그럼."
한효월은 그녀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날려 귀왕에게로 향했다.
그것을 본 절진 신니는 길게 불호를 외더니 금강결(金剛結)을 맺어 마계의 문이 열린 소용돌이치는 혈광의 좌우를 향해 쳐내기
시작했다.
"관음보살의 힘으로 마를 봉하니, 사(邪)는 금강력에 의해 부서지리라! 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훔! 나무 사다남
삼약삼못다 구치남 다냐타 옴 자례주례 준제 사바하 부림……."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에 이어 준제관음(准提觀音)의 진언이 사방을 울리며 퍼져 나갔다.
팡! 팡팡!
그녀의 손짓에 의해 마계의 소용돌이를 중심으로 한 암벽에 진언이 새겨지기 시작한다.
불력으로 마력을 봉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니라면 최소한 억제라도 할 생각.
과아아아…….
그것을 느꼈음인지 마계의 마기가 더욱 강하게 쏟아져 나온다.
사방이 온통 혈광으로 가득 찬다.
크게 진동이 일었다.
쾅! 콰콰콰…….
한효월은 귀왕과 복면인의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곳에 당도하여 대뜸 귀왕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근소한 우세를 점하고 있었던 귀왕은 그의 가세로 허둥대기 시작했고 그는 노하여 부르짖었다.
"이 파렴치한 놈!"
"나무관세음보살, 노니 또한 당신을 그냥 두지 않으리……."
옆에서 절진 신니의 음성이 들려오자 귀왕은 크게 당황했다.
한 사람씩이라면 전혀 겁이 나지 않았지만 절세고수 세 사람의 합공이라면 귀왕 아니라 귀왕 할아버지라도 감당할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몸을 빼낼 수 있을 만큼 한가하지도 못하다.
"크악!"
귀왕이 비명을 질렀다.
앞을 가로막던 한효월에게 생사를 돌보지 않고 전력을 다해 귀왕음부인을 쳐냈다.
그는 자신이 사생결단의 기세로 공격해 가면 유리한 입장의 한효월이 결코 자신과 맞서지 않고 피할 것으로 보았고,
그럼 그 자리를 벗어나 후일을 기하고자 생각했었다.
그런데 상황은 전혀 달라서 한효월은 피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공세를 몸으로 받아넘기고 그 무서운 수인지력으로 귀왕의 귀왕음부인을 공격했던 것이다.
한효월의 무공은 그가 생각했던 경지를 넘어서 있었다.
마기를 받아들인 독고경과 맞설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던지를 정작 귀왕은 간과했던 것이다.
아무리 수인지력이 무섭다 한들, 이라고 생각했던 귀왕은 그 생각의 잘못을 치를 떨면서 후회해야 했다.
수인지력이 거침없이 귀왕음부인을 뚫고 들어와 귀왕의 손바닥을 뚫고서 귀왕음부인을 파괴해 버렸기 때문이다.
평생을 두고 고련한 귀왕음부인이 파괴되는 고통은 이루 형용키조차 어려웠다.
"크흐으으으……."
거의 걸레처럼 뭉개진 오른손을 움켜쥔 귀왕이 치를 떨면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복면인이 그를 사정없이 후려갈겨 버렸다.
펑!
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귀왕이 튕겨져 나갔다.
그런 그를 복면인은 유령처럼 다시 쫓아갔다. 살려두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만두시오."
한효월이 그에게 명했다.
그러자 복면인은 허공에서 몸을 뒤집어 내려섰다. 절대적으로 충실한 태도. 그는 다름 아닌 대막사왕 완일이었다.
괴노에게 제압당한 그는 지금 한효월을 절대적으로 따르고 있었다.
"가시오. 그리고 다시는 나타나지 마시오. 당신의 능력은 이미 지난날에 비해 절반도 되지 못하니……
세상에 나타난다면 다른 사람에게 수모를 당하게 될 것이오."
"……."
사납게 한효월을 노려보던 귀왕은 말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왜 그를 죽여 버리지 않습니까?"
유성이 옆에서 물었다.
"그는 아직 죽을 때가 아니다. 이젠 더 이상 세상에 해를 끼칠 수도 없으니 자신이 저지른 업보가 있다면 스스로 받게 되겠지……."
한효월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피곤했지만 아직은 쉴 때가 아니었다.
"가자!"
말과 함께 그가 훌훌 몸을 날려 그 자리에서 사라져 갔다.
복면인 완일도, 유성도, 천무를 비롯한 그 수하들도 그 뒤를 따랐다.
천무만이 절진 신니의 품속에 늘어져 있는 독고경을 힐끔 바라보았을 뿐이다.
과아아아…….
마의 후인을 받아들일 뻔하다가 실패한 마계의 마기는 절진 신니가 쳐둔 진언의 결계에서 노한 듯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삼십여 장이나 떨어진 바위 위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절진 신니는 길게 불호를 외었다.
"나무관세음보살……. 저것이 금생에 네가 볼 그의 마지막 모습이리라. 잘 보았느냐?"
"……."
그녀의 물음에 독고경은 아무런 대답도 없다.
하긴 정신을 잃은 그녀가 무슨 답을 할 수가 있을 것인가. 그런데 아닌 것 같았다.
꼬옥 깨문 입술은 금방이라도 피가 흘러내릴 듯하고 질끈 내려감은 두 눈에서는 맑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지 않은가.
"그래. 실컷 우는 것도 좋으리라. 네 마음속에 서린 한을…… 그렇게 풀어도 좋겠지. 하나 후일 너는 알게 되리라. 너와 저
사람은 인연이 아니었음을……. 그때까지는 이 사부를 원망하여도 좋으리라."
절진 신니의 말에 독고경은 어린아이처럼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한 가닥 바람이 그녀들을 감싸기 시작할 때 두 사람의 신형은 그곳을 떠나 남해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