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五首 정중지동(靜中之動)
-암중에 움직이다
내일을 위한 안배(按配)를 누가 알 것인가
무심히 구름은 흘러간다.
하지만 선녀평은 아연 긴장에 휩싸였다.
조금 전까지 서로 칼을 겨눌 듯하던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비록 조금의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주위를 경계한다. 개방도, 정의맹도, 남해의 고수들도…….
그리고 신녀묘 안에서는 긴장된 모습으로 감천형을 비롯, 황엽, 고려검왕과 요동권왕, 그리고 남해용왕과 만박노유 등이 둘러앉아 있었다. 가운데 탁자에 마주한 것은 만박노유와 감천형. 다른 사람들은 그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형세였다.
"이리 주게."
만박노유가 손을 내밀었다.
그의 왼손에는 빛을 뿜으며 기묘한 울음을 토하고 있는 봉신지약이 들려 있었다.
감천형은 주저없이 수중의 철궤를 내밀었다.
웅웅!
철궤를 받아 들자 철궤도 떨리고 만박노유의 손에 들린 봉신지약도 전신을 떨며 크게 울음을 토해낸다.
"정말 기물(奇物)이군!"
만박노유가 감탄을 하면서 철궤를 열었다.
기잉!
기이한 음향과 함께 철궤 속에서 또 하나의 봉신지약이 뛰쳐나왔다. 마치 누가 격공흡물로 잡아당기기라도 한 듯이 봉신지약은 허공으로 뛰쳐나와 만박노유가 들고 있는 다른 봉신지약에게로 날아갔다.
그 오랜 세월의 기다림을 한(恨)하듯이.
그런데……
정말 뜻밖의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깅…….
묘한 소리와 함께 만박노유가 들고 있는 봉신지약을 향해 날아가던 봉신지약이 다른 봉신지약의 한 치 앞에서 딱 멈추어
버린 것이다.
"이건?"
괴이한 표정으로 만박노유가 손을 흔들자 공중에 멈춘 봉신지약도 그 모습 그대로 따라 흔들린다.
떨어질 기색은 아예 찾아볼 수 없고 그렇다고 더 이상 달라붙을 것 같지도 않았다. 한 치의 사이를 두고 공중에서 붙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냥 자석이 아니라는 소리군. 정말 천하십성의 능력은……."
만박노유가 머리를 저었다.
손에 든 봉신지약 두 개를 하염없이 노려보고 있던 만박노유는 미간을 찡그린 채로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한쪽 봉신지약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른 손을 내밀어 허공에 뜬 봉신지약을 잡고 빙글 돌렸다.
그리곤 힘을 주어 두 개의 봉신지약을 누르기 시작했다.
거리는 불과 한 치.
그런데 이마에 핏줄이 서도록 눌러도 봉신지약은 쉽게 다가가지 않았다. 손목이 떨리고 팔이 벌벌 떨리는 것이 보이는 걸로 보아 공연히 그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설마, 그걸 붙이지 못한다는 거요?"
한참 실랑이를 하는 광경을 지켜보던 남해용왕이 답답한 듯이 물었다.
"해보시겠소?"
만박노유가 후, 한숨을 내쉬면서 봉신지약을 남해용왕에게 내밀었다.
남해용왕은 슬쩍 감천형과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곤 그걸 받아 들더니 가운데로 밀어붙였다. 이까짓 거야 하는 모습이었지만 이내 그것이 간단치 않음이 드러났다. 그냥 들고 있을 때는 모르겠는데 밀어보자 강력한 반발이 느껴졌던 것이다.
"허?"
탄성과 함께 남해용왕은 공력을 돋우어 봉신지약을 밀어붙였다. 그의 이마에 핏발이 곤두서는 것과 비례하여 봉신지약은 서서히 가까워졌다. 그러나 그뿐, 봉신지약은 쉽게 다가서려 하지 않았다. 억지로 밀어붙여 놓아도 서로 붙지를 않고 강력하게 반발하니 아무런 소용이 없어 남해용왕은 내려놓지도 붙이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때.
"남해의 진전(眞傳) 중에 아마 해왕신공(海王神功)이 있지요?"
감천형이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러자 남해용왕의 손에 푸른 빛이 일었다. 전신에서 이는 게 아니라 물빛의 그 기운은 남해용왕의 손에서만 빛나는데 그것은 그가 이미 공력의 운용이 자유롭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실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딸깍.
기묘한 음향과 함께 봉신지약이 간단히 하나로 합쳐진 것이다. 환한 빛이 봉신지약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토록 격렬히 저항하던 것에 비하면 너무도 쉽게 봉신지약은 하나가 되어버렸다.
"이게 어떻게 된?"
얼떨떨한 빛으로 봉신지약을 바라보던 남해용왕이 감천형을 바라보았다.
"봉신지비를 풀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은 오직 천하십성의 후예뿐이라는 말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니, 그렇다면 무림 중에서 그것을 확인할 방도는 하나밖에 없겠지요."
"천하십성의 독문심공(獨門心功)이란 말이로군……."
어이없다는 듯이 남해용왕이 중얼거렸다.
감천형, 이놈은 보면 볼수록 만만치 않다.
그는 암중에 미간을 찡그렸지만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제단의 입구에 선 채로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부해옥이었다.
그녀의 눈빛은 묘했다. 최소한 남해용왕처럼 적을 보는 눈빛은 분명히 아니었다. 호의가 담겼으니까.
"좋아, 좋아…… 정말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만박노유는 합쳐진 봉신지약을 보면서 연신 감탄을 한다.
"뭐가 말씀이오?"
참지 못하고 남해용왕이 물었다.
"잠시만……."
만박노유는 준비되어 있던 지필묵 중에서 종이를 들어 봉신지약을 감쌌다. 바닥에 그것을 놓은 그가 먹을 묻힌 솜을 들어 위를 가볍게 두드림을 보자 사람들은 그가 탁본(拓本)을 뜨려 함을 알았다.
아주 조심스러운 모습으로 한참을 걸려서 탁본을 떠낸 그는 봉신지약을 감쌌던 종이를 탁자 위에다 펼쳐 놓았다.
묘한 문양이 종이 위에 새겨져 있었다.
"역시 그랬군……. 정말 감탄을 금할 수가 없군!"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던 만박노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인지 설명을 해주시오."
지켜보고 있던 남해용왕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만박노유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천하십성은 참으로 많은 심력을 여기에 기울였소. 내가 알기로 이 봉신지약을 만들어낸 것은 천하십성의 부탁을 받은 고려인이라고 들었는데 아마 그가 누군지는 고려검왕께서 알고 계시겠지?"
그는 처음부터 고려검왕의 답변은 기다리지 않았다. 그저 말을 이어갈 따름이다.
"이 봉신지약에는 천기(天機)가 깃들어 있지. 우선 표면의 이 문양들은 진세 하나를 표현하고 있소. 아울러 산세(山勢)가 조각되어 있는데 아마도 이게 봉신방이 있는 곳을 가리키는 것일 게요. 그렇다면 이 진세는 봉신방을 세상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는 대자연진세(大自然陣勢)일 것이오."
"대자연진세? 그런 것도 있었소?"
남해용왕이 미간을 찡그리면서 다시 물었다. 그는 자부심이 강한 만큼 재주가 많아 기문진식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진세는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으니 괴이한 것이 당연했다.
"하하…… 세상의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고금 최고의 진이지. 대자연진세는 말이 진세지, 실제로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오. 일단 펼쳐지면 진세 자체가 자연이라서 파훼 자체가 불가능한 게요. 깨져도, 그건 자연 그대로라서…… 전설로 천하십성이 그 대자연진세를 참오(參悟)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이 진세가 세상에 실재할 줄은 노부도 정말 상상하지 못했군. 그러니 그처럼 천하를 헤매어도 봉신방의 위치가 지금껏 노출되지 않았던 것이 무리도 아니었어……."
그가 이렇게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자 모든 사람들이 초조해졌다.
"그 진세가 그처럼 놀라운 것이라면 진입 자체가 불가능한 게 아닙니까?"
감천형이 물었다.
"아니. 그렇지 않네. 내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이 대자연진세는 불완전해. 일부러 허를 남겨둔 것처럼. 물론 그것만으로도 출입로를 알지 못한다면 절대로 갈 수 없을 정도지만…… 완전히 봉쇄된 것과는 천지 차이지. 파괴시킬 수도 있으니까."
"그럼, 저게 파훼법입니까?"
감천형이 눈으로 탁본을 가리켰다.
"핫하하하…… 역시 대단한 젊은이로군. 맞네, 맞아. 그들의 뛰어남은 여기에서도 드러나고 있다네. 산세와 진세를 봉신지약에다 남겨두면서 그 문양에 거꾸로 된 글자를 새겨 넣었다네. 문양 자체가 글자이고 그게 바로 진세의 위치와 출입 방법일 것이야. 하지만 글자가 거꾸로 되어 있어서 그냥 봐서는 절대로 알아볼 수가 없지!"
…….
모든 사람의 눈이 탁자에 놓인 탁본으로 향했다.
탁본만으로도 머리 아플 정도로 문양은 오밀조밀한 데다 기묘하여 저것이 과연 글자인지조차 알기 어려웠다.
"노부가 잠시 생각해 보면 아마 출입 방법과 위치를 찾아낼 수가 있을 거네. 어차피 알려주기 위한 비도(秘圖)라면 풀 수가 있을 거고 풀 수 있는 거라면 노부가 알아낼 수가 있겠지."
"음, 그렇다면 이 봉신지약은 단지 위치를 알려주는 지도란 말이오?"
요동권왕이 물었다.
"그럴 리가! 어디에 쓰는지는 여길 살펴보고 그 자리에 가보면 알게 되겠지. 일단 모든 걸 알아낸 것이나 다름없으니 나머지 해독이야 시간문제지 뭐가 걱정이겠나?"
만박노유가 웃으며 말했다.
"대체 여기서 말하는 봉신방의 위치가 어디란 말이오?"
요동권왕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그건 아직 모르겠네.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이 산세를 잘 조사해 보면 단서가 있겠지……."
"조사할 것 없소."
난데없이 들려온 음성.
모든 사람의 시선이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뜻밖에도 말을 한 사람은 고려검왕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침착한 표정으로 말했다.
"봉신지약에 새겨진 위치는 천손지지(天孫之地)요."
"천손지지?"
"천손지지가 어디요?"
사람들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천손지지라니? 설마 태백산(太白山)이란 말이오?"
만박노유가 불신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맞소. 그 지세로 보아 천손지지가 맞을 것이오. 만약 천손지지가 맞다면 봉신방이 어디 있는지는 뻔하겠지……."
고려검왕의 말이 사람들의 의문 속에서 울려 퍼졌다.
'천손지지라니…….'
만박노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늘의 자손이 내려왔다는 전설의 땅, 천손지지. 그곳은 바로 태백산을 가리킨다.
전설과 신비로 가득 찬 천손의 발원지.
하지만 중원의 자손으로 자부하는 만박노유로서는 그 천손의 전설을 인정하고 싶은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중원의 모든 사가(史家)들이 그러한 사실을 역사 속에서 지워 버렸었다. 오죽하면 이미 만들어진 사서까지 새로 만들어 날조를 일삼았을까.
그런데 봉신방이 천손지지에 존재한다니,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천하 각지에서 모여든 것이, 천하 각지에서 가장 강한 자들이 모인 것이 천하십성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왜 하필이면 천손지지에 봉신방을 만들었다는 말인가…….
* * *
한효월은 암중에 몸을 숨긴 채로 선녀평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유성과 천무가 숨을 죽이고 선녀평을 바라본다.
그들이 갖은 노력을 다하나 선녀평이 너무 멀어서 아른거릴 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기야 보려고 한들 신녀묘 안에 들어간 사람들이 보일 리가 없다.
그저 곳곳에 은신한 채로 사방을 경계하는 자들을 볼 수 있는 정도.
하지만 한효월은 달랐다.
그의 천조신안은 이제 최고조에 달해 가히 불가의 천시지청(天視地聽)을 능가하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그 모두가 바로 괴노가 마지막에 그를 깨우쳐 주어 단숨에 심득을 얻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한효월은 묵묵히 선녀평을 바라보고 있었고 천무 또한 석상처럼 눈을 감고서 바위에 등을 기댄 채 미동도 없다.
유성은 좀이 쑤신다.
'나참…… 아무리 그래도 이 먼 곳에서 뭘 보시겠다고…….'
안달이 난 유성은 고개를 빼밀었다가 석상처럼 눈을 감은 천무를 보고 내심 혀를 찼다.
하지만 감히 입을 열어 한효월의 심기를 거스를 수야 없다. 전에는 모시던 공자였지만 지금은 기명제자의 신분이 아니던가.
그때.
"호정단(護正團)은 모두 어디에 있지?"
한효월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천무가 눈을 번쩍 떴다.
"칠십 리가량 떨어진 산 아래 협곡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리 오라고 할까요?"
한효월은 시선을 돌려 그를 보았다.
"그럴 필요는 없다. 너는 지금 내려가서 그들과 함께 내가 말한 곳으로 출발하도록 해라."
"사숙께서는?"
"나는 지금 바로 출발하겠다. 그들을 이끌고 가능한 빨리 내 뒤를 따라오되, 누구도 너희들의 움직임을 눈치 채게 해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천무는 한효월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전과는 달리 그의 움직임은 유령과 같았다.
"가자."
한효월도 그 자리를 떴다.
그들이 있던 자리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그가 암중에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은 감천형조차도 알지 못했다. 그가 이렇게 모든 상황을 감천형에게 맡기고 그 처리를 지켜본 것은 그의 사후를 대비해서였다. 자신이 계속해서 모든 것을 처리하면 감천형이 클 수가 없게 된다. 이런 일을 감천형이 처리하게 된다면 그의 입지가 굳어질 뿐 아니라, 자신이 없어진 다음에도 대임을 맡을 수가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그러한 고심(苦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최소한 아직까지는…….
* * *
"뭐라?"
개왕은 어이가 없어 눈을 크게 떴다.
"저도 그 자리에서 처음 알았습니다."
"너까지 속였더란 말이냐? 봉신지약을 이미 가지고서?"
개왕이 미간을 찡그렸다. 은은히 노기가 드러났다.
"좀 늦게 알게 되었던 거지요. 워낙 질풍처럼 느닷없이 일 처리를 해서…… 아마 미적거리면서 뒤를 따르고 있었던 것이 그간 암중 작업을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고려검왕과 요동권왕, 그리고 전대 서역법왕까지 한편으로 끌어들이고 있을 동안 너는 그것도 모르고 무엇을 했더란 말이냐?"
황엽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도 이번 일은 사실 뒤통수를 맞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무척 기분이 나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천생이 편협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럴 만한 사정이 있으리라 치부하고 말았다.
하지만 뒤늦게 당도해 사실을 알게 된 개왕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대노했다. 만약 한효월이나 감천형이 앞에 있었다면 사생결단을 냈을는지도 모를 격노(激怒)였다.
"그들은 한편입니다. 같은 배를 탄……. 그들까지 감시할 수야 없는 일이 아닙니까? 그리고 누가 하든 강호를 위한다면 어차피 주체가 누가 되든지 큰 상관은……."
"닥쳐라!"
개왕이 소리쳤다.
"그 따위 소리를 해가지고 어떻게 개방의 성세를 볼 수가 있겠느냐?"
"그 말씀은?"
황엽의 안색이 굳어졌다. 누가 주도권을 가지고 가는가를 따진다면 이미 대의를 위해서라고 하기 힘들다.
대의가 아니라 개방의 성세를 위해서 움직인다면 행동 자체가 달라야 한다.
그는 아직까지 그렇게 움직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볼 필요 없다! 나는 사심을 가지고 궁가방을 만든 게 아니다. 우리 모두는 이 어려운 시기에 서로를 믿고 힘을 합쳐야
한다. 드러나지 않은 자들. 용화회가 얼마나 무서운 자들인데 그 따위 얕은 수를 써서 주도권을 잡으려 한단 말이냐? 그런
행동으로 우리들의 협동에 금이 가면 그 결과가 어찌 될 줄 알고 그런 짓을 해!"
그의 노호에 일대가 겁에 질려 떨었다.
"감 맹주가 죄송하다고 잘 말씀드려 달라고 하더군요."
"말씀드려 달라?"
개왕의 눈썹이 더욱 곤두섰다.
"제놈이 와서 하는 말이 아니라, 겨우 너를 시켜서 말이냐? 으핫하하하…… 이놈이 과연 무슨 속셈인지 내 직접 만나봐야만 하겠다."
"예상대로군요."
"……?"
난데없는 황엽의 말에 개왕은 의아한 빛으로 그를 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냐?"
"감 맹주가 말하길 개왕께서 진노하실 테니 잘 말씀드려 주시고, 그래도 믿고 부디 전면에 나서시지 말고 계속 뒤에서 지켜봐 달라고 하더군요."
황엽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렇게 되면 암중에 숨어 지켜보고 있는 자들이 신경이 쓰여서 행동을 조심하게 될 테니 적을 억제할 수 있는 효과가 있겠다고……."
"나더러 암중에 숨어서 적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라? 상의 한마디 없이?"
"그렇습니다."
"고얀 노옴!"
개왕의 콧김에서 불덩이가 만들어지는 것 같았다. 한참을 씩씩거리던 그는 어이가 없는 듯 머리를 흔들어댔다.
"대체 그 맹랑한 계획을 누가 세웠다더냐?"
"기본 계획은 아마 한 공자가 세웠겠지요. 시행은 감 맹주가 하고."
"허참……."
개왕은 다시금 머리를 흔들었다.
"괘씸한 놈이로고. 이미 일을 벌여놨으니 깽판을 치기도 뭣하고 어쩔 수 없이 뒤를 따라야만 하게 만들었단 말이지? 고얀 노옴…… 네놈이 보기에는 어떻더냐?"
"뭐가 말씀입니까?"
"만박노유라는 자. 그에게서 이상한 걸 느끼지 못했느냐?"
"만박노유?"
황엽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는 순수하게 봉신방을 찾고자 하는 열망에 노구를 무릅쓰고서 나선 걸로 보였습니다만?"
"흥! 순수 좋아하는군! 놈도 용화회의 회원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비록 그의 무공이 별게 아니라고 알려졌지만 그건 시험해 보지 않으면 모를 일. 한시라도 눈을 떼면 안 된다고 감천형이 놈에게 전하도록 해라."
"뒤를 따르시겠습니까?"
"그러지 않으면? 지금 내가 거기에 나타나 따라붙으랴?"
"……."
황엽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감천형이 한 말과 꼭 같이 되었던 것이다. 불같이 화를 내시겠지만 잘 설득하면 결국 납득하실 것이라고.
"놈들은 어디 있느냐?"
"곧 출발할 것입니다."
"태백산이라……."
개왕이 턱을 매만졌다. 생각에 잠기는 것이다.
* * *
한효월이 무산 신녀봉에 나타나기 하루 전.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반나절 하고 조금 더 시간이 보태진 때다.
의창(宜昌).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길에서 보자면 가장 중요한 곳 중 하나. 그 의창의 객잔 등봉루(登鳳樓)에 주자미는 머물고 있었다.
주변에는 호위무사들이 엄중히 경계를 하고 또한 암중에는 보구회의 강시군이 숨어 있어 겉보기와는 달리 용담호혈이 바로 그곳이다.
후원 별채.
이층으로 이루어진 그 별채의 이층 창가에 서서 바깥을 바라보는 주자미의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푸르고 붉은 계절의 변화도, 이층에서 바라보이는 장강의 도도한 흐름도 그녀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딸.
제대로 돌보지도 못했던 그 딸을 구하지 못했고 세상에 나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무력감만이 전신을 지배하고 짓누를 뿐이다.
"미안해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창가에 섰던 그녀가 뒤로 돌아섰다.
침상 옆에는 한 사람이 석상과 같이 우뚝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독고해.
바로 그다.
"나는 당신의 기대를 저버린 것 같군요. 당신이 죽음으로서까지 지키려고 했던 것들을 나는 아무래도 지킬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당신의 그 고심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잠을 이룰 수 없지만…… 내 자식조차 지키지 못한 주제에 어찌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있겠어요?"
그의 앞에 선 그녀가 괴로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그러나 독고해는 말이 없다.
그저 묵묵히, 또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다.
주자미는 손을 내밀어 떨리는 손길로 그의 볼을 어루만졌다.
가시 같은 수염이 가득하던 그의 뺨에는 여전히 거칠한 느낌이 남아 있지만 생기는 없다. 금방이라도 저 굳게 닫힌 입을 열고서 호탕하게 껄껄 웃어댈 것 같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저 까칠한 수염을 질색을 하는 그녀의 뺨에 대고 비벼댈 것 같지만…… 그저 딱딱히 굳은 바위 같은 인형이 거기에 존재하고 있을 따름이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아무래도 당신은 잘못했어요. 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녀가 입술을 물었다.
바로 그때다.
"그렇지 않습니다."
난데없이 들려오는 소리.
"누구냐!"
놀란 주자미가 황급히 뒤로 돌아섰다.
"죄송합니다, 놀라게 해드려서. 예를 갖출 수 있는 시간이 없어서 그랬으니 양해하여 주십시오."
나타난 사람이 그녀에게 포권하면서 고개를 숙인다.
"한 공자……."
나타난 사람을 본 주자미가 뜻밖이라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했다.
나타난 사람은 바로 한효월이었다.
"예가 아님을 알지만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부득이 월장을 하여 침입하였으니 해량(海量)해 주시길."
한효월이 다시금 손을 맞잡아 보였다.
"언제 여기에?"
그를 본 주자미가 놀라 물었다.
"방금 왔습니다. 바로 무산으로 출발할 겁니다."
"정말 신출귀몰하는군요. 정 대인이 사람을 풀어 사방을 물샐틈없이 감시하고 있는데 전혀 소식을 듣지 못했음에도 어느새
이곳까지 오다니……."
"과찬의 말씀을. 그보다 정 대인께서는 무산으로 가실 겁니까?"
"글쎄요. 잘 알지 못하지만 이미 시작한 일이니 아마 나와 함께 가게 되겠죠."
"어쩌면 그렇게 되지 않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상황이 어떻게 될런지는 소생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만약 마마께서 혼자
움직여야 한다면 무산으로 가지 말고 태백산으로 가십시오."
"태백산?"
얼떨떨한 빛으로 주자미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한효월은 품에서 한 통의 봉서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것은 반드시 태백산에 당도하셔서 보셔야 합니다. 그전에 보시면 안 됩니다. 이것은 마마께서 미처 생각하지 않았던
변괴(變怪)가 일어나면 그때 보셔야 됩니다."
"미처 생각하지 않았던 변괴라구요?"
"예. 그게 무엇인지는 그때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을 보시기 전까지는 누구도 믿지 말아야 합니다. 변괴가 일어나면 여기 적힌
대로 하시면 상황을 호전시킬 수 있을 겁니다."
말을 하던 한효월은 문득 안색을 굳혔다.
"이번 태백산행은 많이 흉험할 겁니다. 어쩌면 천하의 주인이 결정될런지도 모르고 세상이 도탄에 잠기게 될런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전에 제가 경아를 구해낼 테니 조금만 더 참아주십시오."
"경아가 어디 있는지 알아냈나요? 그 애가 지금 태백산에 있어요?"
주자미의 눈에서 갑자기 불꽃이 일었다.
"아무것도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씀만 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제가 여러 가지로 살펴보았는데 죽음
가운데 한 가닥 생기를 잡을 수도 있어서 제가 너무 늦지 않는다면 경아는 구해낼 수가 있을 겁니다."
"정말 그런가요? 정말 그럴 수 있겠어요?"
그녀가 한효월의 앞으로 다가왔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부탁해요, 한 공자. 그 아이의 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못하지만 아마 이 자리에서 말할 수 있다면 나와 같이 말을 할 거예요.
부디 내 딸아이를 구해달라고."
한효월은 시선을 돌려 무심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독고해를 바라보았다.
일세의 영웅은 아직도 당당했다.
"후우……."
한효월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마께 한 가지 부탁을 드릴 게 있습니다. 조정의 공주마마가 아니라 저분의 부인으로서, 제 형수님께 드리는 부탁입니다."
"무엇인가요?"
"저는 이번 태백산 일전에서 아마 생을 마치게 될 것 같습니다."
주자미의 안색이 돌변했다.
"무, 무슨 소리예요? 한 공자의 나이가 얼마인데? 게다가 한 공자의 능력이라면 누가 한 공자를 해할 수가 있겠어요? 설마 경아
때문에…… 안 돼요! 그럴 수는. 나와 같이 갑시다. 내 비록 모자라지만 호정대를 비롯 관군을 모두 움직여서라도……."
"그것과는 상관없습니다."
한효월은 머리를 흔들었다.
"하늘이 정한 바 수명이 그러하니 인간이 어찌 그것을 되돌릴 수가 있겠습니까? 제 사후 대국은 감 사질이 맡게 될 겁니다. 만에
하나 감 사질이 잘못된다면 개방의 황 방주가 그 대임을 맡게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만 모든 것은 그 봉서에 따라 적임자를
도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태백산 일전 이후의 혼란에는 형수님의 도움이 절대적이 될 테니까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주자미가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한 번도 자신이 둔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젊은 사람의 앞에 서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것만 같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거나 놀라거나 그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음을 매번 느껴야만 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렇지 않더니 만날 때마다 이 사람은 사람을 놀라게 한다.
한효월을 보면서 그녀는 천재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한효월이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벌써 가려구요?"
"예,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마마, 정화공께서 뵙기를 청하고 계십니다."
"가봐야 할 때가 된 것 같군요. 먼저 가보겠습니다. 제가 다녀갔다는 말은 정 대인께 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리고 경아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가 반드시 구하겠습니다. 그럼!"
한효월은 다시금 그녀에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한 공……!"
소리없이 사라지는 그를 보며 주자미는 그를 부르려고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바람처럼 표홀한 그를 잡아서 뭘 어찌하겠다는 말인가.
그는 마치 나타나지 않았던 것만 같다.
손에 들린 봉서만이 그가 방금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을 말해 주고 있을 따름이다.
"마마……."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라고 해라."
주자미는 대청에서 정화를 만났다.
"돌아간다구요?"
주자미는 미간을 찡그린 채로 앞의 정화를 노려보았다.
"황상께서 부르시니 어쩔 수 없이 잠시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상황이 어떤지 보고를 하긴 한 건가요?"
"물론입니다. 하지만 다녀가라는 교지를 내리셨으니 어쩌겠습니까? 가능한 한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제천교주가 이미 죽었고 나머지에 대한 것도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요? 그자의 시체도 찾지 못했는데!"
"시체는 찾지 못했지만 그 상태에서 살아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판단됩니다. 그가 살아 있다면 이미 뭔가 움직임이 있었겠지요. 너무 심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천하의 강자가 모두 다 모여들었어요. 듣기로는 지난 백 년 이래 가장 큰일이 지금부터 일어날 거라고들 해요. 당연한 것이 천하에 흩어져 있는 나라를 세울 만한 힘을 가진 자들인 천하십왕이 모두 모여들었는데 어찌 조용할 수가 있겠어요? 그런데 심려를 말라니?"
"가능한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황상께서 일단 소환하신 이상, 어쩔 수 없음을 공주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정화가 난감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의 상황이 어떤지 잘 말씀드리고 대국을 살펴야 할 게 아닌가요? 저들 중에서 만약 누구 한 사람이 득세하여 나머지를 지배할 수 있게 된다면 대명의 국세가 흔들릴 수도 있음을 설마 모르고 있단 말인가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후우…… 황상께서 지급이라고 단서를 다신 이상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예외가 될 수가 없습니다."
정화가 난감한 빛으로 말을 받았다.
"당신도 말인가요?"
주자미의 추궁에 정화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신의 권력이라는 것은 황상의 명에 의해서 생기는 겁니다. 그분의 명을 거역하고서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
주자미는 입을 다물었다.
황제의 권위는 가히 절대적이다.
누구도 그의 권위에 도전할 수도, 그래서는 아니 되었다. 죽기를 각오하기 전에는.
그것을 잘 알고 있는 그녀이기에 결국 입을 다물 수밖에.
"신이 간다고 할지라도 대국에 지장이 생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좀 있으면 신이 없을 동안 지휘할 사람이 올 테니까요."
"누가 온다는 거죠?"
"왕 시위(王侍衛)가 올 겁니다."
그의 말에 주자미의 안색이 달라졌다.
"그가 온단 말인가요? 그럼 홍무천위(洪武天衛)를 이끌고 올 거라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왜 지금에서야 그가?"
정화의 안색이 침중히 굳어졌다.
"황상께서는 봉신지약의 실체를 아시고는 그것이 세상에 드러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원하지 않다니…… 그런다고 뭐가? 설마 하니 왕 시위가 홍무천위를 이끌고 천하십왕을 공격이라도 하겠다는 것이오? 말도……."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그걸 가능하다고 생각한단 말이오?"
주자미가 어이가 없다는 듯 안색을 굳히고 코웃음 쳤다.
"쉽지 않지요. 하지만 봉신지약의 주인을 없게 하는 것이 꼭 천하십왕 모두를 죽이거나 공격해야만 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봉신지약만 없애면 가능한 일이지요. 전설은 전설로 남아 있을 때 가치가 있는 법이니까요."
정화가 미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황상께서는 공주마마께서 왕 시위를 도와주기를 바라십니다."
"내가 가진 힘은 황궁의 것이 아니에요. 그는 죽음으로서 무림을……."
정화는 굳게 문이 닫힌 그녀의 침실을 힐끔 보고는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분이 대협임은 누구나 알지요. 하지만 그도 대명의 신민(臣民)입니다. 황상의 신하이며 백성이니 죽어서라도 황상께 봉사함은 이치를 따져도 잘못된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는가요?"
주자미가 안색을 차갑게 굳혔다.
"신은 감히 황상의 용심(龍心)을 전했을 따름입니다."
정화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
주자미는 입을 다물었다.
왕 시위.
그의 이름은 그녀도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황제를 지키는 사람이 그다. 그가 거느린 홍무천위는 세상에 그 실체를 드러낸 적이 거의 없다.
아는 사람은 모두 죽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타날 때마다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시체가 되었다.
죽이기 위해서만 그들은 나타난다. 황위에 오른 홍무제가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정예고수들만을 모아 만든 직속 호위 부대가
바로 홍무천위이며, 세상에 알리지 않은 것은 그들이 척살만을 임무로 하는 까닭이다.
단순히 호칭을 왕 시위라 하는 그 수장(首將)은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 오직 황제의 명만을 받을 뿐.
그들을 보냈다는 것은 황제가 유사시에 모두를 죽여서라도 봉신지약을 없애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아무리 그들이라도 천하십왕을 상대로 한다면…….'
주자미의 안색이 무거워졌다.
그러던 그녀는 문득 안색이 달라졌다.
어쩌면 한효월은 이런 상황마저 짐작하고 있었다는 것일까?
설마…….
* * *
동정호.
물빛은 탁하다. 하긴 수백 리 대호가 어찌 심산의 옹달샘처럼 맑을 수가 있겠는가. 수지청즉무어(水至淸則無魚)라는 말처럼 이 탁해 보이는 동정호에는 오히려 수많은 물고기들이 살고 있어 어민들의 든든한 배경이 된다.
그 탁해 보이는 동정호도 노을이 지면 붉어진다.
모든 물살이 황금을 뿌려놓은 듯 붉고 누렇게 뒤채고 하늘은 온통 붉은빛 구름이 장대히 세상을 누른다.
거기에 낚시를 드리운 자 하나 있으니 말 그대로 천연입화(天然入畵)다.
퐁퐁…….
낚싯대가 요동을 한다.
물살이 둥글게 둥글게 파문을 일으키면서 포말을 튕겨낸다. 팽팽히 당겨진 낚싯줄을 보면 필시 큰 고기가 물린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이 낚시꾼은 낚싯대를 낚아챌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끄러미 낚싯줄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고 있음에도, 낚싯대를 손에 쥐고만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러질 듯 휘어져 물속에 잠기던 낚싯대의 끝이 문득 천천히 위로 솟구쳐 오르는 것이 아닌가. 마치 기지개를 켜듯이,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잉어 한 마리가 낚싯대에 매달려 올라오기 시작했다. 버둥거리며.
피잉…….
갑자기 낚싯대 끝이 하늘로 불끈, 치솟았다.
잉어가 하늘로 날아오른 것은 물론이다.
잉어는 낚싯줄의 흔들림에 따라 춤을 추듯이 요동을 쳤다. 이리 뒤집히고 저리 뒤집히고 마치 누가 허공에서 잉어를 가지고 장난치는 것만 같아 보였다.
"아!"
탄성이 들려왔다.
그 소리가 들리자 모든 것이 끝나 버렸다.
허공에서 춤을 추고 있던 잉어는 다시금 물속으로 들어갔고 낚시꾼은 낚싯대를 버리고 일어섰다.
대로 만든 삿갓을 쓴 사람, 그 아래 드러난 얼굴은 바로 좌백이었다. 내공을 이용하여 길게 늘어진 낚싯대의 줄을 조종했던 그의 얼굴에는 이미 지난날의 그 무기력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내공을 모두 회복한 건가요?"
다시금 예의 음성이 들려왔다.
"대충은 그런 것 같소."
미미한 웃음을 머금은 좌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와아!"
여인, 종소교가 펄쩍 뛰어 그에게 매달렸다.
"엇~!"
좌백이 당황해 허둥거린다.
"그럼 그렇다고 진작 이야기를 하지, 오늘 같은 날 어떻게 그냥 있을 수가 있겠어요? 당장 가서 준비를 해야지!"
활짝 웃어 보인 그녀가 활달하게 뛰어 사라졌다.
그녀의 그런 뒷모습을 보는 좌백의 얼굴에 웃음이 떠오른다. 언제라도 보는 것만으로 흐뭇한 여인. 그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난다. 한 여인에 대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정말 상상조차도 해본 적이 없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의 얼굴이 굳어진다.
그가 바라본 노을은 시뻘겋게 동정호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세상이 온통 불타고 있는 듯 보인다.
어쩌면 나 혼자 너무 호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룰루~"
종소교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그냥 간병을 하는, 돌봐줘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언제인가부터 그것이 즐거워졌고 그가 고뇌하면 괴로웠고 그가 웃는 것을 보면 즐거워졌다. 대체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그를 보면 좋았다.
그에게 힘이 되고 싶었다.
어이없지만 가끔은 그가 낫지 않았으면, 그대로 있었으면 하고 바랬을 때도 있었다. 그가 자신의 곁을 떠날까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옆에 그가 없다는 것이 두려워졌다는 것이 옳으리라.
하지만 건강해진 그를 보자, 웃는 그를 보자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가짓수야 많지 않지만 정갈한 반찬이 상 위에 놓여졌다.
그리고 좌백은 종소교와 함께 그것을 맛있게 먹었다. 체력도 회복되고 무공도 거의 회복되었다. 그의 무공은 한효월의 도움으로 비약적으로 높아졌으므로 그의 무공이 거의 회복되었다 함은 이미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높아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먹는 양도 많아서 종소교는 그런 그를 돼지라고 불렀다.
누가 감히 천수단혼 좌백을 돼지라 부를 것인가.
하지만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좌백은 웃기만 했다.
누가 보아도 그들은 행복한 한 쌍처럼 보였다.
좌백은 설거지를 하는 그녀를 마당에서 바라보았다. 반쯤 닫힌 문틈으로 간혹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멀리서 보는 좌백의 안색은 무거웠다.
'당신을 떠나고 싶지 않지만 나는 떠나야만 하겠소. 교매. 당신을 책임지겠다는 말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돌아와서 하겠소. 당신이야말로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한 여인이오!'
그의 눈빛이 일렁였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무공의 회복.
그런데 한효월이 시킨 대로 하자 무공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고 좌백은 침식을 잊고 거기에 매달렸다.
한효월은 그에게 있어 단순히 사문의 어른, 사숙이 아니었다. 그에게 새 생명을 준 사람이었다.
그가 자신의 죽음을 담보로 천하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이렇게 여기에 웃으며 있을 수는 없었다.
살아서 돌아올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그때 그녀에게 말하리라.
당신을 사랑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