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四首 신녀지회(神女之會)
-감천형 일어서다
적과의 한시적 동침(同寢)이 시작되다
남해용왕은 신녀묘 앞에서 감천형을 맞았다.
신녀묘 주변으로는 그의 수하들과 섞여서 라마들의 모습도 간간이 보이고 있었다.
그들이 연합한 것을 감출 것도 없으니 감천형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서역법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그는 아무 말 없이 감천형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하나 우뚝 선 그에게서는 기세가 무럭무럭 일어나 감천형을 짓눌러 왔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숨도 쉬지 못할 기세였다.
무언의 재촉인 것이다. 왔으면 말을 하라는.
"답을 하려고 왔습니다."
감천형이 입을 열었다.
'답?'
의아한 빛이 남해용왕의 눈에 일순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기억으로는 그가 감천형에게 뭘 물어본 적도 없었고 그럴 일도 없었다.
그런데 답이라니?
"이곳에서 또 하나의 봉신지약이 나타나길 기다리고 계신 걸로 압니다만, 그렇지 않습니까?"
그 말에 남해용왕의 안색이 달라졌다.
"그럼 네가 다른 하나를 가지고 있단 말이냐?"
그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어 물었다.
"그렇습니다."
너무도 태연한 감천형의 말에 남해용왕의 눈빛이 빛을 뿜기 시작했다.
"어디 있지?"
"그런 위험한 물건을 그냥 들고 올 수야 없는 일이지요. 서로 조건이 맞아야 내놓을 수 있음을 설마 모르신단 말씀은 아니실 텐데?"
"으흐흐…… 네놈이 감히 본왕의 앞에서 조건을 논하겠단 말이냐?"
순간.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가운데 한 가닥 경기가 소리도 없이 남해용왕에게서 쏘아져 감천형을 휘감았다.
팡!
감천형의 앞에서 맹렬한 폭음과 함께 흙먼지가 크게 일었다.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바닥이 깊이 패이고 회오리바람이 좌우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감천형은 어깨를 부르르 떨다가 반 걸음쯤 뒤로 물러났을 뿐, 침착한 표정을 변치 않았다.
"과연 듣던 대로 놀라운 능력이군요. 나를 이 자리에서 죽일 작정이십니까?"
그의 태연한 태도에 남해용왕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의 심중에는 놀람이 들끓고 있었다.
그의 심인상인(心印傷人)의 절학을 맞이하고도 불과 반 걸음이라니!
"죽일 생각은 없다. 하지만 감히…… 본왕의 앞에서 협상을 하고자 하다니…… 그러고도 무사히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느냐?"
"오고자 해서 왔으니, 가고자 한다면 갈 수 있는 것. 강제로 막고자 한다면 뚫고 나갈 수밖에. 하지만 아직 답을 듣지 않았으니
지금은 갈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감천형은 당당한 모습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남해용왕이 아무리 무섭게 노려보아도 감천형의 기세를 꺾을 수는 없었다.
'대체 이놈들은 독고해나 그 어린 놈(=한효월)이나 이놈이나 어떻게 해서 한 놈도 시원찮은 놈이 없는 거냐? 이대로 둔다면 향후
천하는 모조리 이놈들의 것이 되어버리고 말 게 아닌가?'
문득 그의 눈에 살기가 동한다.
그것을 보자 감천형은 갑자기 껄껄 웃었다.
"듣기로 남해용왕이 효웅의 기질이 있어서 더불어 논할 만한 사람이라고 하여 찾아왔더니, 이제 보니 속 좁은 범부(凡夫)에
불과하니 내 어찌 이 자리에 더 머물 필요가 있을까?"
그는 양손을 맞잡아 예를 표했다.
"감 모는 이만 물러가겠소."
"감히…… 네 마음대로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냐?"
"못할 것 같소?"
감천형의 말투도 변했다.
"으하하하…… 네놈 혼자서 말이냐?"
그 말에 감천형이 미간을 찡그렸다.
난감한 듯한 표정이지만 실제로는 그 표정이 자신감에서 우러나오는 것임을 부해옥은 알아볼 수 있었다.
'대체 저 사람은 뭘 믿고 저렇게 뻣뻣하게 나오는 거지?'
부해옥은 신기한 눈으로 감천형을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사내다움이 특별한 사람이다.
사내를 가소롭게 보던 그녀에게 있어 한효월 이후 다시 만난 특별한 사내인 것이다.
"내가 혼자라고 누가 그랬소?"
그의 말에 남해용왕이 냉소를 흘렸다.
그 순간.
"본 방주도 끼워주시오."
한 사람이 감천형의 옆으로 날아들었다.
황엽이다.
"하하…… 고작 거지두목 하나를 더한다고 달라질 것 같으냐?"
"두목에다 왕초를 더하면 그리 만만한 것도 아닐 것이오.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어찌 모든 걸 단정하려고 하시오?"
감천형이 말한 왕초가 개왕임을 안 남해용왕이 미간을 찡그렸다. 개방은 몰라도 개왕이 궁가방을 이끌고 왔다면 머리 아픈 일이다.
주변에 몰려든 자들이 어찌 한둘이겠는가?
잠시 감천형을 노려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좋아……. 거지왕초의 체면을 봐서 일단 네 말을 들어보기로 하지. 네가 또 하나의 봉신지약을 가졌다는 것을 어떻게 믿으라는
게지?"
"봉신지약은 두 개.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지면 감응을 한다고 들었소. 내가 신호를 올리면 봉신지약을 가진 사람이 가까운 곳에
이르게 될 것이오. 그럼 자연히 확인이 될 테지."
태연한 감천형의 말.
하긴 이 상황에 그가 이렇게 나타나서 거짓말을 해서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게다가 이렇게 나타나서 나한테 봉신지약이 있소, 라고 밝히는 것 또한 왜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남해용왕이다.
"좋아, 신호를 보내봐라."
남해용왕은 감천형이 상대하기 어려운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휘익!
감천형이 길게 휘파람 소리를 울려냈다.
날카로운 그 소리가 울렸지만 호응이나 어떤 다른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남해용왕이 미간을 찡그렸다.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것이냐?"
순간.
"감응이 있소!"
다급한 외침과 함께 만박노유가 신녀묘에서 뛰쳐나왔다.
움켜쥔 그의 가슴팍이 진동하는 가운데, 기묘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음은 누구라도 볼 수 있었다.
"정말이오?"
"보고도 모르겠소? 봉신지약이 서로를 느껴 부르고 있소! 분명히 십 리 이내에 또 다른 봉신지약이 있는 것이오!"
만박노유가 흥분한 빛으로 소리쳤다.
가슴을 움켜쥔 그의 손, 그 옷 밖으로 신비로운 광채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손가락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옷 속에 있는 봉신지약이 요동을 치는 것이다.
"어디 있느냐?"
남해용왕이 들뜬 모습이 되어 다그쳐 물었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소."
감천형이 말했다.
"먼저? 거지들을 믿고 네가 감히 본왕의 앞에서 조건을 논하겠다는 것이냐?"
남해용왕의 눈에서 사나운 빛이 쏟아졌다.
"날 죽인다고 해서 봉신지약이 여기 나타날 것 같소?"
"십 리 이내에 봉신지약이 있다면 찾지 못할 것도 없다."
남해용왕이 냉소했다.
"움마니반메후움…… 물론이지……."
진언을 외며 서역법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전력을 다한다면 원군이 이르기 전에 두 사람은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높았다.
황엽은 감천형이 대체 무슨 일을 하고자 하는지 납득키 어려웠다. 굳이 이렇게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그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고, 만난 자리에서 갑자기 도와달라고만 하였었다.
자세한 것은 일이 끝난 다음에라는 사죄의 말과 함께.
그가 긴장의 빛을 드러내며 암암리에 공력을 끌어올리는 순간이다.
"나이 어린 후배를 능멸하는 행태는 여전하군."
냉소가 들려왔다.
'이 소리는?'
안색이 달라진 남해용왕이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자 한 사람이 팔짱을 낀 채로 나무에 기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과의 거리는 칠팔 장. 숲 속이라 그가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는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의 모습을 본 남해용왕의 눈빛은
차가워졌다.
"한자리 끼겠다는 겐가?"
나타난 사람, 고려검왕은 냉랭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별로. 다만 몇 푼 되지 않는 힘으로 남을 누르려는 구태의연한 작태가 보기 싫다는 것뿐이지. 그보다 먼저 자신의 힘을 헤아리는
게 어떨까 싶기도 하고……."
그는 말끝을 흐리며 입을 닫았다.
나뭇가지에 선 그의 신형은 미동도 없지만 남해용왕은 곤란해졌다. 고려검왕은 천하십왕 중에서도 신비한 사람이고 능력자다.
그가 가세한다면 상황은 쉽게 예측하기 어렵다.
그가 서역법왕과 눈을 마주한다.
'내가 그를 맡지.'
서역법왕이 전륜법음(轉輪法音)으로 전음을 보내왔다. 일종의 심어지법으로 서역불문의 절학이다.
서역법왕이 그를 맡고 자신이 손을 쓴다면 승산이 없는 건 아니었다. 상대는 감천형과 개방의 방주. 저들의 원군이 온다 하더라도
그전에 끝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그런 저울질은 이내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손을 쓰고 싶습니까? 검왕 선배를 한 분이 맡고 다른 한 분이 우리 둘을 요리하는 것으로? 자신있습니까?"
감천형이 불쑥 허를 찔러왔던 것이다.
이렇게 단도직입으로 묻자 제아무리 남해용왕도 멈칫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 이어지는 말.
"그래서 무슨 이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런 간단한 것도 감안하지 않고 이곳에 나타났으리라 생각했다면 정말
실망스럽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천하의 남해용왕이 그처럼 용렬한 사람이었다니……."
"용렬이라?"
남해용왕은 멈칫하다가 이내 냉소를 흘리며 눈에서 살기를 드러냈다.
"과연 네가 우리를 감당할 수 있을 듯싶으냐? 먼 데 있는 물로는 가까운 곳의 불을 끌 수 없는 법이거늘……."
"내가 이곳에 올 때는 모든 계산을 하고 왔다는 것을 다시 말하지요. 그리고 나는 두 분 외에 또 다른 사람이 여기에 가세하고
있음도 알고 있습니다."
그 말에 남해용왕의 안색이 다시 달라졌다.
"하긴, 천하십왕 중 세 사람 이상이 손을 잡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와중에 봉신지약을 가로채 갈 엄두를 낼 수 있었겠습니까?"
문득 괴이한 웃음이 감천형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런 것을 알면서도, 내가 여기에 왔는데도…… 그래도 나를 처리하고 봉신지약을 가져갈 수 있다고 믿는다면 실로 가소로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무후(武侯)가 이 자리에 와도 세 치 혀로 상황을 타개할 순 없을 것이다. 본왕은 공성계 따위에 당할 사람이 아니다."
남해용왕은 여전히 저울질을 끝내려 하지 않고 코웃음 쳤다.
"공성계? 그럼 한번 해봅시다. 당신이 나를 공격하는 동안에 봉신지약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흐흐…… 백 리, 천 리 밖에 간들 네놈을 족치면 자연히 알게 되겠지."
"저런. 미안하게 그럴 수는 없을 겁니다. 그분은 나로서도 잡을 수가 없고…… 무공으로도 그분을 이길 수가 없으니까요.
아마 법왕께서도 잘 아는 분일 겁니다."
감천형이 서역법왕을 힐끔 보면서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한효월!"
서역법왕이 소리쳤다.
"놈이 봉신지약을 가지고 있단 말이냐?"
그는 이내 머리를 저었다.
"놈이 가졌던 하나는 이미 여기에 있는데 무슨 헛소리로 본불을 속이려는 것인고! 고얀 중생이로다!"
서역법왕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러자 강력한 기운이 소리도 없이 감천형을 무찔러왔다.
"정말 해보자는 것이오?"
감천형은 맹렬한 기세로 가슴팍 어림에서 패도를 뽑아냈다. 그리고 그 겨눈 패도에서 막대한 도기가 쏟아져 나가 서역법왕이
은밀히 밀어낸 밀종유가진력에 부딪쳐 갔다.
피할 수도 있고 초식으로 흩트리면서 예봉을 피할 수도 있을 것임에도 그는 그러지 않았고 정면으로 맞섰다.
콰쾅!
폭음이 감천형의 앞쪽에서 일었다.
맹렬한 기운이 일며 사방을 회오리의 와중으로 몰아넣었지만 정작 그 진원지인 감천형은 고리눈을 부릅뜨고서 앞을 노려보고 있을
뿐, 조금도 뒤로 물러나지 않은 채로 수중의 패도를 가슴에 세우고 있었다.
'놈의 무공이 저렇게 높다니?'
그가 서역법왕의 일격을 그 자리에서 받아내자 남해용왕은 내심 크게 놀랐다.
감천형의 무공이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공격을 당하자 황엽은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서면서 그를 보호하고 나섰다.
황엽에게서도 강력한 기세가 구름처럼 뭉게뭉게 일어나고 있어 결코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감천형은 날카로운 눈으로 남해용왕과 서역법왕을 노려보았다.
"당신들은 나를 죽인다 할지라도 봉신지약을 얻을 수 없소. 게다가 아마 그럴 수도 없을 것이오."
그의 말에 남해용왕의 안색이 음침히 가라앉았다.
"그래? 시험해 보겠나?"
그가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때 감천형이 입을 열었다.
"어부지리를 주고 싶소?"
그 말에 남해용왕의 신형이 멎었다. 그의 사나운 눈은 음침한 빛으로 감천형을 쏘아보기만 한다. 무언의 재촉인 셈이다.
"당신들의 힘은 이미 다 드러나 있소. 그럼에도, 내가 여기 온 것을 보고서도 헛된 욕심을 부린다면 용화회가 좋아하겠지. 그들이 힘이 없어서 봉신지약을 보고도 그냥 두었다고 생각하시오?"
"……."
남해용왕은 입을 열지 않았다. 용화회라는 말을 듣자 주춤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그만두거라.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저 늙은이는 탐욕으로 눈이 멀어서 형세 판단도 못할 지경이니 내 말대로 모조리 쓸어버리고
봉신지약을 뺏아버리면 된다."
다시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고 말한 사람이 감천형의 옆으로 걸어왔다.
그냥 걸어오는데 한 걸음이 삼사 장 거리를 가로질렀고 대체 어떻게 그 경계를 뚫고 왔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또 당신이군……."
그를 본 남해용왕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그때 깨우쳐 줘도 아직 깨닫지 못하니 미련하긴 소나 다름이 없군. 과연 당신 뒤에 누가 있는지 한번 패볼까? 나오나 안 나오나
보게."
나타난 사람의 입심에는 사정이 없다.
횃불 같은 눈빛을 부라리고 있는 그 사람은 바로 요동권왕이었다.
그가 나타남으로 해서 절정고수의 숫자에서는 대번에 문제가 생겼다. 아직 절대적인 숫자는 남해용왕 측이 많다고는 하지만.
뿐만 아니라 선녀평으로 올라오는 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가 싶더니 한 사람이 다급히 나타나 남해용왕을 향해 허리를 굽히면서 전음으로 뭔가를 보고했다.
적이 나타났다는.
그 말이 아니더라도 여기저기 숲 속에 군웅들과 거지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 이미 적들이 코앞에 당도해 있음을 볼 수가 있었다.
"아직 해보고 싶으시오?"
감천형이 냉랭히 웃어 보였다.
"……."
내색코자 하지 않아도 남해용왕의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당신이 원한다면 아예 지금 봉신지약을 지닌 사람을 이곳으로 불러서 보여드릴 수도 있소. 아니…… 그럴 필요도 없겠군. 이미 오셨으니……."
그의 말에 남해용왕의 눈빛이 번쩍 빛을 발했다.
그것은 서역법왕도 마찬가지였다.
"아!"
운중연 부해옥이 탄성을 터뜨렸다.
한 사람이 손을 가슴에 세운 채 절벽에서 허공을 걸어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능공허도의 절정경공을 넘어서는 놀라운
불가의 절학 불존강세(佛尊降世)였고 그 사람은 과연 승복을 입은 승려였다.
"으윽?"
그를 본 서역법왕이 신음을 흘렸다.
너무도 뜻밖이었던 것이다.
나타난 것이 바로 전대 서역법왕이자 그의 사형인 혈불 찰도극, 무명승일 줄이야. 이제는 지난날의 이름을 버린. 그는 한 손을
가슴에 세워 반장(半掌)의 모습이다. 이미 한 팔을 동정호의 일전에서 잃어버린 다음이니 무심한 산상(山上) 바람은 그의 한쪽
소매를 세차게 휘젓고 있었다.
"사제가 아직도 미망에 사로잡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후우…… 노승은 증과(證果)를 미루어둘 수밖에 없었다네. 이제 미망을
끊고 나와 함께 서역으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지금 본왕을 타이르려 하는 겐가!"
서역법왕이 눈을 부릅뜨고 노성을 질렀다.
그는 늘 사형에게 위축감을 느꼈었다. 하지만 그를 암해한 후에 그가 죽었다고 알고 있었고 거기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앞에 나타난 그를 보자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깨닫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그를 화나게 했다.
"사제, 혈불이란 없네. 수미(須彌)에서 보면 형상에 대한 집착이야 뜬구름과 같으니 출가인에게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여기
있는 것은 증과를 기다리는 한 사람의 출가인일 따름이라네."
그러나 그를 보는 무명승의 태도는 고요, 그 자체다.
그것이 서역법왕을 더욱 화나게 했다. 예전이라면 상대가 되지 않을 자신일지 몰라도 지금은, 더구나 그가 한 팔을 잃은 이상
절대로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흥! 정말 아무것도 필요없단 말이오?"
"삶이 소유일진대 허울을 벗는다면 더 무엇이 필요하리오?"
"좋소. 그렇다면 그 삶의 허울을 지금 이 자리에서 벗어보시오!"
서역법왕이 냉소를 터뜨렸다.
"이 자리에서 말인가?"
"그렇소!"
무명승은 미간을 찡그렸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물끄러미 서역법왕을 바라보던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내가 그리한다면 서역으로 돌아갈 텐가?"
흠칫했던 서역법왕은 냉소를 흘렸다.
"그렇소."
"좋네."
무명승은 감천형을 바라보았다.
"감 시주, 일이 이렇게 되어 끝까지 도와주지 못하게 되었으니 송구하구료."
"대사!"
"한 시주에게 전해주시오. 미안하다고…… 그리고 우린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
그는 미미하게 웃음 짓더니 한 손을 내저었다. 그 손에서 한 가닥 섬광이 감천형에게로 날아갔다.
"저, 저……!"
만박노유가 눈을 부릅떴다.
무명승의 손에서 날아가 감천형의 손에 들린 작은 철궤.
그것이 모습을 드러내자 만박노유의 가슴팍이 미친 듯 진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남해용왕이 누군데 그것을 몰라볼 것인가.
"……."
그는 굳은 얼굴로 감천형의 손에 들린 철궤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는 형편이다.
천하십왕 중 둘이 그들에게 있었다. 아니, 어쩌면 나타나지 않은 자들이 또 있을는지도 몰랐다.
한 번의 판단 실수는 천 길 나락을 의미할 수 있어 신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제. 잊지 말게. 고개를 돌리면 피안이란 말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조용한 불호.
가슴을 울리는 불호와 함께 무명승은 고요히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한 손을 가슴에 세운 채로 눈을 감은 그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무엇을 할지 몰라 그를 바라보고 있던 서역법왕의 얼굴이 묘하게 비틀어졌다.
"다, 당신은……."
…….
문득 싸아한, 말로 형용키 어려운 전단향이 장중을 휘감아 돈다. 언제부터 이런 향기가 이곳에 있었단 말인가.
사람들이 그것을 느끼고 기이한 생각에 잠길 때 상서로운 빛이 무명승의 전신을 감싸고 고요히 빛난다.
그의 얼굴은 빛을 뿜고 있었다.
"대사! 대사님!"
설마 무슨 일이랴, 하고 있었던 감천형이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무명승은 다시 눈을 뜨지 않았고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놀랍게도 그는 이미 원적(圓寂)을 한 다음인 것이다.
일세의 흉마였다가 일대의 고승으로 살아온 그가 이 자리에서 이처럼 간단히 목숨을 끊고 열반에 들 것임을 누가 짐작이라도
하였으랴.
"……."
서역법왕도 멀뚱히 눈만 굴리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던 어느 순간.
"으아하하하하하……!"
갑자기 서역법왕이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울분과 한탄, 그리고 회한에서부터 갖가지 상념이 담겨 있어 공력이 약한 사람들은 이내 귀를 틀어막으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픽픽- 바닥의 돌 가루가 튕기고 흙먼지가 날아올랐다. 나뭇잎이 새파랗게 질렸다가 비 오듯 쏟아져 내린다.
가공할 충격파가 벼락을 뿌리듯 그 웃음소리에 실려 주위를 휩쓸고 있었다.
"법왕! 뭘 하는 게요? 무슨 짓이오?"
남해용왕이 미간을 찡그린 채로 소리를 높였다.
공력이 깃들인 그의 음성이 날아들자 서역법왕은 웃음을 그쳤다. 그래도 그의 눈은 바닥에서 열반한 무명승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 눈은 깊게 가라앉아 있어 조금 전과는 전혀 달랐다.
"당신은 단 한 번도 나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군……. 무엇들 하느냐? 법왕의 법신을 모시지 않고!"
갑자기 그가 소리쳤다.
그의 외침에 라마들이 어리둥절 서로를 돌아보았다.
"법체(法體)를 모시고 서역으로 돌아갈 테니 속히 모시도록 하거라. 죄송하오. 본왕은 이만 돌아가겠소. 더 이상 속진(俗塵)에
마음을 두지 않을 터이니 나머지는 부 시주께서 알아서 하시오."
서역법왕이 하는 말에 남해용왕은 멍청해졌다.
이자가 미쳤나?
하는 표정으로 그를 보면서 남해용왕이 절로 더듬거렸다.
"지금 돌아간다고 하는 거요? 모든 걸 버리고?"
"어차피 신외지물이니 내 것이 아닐 것이며, 이 몸 또한 빌려쓴 껍데기일지니 미련을 두어 무엇을 하겠소? 움마니반메후움……."
그는 길게 진언을 외더니 미련없이 몸을 돌렸다.
일단 그가 떠나고자 한다면 누가 막을 수 있을 것인가?
감천형조차 멍청한 표정으로 자신의 옆으로 스쳐 가는 거대한 몸집의 그를 바라보고만 있을 따름이고, 남해용왕은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붉으락푸르락 하는 괴이한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마음 같았다면 한매에 쳐 죽여도 시원치 않은 표정이지만 어찌할 것이랴.
눈만 끔벅이던 라마들은 자신들의 법왕이 타고 있던 가마에 대신 무명승의 법신을 태워 서역법왕의 뒤를 따라 사라져 버렸다.
너무도 뜻밖의 사태에 남해용왕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그 자리에 멍청히 서 있었고 그 점은 멀어져 가는 그들을 보는 감천형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먼저 입을 연 것은 감천형이었다.
"아직도 손을 써볼 생각이 남아 있으시오?"
그의 음성에 여유가 묻어 있는 듯함은 착각일까?
남해용왕이 입을 열기 전에 요동권왕이 걸걸 웃어댔다.
"손을 쓰는 게 아니라 어떻게 이 자리를 모면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 거겠지?"
"건방진 오랑캐 같으니……."
남해용왕이 냉랭히 중얼거렸다.
"서역법왕이 이렇게 떠나게 될 것은 짐작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그가 있었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오. 보시다시피…… 하지만 내가 온 것은 싸우러 온 것이 아니오. 합작을 하기 위해서 온 것이지."
"……."
"부 선배와 우리가 싸우고 누군가 승리한다면 적지 않은 상처를 입게 될 것이오. 그럼 뒤에서 기다리는 자에게 어부지리를 줄 뿐임을 부 선배께서도 모르진 않을 터, 봉신방을 찾을 때까지 한 배를 타는 게 어떤가 하는 것이 내가 찾아온 목적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아, 늑대와 굳이 한 배를 탈 이유가 있겠나?"
옆에서 요동권왕이 투덜거렸다.
"……."
남해용왕은 착잡한 기색으로 감천형의 손에 들린 채 웅웅, 기향(奇響)과 함께 빛을 뿜어내며 요동 치고 있는 철궤를 바라보았다.
가슴팍을 움켜쥔 만박노유의 안색도 격동으로 물결친다.
"용왕, 받아들이시게.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가 초조한 듯 권한다.
평생을 두고 소원했던 봉신방을 찾는 일이다. 어쩌면 생애에는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던 그것이 이제 눈앞에 있었다.
'망할!'
남해용왕은 암암리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공이 상대에게 넘어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막말로 힘으로 뺏자고 달려들면 이길 방도가 없는 것이 지금의 처지인데 더 이상 어떻게 버틸 수가 있을 것인가.
하지만 아직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