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풍운연의 11(완결)
第一首 심모원려(深謀遠慮)
-사랑을 위하여
아직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뿌연 새벽빛이 어둠을 뚫고 힘을 찾아간다.
해가 떠올랐음에도 사방이 아직도 어둑한 것은 아직 못다 뿌려낸 빗물을 머금은 구름들이 하늘에 떠 있는 까닭이리라. 그러나 이따금 세찬 바람이 불어오니 곧 구름은 흩어지고 세상은 아침임을 알게 될 터이다.
한효월은 사방을 덮고 있는 아침 안개를 뚫고 단숨에 십여 리를 내달렸다. 그는 전신의 모든 공력을 짜내어 경공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그 속도는 정말 놀랍도록 빨랐다.
만약 누군가가 그를 뒤쫓고 있다면 전력을 다해서 뒤를 쫓아야 할 것이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서는 도저히 방법이 없을 속도였다. 단순히 경공이 높은지 아닌지를 말할 수준이 아니었다. 어떤 경지를 넘어선 단계에 이르러서는 일반적인 무공 수준으로 그 척도를 삼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주위를 둘러본 한효월은 길옆으로 나 있는 숲으로 들어가는가 싶더니 곧장 위로 솟구쳤다. 설혹 누가 뒤를 쫓았다 할지라도 단숨에 숲에 가려 종적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고명한 신수(身手).
나뭇가지를 스치면서 몇 군데를 돈 그가 날아간 곳은 숲 속이되, 주위가 다 내려다보이는 거목의 중간. 높이만도 칠, 팔 장은 되어 보이는 곳인데 크고 작은 나뭇가지들이 얽혀 아래에서는 위를 보기 힘든 형세다.
놀랍게도 유성이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커다란 포대 하나가 길쭉하게 놓여 있다.
나뭇잎이 무성한 나뭇가지 사이에 숨겨진 그 포대를 가로막은 채로 유성은 긴장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다가 한효월을 맞았다.
"이제 오세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느냐?"
"그거야 당연하죠! 귀신도 모르게 빼왔으니까. 원 세상에…… 이놈의 늙은이는 뭘 먹고 살았길래 이렇게 무거운 건지 허리가 빠지는 줄……."
"쓸데없는 소리는. 잘 살펴봤느냐?"
한효월이 묻자 유성이 정색을 한다.
"예. 제가 보기로는 진짜인 거 같은데요? 아무리 봐도 변장을 한 흔적이나 흉터 같은 건 없어요."
유성이 뒤에 있던 포대를 앞쪽으로 옮기며 주둥이를 열었다.
놀랍게도 그 속에서 나온 것은 사라졌던 공일도의 시신이었다.
"으음……."
한효월은 공일도의 시신을 세심히 내려다보았다.
이미 생명이 떠난 그의 시신, 하지만 부릅뜬 그 눈은 여전히 한효월을 쏘아보는 것만 같다.
"아직 죽은 거 같지 않아요. 기세가 남아 있어서……."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내공이 전신을 흐르지. 사람이 죽어도 그건 금방 사라지지 않는다. 사후 경직도 그만큼 늦게 일어나게 되고."
그의 맥을 짚어본 한효월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여전히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모습이다.
"대체 왜 이 인간을 아무도 몰래 데려오도록 하셨어요?"
아무래도 참을 수가 없는 듯 유성이 물었다.
정말 모래밭을 기는 개처럼 기어서 접근을 했었다. 강기가 날아다니고 검기가 용솟음쳐 한순간만 잘못하면 머리통이 날아갈 판. 그 와중에 마지막에는 폭발까지 일어나 거의 황천으로 직행할 뻔하면서 겨우겨우 공일도의 시신을 빼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모두가 같은 편이 아닌가.
동료가 아니라면 왜 같이 행동을 한단 말인가. 그들 중 유성이 보기에 의심을 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확인할 것이 있었다."
그리곤 입을 닫아버리는 한효월.
'쩝…….'
유성은 암암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한효월이 저렇게 하면 아무리 졸라도 말해 주지 않을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제 어떻게 해요?"
"따라오너라."
한효월이 앞서 몸을 날렸다.
그가 이렇게 훌쩍 가버릴 줄은 뜻밖이라 유성은 당황해 급히 포대를 묶고는 투덜거리면서도 죽어라 한효월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한효월은 무섭게 빨랐다.
쉬엄쉬엄이 아니라 죽을힘을 다해 달리는 것처럼 보였고 유성은 조금만 느리면 한효월을 잃어버릴 것 같아서 숨을 내쉴 틈도 없이 앞으로 내달렸다. 코에서 단내가 난다는 것을 느낄 만큼.
세찬 바람이 그들을 가르며 뒤로 날아갔다.
"대체 왜 저렇게?"
한 번도 저렇듯 무섭게 달리는 것을 보지 못했던 유성은 괴이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소리 내어 부를 여유가 없을 만큼 한효월의 속도는 빨랐고 그렇지 않아도 달리는 경공으로 죽은 공일도까지 들쳐 멘 유성은 그 뒤를 따르느라고 죽을 맛이었다.
마침내 한효월의 모습이 가물거리며 눈앞에서 사라지는가 싶더니 꺼져 버렸다. 속도가 워낙 빠르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놓치게 되면 퍽! 꺼지는 것과 같다.
"고, 공자…… 공자님!"
다급해진 유성이 한효월을 소리쳐 불렀다.
원래의 숲을 벗어난 지 오래, 이미 몇십 리를 벗어난 다음이다. 그럼에도 산골은 여전하고 숲의 우거짐도 덜하지 않다. 안개가 손가락을 보기 힘들게 짙음도 여전하지만 그 위로 떠오른 해가 빛난다. 곧 안개가 걷히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잃어버린 한효월은 찾을 수가 없다. 이대로는.
"말도 안 돼. 왜 이런 일을……."
뻔히 자신이 따라오기 힘든 것을 알면서도 이처럼 무식하게 달려서 자신을 떨구어 버리다니?
이 빌어먹을 시체를 어떻게 하라고.
투덜거리며 비 오듯 흘러내리는 이마의 땀을 소매로 훔치던 유성의 안색이 불현듯 굳어졌다.
무엇인가 소리를 들은 것이다.
어디서 생긴 힘인가. 방금까지 때려죽인다고 한들 못 움직일 것처럼 보였던 유성이 바람처럼 앞으로 달려가다 소리쳤다.
"공자!"
한효월.
그가 나무 한 그루에 기대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어, 어떻게 된 겁니까?"
기겁을 한 유성이 포대를 팽개치고 한효월을 부축했다.
"다…… 왔다. 저기 있는 집 안으로 들어가자……."
한효월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얼굴은 창백하고 말소리는 쥐어짜는 듯했다.
앞으로 나뭇잎 사이로 한 채의 목옥(木屋)이 보였다.
"여기가 어디죠?"
한효월을 부축해 그곳으로 가면서 유성이 물었다. 한효월에게 훈련을 받은 그인지라 망설임없이 목옥으로 향해 시간을 죽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세심히 주변을 살피니 능수(能手)라 할 만하였다.
"여기는……."
한효월이 낮은 음성으로 답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목옥은 간단한 담이 있는 둥 마는 둥 하고 통나무로 지어져 짐승들을 막을 수 있는 구조였다.
숲에 있는 것으로 보아 사냥꾼이나 나무꾼의 거처인 것 같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언제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신 거지?'
유성은 괴이한 얼굴로 한효월을 부축,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단칸의 방이 있고 역시 나무로 만든 침상이 안쪽에 놓여 있다.
한효월을 거기에 앉힌 유성은 한쪽 팔에 걸쳤던 공일도의 시신을 목옥 구석에다 처박았다.
"공자!"
한효월을 살펴보던 유성이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그는 이내 입을 다물어야 했다.
한효월이 손을 젓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리 내지 말고 밖을 경계해라. 누가…… 보이더라도 다가오지 않으면 상관하…… 지…… 말거라."
쥐어짜는 음성.
"뭐, 뭘 하면 되죠? 약! 무슨 약이 필요한지……."
"……."
한효월은 말없이 머리를 저었다.
그리고는 나무로 된 침상에 앉아 눈을 감았다. 백지장처럼 창백한 얼굴이다.
좀 전보다 더 창백해서 마치 시체를 보는 것만 같았다.
숨조차 쉬지 않는 것 같았고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지 못하고 등을 벽에다 기대고 있어 금방이라도 옆으로 쓰러질 것만 같다.
"대체 무슨 일이……."
유성은 한효월이 가끔 힘들어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저런 모습까지는 본 적이 없다. 이제서야 그가 그처럼 급하게 서둘렀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렇게 급하게 달리지 않았다면 도중에서 쓰러졌을 테니.
"……."
유성은 초조한 얼굴로 창을 반쯤 열어놓고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일방 한쪽 눈은 한효월에게서 떨어지지 않아 그의 초조한 마음을 짐작케 한다. 철이 들면서부터 모셔온 상전이다.
게다가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알려주면서 자신을 문도(門徒)로 삼아준 사람이었다.
말만 그렇지, 실제로는 형과 같고 아버지와 같았던 사람.
한효월의 그런 모습을 보자 그는 이제 한효월이 말했던 마지막이 정말 현실로서 가까워져 옴을 실감하고는 가슴이 미어졌다.
그 자리에서 통곡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울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울 수 있다면 그럴 시간에 눈을 부릅뜨고 누가 접근하는지를 살펴야만 했다.
고춧가루를 뿌린 듯 가슴이 아리고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유성은 처음 경험하면서 눈을 부릅떴다.
밖으로 나가 감시를 할까 했지만 한효월이 어떻게 될지를 몰라 그럴 수도 없으니 창가에 붙어 서서 눈만 부릅뜰 수밖에.
그 이후, 한효월은 움직이지 않았다.
숨을 쉬는 것 같지도 않았고 안색이 더 좋아지지도 않았다.
그저 그렇게 쉼없이 시간만 흘렀다.
새벽이 아침이 되고 아침이 점심때가 되도록.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해가 중천에 떴을 때는 숲을 덮었던 안개도 사라진 다음이다.
유성은 여전히 창가에 붙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의 눈에 긴장이 돌았다.
누군가가 소리없이 목옥으로 접근하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긴장으로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유성은 품속을 더듬어 단검을 움켜쥐었다.
그때 들려온 너무도 뜻밖의 음성.
"사숙, 천형입니다."
너무도 익숙한 그 목소리에 유성은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 했다.
슬쩍 빗겨보자 창문으로 보이는 사람, 문밖에 우뚝 선 그 사람은 정말 감천형이었다.
그가 어떻게 이곳을 알고 올 수가 있단 말인가?
"맹주……? 사형?"
유성은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음, 너도 여기 있었더냐? 사숙께선?"
감천형은 유성의 모습을 보자 미미하게 웃음 지으며 물었다.
"어, 어떻게 알고 여기에?"
유성이 더듬거리자 감천형의 안색이 갑자기 달라졌다.
"어떻게라니? 사숙께서 아무 말도 안 하시더냐?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셨었는데…… 왜,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사숙께선 어디
계시는 거냐?"
"안에."
유성의 얼굴이 일그러짐을 보자 감천형은 땅을 박차고 안으로 날아들었다.
그렇다고 문을 부술 수야 없으니 문을 밀어보다가 열리지 않자 유성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창문을 통해서 안으로 날아들었다.
"……."
그는 한효월이 침상에 넘어질 듯 기대고 있음을 보자 얼굴이 굳어져 유성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거냐? 부상을 당하셨느냐?'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자 그는 대뜸 전음지성을 사용하여 물었다.
유성은 울상으로 머리를 저었다.
"그냥…… 갑자기…… 아마도 그때 말씀하신 고질이……."
"고질……!"
부지간에 신음처럼 그 말을 되뇌이는 감천형.
그도 실감을 한 적이 없었다.
그처럼 펄펄 나는 한효월이 곧 쓰러질 것이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말을 누가 실감할 수가 있을 것인가.
그런데 눈앞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언제부터 이렇게 되셨느냐?'
암암리에 한숨을 몰아쉰 감천형이 다시 전음으로 물었다.
'새벽에…… 중양서원을 떠나신 후에 바로…….'
'바로!'
감천형의 안색이 달라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인사불성이란 말인가?
"……."
망설이던 그는 천천히 한효월에게로 다가섰다. 그리고 그는 손을 내밀어 살짝 한효월의 맥문(脈門)을 잡았다.
한효월의 팔은 얼음처럼 찼다.
하지만 맥은 뜻밖에도 활발히 뛰논다.
"이건?"
이해가 가지 않아 한효월을 쳐다보던 감천형의 눈에 놀람이 가득 찼다.
한효월이 눈을 뜬 채로 그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상태가 어떤가?"
그가 힘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미소 띤 얼굴이었지만 그 얼굴을 보는 순간 감천형은 불쑥 가슴이 미어졌다.
"사숙!"
감천형이 소리치자 유성이 달려왔다.
"공자!"
"소란 피울 것 없다. 잠시 쉰 것뿐이니……."
한효월이 피곤한 빛으로 자세를 바로 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괜찮으시겠습니까? 잠시 기다리시면 제가 지금 바로 약선 백 노선배께 갔다 오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곧 이곳을 떠나야 하네."
"이 몸으로 어디를……!"
"잠시 호법을 해다오."
말과 함께 한효월은 눈을 감고 자세를 바로 했다.
분명히 방금 전까지 자세조차 잡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던 그가 아니었다.
얼굴에 혈색이 도는 것이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
침묵 속에서 유성과 감천형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인 유성과 감천형은 각기 창가와 문 옆으로 붙어 섰다.
혼수 상태에 빠졌던 것과는 달리 한효월은 잠시 시간이 흐른 다음 깨어났다.
조금 피곤해 보이긴 하지만 운기행공을 한 그의 얼굴은 생생하여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도저히 방금까지 인사불성이었던 사람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어두워진 건가?"
창밖으로 스며드는 희미한 빛을 본 한효월이 물었다.
"예. 곧 날이 어두워질 겁니다."
감천형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효월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또 밤에 움직여야 하겠군……."
그는 유성을 보더니 말했다.
"좀 쉬도록 해라. 내가 정신을 놓은 사이 전혀 쉬질 않았던 모양이니 그래서야 어떻게 밤길을 갈 수가 있겠느냐?"
"괜찮습니다. 전 공자께서 아프지만 않다면……."
유성은 말하다 말고 입술을 물었다. 억제하려고 해도 눈물이 돌고 목이 메었다.
"사제, 가서 쉬도록 해라. 길을 가면서 네가 짐이 되어서야 되겠느냐? 이 뒤에 작은 방이 하나 있으니 쉴 수 있을 게다.
먹을 것은 미리 준비해 둔 것이 있다."
감천형이 유성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알고 유성은 묵묵히 고개만 끄덕이곤 나섰다.
"사숙……."
"길게 이야기할 시간은 없을 것 같군. 내 생각보다 시간이 너무 흘렀다. 자칫 생각한 것보다 시간이 늦게 되면 크게 후회할 일이
생길지도 몰라. 그래, 잘 살펴봤나?"
"예. 황 방주에게서 별다른 이상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음……."
감천형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혹, 황 방주를 의심하십니까? 그가 공일도의 사라진 시신과 관련이라도……."
"그의 시신은 여기 있다."
한효월의 말에 감천형은 안색이 돌변했다.
"그게 무슨?"
그는 순간적으로 구석에 놓여진 포대를 바라보았다.
"설마……?"
"공일도의 시신이다. 내가 유성을 시켜서 빼냈다."
"왜 그런 일을?"
감천형은 괴이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로 한효월을 바라보았다.
그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왜 그 자리에서 공일도의 시신을 빼냈단 말인가?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해야 했던가?
"설마?"
한효월을 보는 그의 얼굴에 충격이 서렸다.
"아무것도 단정할 수 없고, 아무것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필요한 것은 어떤 경우의 수라도 모두 생각해서
변화에 대처하는 것이지. 시신은 감 사질이 보관하고, 의논했던 대로 모든 힘을 기울여 상황을 살피도록 해. 봉신지약을 가진
남해용왕이 지금 어디 있는지는 반드시 찾아내야 함은 잊지 말고. 어쩌면 그가 가고 있는 방향이 내가 가려는 곳과 같을지도
모르니까……."
"지금 상황에서 그들과 마주치면 정말 큰일 납니다. 그들은 하나가 아니라 최소 두 명 이상입니다."
"세 명 이상일 거야."
"예?"
"두 명으로서는 봉신지약을 가져가지 못했겠지. 다른 사람들의 공격을 막아낼 가능성이 없을 테니."
"그런 걸 알면서도 혼자 가신다는 겁니까?"
"내가 가는 곳으로 그들이 올 가능성은 전무해. 내가 마경의 위치를 알아내서 찾아가다가 만나면 몰라도…….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다른 사람을 만날 수야 있겠지만."
"다른 사람?"
"내 생각이 맞다면. 그보다 계획했던 대로 내가 돌아올 때까지 최대한 힘을 모으도록 해. 내 예측대로면 건곤일척의 승부를 해야만
할 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으니. 그리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비밀리에 내가 말했던 그분들을 찾아서 내 말을 전달해야 함을 절대
잊지 말고."
"사숙."
"음?"
"누굴 의심하는지 제게 말씀해 주실 수 없습니까? 사숙께서 생각하는 모든 걸 다 말씀해 주시고 좀 편해지시면 안 되겠습니까?
굳이 사숙 혼자서 그 어려움을 다 짊어지시는 건……."
"아불입지옥(我不入地獄)이면 수불입지옥니, 내가 지옥에 들어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들어가겠나? 라는 말이 있지. 아직은 때가
아니야. 때가 되면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게 되겠지. 나 또한 모든 걸 아는 게 아니니 기다려 볼밖에. 감 사질."
한효월은 손을 내밀어 감천형의 손을 잡았다.
"만약 말이야, 상황에 변동이 생기면 전에 내가 줬던 봉서를 읽지 말고 태워 버리도록 해."
"그게 무슨……?"
"지금은 그렇게만 아는 게 좋아. 때가 되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고 아마 그 일은 길어야 한 달을 넘기지 않을 거야."
한효월은 시선을 공일도의 시신이 든 포대에 두었다.
"저 시신을 잘 조사해 보게. 정말 공일도 본인이 맞는지. 내가 보기로는 맞는 것 같은데 혹 모르니…… 그가 죽은 것이 정말인가에
따라 앞으로의 대국에 큰 변동이 초래될 테니까. 어쩌면 그의 죽음 자체를 우리가 이용할 수도 있겠지."
"사숙께선 아직도 그의 죽음을 의심하십니까? 저 시신이 화신이라고?"
"아니. 이 시신은 아마 화신일 가능성이 매우 낮을 거네. 그는 내게 쫓기면서 그럴 만한 여유를 얻지 못했어. 그러나 그의 죽음을
우리가 쥐고 있으면 뜻밖의 패로 사용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
말과 함께 한효월은 몸을 일으켰다.
"사숙."
그가 지금 떠나려 함을 알고 감천형이 놀라 그를 불렀다.
"요기를 한 다음에 조금 쉬고, 그런 다음에 떠날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의 걱정을 아는 한효월이 그를 보면서 웃어 보였다.
그를 향해 감천형도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무거웠다.
* * *
하늘도 땅도 모두가 어둠에 묻혔다.
검게 변한 하늘에는 달이 뜨고 별이 빛난다.
은가루를 뿌린 듯한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있다. 그 별들의 무리는 중원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많아 보였다.
그렇게 텁텁하던 공기도 밤이 되면서 맑아졌다.
아니, 시원해졌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 별들을 바라보고 있는 서문운하의 얼굴은 어둡기만 했다. 공기와는 달리 답답하게만 보였다.
"이젠 그만 들어가자꾸나. 자야지!"
뒤에서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를 그림자처럼 따르는 송옥교가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 늘 그렇듯 걱정스러운 얼굴.
"난 괜찮아요."
"괜찮기는! 홀몸도 아닌데 이러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어서 들어가자!"
"모모. 그가 죽어가요."
"……!"
송옥교의 전신이 굳어졌다.
"그의 수성(壽星)이 희미해졌어요. 어제만 하더라도 저렇듯 흐리지 않았는데 갑자기 변해 버렸어요……."
서문운하가 말끝을 흐렸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럼 그 녀석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는 말이냐?"
"아직은…… 아니겠죠. 하지만……."
그녀의 눈에 떨림이 일어났다.
'저대로라면 길어야 6개월을 버틸 수 없을 거예요. 아니, 어쩌면 단 2개월도 견딜 수가 없을지도…….'
그녀가 입술을 물었다.
그녀의 어깨에 손이 올려졌다.
"잘 견뎌줄 게다. 너의 이런 정성을 알고 있다면, 양심이 있다면 네가 돌아갈 때까지 버텨주겠지. 그래야 태어날 아이가 아빠의
얼굴을 볼 수 있지 않겠느냐? 가자. 가서 쉬어야 내일 화왕(花王)을 만날 수 있지 않겠느냐?"
송옥교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모모……."
서문운하는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송옥교가 조용히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하늘이 돕겠지……."
"그럴까요?"
"그럼……. 길인천상(吉人天祥)이라 하였는데 하늘이 그런 인재를 헛되이 그냥 버릴 리가 있겠느냐?"
송옥교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렇겠죠……. 그럴 리가 없겠죠……."
서문운하는 송옥교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바람이 헛된 것임을 그녀도 알고 송옥교도 안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녀들은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아무 일도 하지 않고서 그냥 떠나보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를 만나줄까요?"
문득 서문운하가 중얼거렸다.
"그럼. 그는 지난날 네 어머니께 진 빚이 있으니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절대로 너를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까짓거……
만약 만나지 않겠다고 한다면 이까짓 꽃밭, 모조리 불질러 버리고 말지!"
송옥교가 걱정 말라는 듯 큰소리를 쳤다.
화왕(花王)…….
운남(雲南)의 전설인 그는 꽃에 관한 한 누대에 걸쳐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 예전에는 그도 천하십왕 중의 일 인이었다고 전해지지만 이제는 강호의 시비에 상관없이 오로지 꽃에만 매달린다는 기인.
내일 그를 만나 만화정(萬花精)을 얻을 수 있다면 한 가닥 희망을 걸어볼 수가 있으리라.
만화정이야말로 불사회혼단(不死廻魂丹)을 구성하는 삼대주약(三大主藥) 가운데 하나인 까닭이다.
과연 불사회혼단을 제련할 수 있을는지 알 수 없지만.
서문운하는 눈을 들어 아련한 밤안개가 흐르는 전면을 바라본다.
꽃이다.
발 밑에도 꽃이고, 눈앞에도 꽃이었다.
시선이 미치는 곳 모두가 다 꽃이었다.
가히 꽃밭의 물결.
심신을 취하게 하는 향기는 끊임없이 꽃밭에서 일어 일대를 덮고도 모자라 코끝을 간지럽힌다.
송옥교가 한 말이 자신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것임을 안다.
이 만화교염대진(萬花嬌艶大陣)은 그녀로서도 쉽게 파훼하기 어려운 것이고 설사 진세를 뚫고 들어간다 할지라도 화왕이 협조하지 않는다면 그를 강제할 수 없으리라.
아무리 은둔하여 강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일지라도 화왕일계(花王一系)가 천하십왕 중의 하나였었다는 사실은, 설사 지금은 그가 천하십왕에 속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결코 쉽게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야 없는 일.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 * *
중양서원은 동정호와 중조산의 중간 지점에 있었다.
한효월과 유성이 밤을 도와 산길을 달리자 이틀 후에는 황하에 도달했고 그 다음날에는 중조산 경내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들은 밤에 길을 재촉했으므로 그들이 중조산에 도달한 것도 당연히 밤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밤이 끝나갈 즈음에 그들은 무우곡이 아닌 다른 곳에 도달했다.
쿠쿠쿠…… 쿵쿵…….
안개가 자욱하게 시선을 가리는 곳.
지축을 울리는 그곳에는 까마득한 폭포에서 쏟아지는 물줄기가 장관을 이루고 있다. 폭포의 높이만도 수십 장은 되어 보이는 그곳에 기암괴석이 어우러지고 하늘을 가린 삼천(森天)이 고오(高傲)하다. 발 밑을 흐르는 것이 구름인지 안개인지 알기 힘든 그곳에 이른 한효월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나로서도 응수(鷹愁)라 이름하는 곳이 어딘지 알 수 없으니……."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유성에게 말했다.
"너는 이곳에서 내가 나올 때까지 주위를 감시하고 있거라."
"어딜 가시게요?"
"망혼동에를 잠시 다녀오마."
"망혼동이라면 그 괴팍한 노인이 있다는 곳 말인가요?"
"그렇다. 혹 강적을 만날는지도 모르니 절대로 모습을 드러내면 안 된다."
한효월의 말에 유성은 씨익 웃었다.
"걱정 마세요. 여기는 제가 자란 곳인데 아무려면 제 한 몸이야 못 지키겠습니까?"
"그래."
고개를 끄덕여 보인 한효월은 망설임없이 폭포를 향해 몸을 날렸다.
폭포 안 망혼동은 예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어르신."
지하를 통과하여 산곡(山谷)에 이른 한효월이 동굴 앞에서 괴노를 불렀다.
답이 없다.
그가 안으로 들어갔지만 늘 그 자리에 있던 괴노인, 마교의 호법장로가 보이지 않았다.
"어르신!"
"아직도 살아 있느냐? 명이 질긴 놈이로구나!"
답이 들려왔다.
"어르신의 능력이라면 제가 아직은 죽지 않을 걸 알고 계셨을 텐데 굳이 그렇게 기를 죽이실 필요까지야 있겠습니까?"
"크하하하…… 고얀 놈 같으니, 이젠 느물거리기까지 하는구나!"
넓은 동굴을 뒤흔드는 웃음소리.
하지만 괴이하게도 여전히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한효월이 주위를 둘러보면서 물었다.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던 까닭이다. 그가 올 때마다 괴노는 늘 이 동굴 광장에 있었다.
"아무 일도. 이쪽으로 오너라."
음성이 지시했다.
앞으로 나가자 동굴은 왼쪽에서 안으로 다시 꺾어져 있었다. 이 동굴은 그가 보던 것이 다가 아니었다.
높이가 낮아지고 너비도 좁혀져 한 사람이 머리를 조금 숙여야 갈 수 있는 그 동굴은 얼마 가지 않아서 끝이 났다.
똑똑…….
어디선가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너비가 두어 자가량 되어 보이는 작은 샘이 동굴 끝자락에 있는 듯 보였다.
빛이 스며들지 않지만 이 동굴 안 전체는 어딘지 모르게 희미한 빛으로 인해 아주 어둡지가 않았다.
장식도, 사람이 살면서 필요한 것들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달랑 돌을 다듬어놓은 석돈(石墩) 하나가 있을 뿐.
그 위에는 바로 마교의 호법장로라고 하는 그 괴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를 본 한효월의 눈에 찰나간 놀람의 빛이 스쳐 갔다.
괴노인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눈을 감은 채였다.
그런데 어딘지 전과는 느낌이 달랐다.
의혹을 느낀 한효월은 부지중에 괴노인을 살펴보았다.
겉보기로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누더기와 같은 옷도, 오랜 세월 손질하지 않고 버려두어 땅바닥에 끌리도록 산발이 된 그 장발까지 하나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자 그의 그 장발 하나하나, 누더기가 된 옷의 실밥 한 오라기마다 모두가 생기를 머금고 은은한 빛을 뿜고 있는
듯했다. 놀랍게도 이 동굴을 어둠에서 지켜주고 있는 빛의 근원은 괴노인의 몸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전과는 달리 그의 괴팍한 얼굴은 화평해 보였다. 얼굴만 보아서는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그사이에 또 새로운 경지에 이르셨군요. 경하드립니다."
한효월은 이내 놀람의 빛을 갈무리하며 포권을 한 채로 허리를 굽혔다.
그의 말에 괴노는 감았던 눈을 반개(半開)하여 그를 보면서 걸걸 웃음을 터뜨렸다.
"밖에를 싸돌아다니더니 아첨만 배워왔구나?"
"무림사 수많은 마공고수들이 있었지만 누가 탈마해선(脫魔解仙)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아첨이 아니지요."
그의 말이 뜻밖인 듯 괴노인은 멈칫 그를 보더니 쓰게 웃었다.
"놈, 어린놈이 도대체 모르는 게 없구나. 그러니 그 따위 천형을 얻는 게지……. 맞다. 얼마 전에 나는 마의 극제(克制)에서
완전히 벗어나 천지간의 구속에서 자유로워졌다."
"그런 깨달음으로 왜 굳이 이곳에 머물러 계시는 겁니까?"
"글쎄? 내가 지금 이 몸으로 강호에 나가서 무엇을 하라는 것이냐? 나더러 마교 부흥의 기치라도 세우고 피바람을 몰아보라는
말이더냐? 그렇게 되길 원한다면 한번 해볼 용의도 있다. 해보랴?"
한효월이 미미하게 웃었다.
"마경(魔境)을 벗어나시더니 말이 많아지셨습니다?"
"뭐라? 이런 고얀 놈 같으니……."
괴노가 짐짓 눈을 부릅떴다.
그때 한효월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혹, 이곳을 벗어나지 않으시는 것이 교장(敎藏) 때문입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괴노의 안색이 달라졌다.
"어디서 그 말을 들었느냐?"
그의 눈에서 무서운 광망이 형체가 있는 듯 한효월을 향해 무찔러왔다.
펑펑펑!
한효월의 눈앞 반 자가량 되는 곳에서 맹렬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놀랍게도 눈빛이 그를 공격한 것이다. 주변에 난데없는 태풍이 일면서 동굴이 온몸을 뒤틀며 으르렁거렸다.
"그만 하십시오. 절 죽일 작정이십니까?"
한효월의 외침에 괴노는 그때서야 눈빛을 거두었다.
"많이 발전했군……. 이젠 더 이상 아무런 방법을 쓸 수가 없겠구나……."
"어차피 좀 일찍 가는 것뿐인데, 소생이 먼저 간다고 해서 세상이 별로 달라질 거야 없지 않겠습니까?"
"크크크…… 남들이 보면 네놈이야말로 신선이 된 걸로 알겠구나."
웃음을 흘리던 그가 정색을 했다.
"교장을 어떻게 알았더냐?"
그의 물음에 한효월은 지난 일을 모두 이야기했다.
"교장을 지키는 자의 맥이 끊어졌단 말이냐?"
괴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가 알기론 그렇습니다만, 또 다른 후예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교장은 신비롭고 위험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아무나 맡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여러 개가 될 수도 없다.
다른 후예가 있을 순 없어."
"교장을 교도가 아닌 다른 사람이 얻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세상이 도탄에 빠질 수도 있겠지. 본 교에는 모두 세 개의 교장이 있었는데, 모두 산실(散失)되고 하나밖에는 남지 않았다.
어떤 수를 쓰더라도 외인이 그걸 얻을 순 없지."
"그래서 그걸 막기 위해서 이곳을 지키고 계신 거군요?"
"교활한 놈……."
"그렇군요. 굳이 지난 세월을 이곳에서 보낸 이유가 그것이었군요. 아무리 생각해도 왜 마경을 벗어난 분이 여기에 머물러
계시는지 의아했더니 아직 마교를 잊지 못하셔서…… 그래서 마지막 허물을 벗지 못하시는 것이었습니까?"
"네놈 혼자서 다 해라."
한효월은 한 가지 물건을 꺼냈다.
"제가 이걸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까?"
그 옛날 홍 낭랑이 그에게 주었던 옥패였다. 비천옥녀상이 조각된…….
"옥녀패로군……."
힐끔 그것을 본 괴노는 머리를 저었다.
"그걸로는 신분을 증명할 수 있을 뿐이다. 천마강림패가 있어야 교장을 보호하고 있는 기관을 해제할 수가 있지. 그 두 가지가
한데 모이지 않으면 절대로 교장을 열 수 없다."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합니까?"
"그렇다."
"하지만 제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누군가가 교장을 노리고 이미 왔을 겁니다."
"그 교주란 놈이 죽었다면서 누가……."
"세상일이란 게 한 사람이 다 하는 게 아니니까요. 교장을 얻게 되면 마경을 찾을 수 있음이 사실입니까?"
"마경? 무슨 마경?"
그의 되물음에 한효월이 설명하자, 괴노는 미간을 찡그렸다.
"교장은 마교의 역사를 기록한 곳이다. 무림과 관련된 비급들에서부터 각종 제례(祭禮)까지…… 마교의 모든 것이 다 있지. 아마
뒤져 보면 마경으로 갈 수 있는 단서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게다."
"어르신께서도 확실히 알진 못한다는 말씀이십니까?"
"……."
괴노는 한효월을 바라보았다. 그 무섭던 불칼과 같은 눈빛이 어딘지 모르게 부드러워져 있었다.
"마경을 찾고자 하는 게냐?"
"마경이 아니라, 말씀드렸던 봉신방을 찾고자 함입니다."
"봉신방이라…… 천하십성의 유진(遺眞)이란 말이지? 하긴 그것을 찾으면 너의 생을 연장시킬 방법이 있을는지도 모르지."
"그것 때문에 봉신방을 찾는 게 아닙니다. 거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굳이 세상의 풍파에 몸을 던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건방진 놈 같으니……."
괴노는 피식, 웃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탈마하여 모든 구속을 벗어난 나조차 미련이 남는데 너와 같은 청춘을 가진 녀석이 그런 건방진 소리를 한다는 것은 정녕 쉽지
않은 일이지. 이 마당에 더 무엇을 숨기겠느냐? 사실 지난번에 네게 한 가지 알려주지 않은 것이 있었다."
"……?"
"마교에는, 마경(魔境)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면 마교가 부흥한다는 전설이 있다. 나는 모든 것에서 벗어났다고 하면서도
사실…… 마교가 다시 세상에 창궐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일면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명옥마녀에 대해서 네게 알려주면서도
그것을 숨기고 말하지 않았으니……."
"그것과 명옥마녀가 무슨 관련이 있기에?"
"완성된 명옥마녀는 무적의 힘을 지닌다. 호교지신(護敎之身)이 되어 마교를 수호하게 되는데, 그럴 수 있는 것은 명옥마녀가
스스로 마경을 찾아갈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마경을 찾아간단 말입니까?"
"그렇다. 흘러나오는 마기를 찾아 스스로 마경을 찾아갈 능력을 지녔고 숨겨진 마경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
알려진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할 수 있는지는 알지 못하겠다만."
"그런……!"
한효월은 신음을 흘린다.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마교의 시원(始原)은 바로 마경이다. 그 마경에서 흘러나온 마기야말로 마교를 만들어낸 원초(原初)이니까.
세간에 알려진 마교는 바로 그렇게 비롯된다.
태초의 악(惡)!
어둡고 무서운 그 마의 힘을 이어받은 저주의 사도(使徒). 어둠을 추종하는 무리들.
백련교나 기타의 종교를 마교라 이름하는 것은 바로 그들을 그런 종교의 무리라 지탄하는 것에 다름이 아닐 뿐,
실제의 마교와는 거리가 있었다.
마(魔)를 마(魔)라고 부르지 않고 힘을 추종하는 자들인 양 호도하는 것은 그릇된 인식이고, 어리석음의 소치일 따름이다.
무지(無知)한 자들의 잘못된 인식.
명옥마녀는 바로 그러한 마교를 되살리기 위해, 마경을 찾아내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아마도 오랜 고심 끝에…….
"명옥마녀가 마경을 찾아내면 어떻게 됩니까?"
"마경을 열고 마기를 받아들이게 되겠지……. 아니라면 그 마기를 마주(魔主)에게 전해주게 되던지."
"마주?"
"명옥마녀를 조종하는 사람이지."
"그 마주라는 자가 마기를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됩니까? 마성(魔性)에 물들어 마인(魔人)이 됩니까? 아니면……."
"그건 그자의 본신 능력에 따라 다르겠지. 천하십왕 정도의 능력을 지닌 자라면 마성을 이길 수도 있고, 마성의 지배를 받는
현세지마(現世之魔)가 되어 세상을 마로 물들일 수도 있겠지."
"천하십왕이라도 마성을 이길 수 없다는 뜻입니까?"
"천하십성이라면 몰라도 천하십왕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괴노가 코웃음 쳤다.
한효월의 뇌리에 귀왕의 모습이 스쳐 갔다.
그가 그처럼 고심하여 독고경을 명옥마녀로 만들었다면,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자명해진다. 이제 보니 그를 저지함도 정말
시급한 일이었다. 그러자면 반드시 마경의 위치를 알아내야만 한다.
"마경의 위치를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습니까?"
"마교도가 아니라면 알 수 없다."
괴노가 머리를 저었다.
"어르신!"
"탈마를 하였다 한들, 내 본신은 마교에 속한 사람. 내가 마교의 근기(根基)를 흔들 일을 하리라 기대하진 말거라."
"어르신, 저는 교장에 출입할 수 있는 신패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교는 사람을 신용하지 않고, 오직 신패만을 인정함을 압니다.
제게 교장의 위치를 알려주십시오."
"그렇다면 네 스스로가 찾아보거라."
"어르신!"
한효월의 부름이 채 끝나기도 전이다.
쿠쿠쿠…….
은은한 진동이 땅 끝에서 전해져 왔다.
달그락, 툭툭……. 여진이 길게 꼬리를 뒤틀면서 동굴의 천장에서 돌 조각들이 굴러 떨어진다.
"……."
한효월이 굳은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자 문득 괴노가 탄식을 흘렸다.
"미련을 끝내지 못하니, 결국 해선(解仙)을 미룰 수밖에 없는 것인가? 가보거라. 이 소리는 누군가가 교장의 기관을 파괴하는
소리다. 이곳은 교장의 중추와 연결이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