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首 초전용화(初戰龍華)
-마침내 만나다
의혹(疑惑)은 죽음 가운데에서 더욱 깊어지고
모진 비바람이 불었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비바람은 그쳤지만 기온은 뚝 떨어졌다.
나뭇잎들도 이슬 대신 빗물을 머금고 바람이 불 때마다 전신을 떨어대고 있었다.
아직도 사방으로 뿌려지는 빗방울이 무서워서인지 숲에서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흘이나 달려온 그가 아니었다면 아무도 이런 새벽에 이런 날씨를 무릅쓰고서 움직이지는 아니할 터이다.
"후우……."
입 밖으로 하얀 김이 서리처럼 서린다.
마침내 눈앞에 나타났다.
말 그대로 천신만고 끝에 도달한 곳이었다.
높다란 담장, 치솟은 누각들…….
날씨에 아랑곳없이 오연한 모습을 한 그 건물은 중양서원(重陽書院)이란 이름을 가진 유서 깊은 서원이다. 삼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서원은 수많은 유생들을 배출해 낸 곳이며 대학유(大學儒)들이 출사했다가 다시 돌아와 후배들을 길러내 누구도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곳이었다.
비바람이 친 새벽이니 아직 이불을 둘러쓰고 있을 시간이다.
그러나 여기저기 불이 밝혀져 있고 벌써 낭랑히 글 읽는 소리가 들리니 과연 학풍(學風)이 범상치 않음을 알 수 있다.
"……."
낭패한 모습인 공일도는 뒤를 돌아보았다.
쫓고 있는 자는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아직도 자신을 쫓는 자가 있음을. 비록 백여 리 가깝도록 쫓는 자가 없었지만 조금만 지체한다면 다시 그들이 나타날 것임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많이 망설였지만 더 이상의 방도는 없었다.
제천교의 중추(中樞)는 이미 그의 명을 받지 않았다.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 그는 반드시 알아야만 했다. 지난날이라면 뒤로 물러나서 천천히 모든 것을 판단했겠지만 대막사왕에게 배신당하면서 내부 기반마저 잃어버린 그였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너무 한꺼번에 일어났다.
잠시 나무 그늘에 기대어 운기조식을 한다.
가슴이 뻐개질 것만 같고 정체된 진기는 곳곳에서 비명을 지른다. 아무래도 몇 달은 조섭(調攝)을 해야만 회복이 가능하리라. 중간에 한효월을 만나 받았던 선물, 수인지력에 뚫린 복부의 상처는 정말 간단치 않아 생각할수록 이가 갈렸다.
배를 움켜쥔 그가 한 맺힌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때 놈을 죽였어야 했는데……."
이를 악문 채로 그는 담을 넘어 중양서원의 뒤로 향했다.
아무리 부상을 당했다 할지라도 그의 종적을 발견할 만한 사람은 흔치 않다.
중양서원의 석유(碩儒)들이 거한다는 후원은 담으로 격리되어 있었고 아직 해가 뜨지 않았음에도 방 여기저기에 불빛이 보였다.
"……."
공일도는 조용히 주위를 살폈다.
미약한 기척이 여기저기에서 느껴졌다.
그러나 그들로서는 공일도를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드러내 놓고 활보하면서 들어갈 수는 없는 일.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소리도 없이 나무 위에 잠복한 놈의 사혈을 찔러 죽였다. 그의 웃옷을 벗겨 걸친 그는 한달음에 십 장 거리를 가로질러서 후전 서향각(書香閣)이란 현판이 달린 곳으로 향했다.
서향각은 중양서원에서 중심이 되는 곳이다.
석유들이 머물러 있어 중양서원의 대소사가 모두 이곳에서 결정되는 곳이기도 하다.
학사(學士) 구대처(咎大處)는 나이 서른에 출사하여 오십에 대학사의 신분을 버리고 서원으로 돌아와 후진양성에 힘쓴 지가 벌써 이십 년이 넘는 노유(老儒)인지라 모두의 존경을 받는다. 그의 신분을 말하듯 누구도 그의 허락 없이 그의 서재에는 들어갈 수가 없다.
그는 이미 의관을 정제한 채로 서탁에 앉아 잔뜩 쌓인 문건을 살펴보고 있었다.
도저히 칠십이 넘는 노구답지 않게 빠르게 문건을 살피고 있던 그는 손을 슬쩍 들었다. 그러자 한 가닥 경력이 일면서 그의 앞쪽 벽이 진동을 일으킨다.
미약한 진동을 일으킨 벽은 좌우로 갈라지더니 괴이한 물건을 드러낸다.
지도였다.
그것도 중원의 전도였다.
"동정호에서 시작되어 모든 길이 차단되어 전부 열두 차례의 공격을 받았군. 잠시도 쉴 틈을 얻지 못하고 사선을 넘나들었고……."
서탁에 분류된 문건을 밀어놓은 그는 천천히 서탁에서 몸을 일으켜 지도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행로를 보면 결국 그가 선택한 곳은 여기란 의미인가? 말도…… 그런 짓을 하다니! 이곳을 버려야겠군!"
몸을 돌리던 그의 안색이 달라졌다.
한 사람이 사나운 기색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아무런 변장도 없이 본모습을 드러낸 그는 바로 공일도였다. 젖어 흘러내린 머리카락 끝에서는 빗물이 뚝뚝 흘러 바닥을 적신다. 핏발이 선 눈은 사나운 살기로 이글거렸다.
"생각보다 너무 빨리 왔나?"
그렇게 빗물에 젖은 발걸음을 내딛으면서 공일도가 사납게 물었다.
"무슨 그런……."
노학사 구대처는 이내 평정을 되찾고서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교주."
"교주? 네놈의 눈에 아직 본좌가 교주로 보이더란 말이냐?"
공일도가 냉소를 터뜨렸다.
"무슨 말씀을, 교주께서 오해가 계신 듯……!"
"닥쳐라!"
공일도가 눈을 부릅떴다.
"네놈이 제천전을 맡아 교중의 대소사를 처결함에 있어 본좌는 최대한 양보를 했다. 네가 그들의 하수인임을 알고 있기에…… 그런데, 그런데 이렇게 본좌의 뒤통수를 치다니? 그들이 나를 버리라고 하던가?"
그는 구대처의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머리를 설레설레 젓는 그의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굳이 들을 필요도 없겠군! 네놈을 죽이고 그들을 찾아가 따져 보면 될 테니까."
"교주."
구대처가 침착히 공일도를 불렀다.
"교주는 이곳으로 오지 말았어야 했소. 설마 하니 교주는 누가 오늘날의 교주를 만들어놓은 것인지 모른단 말씀이오? 그분들에게 대항하려 한다면 그간 이루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르……."
"흐흐흐…… 죽은 다음에 뭘 또 잃어버릴 게 있단 말이더냐? 그들이 왜 본좌를 밀었었나? 아무런 이유도 없이? 설마 그럴 리가! 본좌의 능력이 필요해서 그런 것이었지. 그런데 이젠 필요가 없어졌단 말인가? 좋아, 좋아……. 네놈의 목을 치면 그들도 모습을 드러내겠지!"
말을 하던 그가 갑자기 손을 뻗었다.
그 손속은 비할 바 없이 빨라 구대처는 피할 도리가 없었다.
"크윽!"
그의 얼굴이 사색으로 창백해졌다.
구대처의 목줄기를 움켜잡은 공일도는 냉랭히 웃었다.
"이곳이 단순히 그 노괴들과의 연락처가 아니라, 본거지임을 본좌는 이미 알고 있다. 네놈의 목을 꺾어버린 다음에 그들을 만나보마. 왜 그 따위 짓을 하려 한 것인지……."
"크으으…… 꼭 알고 싶은 거요?"
그의 손에 목줄기가 잡힌 구대처가 숨을 뱉어내면서 물었다.
"네놈이 안단 말이냐?"
"그, 그렇소……."
"그렇다면 어디 말해 봐라. 갑자기 교중의 금령(禁令)을 발동해 본좌의 권한을 제한한 이유가 어디 있는지!"
공일도가 손의 힘을 조금 늦추었다.
구대처가 미간을 찌푸렸다.
"둔하군. 그건 네가 쓸모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뭐라고?"
공일도는 대노하여 구대처의 목을 꺾어버리려 했다. 구대처의 무공은 겨우 토납지법을 익혀 몸을 보호하는 정도라 목을 꺾지 않고 기세만으로도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쾅!
"크악!"
공일도가 피분수를 뿜어내면서 훌쩍 튕겨져 나가는 게 아닌가.
"크으으으…… 이, 이럴 수가……."
공일도는 세차게 벽에 부딪쳤다가 땅바닥을 짚으며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이 눈에 보인다. 보통 심한 타격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너, 너는…… 네놈이 나를 속이고 있었구나……."
그가 입에서 피를 쏟아내면서 소리쳤다.
"무엇을 속였단 말이냐?"
구대처는 오연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서 무표정히 말했다. 방금 공일도의 가슴을 쳐 그를 일패도지(一敗塗地)케 한 가공할 일장를 쳐낸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네놈의 무공은…… 이런 경지가 아니었……."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가 아닌 걸 아직 모른단 말인가? 필요하면 나타나고 그렇지 않으면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으니 용화는 늘 그러했지. 너는 아직 쓸모가 있었는데 스스로 명을 재촉했으니 그도 어쩔 수 없는 일."
"대, 대체 내가 뭘 어쨌다고?"
공일도가 가슴을 움켜쥔 채로 다시금 피를 게워냈다. 핏속에 거품이 부글거린다.
"너는 너무 일을 복잡하게 끌고 갔다. 제천교의 힘은 당세제일. 그 힘으로 모든 것을 다 쓸어버렸으면 이렇게 복잡해지지는 않았을 터이다."
"마, 말도…… 그걸 막은 게 누군데…… 다른 용화회원들이 나타날 때까지 세상을 어지럽히라고…… 그렇게 한 것이 누군데……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다니……."
"서서히 모든 걸 괴멸시켜 용화회만 남게 해서 그들을 나타나게 했어야 했다. 그런데 어지럽히기만 하고 한 것이 아무것도 없지. 호법존자들을 처리함에도 우리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야만 했으니, 설마 하니 그것이 네 의도였음을 우리가 모르리라 생각했더냐?"
"마, 말도…… 난 당신들과의 계약대로……."
"계약이라…… 그래서 너는 뒤로 빠지고 분란을 일으켜 용화회원들이 모여 서로 동패공사(同敗共死)하도록 획책을 했고?"
"그, 그건……."
"변명은 너답지 않지. 너 또한 천하십성의 후예……."
"……."
공일도는 일그러진 얼굴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가쁜 숨을 몰아쉰 그는 구대처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그들의 하수인이 아니라 그들 중 하나라니…… 좋소. 이젠 나를 어찌할 셈이오?"
"쓸모가 없어진 자는 남겨두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
구대처의 백발이 문득 하늘하늘 날리기 시작한다.
동시에 가공할 기세가 서재 전체를 가득 채웠다. 숨이 막혀 코에서 핏줄기가 터져 나오는 것만 같다.
'내가 평소의 능력을 가졌어도 상대할 수 있다 장담 못할 고수로구나! 이처럼 나를 속이다니…….'
공일도는 쥐어짜듯 외쳤다.
"나를 죽이면 당신들의 모든 것이 세상에 드러날 것이오!"
"우리의 모든 것이?"
"그, 그렇소. 나는 그간 모든 것을 조사하여 기록했고 내가 명하지 않으면 그건 세상에 유포될 거요. 그리고 난 혼자 온 게 아니오."
"네가 끌고 온 그 오합지중(烏合之衆)들 말이냐? 그들은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마, 말도…… 그들의 숫자가 얼마인데……."
공일도가 눈을 부릅떴다.
혼자 쫓기는 듯하지만 실제로 그는 암중에 수하들을 불러 모아 여기 당도할 즈음에는 그 숫자가 백도 넘었었다.
아무려면 그가 혼자 이곳으로 왔을 리가 있겠는가.
하나……
"잊었나 보군? 용화의 힘은 세상의 잣대로는 잴 수 없다는 것을……. 너의 기록물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차피 그런 것에
연연할 우리가 아니니까."
말과 함께 그가 손을 쳐들었다.
"크아아!"
미친 듯이 공일도가 등으로 벽을 밀었다.
사력을 다한 움직임이니 두터운 벽도 종잇장처럼 부서졌고 그는 벽과 문짝을 부수며 밖으로 뛰쳐나갈 수 있었다.
역시 천하십왕의 무공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크아악!"
벽을 뚫고 날아가는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비명은 너무 컸다. 아니, 단말마의 비명이라고나 할까.
피분수를 피워내면서 사오 장이나 더 날아간다는 것은, 그리고 날아간 그가 빗물이 남아 있는 뜨락에 세차게 부딪친 것도 모자라
십여 바퀴나 뒹굴다 화원에 철퍼덕 엎어지는 것은 그가 정상이 아님을 알게 하기에 족했다.
부들부들 떨기는 하되, 일어나지 못하니…… 그는 구대처의 일장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쓰러진 것이다.
그렇게 굴러가 허우적거리는 공일도의 눈에 한 사람의 발이 들어온다.
누군가가 그를 내려다보면서 우뚝 서 있었다.
"크허헉?"
놀란 공일도가 허우적거리며 물러나려 했지만 흙탕물에서 허우적거릴 뿐, 그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너, 너는…… 크아하하하하…… 윽!"
나타난 사람을 본 그는 갑자기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더니 폭포수처럼 핏물을 쏟아내고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구대처의 일장은 단숨에 그의 심맥을 끊어놓았던 것이다.
그의 내공이 그처럼 높고도 심후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버티지도 못하고 단숨에 즉사를 했으리라.
하지만 너무 허무했다.
천하를 쥐락펴락했던 그 일대의 효웅(梟雄)이 이렇게 죽다니.
그것을 말하고 싶은 듯 공일도의 핏발이 곤두선 두 눈은 빗방울에 씻겨도 결코 감기지 않았다.
한 맺힌 눈이지만, 그로 인해서 한 맺힌 사람이 어디 한둘이었으랴.
나타난 사람은 한효월이었다.
그를 본 순간에 공일도는 자신이 여기에 이른 것이 모두 한효월의 심계에 의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것을 아는 순간에 그는 절망했고, 어이가 없어서 크게 웃다가 절명하고 말았다.
한효월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부서진 문짝 사이로 보이는 사람, 구대처를 바라보았다.
"과연 무서운 사람들이로군요."
한효월이 입을 열었다.
구대처는 뒷짐을 진 채로 서재에서 한효월을 바라보았다.
"과찬의 말을. 네가 한효월이냐?"
"알고 계시니 영광이군요. 당신을 누구라고 불러야 합니까?"
"편한 대로 부르거라. 이름[名]이라고 하는 것이야 형(形)이 남아 있으면 늘 변하지 않더냐? 뭐라고 부른들 무슨 의미가 있겠나?
너는 듣던 것보다 더 대단하구나. 저 교활한 자를 이곳까지 몰고 올 수 있었다니…… 하늘이 너에게 수(壽)를 허락하였다면 어찌
만대(萬代)의 우환(憂患)이 아니었으랴."
그는 한효월을 쓸어보고는 담담히 말했다.
놀랍게도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한효월의 상태를 짐작한 모양이다.
그럼에도 한효월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당신의 사기술은 참으로 대단하군요."
"사기?"
"득도한 듯, 세상을 달관한 초월자 같은 풍모와 그 말투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속였는지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그 초연(超然)한
태도 뒤에 숨은 탐욕이 보이고, 그 초범(超凡)을 가장한 말투 속에 숨은 비열함이 역력히 느껴져 숨을 쉬자니 냄새가 역겹고 그
위선을 들은 귀는 가렵기 이를 데 없소! 오늘날까지 허유(許由)가 살아 있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구료."
"하하하…… 참으로 통쾌한 매도(罵倒)로구만."
허유란 상고시대에 요임금에게 양위(讓位)의 말을 듣고는 천하에 듣지 못할 말을 들었다고 시내에 가서 귀를 씻었다는 인물이다.
그런 지독한 욕을 먹었음에도 구대처는 태연하기만 했다.
바로 그 순간이다.
쾅!
한효월의 앞에서 폭음이 일었다.
무슨 폭발이 일어나기라도 한 듯이 빗물이 사방으로 튀는 가운데 한효월은 옷자락을 펄럭이면서 어깨를 흔들었다.
무형의 기가 그를 향해 쏘아왔던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한효월은 피하지 않고 거기에 맞섰다.
"의형상인(意形傷人)……."
한효월이 침중히 중얼거렸다.
상대는 손을 쓰지 않고 마음이 동하는 순간에 상대를 공격하는 전설상의 무공으로 그를 공격했다.
세상에 드문 것이지만 기실 한효월이나 천하십왕의 수준에서 그 경지는 놀라운 것이라 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세상에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저 노학사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경지를 보여주니 과연 용화회는 놀랍기 이를 데 없는
곳이다.
"과연 소문만큼 대단하군. 하나 네 사부조차 어쩌지 못하고 쓰러졌으니 네가 어찌할 수 있겠느냐? 여기까지 찾아온 네 노력이
가상하다만 이젠 끝이다."
구대처는 뒷짐을 진 채로 천천히 걸어나오며 말했다.
부르르…….
방금 전의 폭음에도 아직 매달려 있던 빗방울이 있었던 것인지 화원의 풀잎들이 전신을 떨면서 물기를 털어냈다.
소리도 없이 서향각 일대에 흑의인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강령루……."
그들을 보자 한효월이 중얼거렸다.
"섭생루와 화룡루도 있다. 제천교의 삼루는 기실 제천교의 주력이고 그 주력은 세상에 제대로 힘을 드러낸 적이 거의 없다."
"겨우 그 정도로 나를 겁줄 작정이오?"
"네가 데려온 자들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만한 하지. 너까지 처리하기에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그 말에 한효월은 크게 웃었다.
"아하하하하하……!"
평소의 침착하고 조용한 그답지 않은 웃음소리였다.
"……."
왜 웃느냐는 물음 대신 구대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랬소. 언제라도 나를 죽일 수 있다고 보고 오히려 나를 이용하려고 했었지. 나는 대체 그가 왜 그랬을까? 늘 의아했었는데
아마도 나를 키워 당신들에게 위협이 되도록 하고 싶었던 모양이오. 그랬다가 정작 위협을 느끼자 나를 죽이려 했었지만 이 자리에
죽어 있는 것은 내가 아니었소."
웃음을 그친 채 말하는 한효월.
그 말을 인정하듯 공일도는 흙탕물을 뒤집어쓴 채로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감지 못한 눈을 부릅뜬 채로.
구대처는 빙그레 웃었다.
"어차피 너는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터이니 그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네 천수는 어차피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
자리에서 수를 다한다 한들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그 말에 한효월은 다시 웃었다.
"얼마 남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은 남아 있는 모양이니 어찌 천기를 거스르며 오늘 이 자리에서 횡액을 당할 리가 있겠소?
내 당신의 관상을 보니 주작기(朱雀氣)가 인당(印堂)을 침범하고 있으니 필시 해가 뜨기 전에 당신에겐 횡액이 미칠 것이오."
꿈틀.
구대처의 미간에 고랑이 패였다.
그는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참으로 매끄러운 입이로군. 언제까지 그 입이 움직일는지 볼까?"
"아, 죽기 전에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한효월의 말에는 묘한 풍자의 의미가 깃들어 있어 구대처는 미간을 찡그렸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못할 것도 없겠지."
"당신…… 아니, 당신들의 능력은 정말 뛰어납니다. 그런 능력을 가졌으니 용화회에 들었겠지요. 당신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도
세상에서 공명(功名)을 다투지 않아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으니 더 놀랍고…….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이런 분란을 일으키는
겁니까?"
"분란이라?"
구대처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용화회는 은자의 모임.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 누가 명하는 것도 아니니 기실 세상의 공명이
탐났다면 누가 용화에 몸을 담았을 것이랴."
"공명이 필요없다면 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너를 죽인다면 아마 우리가 바라던 일은 이루어지는 것이겠지."
"나를?"
한효월은 뜻밖이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너를 죽인다면 네 뒤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던 자들이 모두 나타나게 될 테니까 말이지. 우리가 제천교를 움직여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은 매우 간단하다. 네 사부와 같은 자들을 끌어내기 위함이지……."
"그들을 처리하고 뭘 하고 싶은 거요? 당신들과 같은 능력이라면 사실상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위치는 언제라도 누릴 수가 있을
텐데? 무림지존이 되고 싶으시오? 아니면 이 나라를 엎고서 황제가?"
"으하하하……."
구대처가 크게 웃었다.
"그까짓 거야 언제라도 할 수 있는 게지. 우린 천하십성을 기다리기에 지쳤지. 해서 남은 생이 다하기 전에 지금 우리의 능력이
과연 천하십성과 비교하여 어느 정도인가를 알아보기로 했다. 봉신방만 찾으면 봉신지약이 없어도 우린 모든 것을 밝혀낼 자신이
있으니까…… 물론 쉽게 하려면 봉신지약이 모이는 게 좋겠지만."
"그게 다요?"
"더 있다 한들 너에게 그걸 알려주어야 하겠느냐?"
"그까짓 호승심으로 천하를 어지럽히고 창생(蒼生)을 도탄에 빠지게 했으니 당신들의 수도는 모두가 거짓이며, 내일 죽는다
할지라도 염왕의 분노를 피할 수가 없을 것이오!"
한효월이 준엄히 꾸짖었다.
"그까짓 호승심이라니!"
"그게 아니면 뭐요? 아무리 그럴듯하게 포장했다 한들, 그건 노망난 늙은이들의 한심한 호승심일 뿐이지!"
"듣자 하니 방자하기 그지없구나!"
노성과 함께 조금 떨어진 쪽 방문이 왈칵 열렸다.
백발에 허연 수염을 기른 노문사(老文士). 작달막한 체구이지만 학창의를 걸친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 당당하고 기품이 높다.
그의 곁으로는 조금 큰 키에 검은 수염을 기른 노도인 한 사람이 서 있는데 그의 기품 또한 노문사에 조금도 못하지 않았다.
"당신들이군……."
그들을 본 한효월이 중얼거렸다.
"우릴 안단 말이냐?"
노문사가 뜻밖인 듯 미간을 찡그렸다.
"동정호에서 봤었소. 사부님의 소식을 내게 전한 분의 뒤를 쫓아 상갓집 개처럼 따라다니던……."
노문사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네놈이 감히……."
쿠쿠쿠…….
그가 발을 구르자 그가 선 섬돌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 앞쪽에서부터 땅거죽이 뒤집히면서 한효월을 향해 밀려왔다. 지진이 일어나 땅거죽이 갈라지는 것 같았다. 소위 말하는 진각(震脚)의 최상승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한효월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하는 저들의 공격은.
그것을 보면서도 한효월은 늠름했고 미동조차 없이 냉정히 바라보고만 있을 따름.
"하하…… 그 많은 인원으로 한 사람을 상대하려 하다니 너무 심하지 않소?"
호탕한 웃음소리.
황엽이 담장 위에 우뚝 서서 홍소(哄笑)를 터뜨리고 있었다.
마치 메뚜기가 날아들듯 담을 날아 넘는 개방과 궁가방의 고수들. 개방의 고수들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궁가방의 고수들은 물밀듯이 한효월의 좌우로 갈라져서 밀려들었다.
그들은 이내 제천교의 삼루 고수들과 마주쳤다.
"흥! 동양이 과연 얼마나 제자를 잘 가르쳤는지 내 오늘 친히 견식하고 가르침을 내리겠다!"
노문사가 훌쩍 몸을 날려 한효월을 덮쳐 왔다.
우우우∼
긴 장소성이 들리면서 흑영 하나가 전광과도 같이 날아들며 노문사를 맞아갔다.
"당신과 같은 자가 어찌 내 사부님과 같은 반열에 오르려 한단 말인가?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는지 내 사형이 당신을 시험하리라!"
한효월이 냉소를 터뜨렸다.
나타난 사람은 바로 건곤무적 독고해였다.
"한낱 강시 놈이 감히……."
노문사는 호통을 지르면서 독고해와 맞서갔다.
"그 강시는 보통이 아니니 쉽게 보지 말게."
노문사의 곁에 서 있던 검은 수염의 노도인이 주의를 주었다.
"당신은 당신 걱정이나 하는 게 좋겠다!"
냉소, 그리고 도기 한 가닥이 무서운 살기를 머금고서 담 밖으로부터 그에게로 날아들었다.
"이기어도인가? 누구지?"
노도인은 들고 있던 불진을 들어 놀랍게도 그처럼 무섭게 날아드는 보도를 휘감으려 했다.
"감히!"
노성과 함께 날아들던 도기가 빙글 돌면서 불진을 잘라 버리려 하였다.
감천형이었다.
그가 나타나면서 정의맹의 고수들이 일제히 날아들었다.
주자미도 나타났다. 그녀가 이끄는 보구회의 고수들을 이끌고.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장내로 진입해 격전에 가담했다.
조용했던 중양서원은 격렬한 싸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비명이 연달아 터지고 병장기가 부딪는 소리가 고막을 찢는다.
"다 끌고 온 건가?"
구대처가 태연히 주위를 바라보더니 물었다.
"글쎄요. 당신은 패를 다 내놓은 겁니까?"
"핫하하…… 글쎄…… 어쨌든 길게 갈 필요야 없겠지?"
그가 성큼 계단을 내려서더니 한효월을 향해 다가왔다.
역시 이들 중의 중심은 한효월이니 그를 처리하는 것이 최선임을 자각하고 스스로 나선 것이다.
"당신은 내 상대가 아니오."
"무슨 소리냐?"
"당신을 상대할 사람은 따로 있지."
그 말에 걸걸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크하하하…… 그놈 결국은 나를 끌어들이는군 그래."
한 사람이 옷자락을 펄럭이면서 날아듦을 보고 구대처는 신음을 흘렸다.
"으음…… 당신이군."
"맞아. 내가 누군지 안다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어야 함도 알겠지?"
나타난 사람, 개왕이 두 눈을 부릅뜨고서 꾸짖었다.
"왜 그래야 하오?"
"집법존자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지. 설마 잊었나? 용화회에 가입하면서 맹세한 법을? 언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용화지법을
어긴다면 집법존자의 처벌에 따르기로 한 것을?"
"내가 무슨 법을 어겼기에?"
"으흐흐…… 이런 마당에 발뺌을 할 생각인가?"
개왕이 주위를 쓸어보면서 괴소를 흘렸다.
"용화회에 든 자는 다시 세상사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런 일을 한 자가 있다면 집법존자의 어떠한 처벌도 받는다. 그런데
당신은 강호의 일에 간섭한 것을 넘어 집법존자와 호법존자까지 해쳤으니 그 죄야 만사무석(萬死無惜)이지!"
"저런, 난 그런 기억이 전혀 없는데?"
구대처는 격렬한 싸움 현장을 보면서 머리를 저었다.
"나로서는 서원에 묻혀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지내고 있는데, 왜 이들을 끌고 와서 이런 분란을 일으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소이다. 왜인지 말해 주시겠소?"
"으으음…… 나랑 장난을 하자는 겐가?"
"핫하, 장난이라니……."
"내 기억에 따르면 당신은 교활하긴 해도 이런 짓을 할 담량을 가진 자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당신 뒤에 또 누가 있는 거지?"
"내 뒤에?"
구대처는 의아한 듯 뒤를 돌아보았다.
"네놈이 나를 그리 만만히 봤더란 말이지?"
개왕이 코웃음을 쳤다.
동시에 그는 무서운 속도로 구대처를 향해 덮쳐 갔다.
개방에서 전설이었던 그가 움직이자 태산이 무너지는 것 같은 위력이 있었다. 개방의 방주만이 익힐 수 있는 옥현귀진신공은 이미 화경(化境)에 이르러 수발이 자유로울 뿐 아니라 용음십이수는 발출될 때마다 용의 신음을 토해내면서 주위를 떨어 울린다.
하지만 구대처 또한 만만하지 않다.
감천형은 일시적으로 노도인과 맞섰지만 아무래도 손색이 있어 밀리기 시작했고, 그런 그를 황엽이 나서서 도왔다.
용화회의 세 사람과 독고해, 황엽, 감천형, 개왕 등이 한데 어울려 싸우자 그 일대에는 강기가 소용돌이쳐 정원석들까지 모조리 산산조각으로 으스러져 흩어졌다.
한 수 한 수에 가공할 위력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
한효월은 주위를 살펴보았다.
싸움은 난전(亂戰)이다.
사방에 흩어져서 싸우고 있는 그들의 숫자는 얼핏 봐도 오백은 넘을 것이었다. 이들이 이 자리에서 몰사한다면 무림중의 정영(精英)이 크게 손상됨을 면할 수가 없으리라.
그런데 뭔가 미진했다.
그게 그가 싸움에 참가하지 않는 이유였다.
베일에 쌓여 있던 자들을 모두 끌어냈고 제천교주인 공일도마저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가 미진한 느낌이 뒤통수를 잡아당기는 것만 같았다.
'무엇일까?'
잠시 생각에 잠겼던 한효월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황엽과 감천형이 협공하는 노도인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일단은 저들을 제압하고서 다시 생각을 해야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한효월은 기세를 모아 그들에게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이런 형태의 기도는 기세가 정점에 모이면 실로 무서운 위세를 발휘할 수 있게 된다. 고수들은 그러한 것을 잘 알기에 상대가 그런 기세를 형성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는다.
삼엄한 기세를 느끼자 섬뜩해 돌아본 노도인과 감천형 등은 그것이 한효월임을 알자 안색이 완전히 달라졌다.
노도인은 놀라 손발이 어지러워졌고 감천형과 황엽은 더 힘을 얻어서 그를 몰아붙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협공을 하다니! 부끄럽지도 않은가!"
노도인이 불진을 휘두르며 노성을 터뜨렸다.
그의 은사불진(銀絲拂塵)은 은사의 길이만 세 자에 이르러 채찍과도 같았다. 게다가 그 은사 한 가닥마다에는 놀라운 공력이 깃들어 있어 감천형의 도법과 황엽의 봉은 거기에 휘말려 힘을 쓰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한효월이 다가오니 두 사람은 날개를 단 것과 같았다.
"당신과 같은 자를 처리함은 하늘의 뜻을 받드는 것이니 뭐가 부끄럽단 말이오? 간적(奸賊)은 오래 살수록 착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니 일각이라도 빨리 죽는 게 세상을 도와주는 것이오!"
황엽이 변죽을 울렸다.
"네 이노옴! 감히……."
황엽을 쳐가던 노도인은 갑자기 섬뜩한 기세가 쳐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아차! 당황했다.
잔뜩 경계하고 있다가 황엽의 변죽 바람에 잠시 한효월을 망각했던 것이다. 평소의 그라면 있을 수 없는 일, 한효월의 등장에 평정을 잃은 것이 틀림없었다.
순간적인 틈이지만 한효월이 그것을 놓칠 리가 없으니, 한순간에 그는 이미 노도인의 앞에 도달하여 그를 향해 일장을 무찔러 내고 있었다.
기세는 무섭지만 실제로 그 위세는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깜짝 놀랐던 노도인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그는 황급히 은사불진을 저어 은하도괘(銀河倒掛)의 일식으로 앞에다 은빛의 방패를 만들어냈다. 첩첩이 일어나는 강기의 막은 과연 대단하여 은의 장막 하나가 그의 앞에 나타난 것 같았다. 그 일식은 한효월과 황엽 두 사람을 한꺼번에 상대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폭풍과도 같은 기세로 밀려드는 감천형의 뇌정도는 한 손으로 상대할 수 있으니 일단 이 상황을 모면하면서 변화를 꾀해볼 일이었다.
그런데 황엽이 느닷없이 고함을 지르면서 앞으로 진격해 오는 것이 아닌가!
분명히 공력에 뒤떨어짐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수중의 단봉을 은하도괘의 일식에다 직격(直擊), 바로 찔러 넣었다. 변식조차 없이 쾌속무비한 그것이야말로 형(形)이 없는 임기응변의 한 수였다. 강기가 거대한 주먹처럼 서린 그것은 거신(巨神)의 주먹과도 같이 그대로 노도인이 일으킨 강기막에 충돌했다.
콰쾅!
"이런 미친놈……."
황엽이 그 충격으로 비틀, 함을 보자 노도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람처럼 앞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들은 이미 무서운 속도로 변초를 하여 실제로는 백여 초의 대결을 펼치고 있는 중이라 어느 정도 상대에 대해 알게 된 상황이었다.
빈틈을 놓칠 리가 없었다.
더구나 한효월이 가세하는 판국이니 기회가 생겼을 때 무리를 해서라도 하나를 처리해야만 했다.
그때였다.
"바보! 내가 왜 무리를 했는지 모르겠소?"
황엽이 뒤로 물러나면서 껄껄 웃는 게 아닌가.
노도인은 가슴이 섬뜩해졌다.
감천형이 상층제(上層梯)의 일식으로 불끈, 허공을 밟고서 솟구쳐 올라 이기어도를 전개하여 그의 머리를 쪼개오고 있었다. 자연히 노도인이 그를 상대하려던 일초는 허초가 되고 말았다.
벼락불이 정수리에 떨어지는 형국이었다.
"간교한 놈들!"
하늘에 떠오른 자를 상대하려면 신형을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 몸이 묶인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상황의 변화가 너무 빨라 어찌할 수가 없음을 느낀 그가 노하여 수중의 불진을 재차 저어 노한폭사(怒漢暴射)의 일초를 시전함과 동시에 선풍전(旋風轉)의 일식으로 신형을 바람처럼 틀려고 했다.
그런데 찰나간. 그의 안색이 돌변했다.
자신이 나아가려는 방향에 한효월이 있음을 경각했던 것이다. 이제 보니 그들은 자신을 한효월이 진격해 오는 방향으로 몰고 있었다.
'함정!'
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한효월이 그를 향해 손을 쳐들고 무찔러 오고 있음을 보았다.
"너 혼자의 힘으로는……."
호통을 치던 노도인의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
무서운 홍광이 그의 호신강기를 뚫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윽!"
그가 비틀했다.
그것이 끝이었다.
하늘에서 감천형이 뇌정도로서 떨어져 내렸고, 놀랍게도 노도인은 그것을 은사불진으로 휘감아냈다.
하지만 그렇게 빈 가슴을 황엽이 달려들면서 단봉에서 일어난 강기로 쳐버렸다.
피분수가 노도인의 입에서 터져 나갔다.
쿵, 쿵, 쿵, 잇달아 물러나는 그의 가슴, 움켜쥔 그의 가슴에서는 핏줄기가 손가락 사이로 분수처럼 솟구쳐 나오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지공이기에 내 은한신공(銀漢神功)을……."
말과 함께 비틀거리던 그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가공할 삼대고수의 협공에 그는 이미 가슴이 산산조각으로 으스러져 즉사한 상태였다.
"정말 대단한 고수로군요……."
감천형이 중얼거렸다.
"천하십왕과도 비견될 사람이다. 정말 대단하구나. 용화회는……."
한효월도 중얼거렸다.
"그는 칠십 년 전에 불진 하나로 세상에 군림하던 진세무적(塵世無敵) 관진인(冠眞人)인 것 같소."
무거운 얼굴로 황엽이 말했다.
"맙소사! 이 사람이 말입니까?"
감천형이 신음을 탄성처럼 토해냈다.
"강호상에 소식이 없어진 지 오십 년이나 되어 이미 오래전에 죽은 것으로 알았었는데 여기에서 보다니……."
칠십 년에 진세무적이라 불리웠다면 아무리 나이를 적게 잡아도 백 세는 넘어간다.
세 사람은 가슴이 무거워졌다.
과연 여기 있는 세 사람뿐일까?
독고해와 노문사의 대결은 독고해의 우위였다. 독고해의 무위는 압도적이라 천하십왕 그 누구라도 감히 자신할 사람은 없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했다.
개왕과 구대처의 대결은 막상막하.
앞으로 얼마를 더 싸워야 결정이 날지 모를 상태였다.
나머지 상황은 군웅들이 우세했다. 우세라고는 하지만 숫자는 압도적으로 많으나 적이 강령루와 섭생루, 화룡루 등의 고수인지라 그 특이함 때문에 함부로 상대하기가 거북해서 생긴 문제들.
앞선 궁가방의 고수들이 기묘한 진세로 그들을 잡아 가두고 있어 시간이 흐르면 몰살도 가능한 상황이었다.
"가서 돕도록 하지요. 저 두 사람만 처리하면 다른 상황은 저절로 정리가 될 겁니다."
한효월이 큰 음성으로 말했다.
그 말을 못 들을 사람은 없다.
싸움을 하고 있는 구대처와 노문사는 자신의 동료가 허무하게 죽고 그들이 자신을 지목하면서 다가옴을 보자 가슴이 서늘해졌다.
절세고수 하나의 위력은 십만대군과 같다.
단순한 고수처럼 숫자로 셈할 존재가 아니었다.
그런 자들이 셋이나 다가오고 있었다. 이들이 어디든 가세하는 순간에 그 싸움 상대는 괴멸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휘이이익∼!"
구대처가 길게 장소성을 내질렀다.
그 소리는 길게도 우렁차게 장중을 휘감았다. 펑펑! 소리와 함께 중양서원의 지붕에 올려진 기왓장들이 튕겨져 오를 정도로 거대한 위력을 가진 소리였다.
그것과 함께 그는 신형을 솟구쳐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으하하하…… 네놈은 나를 바지저고리로 아느냐?"
개왕이 껄껄 웃으며 그를 막았다.
"비키지 못할까!"
"한 가지만 남겨놓고 간다면 비켜줄 수도 있다!"
"뭐라고?"
"저런, 자세히 말해야만 알아듣나? 벌써 귀가 어두운 모양이로구만! 네놈의 교활한 머리통만 남겨둔다면 보내줄 수 있단 말이다. 물어볼 게 많으니까! 볼일이 끝난 다음에는 다시 몸뚱이에다 붙여줄 수도…… 으윽! 미친개같이 사납군!"
개왕이 가가대소를 터뜨렸다.
한효월과 만났을 때는 근엄했던 그였지만 실제로 그가 활동했던 시절에는 그의 넉살과 장난에 수많은 고수들이 골머리를 싸매야 했었다. 차마 후생소배 앞에서 본색을 드러내질 못했을 뿐.
그런데 일이 예상외로 유리하게 돌아가자 본색이 드러나는 것이다.
구대처는 초조해졌다.
벗어나려고 신호를 주었지만 노문사도 꼼짝 못하고 있었고 자신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퇴로에 이미 한효월 등이 막아선 채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있는다는 것은 저들이 합공을 한다면…… 나머지 상황이야 불을 보듯 뻔했다.
"뻔뻔한…… 합공을 하다니!"
참지 못하고 구대처가 고함쳤다. 처음의 그 태연함은 이미 찾기 어렵다.
"크크크…… 입장을 바꿔보게. 자네라면 진 빠지게 싸우겠나? 어차피 쉽게 이길 방법이 있는데…… 게다가 이건 무인의 자존심을 건 비무가 아니라 세상을 어지럽히는 회충들을 잡아내는 작업이란 말이야. 오래가면 손만 더러워지니 빨리 처리하고 손을 씻어야지 안 그런가? 뒷간에 가서 똥꼬가 가려워 긁었더니 회충이 나오면 그 기분이 얼마나 더러운지 설마 모르는 건 아니지? 회충을 잡아당기면 이놈이 나오지 않으려고 똥꼬를 잡고 발악을 한단 말이거든. 굵고 긴 놈일수록 더하지……."
'회충?!'
구대처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욕지기가 치밀어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전력으로 구대처를 공격해 가면서 틈을 보았다.
말을 하면 할수록 손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구역질을 했을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가서던 한효월도 얼굴이 묘해졌다.
설마 하니 강호의 전설인 저 개왕이 저런 말을 서슴없이 할 줄이야.
"또 병이 도지셨군. 저 어른의 입을 닫게 하려면 빨리 상대를 처리해 드려야 하오. 어서 가서 목을 따주도록 합시다."
황엽이 성큼성큼 다가서면서 말했다.
그 위협에 구대처는 가슴이 철렁했다.
진세무적 관진인은 결코 쉽게 목숨을 놓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쓰러졌으니 그들로 봐서는 치명적이었다. 그것은 상대가 그만큼 강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싸우면서 버틸 상태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물러나야만 할 때다.
어느 정도 준비는 했지만 뜻밖에 기습을 당한 꼴이라 지금으로써는 방도가 없었다.
"이렇게 나오면 동귀어진을 할 수밖에!"
구대처가 갑자기 고함치면서 양손을 떨쳤다.
펑! 퍼펑!
폭음과 함께 짙은 검은 연기가 무섭게 일어났다.
"크하하하하…… 이런 연막탄으로 모면을 하려 하다니, 우리가 시정잡배들인가?"
개왕이 크게 웃었다.
말과 함께 그가 소매를 흔들어대자 가공할 광풍(狂風)이 일면서 순식간에 삼 장여를 뒤덮던 연기를 한순간에 사오 장 상공으로 날려 버렸다.
절대고수라는 것의 의미가 보여지는 순간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구대처는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
뭐 빠지게 도망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개왕이 멈칫하는 순간에 구대처가 음산하게 말했다.
"거지는 배운 게 없으니 단순하지."
말과 함께 그는 손에 들었던 오리알 같은 것을 무서운 힘으로 집어 던졌다. 개왕의 앞 땅바닥으로.
개왕의 무공으로 그걸 받아내지 못할 리가 없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던졌다는 것은 받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이 마당에 굳이 무리를 하면서까지 그걸 받아내야 할 이유는 없다.
"피햇!"
그가 소리치며 몸을 날렸다.
쾅!
거대한 폭음과 함께 불길이 일었다.
"으악!"
"으아악!"
처절한 비명이 꼬리를 물었다.
폭발은 십 장 주위를 휩쓸었다. 가공할 폭발이었다.
펑!
쾅! 콰콰콰쾅!
검은 연막탄이 마구 터지면서 주위를 뒤덮었고 다시 폭음과 함께 폭발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다시금 꼬리를 무는 단말마의 비명들…….
"하나는 남겨놓고 가야 하지 않겠소?"
호통 소리가 폭발 가운데에서 터져 나왔다.
한효월의 음성이었다.
"크윽!"
쥐어짜는 신음 소리.
호통이 연이어 터지고 다음 순간에 무서운 강기의 폭풍이 장내를 쓸면서 장내를 덮고 있는 검은 연막을 휘말아 올렸다.
감천형이 도풍(刀風)을 일으켜 연막을 흩고 황엽이 연막을 흩트렸다. 보통의 연막이라면 단 한 번에 사라져 버릴 것이지만 고수들이 그렇게 힘을 합해야 겨우 흩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연막은 끈끈했다. 그럼에도 한효월이나 개왕 등은 그 연막을 뚫고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장애를 받을 뿐이지 발을 묶을 수는 없다는 의미다.
바닥에는 퍼덕이는 팔 하나가 남겨져 있다.
구대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개왕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노문사도, 독고해도 사라지고 없었다. 한효월마저도.
"어떻게 된 건가?"
황엽이 주위를 돌아보면서 미간을 찡그렸다.
폭발로 인해 십사오 장가량이 온통 폐허였다.
그도 바닥을 뒹굴어 피해낸 터이니 낭패한 모습이 역력하고 그것은 감천형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은 수십 명이 한꺼번에 나뒹굴고 있는데 죽은 사람은 차라리 낫지만 다친 사람들은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머리가 없어지는 등 참혹함이 가히 아비규환이다.
"무서운 폭탄이군. 대체 이게 무슨 화기이길래 이런 위력이 있단 말인가?"
황엽이 신음을 흘렸다.
하마터면 그도 횡액을 면하지 못할 뻔했던 것이다.
"진천뢰였던 것 같군요."
감천형이 말했다.
"진천뢰가 아무리 구하기 힘든 물건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무서운 위력을 발휘할 수는 없소."
황엽이 머리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 폭발의 무서움은 한 번에 일어난 게 아니었습니다. 첫 번째 폭발 이후에 일어난 연쇄 폭발로 인해서 이런 피해가 난 거지요. 어떤 화기도 이런 연쇄 폭발을 일으킬 수가 없습니다. 진천뢰는 바로 그걸 일으키기 위한 도화선이었던 것 같습니다."
"도화선?"
갑자기 황엽의 안색이 달라졌다.
"그렇다면 원래 이곳에 화약이 묻혀 있었다는 말이오?"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삽시간에 이 일대가 모조리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화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화약으로 매복을 깔아 상대를 길동무 삼을 작정을 했다니……."
일대를 살펴보고는 그 말이 옳음을 깨달은 황엽이 중얼거리다가 암중에 다시금 감천형을 바라보았다.
강인한 그 얼굴에서는 횃불 같은 눈빛이 이글거린다. 누가 봐도 당당한 것이 느껴진다. 그런 사내가 세심하기 이를 데 없으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낭중지추라…… 주머니의 송곳은 결국 본색을 드러내듯이 감당주도 이제 어려움을 딛고 제자리를 찾는 것 같군. 독고 맹주는 죽어서도 흐뭇하겠군. 그의 사제나 제자들이 모두 뛰어나니…….'
내심 감탄한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때, 주위를 살펴보던 감천형은 정의맹도들이 아직 싸우고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중심 축이라고 할 수 있는 구대처 등은 사라졌지만 그 수하들은 아직 남아서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그것은 끝이 예측되는 싸움이었다.
쾅!
강령루의 고수 하나가 싸움에 뛰어든 황엽의 일장에 튕겨져 나가 쓰러졌다.
순간, 눈앞으로 날아드는 그림자 하나.
"군주마마."
나타난 사람을 본 황엽이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공일도가 사라졌어요!"
나타난 사람이 소리쳤다.
주자미였다.
그녀의 옷도 피투성이였다. 한바탕 악전을 치른 모양이지만 자신이 크게 상처를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의 옆으로는 여전히 시위 두 사람이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공일도가 사라지다니? 그는 죽었……."
얼떨떨한 황엽의 말에 주자미가 사납게 도리질했다.
"그자의 시체가 없어요!"
"……."
부지중에 황엽이 폐허로 변한 폭발 현장을 바라보았다.
건물까지 반쯤은 무너진 곳. 수많은 주검들이 얽히고설켜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가 없는 상태였다. 저런 곳에서 누구의 시체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폭발로 인해서 아마도……."
"아니. 그자의 시체가 있던 곳은 폭발에서 떨어진 외곽이었어요. 아무리 폭발에 휩쓸렸더라도 산산조각으로 분시(分屍)되어 시체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지는 않았을 거예요."
'시체가 사라지다니?'
황엽은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이미 한차례 가짜 소동을 경험한 다음이다. 이번은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확인을 위해서는 시체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 시체가 사라지다니…….
그 사나운 드잡이질의 현장에서 시체가 어찌 홀로 사라진단 말인가?
발이 달렸다면 몰라도…….
그의 지시 하에 몇 사람이 수색을 시작했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망자는 피아를 합쳐 대충 백여 명 정도인 것 같았다.
상처를 입은 사람도 이백은 족히 넘었다. 완벽한 승리였지만 포로는 거의 없었다. 거의 모두가 죽기 전까지 저항을 했고 죽기 전까지 도주를 했기에 그러했다.
매캐한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가 뒤섞여 구역질이 나는 참경(慘景)이 중양서원 후전을 뒤덮고 있었다.
전원에 있던 서생들은 일부는 도주하고 간 큰 서생들이라 할지라도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뒤쪽만 넘겨다보고 있는 중이다.
대대적인 수색이 싸움을 승리로 이끈 다음에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개왕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를 따른 궁가방의 핵심고수들도 돌아오지 않았다.
한쪽 팔을 잃고서 도주한 구대처를 쫓아간 까닭이다.
격전의 현장에 한효월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주변으로는 주자미와 황엽, 감천형 등이 서 있다.
하늘에는 꾸물거리는 구름에 묻힌 해가 따분한 듯 졸면서 미약한 빛을 흘려내고 있어 언제 다시 비가 쏟아질지 알기 어려운 날씨였다.
"그가 쓰러져 있던 곳 주위 십 장을 이 잡듯 뒤졌지만 그의 것으로 짐작되는 시체나 신체의 일부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주자미의 시위인 용천성이 최종 보고를 했다.
"으음……."
황엽이 신음을 흘렸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설마 하니 그자가 다시 살아나 도주하기라도 한 건가요?"
주자미가 입술을 물었다.
"누가 시체를 가져갈 수 있는 확률은?"
한효월의 물음에 감천형이 머리를 저었다.
"희박합니다. 격전의 소용돌이에서 시체를 가지고 가다니요. 더구나 폭발까지 일어난 상황인데, 그랬다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겠지요. 한 가지 가능성이 있다면……."
"있다면?"
"시체가 스스로 몸을 숨겼다면……."
"말도 안 돼!"
주자미가 발을 굴렀다.
"그자가 쓰러진 걸 보고 나는 이 자리에 오면서 암중에 보타경(普陀勁)으로 다시 한 번 그의 심맥을 으스러뜨렸어요. 설사 그가 죽은 척했다 할지라도 살아남을 수 없어요!"
이미 한번 당한 적이 있는 그녀인지라 세심히 손을 쓴 것이다.
그런데도 시체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죽었습니다. 최소한 그 시체가 공일도 본인이었다면……."
한효월이 단정하듯 말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단정하죠?"
"제가 그의 죽음을 확인했으니까요. 군주마마께서 그를 다시 죽이기 전에 이미 소생은 그의 죽음을 확인했었습니다."
"그럼 그자도 가짜란 말이에요?"
"아닐 겁니다. 사람에겐 기도가 있습니다. 아무리 화신이 비슷하게 변장을 해도…… 그것까지 흉내 낼 수가 없죠."
"화신이 대신 끼어들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쫓기면서 그럴 만한 틈은 전혀 없었습니다."
감천형도 말했다.
"거참……."
황엽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일대를 모두 수색하도록 일단 명은 내려두었지만 수습에도 손이 달리는 판이라…… 인마를 더 불러 모아야 원활한 수색이 시작될 수 있을 것 같소이다."
"개왕 어른은 언제 돌아오십니까?"
감천형이 묻자 황엽은 머리를 저었다.
"그건 알 수 없지만 연락을 취하면 반 시진 내에 어디 계신지 알아낼 수가 있소. 이쪽의 상황을 알리도록 하겠소."
"이렇게 끝이라면 너무 허무한 일이군요."
주자미가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로 중얼거렸다.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습을 당해 무너졌지만 이곳에 있던 사람은 모두 세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어투를 보건대 정작 중심 인물은 여기 없었던 것같이 느껴졌습니다. 노문사도 죽어버렸으니 개왕께서 그 대학사라는 구대처를 잡을 수 있기를 바래야겠지요. 그럼 거의 전모를 알 수 있게 될 것 같습니다."
한효월의 말에 사람들은 침묵을 지켰다.
격전이었고 대승을 거두었지만 실제로는 뭔가 미진하게 사람들의 뇌리를 잠식했고 그로 인해 오히려 뭔가가 더 큰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그들의 안색을 무겁게 했던 것이다.
"감 사질."
"예, 사숙."
"여기서 개왕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려서 상황을 명확히 판단토록 하게."
"예, 그런데 사숙께선?"
한효월의 말이 이상하자 감천형이 물었다.
"나는 먼저 가볼 곳이 있어. 황 방주께도 잘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어딜 가실 예정이오?"
황엽이 물었다.
"미루어두었던 일을 해볼까 합니다."
"미루어두었던 일이라면……?"
"그날 말했던 그 물건을 찾으러 갔다 오겠습니다."
"정말 찾을 수 있겠소?"
황엽의 얼굴에 아연 긴장이 떠올랐다.
"최선을 다해봐야지요."
"만약 찾을 수가 있다면, 그동안에 우리는 나머지 하나를 찾아 나서야 하지 않겠소?"
"서두르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다녀올 때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알겠소이다. 그런데 유성은 어디로 가고?"
"소생이 먼저 가 있도록 시켰습니다. 가면서 만나면 됩니다."
"왜 이렇게 급하게 떠나야 해요? 개왕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도 되지 않겠어요?"
주자미가 말했다.
한효월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한시라도 아까우니까요. 그리고 군주마마께 약속드린 일도 해결해야 하니 어찌 한가롭게 쉴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다른 사람과 같이 가야지 어떻게 혼자……."
"아닙니다. 혼자 은밀히 가야 합니다. 그럼."
그 말을 남기고 한효월은 그 자리를 훌쩍 떠났다.
"잠시 쉬면서 계획을 잡아도 될 텐데…… 뭐가 그리 바쁘다는 건지?"
주자미가 머리를 저었다.
그녀의 말에 황엽과 감천형은 가슴이 무거웠다.
한효월이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다시 길을 떠난 이유를 잘 알기 때문이다.
일각이 여삼추.
하루하루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기에 저렇게 동분서주하는 저 젊은 영웅의 행동을.
『대풍운연의』 제11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