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首 천리추종(千里追從)
-뒤를 쫓다
죽음의 공포(恐怖)는 효웅이라 해도 다르지 않다
일세를 풍미하던 원흉.
제천교를 실질적으로 조직했던 신비인.
천기선생이라 호(號)하며 천하를 농락하던 그 공일도가 죽었다. 그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믿기지 않도록 그는 너무 허무하게 죽어갔다.
믿었던 대막사왕의 배신, 한효월의 공격에 이어진 독고해의 일격에 무너진 그의 목을 주자미의 한 맺힌 일검이 베어냈다.
외견상 잘못된 점은 하나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은 한효월이 주도했으며, 그의 안배에 따라 공일도를 잡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너무 허무했다.
그는 이렇게 죽어서는 아니 되었다.
이렇게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렇게 죽고 말았다.
정화와 황엽 등이 나타나자 대막사왕은 모습을 감추었다. 그가 집 안으로 숨어든 이유는 정화와 부딪치기 껄끄러워서다. 북원의 잔당이라 할 수 있는 그를 정화가 그냥두려고 할 리가 만무인 까닭. 그쪽을 슬쩍 바라본 한효월은 자신의 곁으로 다가서는 감천형에게 물었다.
"왜 미리 움직인 것인가?"
그 음성은 크지 않았지만 질책의 빛이 역력했다.
"그건 내가 답하겠소."
시신을 향해 다가왔던 정화가 그 말을 듣고서 나섰다. 말소리가 들리게 한 것이 그를 향한 것임을 짐작하는 것이다.
"매복했던 곳에서 소요가 있었소. 어이없게 풀 속에서 뱀이 나타나자 놀란 군사가 앞으로 뛰어나오다가 그걸 적에게 들킨 모양이오. 너무 어이가 없는 일이라 군률에 따라 참할 생각이오만, 적의 수괴를 잡았으니 대과(大過)는 없는 게 아니겠소?"
"머리를 자르면 꼬리가 아무리 많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예정과 조금 다르긴 하지만 절대적인 위치에 있던 교주가 죽었으니 그들을 일망타진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일 거예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공일도의 수급을 보검에 꽂은 채로 주자미가 한효월에게 그렇게 말한다. 그를 죽이고도 그녀의 한은 풀린 것 같지가 않았다.
"사로잡았다면 좋았겠지만 그리 수월히 잡힐 존재가 아니니……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인 거 같소."
황엽도 입맛을 다시면서 말했다.
"그리 간단하지 않은 느낌입니다."
"무슨 소리요?"
묻던 황엽이 돌연 안색이 변해 주자미에게 다가갔다.
"그의 수급(首級)을 내려놓으십시오."
"왜죠? 이자의 수급으로 억울하게 죽어간 모든 사람들의 제사를 지낼 작정인데……."
하지만 그녀는 검끝에 꿰었던 제천교주의 수급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비할 바 없이 영민한 사람이었으므로 분노한 와중에도 황엽의 말에 무엇인가 뜻이 있음을 알 수가 있었던 것이다.
"포위망을 풀지 말고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 채로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말과 함께 한효월은 몸을 날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
장내의 사람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늘 한효월의 뒤를 따르던 유성의 모습이 왜 보이지 않는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과연 잡을 수 있을까 했던 존재를 잡았으니 유성에게 신경을 쓸 사람이 있을 리 없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그때 황엽이 일그러진 음성을 흘려냈다.
"무슨 일이오?"
정화가 다가서면서 물었다.
"가짜입니다."
"뭐라고?"
정화와 주자미의 눈이 커졌다.
"어, 어떻게 가짜란 말이오? 면구(面具)를 쓴 것같이 보이지 않는데?"
정화가 믿기 힘들다는 듯이 눈을 껌벅였다.
피투성이인 채로 눈을 부릅뜬 공일도의 수급. 그 머리는 바닥에 놓여져 있지만 변장을 하거나 인피면구를 쓴 것 같지는 않았다.
"단순히 변장을 목적으로 면구를 쓴 게 아니라…… 아예 얼굴을 바꾼 것 같군요. 얼굴 피부를 뜯어내고 인피면구를 얼굴에다가 붙여 버린 것 같습니다."
신중하게 잘린 목 부분과 피부를 조사하던 황엽이 말했다.
"무슨 그런…… 아무리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오?"
"공일도 정도의 능력을 지닌 자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일 겁니다. 여기를 보십시오. 얼굴 피부는 그렇지 않은데, 이 목 쪽으로는 잘린 부분의 피부가 괴리가 됩니다. 몸을 살펴본다면 아마 목 둘레에 무슨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으으음……."
정화는 신음을 흘리면서 조금 떨어진 곳에 쓰러져 있는 공일도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황엽이 피 범벅이 된 옷을 젖히자 과연 공일도의 시체 목 아래로는 은은한 흉터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왜 생겼는지는 누구도 단정하기 어려웠다. 괴이한 것은 어깨 부분에서 시작된 그 흉터가 목 주위를 빙 두르고 있다는 정도일까?
"정말 내가 죽인 것이 놈의 화신(化身)이란 말이오?"
주자미가 발을 굴렀다.
"아직은 아무것도 단정하기 이릅니다. 한 공자가 안으로 들어갔으니 무슨 단서를 찾아내겠지요."
황엽이 집 안을 바라보았다.
한효월은 공일도가 대막사왕에게 쫓겨 들어왔던 그 방에 있었다. 대청에서 대막사왕과 싸우다가 한효월을 보고 달려 들어갔던 그 방. 한효월이 그곳에 도달했을 때는 공일도가 이미 문을 부수고 밖으로 달려나갔을 때였다.
'내 눈을 피했다면 여기서밖에 없다. 외부는 포위되어 그냥 나갈 방법은 전혀 없었을 테니까…….'
그가 눈을 빛내면서 주위를 돌아볼 때 옆에서 소리가 들렸다.
'왜 남아 있으라고 한 거요?'
전음지성.
바로 대막사왕이었다.
그는 어느새 복면을 꺼내 쓰고 있었다. 그가 찡그린 빛으로 슬쩍 부서진 문 쪽을 바라봄을 보자 한효월이 말했다.
"우리가 잡은 것은 진짜가 아닌 것 같소."
'무슨 소리를! 그럼 본왕이 여기서 어릿광대 짓을 해서 당신을 속였다는 것이오?'
대막사왕이 눈을 부릅떴다.
"어떤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겠죠. 진실을 밝히기 전까지는. 다만 나로서는 당신이 그런 짓을 하지 않았으리라 믿고 싶을 뿐…….
한 가지만 묻겠소. 당신이 그를 공격했을 때, 그가 정말 공일도 본인이었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그럼 본왕이 정말로…….'
"대답만 해주시오."
한효월이 그의 말을 잘랐다.
'후우…… 이런 일이라니. 당연히 본인이지. 아니면 누구란 말이오?'
"내가 부딪쳐 본 그는 너무 약했소. 아무리 부상을 당했더라도…… 만약 당신과 싸운 사람이 진짜였다면 그가 가짜로 화할
가능성은 이 방에 들어왔을 때뿐이오."
"말도…… 그 짧은 순간에 어떻게 사람을 바꾼단 말이오? 더구나 여기는 다른 곳으로 통하는 통로가 없지 않……!"
부지중에 소리를 치던 그는 갑자기 눈을 빛내면서 입을 닫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요? 그럼 그가 여기서 바꿔치기 해서 가짜가 밖으로 나가고 진짜는 비밀 통로를 통해서 사라졌다는 거요?"
"그 외에는 한 가지 가능성뿐이오."
"그게 뭐요?"
"당신이 처음부터 각본을 쓰고 나를 속인 것이겠지."
"……."
한효월의 말에 대막사왕은 그를 쏘아보았다.
사납게 그를 쏘아본 대막사왕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한차례 발을 구르더니 길게 한숨을 불어냈다.
"그만두지. 다 내가 자초한 일이 아닌가! 내가 뭘 하면 좋겠소?"
"그와 부딪쳤을 때, 불의의 일격으로 그에게 상처를 입혔소?"
"본 대로. 그의 무공은 나보다 약하지 않아 정면으로 상대한다면 천 초 이내에는 승부가 나지 않을 거요."
"당신의 무공이 그보다 높단 말이오?"
한효월의 말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무공광이오. 평생을 통해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고 오로지 무공 연마에만 몰두했고 권력 다툼에도 끼어든 적이 없소. 자연히 그처럼 갖가지 일에 머리를 굴리는 사람보다 무공진경이 빠른 게 오히려 정상이 아니겠소? 물론 처음에는 내가 그에게서 무공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그건 옛일이오……."
하긴 보통의 자질, 보통의 노력으로 어찌 천하십왕 중 하나가 될 수 있었을 것인가.
한효월이 상대해 본 바로 그의 무공은 다른 십왕에 비해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가장 나이가 어릴 것임에도 그러한 진경을 보여준다는 것은 역시 대단한 존재라는 말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의 상세는 어느 정도일 것 같소?"
한효월의 질문에 그는 미간을 찡그렸다.
"워낙 속이 깊은 사람이라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족히 몇 달은 요양해야 회복이 가능할 거요. 나는 조금도 사정을 보지 않고 대막 광풍신공장(狂風神功掌)을 운용했으니 용권풍인 줄 알고 대응하던 그로서는 타격이 더욱 컸을 거요. 그런데 그가 정말 가짜라면…… 그리 쉽게 파탄이 드러나지 않을 텐데? 그의 화신은 정말 알아내기 쉽지 않소. 나조차 몇 번이나 속았었는데……."
"그의 무공이 약한 면도 있지만 마지막 순간에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광기(狂氣)를 보였었소. 공일도와 같은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죽음을 도외시하는 행동은 하지 않을 테니 나머지야 자명하겠지."
말과 함께 한효월은 한쪽 벽에 섰다.
그는 지금까지 말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방 안 이곳저곳을 유심히 살피면서 돌아다녔었다.
공일도는 상처를 입은 채로 무서운 속도로 방 안으로 날아들었었다. 그리고는 바로 뒤따라온 한효월이 본 것은 부서진 문 밖에서 달려가고 있는 그의 뒷모습.
그를 놓친 적이 있다면 오직 하나…….
뒤쫓던 그의 눈앞으로 날아들었던 암기.
그건 어쩌면 그를 해치기보다는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일 수도 있었다. 단 한 순간이라도 그를 지체키 위한 것이라면…….
한효월은 문을 박차고 들어온 그가 몸을 뒹굴어 일어났던 곳을 찾아냈다.
보통 사람은 찾기 힘들 정도의 미미한 흔적이 거기 있었다.
그 흔적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을 때 황엽이 안으로 들어왔고 정화와 주자미, 감천형 등이 줄줄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한효월 외에 복면인이 한 사람 안에 있자 놀란 빛이었지만 한효월과 같이 있음을 보고 그가 누군지는 묻지 않았다. 그들 중에서 대막사왕 완일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황엽이 유일했다.
한효월은 그 날아든 흔적에서 문 쪽을 바라보았다.
"사각(四角)이군……."
그가 중얼거렸다.
"뭐가 사각이란 말이오?"
정화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는 아직도 제천교주가 가짜라는 것이 실감나지 않는 것이다.
"문에서 날아든 이곳이 문밖에서 보이지 않는 장소라는 겁니다. 그가 급하게 도주하기 위해서였다면 거리가 더 떨어진 이곳으로 가진 않았겠지요. 이처럼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을 까닭도 없었겠죠. 그는 부상을 당한 몸으로도 굳이 이곳으로 날아들어 남의 시선을 피한 다음에 다시 몸을 날려 문을 부수고 도주했습니다. 남의 이목을 꺼리던 자가 갑자기 시선을 끌면서 도주한 까닭은……."
"정말 가짜란 말인가!"
정화가 신음했다.
한효월은 고개를 쳐들어 지붕을 올려다보았다.
"방주께선 감 사질과 함께 이 방 내에 비밀 통로가 있는지 알아봐 주십시오."
말과 함께 한효월은 둥실 솟구쳐 머리 위쪽의 대들보로 올라갔다.
그가 대들보 위에서 세심히 살펴보고 있는 동안 갑자기 밑에서 탄성이 들려왔다.
"비밀 통로군!"
족자가 걸려 있던 곳 뒤에서 비밀 문이 발견되었다. 감천형이 찾아낸 한 사람이 겨우 몸을 비틀어 들어갈 수 있는 비밀 문은 벽과 같은 색이라 거의 발견하기 힘들었다. 아래로 내려가는 좁은 계단은 지하로 통하는 것 같았다.
"이런 교활한 놈 같으니!"
정화가 다급히 밖으로 달려나갔다.
군사들을 풀어서 사방을 경계할 작정인 것이다.
이런 통로는 대개 집 밖이나 뒷산으로 나 있게 된다. 십 리 이십 리 밖으로 나 있기는 힘든 까닭이다. 그러니 근처 어디로 나올 그를 놓칠 수야 없는 일이었다.
주자미는 노하여 한 차례 발을 구르더니 독고해를 불러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앞선 이상 커다란 위험에 직면할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방주께서 뒤따라가 보시지요."
한효월이 내려서면서 하는 말에 황엽은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한 공자는 가지 않을 생각이오?"
"조금 생각할 것이 있으니 먼저 가십시오. 어떤 함정이 있을지 모르니 이상하면 바로 뒤돌아 나오도록 하십시오."
"알겠소."
황엽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한효월은 대막사왕을 바라보았다.
"이 방에 계속 있었습니까? 아니면 밖으로 나왔던 적은?"
"당연히 뒤따라 나갔다가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기에 다시 안으로 들어와 한 공자를 기다리고 있었소. 그건 왜?"
"그 순간이 함정이었던 것 같군요."
한효월은 대들보를 힐끔 바라보고는 머리를 저었다.
"그의 무공은 과연 잡다하고 박대하군요. 아마도 그는 이곳으로 들어와서 밖으로 나가는 척하고는 대들보 위로 올라갔고 화신을
밖으로 내보냈을 겁니다. 그의 잠력을 격발시켜서……."
"무슨 그런! 내가 여기 왔을 때는 공력을 운용하여 모든 곳을 샅샅이 살펴보았는데 숨어 있었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리가!"
"나도 전심을 다해 살피고 있었으니 그가 숨어 있었다면 발견할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는 그냥 있었던 게 아니라 아마도
환술(幻術)을 사용하여 눈속임을 했을 겁니다. 겉보기로는 대들보처럼 보였겠지요. 그리곤 당신이 밖으로 나간 찰나간의 틈을
이용하여 우리가 들어왔던 저 문으로 다시 빠져나갔을 겁니다."
"그건…… 너무 앞서가는 추측이 아니오?"
대막사왕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머리를 저었다.
"대들보 위에서 아주 미세한 사람의 흔적을 발견했는데, 저곳은 특성상 사람의 흔적이 있기 힘듭니다. 오래되었다면 그런 흔적이 남지 않았겠지요."
휙.
참지 못하고 감천형과 대막사왕이 동시에 대들보로 날아올랐다.
그 모습에 한효월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에 그는 문밖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과연 자신의 생각대로인지를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그가 나선 곳은 처음 당도했던 대청이었고 한효월이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동안에 대막사왕과 감천형 등이 뒤따라 나왔다.
"미묘한 흔적이 있긴 하던데, 정말 그걸 가지고 그렇게 생각하시오? 만약 그렇게 했다면 왜 비밀 통로 안으로 들어가질 않고?"
대막사왕이 물었다.
"비밀 통로를 발견당했을 경우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겠지요. 그는 땅에 뒹굴면서 살짝 바닥을 짚었고 그 반동으로 대들보까지 올라갔습니다. 물론 화신에게는 전음으로 지시를 내렸겠지만…… 그의 공력으로 그런 흔적을 남겼다는 것은 그의 일신 내상이 가볍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 것 같기도 하군요."
그때였다.
쾅!
집 안이 뒤흔들리는 폭음이 터져 나왔다.
"맙소사!"
한효월이 안색이 돌변해 방금 나왔던 방으로 뛰쳐 들어갔다.
열린 지하 통로에서 뭉클뭉클 흙먼지가 피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서슴없이 통로 안으로 뛰어들었다.
매캐한 냄새에다 먼지가 숨을 막히게 한다. 온통 통로를 가득 채운 그것들로 인해 보이는 것이 없었다. 통로의 계단은 일 장 반 정도 밑으로 뻗어 있는데 통로를 메운 것은 부서진 돌 더미들이었다.
"이런! 함정이로군요!"
감천형이 뒤따라 들어와서는 신음을 흘렸다.
"이쪽도 무너질지 모르겠군……."
한효월이 신음을 흘릴 때 우르릉 소리와 함께 천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피해."
한효월이 소리치면서 뒤로 물러났다.
쾅! 콰콰…… 쾅!
계속해서 굉음이 일더니 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통로를 빠져나온 한효월과 감천형 등이 바람처럼 집 밖으로 물러났다.
"무, 무슨 일이오?"
정화가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만에 하나 주자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무슨 낯으로 황제를 대할 것인가.
폭음과 함께 진동이 일자 명민한 그는 일이 터진 걸 짐작하고는 황급히 달려온 것이다.
그런데 그때, 돌 조각과 나무들이 튕겨 오르면서 지하에서 사람 하나가 날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사부님!"
감천형이 소리쳤다.
놀랍게도 땅거죽을 헤집으면서 솟구쳐 오른 사람은 바로 독고해였다.
그의 옷은 방금 전과는 달리 너덜거려 내부에서 당한 일이 심상치 않은 것임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의 뒤를 따라 주자미와 황엽이 잇달아 솟아났다.
"다들 무사하셨군요. 다행입니다."
한효월이 한숨을 내쉬었다.
"독고 맹주께서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이 사람은 지하고혼이 될 뻔했소. 정말 악독한 매복이오……."
황엽이 머리를 저었다.
그도 먼지를 수북이 뒤집어쓴 모습이다.
반면에 주자미는 비교적 양호했다.
그녀는 묘한 눈빛으로 자신의 옆에 있는 독고해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을 가로막으며 강기로써 보호하지 않았다면 그녀 또한 상당한 곤욕을 치렀을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통로 전체가 붕괴되는 상황에서 그가 아니었다면 위쪽을 뚫고 오른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 사람은 대체…….'
주자미는 암암리에 한숨을 쉬었다.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처럼 굳건하게 자신을 지키고 있는 사람을 어찌 죽었다고 생각하고 잊어버릴 수 있을 것인가.
방금 전에만 해도 전진하고 있던 지하 통로 전체가 한꺼번에 무너지자 그는 명령이 있기 전에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 움직였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그가 살아서 자신의 곁에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러한 그녀의 마음을 누가 알 것인가.
모두 그녀가 변고에 놀란 것으로 생각할 뿐이다.
무너져 내린 통로를 바라보면서 정화가 이를 갈았다.
"말도 안 돼…… 놈을 또 놓친 거란 말인가!"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압도적인 전력이었다.
그런데도 홀로 있는 그를 잡지 못하다니…….
사람들은 그의 신출귀몰에 농락당한 느낌에 참괴(慙愧)한 빛이 역력하다.
멀리서 부엉이 소리가 청승스럽게 들리니 더욱 처량했다.
그런데 그 소리를 듣자 한효월이 사람들을 돌아보는 것이 아닌가.
"한 가닥 단서가 생긴 것 같군요. 혹시 몰라서 외곽에서 이곳을 빠져나가는 자가 있는지…… 약간의 매복을 깔아두었었습니다. 거기에 단서를 찾아낸 모양입니다."
"단서라니? 그럼 저 부엉이 소리가?"
"약속한 신호입니다. 그를 발견하면 보내기로 한……."
"그, 그런!"
정화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장 천호(千戶)! 빨리 군사를 모아라!"
그가 소리치자 한효월이 황급히 그를 제지했다.
"정 대인께선 이 일대로 군사를 흩어 수색을 시작해 주시고, 군주님께서는 잠시 쉬면서 하회을 기다려 주십시오."
"군사를 흩어 수색이라니? 놈이 어디로 간 줄 알고 그냥 수색을 한단 말이오? 저 느림보들에게 수색하라면……."
"그를 쫓는 걸 알게 해선 안 됩니다. 자신의 종적이 들킨 것을 알게 되면 그가 어떻게 사라질지 모르니까요. 감 사질과 황 방주,
완 형은 나와 같이 가서 상황을 보도록 하지요."
말과 함께 한효월은 바람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오늘 그의 행동은 전과는 또 다른지라 모두 주춤했다가 바로 그 뒤를 따랐다.
"도대체 저 친구는 점점 추측불가로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겐가?"
멍청히 그 뒤를 바라보던 정화가 중얼거렸다.
한효월은 조가장의 뒷산으로 올랐다.
거기에는 유성이 있었고 유성은 활짝 웃으며 그를 맞았다.
"놈을 발견했어요! 지금 만리비응(萬里飛鷹)이 뒤를 쫓고 있어요."
"얼마나 되었느냐?"
"방금이죠. 교활하게도 어슬렁거리면서 움직이더군요. 하마터면 놓칠 뻔했어요. 그렇게나 태연하다니……."
유성은 처음부터 한효월의 명을 받고 높은 곳에서 조가장 주위를 감시하고 있었다. 조가장의 지세로 볼 때 어떤 방향으로든 조가장을 떠나려면 감시의 눈길을 피할 수가 없는 곳이 바로 여기인 까닭이다.
"무슨 옷을 입었더냐?"
"공자님 말씀대로 위사의 옷을 입은 놈이 포위한 위사들 사이를 늠름하게 통과하더군요. 아마 잠복했던 위사 서너 명은 놈의 손에 죽은 거 같아요. 그걸 보지 않았다면 설마 그게 제천교주라곤 생각할 수 없었을 거예요."
"북쪽으로 갔느냐?"
"맞아요."
한효월이 황엽을 돌아보았다.
"궁가방도들이 만리비응의 뒤를 추적할 수 있겠지요?"
"물론이오. 만리비응은 본 방의 영물(靈物)인데 그걸 못할 리가 있겠소?"
황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죠."
한효월이 신형을 날렸다.
'이건 소문보다 더 대단하지 않은가. 천하를 도모한다면 결코 그냥 두어서는 안 될 존재!'
그의 뒤를 따르면서 대막사왕은 신음을 흘렸다.
한효월은 모든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유성에게 감시를 하도록 시키고 개왕에게서 만리신응을 빌렸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유성뿐이었지만 실제로 일대를 감시하는 인원은 십여 명이 넘었다. 그중 절반은 궁가방이었고 절반은 감천형의 정의맹 고수들이었다.
만리신응은 일단 하늘에 뜨면 만 리를 간다는 영물이고, 기연을 얻어 밤에도 사물을 대낮처럼 볼 수 있었다.
추적에는 최고라는 존재가 바로 만리신응이다.
{c#}* * *
동정호에 일던 풍운은 일단 가라앉았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던 사람들은 모두가 암암리에 한숨을 몰아쉬었다.
태풍일과(颱風一過).
이미 큰 바람은 지나간 것 같았다.
동정호 오백 리 일대에 내려졌던 통금령도 해제되었으니까.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 바람은 아직 지나지 않았고 사람들이 움직이는 요로요로를 따라 피바람이 일었다. 풍운이 아우성치면서 치닫고 있는 듯한 형국이었다.
한 사람이 움직이는 곳마다 격렬한 싸움이 일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우……."
촌로(村老) 한 사람이 길거리 주막에 앉아 암암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늙수그레한 모습은 마을 노인에 다름이 아니다. 일을 마치고 술 한잔을 걸치기 위해서 이 주기(酒旗)가 펄럭이고 있는 허름한 길거리 주막에 온 모양이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사십 대의 주인이 웃음을 띤 채로 다가왔다.
손에는 술병 하나와 잔, 그리고 안주가 놓인 작은 소반이 들려 있다.
"손님이 많은가 보우?"
촌로가 걸걸한 음성으로 물었다.
길거리에 내놓은 탁자 네 개 중 그가 앉은 탁자를 제외한 세 개에는 장사꾼과 무림인인 듯한 사람 등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빈자리가 없었다.
"하하…… 많긴요. 저녁때니까 요기를 하려는 사람들이죠. 뭐 다른 것도 드릴까요?"
"난 이거면 되었수……."
촌로가 술병을 들어 보이며 히죽 웃어 보였다.
"그렇게 하십쇼. 그럼……."
그는 싹싹하게 웃으며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평범한 대화.
하지만 그렇게 대화를 나누면서 전음으로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이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사람임을 말한다.
'어떻게 되었느냐?'
'화룡루(火龍樓)의 십이화룡이 오고 있는 중이고, 내당의 고수들도 십 리 이내에 들어와 있습니다. 제삼교주와 제사교주께서도 동서의 인마와 함께 급히 오고 있는 중입니다.'
'천마각과 강령루는?'
'그게…… 주력이 어떻게 된 건지 움직이질 않고 있습니다.'
'무슨! 감히 본 교주의 명에도 움직이질 않는다고?'
'그렇습니다. 무슨 까닭인지 제천전(帝天殿)에서 그 움직임을 막고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감히…….'
촌로가 콸콸 화주(火酒)를 잔에다 쏟았다. 분노가 술잔을 쥔 손에서 이글거린다.
어떻게 이따위 일이!
'추적자들의 흔적은?'
그가 술을 들이키면서 물었다.
주인은 옆에 있는 다른 탁자에 가서 뭔가 이야기를 하면서 대답했다.
'삼십 리 밖에서 적지 않은 인마가 움직이고 있지만 여기까지는 오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을 떠나시는 대로 바로 천라지망을 쳐서 누구도 통과할 수 없도록 하겠습니다.'
"아이구, 취한다……."
벌컥벌컥 화주를 물 쏟듯 들이킨 촌로는 바지춤을 움켜잡고서 주막의 뒤쪽으로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이미 술이 거나하게 올라 소변을 보려는 형상이다.
길거리 주막이니 주막 뒤는 숲이고, 키 작은 싸리나 사철 등을 심어 대강 담장을 이루었다.
주막의 뒤로 돌아간 촌로의 눈빛이 달라졌다.
구부정한 허리도 꼿꼿해졌다. 그가 한 걸음을 내딛자 놀랍게도 삼 장을 미끄러진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살피면서 그가 무서운 속도로 담장에 이르러 담장을 뛰어넘으려는 순간이다.
콰작!
담장이 마른 목화처럼 산산조각났다.
그리곤 한 사람이 불쑥 그의 눈앞에 솟아나면서 일권을 쳐왔다.
단 한 수에 촌로 주변 십 장이 모조리 그 권역(圈域)에 드는 가공할 위력을 가진 일권.
"도, 독고해!"
촌로가 대경해서 외쳤다.
그러나 어찌 놀라고만 있을 것인가.
피할 수조차 없는 마당.
그는 다급히 부르짖으며 양손을 모아 용권풍을 말아냈다.
쾅!
가공할 폭풍이 몰아쳤다.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촌로가 비틀,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정작 나타난 적, 독고해는 아무런 충격을 받지 않았는지 질풍처럼 앞으로 전진하면서 다시 일격을 가해오는 것이 아닌가.
"정말…… 무섭군!"
촌로가 신음을 흘리며 양손을 황급히 가슴 앞에 모았다.
쾅!
폭음이 터져 나오며 그 충격에 그는 다시금 뒤로 튕겨져 나갔다.
퍽! 밀려나던 그의 등 뒤에 있던 주막 본채가 그의 등에 밀려 모래성처럼 간단히 허물어졌다. 촌로는 주막을 뚫고 들어가 넘어질 뻔하다가 전신을 내던져 옆쪽 주막의 벽을 뚫고 나갔다.
주막의 흙벽 정도는 백지장처럼 여길 힘을 가진 고수가 그였다.
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가공할 위세가 이미 자신을 휘감았고 독고해가 그의 뒤를 바짝 뒤쫓아와 있음을!
바로 그때.
좌우에서 막강한 위세를 가진 힘이 날아와 독고해를 쳤다.
콰쾅!
독고해는 그들을 마치 파리 치듯 쳐 날려 버렸다.
개개인이 일당백일 그들도 독고해의 절륜(絶倫) 앞에서는 무력하게 밀려났다. 그러나 그들이 끝이 아니었다. 주막에서 밥을 먹고 술을 마시던 자들이 모두 독고해에게 달려들었다. 사람 좋아 보였던 주막의 주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이야말로 제천교의 총단 고수들이었지만 그들로서도 독고해를 당해내기는 무리였다. 그리고 촌로 또한 그들이 독고해를 막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시간을 벌어주는 것으로 만족할 따름.
한차례 피를 토한 그는 수하들이 떼거지로 달려드는 것을 보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이미 한 번 겪은 일이 아니었다.
쫓기기 시작한 이래로 잠은커녕, 숨 돌릴 여가도 없이 쫓기고 있는 그였기에.
"헉헉……."
정말 그답지 않게 손을 무릎에다 대고서 헉헉거린 촌로, 제천교의 교주이자 전대 대막사왕에 봉황문주였던 그. 천기서생 공일도는 한 식경이나 지나서야 겨우 숨을 고를 수가 있었다.
정말 믿기지 않는, 누구도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오백 리가 넘는 길을 잠시도 쉬지 않고 다람쥐처럼 이리저리 길을 바꾸어 누구도 예측 불가능하게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도 놈들은 그를 쫓고 있었다.
독고해가 아니라 황엽만 나타나더라도 일패도지, 죽을힘을 다해서 도주해야 했다. 잠시도 쉴 수가 없는 데다 내상을 다스리지 못해서 입은 내상이 점점 중해지고 있는 까닭이다. 더구나 이렇게 한 번 당하고 나면 내상은 더 깊어졌다.
이대로라면 적에게 잡히기 전에 스스로 무너지리라.
"대체 어떻게 나를 쫓는 것이지?"
공일도는 미간을 찡그렸다.
진땀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추적에는 누구보다 자신이 있는 그였기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암중에 누가 따르고 있다면 그걸 모를 그가 아니었다.
공일도라는 존재가 아니었다면 결코 피할 수가 없도록 추적은 집요했다.
마치 누가 자신의 행로를 앞서 예측하고 그가 갈 만한 곳 모두를 미리 막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문득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천마각과 강령루가 움직이질 않는다고?'
그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설마?"
부지중에 그가 중얼거렸다.
"절대로, 절대로 그렇게 되진 않을 것이다. 감히 나를 버리려 한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게야……."
일그러진 얼굴, 그 피폐해진 눈에서 돌연 무서운 광채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공일도는 안개가 흩어지듯이 그 자리에서 꺼졌다.
…….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허허로운 바람만 남았다.
잠시 후.
"정말 괴상한 무공은 안 익힌 게 없군요. 배교의 환술까지 익혀서 자유자재로 사라지니……."
감탄한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는 보기 드문 재사이니 그 정도를 알고 있다고 해서 놀랄 건 없겠지. 그의 흉중에는 아마 천하의 모든 무공이 들어 있을 게다."
말과 함께 그 자리에 나타난 것은 한효월.
그 뒤에는 유성이 서 있었다.
"저자가 대체 어디로 가는 거죠?"
"글쎄…… 따라가 보면 알게 되겠지."
"우리가 따르는 걸 눈치 채지 못했을까요?"
"알런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그럴 만한 여유를 갖지 못했을 게다. 생각을 가다듬을 만한 여유를 주지 않았으니까. 조금이라도 여유를 가진다면 생각을 해낼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건 그를 결코 쉬지 못하게 계속해서 쫓아가는 일이다."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지금 한효월이 하는 행동은 바로 천기선생 공일도가 건네주었던 천기단서에 있던 추적편을 원용한 것인데, 정작 당사자는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효월은 그를 상대하기에 최선을, 모든 계략을 다 짜내어 그를 쫓고 있었다.
그를 잡는 것이 아니라 그를 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