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首 참구설한(斬仇雪恨)
-원흉을 죽이다
시신(屍身)은 목이 잘려도 살아남다
동정호 북단.
팔촌리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다. 이곳은 동정호의 북단이지만 강물이 동정호로 흘러 들어가는 곳이다.
수륙 교통의 요지까지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길목인지라 어시장이 서곤 하는 곳이었다.
낮이면 사람들로 요란하던 그곳에도 밤이면 어김없이 고요가 찾아든다.
동정호로 출어(出漁) 갔던 배들과 이곳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배들이 모두 볼일을 마친 다음이라 조용해지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오늘 밤은 좀 달랐다.
소리도 없이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창검으로 무장한 병사들. 그들은 한곳을 목표로 해서 물밀듯이 밀려들고 있었고 이내 어둠을 뚫고서 화염이 피어올랐다.
비명 소리가 일기 시작했다.
격렬한 싸움은 오래 계속되었다.
그 와중에 싸움이 벌어진 곳에서 전서구 하나가 하늘로 날아오름은 아무도 보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차가운 눈길 하나가 그 전서구를 놓치지 않고 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눈길은 전서구에 대해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전서구는 어둠을 뚫고서 단숨에 오십여 리를 날아 한 농가에 날아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 농가에서는 다른 전서구가 다시 북쪽을 향해 비스듬히 날아갔다.
그리고는 한 사람이 농가를 나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있던 농가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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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가장.
말만 들으면 거대한 장원이 연상되지만 실제로는 조씨들이 모여 사는 촌락이다.
그러나 예로부터 장원은 마을 일족들을 외세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그렇기에 이 조가장도 이름대로 수십 호의 촌락으로 이루어진 곳이지만 그 외부는 숲과 목책(木柵)으로 견고한 담을 형성한다.
그 조가장 뒤쪽으로는 높은 담장에다 전형적인 사합원의 형상을 한, 고관의 별장과도 같은 집이 하나 있었다.
어둠이 내린 지금, 그 집과 조가장은 소리도 없이 포위된 상태였다. 모두가 흑의를 입은 자들.
그들의 손에는 대부분 창이 들려 있었고 그들을 지휘하는 자들은 대도를 들었다.
흑의 자락 밑으로는 갑주(甲胄)가 보여 이들이 평범한 강호의 무사가 아님을 알고도 남음이 있게 했다.
어둠에 묻혀서 소리도 없이 밀려드는 그들은 멀리서 조가장을 둘러싸는데 그 숫자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천은 넘고 몇 천은 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조가장에서 외부로 통하는 모든 길을 봉쇄했다.
그러나 그 움직임은 매우 은밀했고, 결코 조가장에서 일정 거리 이상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신호를 기다리는 눈빛이 날카로울 따름이다.
"정말 교활한 놈이로군. 가짜로 정보까지 흘리다니……."
몇 군데 불이 밝혀진 조가장의 그 큰 집을 바라보면서 어둠 속에서 정화가 냉랭히 중얼거렸다.
"팔촌리에서의 공격 소식이 아마 지금쯤 전달되었으니 그들은 곧 출발 준비를 할 겁니다. 그때까지 기다리다가 절대로 달아날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한효월이 말했다.
"당연한 일이오.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놈을 놓치겠소?"
정화가 머리를 끄덕였다.
정화의 옆에는 한효월이 있고, 감천형도 있었다. 그 옆으로는 황엽과 얼음 같은 얼굴의 주자미도 있다. 그녀의 곁으로는 철탑과도 같이 팔짱을 낀 독고해가 우뚝 서 있어 오늘 이곳에 동원된 전력이 정말 만만치 않음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했다.
"그럼 말씀드렸던 대로 먼저 들어가 적의 허실을 알아보겠습니다."
한효월의 말에 주자미가 말했다.
"꼭 그래야겠어요? 일제히 공격해서 모두 쓸어버리면…… 주춧돌 하나 남겨두지 않으면 될 텐데."
"잠시만 참아주십시오."
한효월은 그녀에게 포권을 해 보였다.
"……."
주자미는 암암리에 한숨을 내쉬고는 답을 하지 않았다.
독고경을 놓친 다음 그녀는 크게 상심했다.
그런 그녀를 찾아가서 이곳까지 오게 한 것이 바로 한효월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주자미는 아마도 움직이지 않았을 터였다.
"적이 어떻게 움직일지 모릅니다. 그리고 예정대로 적이 바로 출발하지 않으면 더 이상 기다리지 말고 바로 들이쳐야 합니다. 제천교주는 임기응변에 능하고 지모가 출중하니 조금만 이상하면 싸우기보다는 도주하려고 할 겁니다."
"금의위와 무장한 군사 삼천이 주변을 둘러쌌는데 어찌 도주를 할 수 있겠소?"
"모를 일이지요. 어쨌든 최선을 다해야 할 테니까요."
고개를 끄덕여 보인 한효월은 어둠 속에 웅크린 집을 향해 몸을 날렸다.
"각자 맡은 곳으로 가도록 하고, 소생은 본 방의 고수들을 이끌고 조금 전진하여 한 공자를 응원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황엽이 말하자 이미 의논된 바가 있었던 듯 정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엽의 신분은 개방의 방주로서 무림중에는 높았지만 조정의 고관에다가 군주의 앞이니 스스로를 높일 수가 없는 처지라 스스로를 낮출 수밖에 없었다.
황엽이 손짓하자 어둠 속에서 그를 따라 궁가방의 고수들이 조용히 앞으로 밀려 나가기 시작했다.
'거참…… 그처럼 오리무중이더니 일단 움직이니 단숨에 제천교주를 잡아낸단 말이지?'
정화는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내심 묘한 빛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쩌면 잡을 수 있는데 그간 잡지 않고 기다린 것은 아닌가 하는 표정인 것 같기도 했다.
한효월은 어둠을 이용하면서 조용히 전진했다.
그의 무공은 이미 최상승에 달해 세상을 놀라게 하고도 남음이 있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당연히 신법은 유령의 움직임과도 같아 소리없이 큰 집에 도달했다.
담은 한 장 반이나 되어 일반 담장보다 훨씬 높았다. 해자(垓字)라도 있다면 하나의 보(堡)와도 같이 큰 집이고 담장이었다. 주변에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솟아 있어 그런 담장을 가리니 얼핏 보면 담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담에 이른 한효월은 잠시 뭔가 귀를 기울이는 듯하더니 어깨를 움찔하는 사이에 담을 날아 넘었다.
담을 넘어서자 그곳은 별장의 후면이었다.
전원 쪽에는 불이 밝혀져 있는데 이곳에는 불빛이 전혀 없어서 칠흑과도 같은 어둠이 주위를 온통 덮고 있었다.
'여기요.'
전음지성이 들려왔다.
정원 교목 옆이었다. 바위와 어우러진 교목은 멋들어진 정경을 만들어내지만 또한 그늘도 깊어서 몸을 숨기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그곳에는 복면인 한 사람이 그를 기다렸다.
대막사왕이었다.
그의 옆에는 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데 이미 절명한 것 같았다.
'이곳은 주변을 감시하는 매복 초소요. 교주가 곧 떠날 것 같으니 교대가 오거나 하진 않을 거요.'
그의 말을 증명하듯이 후원 마당에는 사인교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좌우로는 이미 흑의인들이 두 줄로 쭈욱 도열해 있는데 숨 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주변으로는 불이 꺼져 있어서 그들이 그 자리에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곧 떠날 작정임이 분명해 보였다.
교자의 앞에는 복면을 한 자가 우뚝 서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쓸어보고 있는데 한효월도 아는 사람이었다.
바로 제천교주의 친위대장.
그때 안쪽에서 흑의인들 십여 명이 줄지어 걸어나왔다.
그리고 모습을 보이는 제천교주.
그의 모습은 여전했다. 그는 침착한 걸음걸이로 곧바로 교자를 향해 걸어갔고 흑의인들은 두 줄로 갈라져 그를 맞았다.
변고는 바로 그때 발생했다.
삐익!
날카로운 호각 소리.
고막을 찢을 듯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고요를 찢고서 들려온 것이다.
아연 긴장이 장내에 엄습했다.
막 교자에 들어가려던 제천교주 공일도는 흠칫, 고개를 들고서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눈길을 던진다.
친위대장이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무슨 일이지?"
"내부 초소에서 발한 긴급 신호입니다."
"내부 초소에서?"
"어떻게 할까요?"
"……."
잠시 주춤하던 제천교주의 결정을 도울 일은 바로 이어졌다.
고함 소리와 비명 소리가 잇달아 들리면서 바깥에서 격렬한 싸움 소리가 일며 안쪽으로 짓쳐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위세는 믿기 힘들 만큼 대단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누가 고함치면서 들판을 달리는 것만 같았다. 아무도 그 앞을 가로막지 못하거나 압도적인 세력에 막던 저지력이 힘없이 무너지고 있다는 의미다.
제천교주는 담장 밖으로 바라보다가 갑자기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모두 주변을 철저히 경계해라!"
친위대장이 소리쳤다.
그러자 교자 주위로 늘어서 있던 친위대들이 모두 집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 신법은 역시 신속하여 찰나간에 집 주변은 철통 같은 경비가 구축되었다.
'어떻게 된 일이오? 왜 미리 움직인 거요?'
대막사왕이 전음으로 한효월을 추궁해 왔다.
한효월이 할 말이 있을 리 없다.
그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대체 왜 그들이 기다리지 않고 미리 움직였는지…….
'어떻게 할거요?'
대막사왕이 물었다.
'제천교주를 따라 들어갑시다!'
'저들을 뚫고 말이오?'
'그가 밖으로 나가지를 않고 오히려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이 수상하오. 비밀 통로가 있어서 외부로 빠져나간다면 그야말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한심한 모양이 되지 않겠소?'
한효월은 대막사왕이 앞서기를 재촉했다.
'무슨 짓? 나더러 저들과 싸우란 말이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소. 그들 모두를 몰살시켜야만 될 거요. 살려둔다면 당신의 배신은 모두에게 알려질 테니.'
'으음…….'
일그러진 눈빛으로 신음을 흘리던 그는 갑자기 앞으로 뛰쳐나갔다.
복면을 잡아 젖히면서 그가 바람처럼 내달리자 그의 앞으로 흑의인들이 가로막으며 나섰다.
"비켜라! 멍청한 놈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앞을 막아!"
대막사왕은 노성을 지르면서 앞을 가로막는 흑의인을 뛰어넘었다.
그러자 흑의인들이 쌍쌍이 날아올라 그를 공격해 왔다.
"이런 멍청한 놈들!"
대막사왕은 대노하여 양손을 쳐냈다.
막강한 잠력이 일며 그를 막았던 흑의인들에게서 비명이 터졌다. 대막사왕의 절학 용권풍이 일면서 그 앞을 막았던 흑의인과 무기들을 하나로 짓이겨 버린 것이다.
"물러나거라!"
그것을 보고 친위대장이 다급히 외치며 달려왔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
대막사왕을 맞이하던 그의 안색이 달라졌다.
짓쳐오던 대막사왕의 기세가 전혀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더욱 빨리 그를 덮쳐 오고 있지 않은가!
"설마 배신?"
그가 눈을 부릅뜨고는 벼락같이 일도를 뽑아냈다. 창황 중에도 도기가 겹겹이 일어났다.
바로 세상을 독보한다는 층층단애지도!
"감히 내 앞을 가로막겠단 거냐? 어서 비키지 못할까!"
대막사왕이 두 눈을 부릅뜨면서 그에게 정면으로 마주쳐 갔다.
"대체 무슨 짓이오? 정말 배신이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그의 기세가 심상치 않자 친위대장이 고함치면서 연달아 칠도를 휘둘러 앞에다 도막(刀幕)을 쌓았다.
그런데 친위대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 사람이 천마(天馬)와 같이 담을 넘어 날아들었다. 그는 날아들자마자 손을 휘둘러 앞을 가로막는 자들을 쳐 죽였다.
"크악!"
"으아악……!"
놀랍게도 교주 친위대의 단 한 사람도 그의 일격을 견뎌내지 못하고서 어육이 되어 튕겨져 나갔다.
"독고해……."
슬쩍 그를 본 친위대장이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멍청한 자! 저자를 보고도 날 막는단 말이냐! 빨리 교주께 가야만 한단 말이다. 비키지 못하겠느냐!"
대막사왕이 고함치면서 양손을 휘둘러 강력으로 밀려오는 층층단애도기를 밀어냈다.
그의 고함 소리에 친위대장은 얼떨떨해서 엉거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기습이 너무 뜻밖이라서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를 막아야 할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하기도 전에 대막사왕은 이미 그의 코앞에 당도해 있었다.
친위대장의 눈빛이 음사(陰邪)하게 굳어졌다.
그는 사정없이 도를 쓸어내어 대막사왕을 베어갔다.
누구도 허락없이 교주에게로 접근하려 한다면 베어내는 것이 그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누구라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대막사왕 또한 피하고자 하지 않았다.
파! 파파팡…….
맹렬한 폭음이 도광권풍에 휩쓸려 터져 나갔다.
강력한 폭장(暴張)으로 주변에 있던 자들이 견디지 못하고 비칠거리면서 물러나야 했다. 절대고수 두 사람이 전력을 다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대막사왕은 정면으로 상대해도 승산이 없는 상대인데 불의의 일격을 당한 셈이니, 그가 불리할 것은 너무도 자명했다.
하지만 물러설 수 있는 상태가 아닌지라 친위대장은 이를 악물고서 수중의 도를 휘저어냈다. 도기가 마치 반달이 쪼개어져 나가듯이 첩첩이 일어 수많은 물고기 비늘이 쏟아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친위대장의 무공이 놀랍다고 하더니 정말이군?"
대막사왕이 냉소를 흘렸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정말 놀란 빛이 스며 있었다.
그래도 그는 짓쳐가는 기세를 멈추지 않았다.
말아 쥔 주먹에서는 무섭게 강기가 일어 뿌연 강막이 소용돌이치면서 친위대장이 일으킨 층층도기를 분쇄해 가고 있었다.
말 그대로 정면 대결이라 누구도 한눈을 팔 수 없었고 누가 간섭하기도 어려웠다. 그랬다가는 두 사람이 일으키는 가공할 위세를 모두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엇인가가 자신의 등 뒤에서 날아듦을 친위대장은 직감했다.
날카롭기 이를 데 없는 기운이었다.
'암습?'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전신의 경력을 모두 일으키고 있어 호신강기는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게다가 두 사람이 맞상대하고 있으니 거기에서 일어난 강풍 또한 가공할 회오리라 누가 암습을 한다고 해서 쉽게 이득을 얻어낼 상태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뭔가 심상치 않은 기세에 친위대장은 신형을 돌렸다. 대막사왕의 공세를 피하면서 등 뒤의 암습을 빗겨내고자 한 것이다. 정면이 아니라면, 대막사왕과 같은 고수의 공격이 아니라면 그 한 수로 충분히 상황을 호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을 했기에…….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호신강기가 쇠꼬챙이에 꿰인 두부처럼 뚫렸다.
부젓가락과도 같은 기운이 사납게 그의 견갑골의 천종혈(天宗穴)을 뚫고 나와 심장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튀어나왔다.
"흐윽?"
그가 두 눈을 부릅떴다.
고수에게 있어 한순간의 빈틈은 바로 치명적이다.
특히 상대가 대막사왕이라면.
대막사왕은 친위대장에게 생긴 빈틈을 놓치지 않았고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고서 그의 가슴에 일격을 가했다.
"크-윽!"
가공할 경력이 친위대장의 심맥을 산산이 으스러뜨렸다. 갈비뼈를 비롯한 척추까지가 모조리 한 번에 바스러졌다. 호신강기가 흩어진 이상 인간의 몸으로서는 도저히 그 공포스러운 강기지력을 견뎌낼 수가 없는 것이다.
피분수가 친위대장의 입으로 튀어나왔다.
그는 대체 무엇이 자신을 공격했는지 알고 싶어서 마지막 힘을 다해 뒤를 돌아보았다.
흰 그림자 하나가 집 안으로 날아가고 있음이 보였다.
"하안, 효월……."
그것이 누군지 알아본 그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곤 그는 비틀거리면서 허물어졌다.
수인지력으로 단숨에 친위대장을 무력화시킨 한효월은 집 안으로 들어서면서 주변을 살폈다.
불빛 한 점 없는 집 안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그렇다고 이미 허실생동의 안력을 지닌 한효월이 사물을 분간하지 못할 어둠은 아니었다.
미풍과 함께 그의 옆으로 대막사왕이 날아들었다.
'만만한 자가 아닌데, 대체 그게 무슨 지공(指功)이오?'
그가 전음으로 물었다.
"교주는?"
한효월은 대답 대신 물었다.
'찾아봐야지. 이곳은 나도 알지 못하는 곳이니까.'
대막사왕은 눈을 빛내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밖에서는 비명이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독고해가 무자비한 살수를 휘두르고 있는 모양이다. 하긴 누가 그의 일격을 막을 수가 있을 것인가.
집 안은 회랑이 아닌 통로로써 연결되어 있었다. 복도 좌우로 방이 있는 특이한 구조였다. 일정 구간이 아니라 전체가 이런 구조로 된 곳은 거의 보기 힘들었다.
통로는 좌우로 갈라져 있었다.
눈빛을 교환한 두 사람은 좌우로 갈라져 전진하기 시작했다.
최고의 고수들인만큼 망설이거나 한 걸음씩이라는 개념은 전혀 없다. 바람처럼 빠른 움직임으로 전진하면서도 실제로는 주변의 개미가 움직이는 소리 하나까지 모두 감각 속에 포함하며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통로의 앞쪽이 넓어졌다.
대청인 듯한데, 아마도 이 집의 후청(後廳)인 듯.
여기까지 오는데 바깥에서 들려오는 아비규환과는 달리 집 안 내부는 쥐 죽은 듯 고요하여 오히려 이상했다.
한효월이 대청으로 나서려는 순간에 천장에서 습격이 시작되었다.
흑의인 하나가 그를 향해 소리도 없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먼지가 흘러내리는 것 같을 정도였다.
하지만 한효월이 쳐다보지도 않고 한 손을 꽃잎처럼 모아서 위로 치자 그는 허수아비처럼 튕겨졌다가 바닥에 뒹굴었다. 가공할 위력의 수인지력이 아낌없이 잇달아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그때였다.
갑자기 앞쪽에서 폭음과 함께 노호가 들려왔다.
"네, 네놈이……!"
차마 믿기지 않는다는 고함 소리.
한효월은 바닥을 찼다.
무서운 속도로 그의 신형이 허공을 가로질렀고 대청 끝 쪽에서 비틀거리며 물러나고 있는 제천교주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를 향해서 덮쳐 가고 있는 대막사왕의 모습까지.
가슴을 움켜쥐고서 노성을 터뜨리던 제천교주는 한효월을 발견하자 일그러진 얼굴이 되었다.
"네, 네놈이 나를 팔았구나!"
"죄송하오, 숙부! 하지만 대원을 위해서는 당신을 더 이상은 두고 볼 수가 없었으니 나를 탓하진 말아주시오……."
말은 긴 듯하지만 행동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과단성을 의미하듯이 그는 양손을 풍차처럼 휘둘러 연신 제천교주를 몰아쳐 가고 있었다. 하긴 몽고족의 역사에서 가족 간의 시살(弑殺)은 다반사로 일어난 일이기도 했다.
제천교주는 이미 그에게 심하게 당한 듯 창백한 얼굴에 앞가슴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아마도 불의의 일격을 당한 것이 분명했으리라. 그는 대막사왕이 무섭게 덮쳐 오고 한효월까지 나타난 것을 보고는 더 이상 싸울 마음이 사라졌다.
이길 수가 없는 싸움을 하는 것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는 앞에 다가온 대막사왕의 용권풍을 맞서는 것처럼 하다가 돌연 양손을 끌어 모아 옆으로 밀어냈다. 그러자 대막사왕의 그 응축된 가공할 위력의 용권풍이 비틀리면서 그에게로 날아들던 한효월에게로 날아갔다.
"엇!"
대막사왕이 놀라 경력을 거두며 옆으로 힘을 밀어냈다.
콰쾅!
폭음과 함께 경력에 스친 벽이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한효월은 제천교주가 몸을 뒹굴어 찰나간에 삼 장 밖의 문을 박차고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뒤따라 몸을 날렸다. 말이 뒤를 따르는 것이지 실제로는 제천교주가 방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것과 거의 같은 순간에 그 뒤를 따랐다고 해도 좋았다.
하지만 준치는 그냥 준치가 아니었다.
스파팟!
귓전을 스치는 파공음.
섬뜩한 빛이 한효월의 앞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무서운 속도로 몸을 날리고 있던 한효월이었으니 그 암습에 그대로 전신을 들이민 것과 같았다.
"타아!"
한효월의 입에서 기합이 터져 나왔다.
그냥 고함이 아니었다. 천둥과도 같은 위력에 앞의 공기가 그대로 폭장되어 터졌다. 마치 무엇이 폭발한 것과 같았다.
그러자 그 여파에 쓸려 그를 향해 덮쳐 오던 암기가 모조리 흩어지고 말았다.
'대체 저게 무슨 무공이지?'
그 뒤를 따라오던 대막사왕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고함 소리, 기세를 불러일으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절세고수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그 또한 이미 의형상인의 경지에 이른 절세고수였지만 저런 무공은 목도하지 못했던 것이다.
쿠콰쾅……!
고함 소리의 폭장에 좌우 벽이 힘없이 무너질 듯 뒤틀렸고 천장에서 흙 먼지가 우수수 떨어지더니 이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고함으로 암기를 흩어버린 한효월은 그 속을 뚫고서 전진했다.
문 안은 커다란 거실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반쯤 부서진 문이 있을 따름이다.
전원(前院)으로 난 문이었다.
비명과 싸움 소리가 격하게 들리는 가운데 한효월은 한 사람이 몸을 날리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눈을 피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제천교주는 문을 부수고 도주하고 있는 중이었다.
"후웁!"
한효월은 거세게 진기를 한입 들이마시고 바닥을 찼다.
그는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제천교주와 같은 고수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전력을 다해서 도주하려고 한다면 누구도 막기가 힘들었다. 오늘 같은 상황은 절대로 쉽게 오지 않을 기회였다.
결코 그를 놓칠 수가 없기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는 순간에 제천교주는 절망해야 했다.
당당한 체구에 두 눈에서는 불칼과도 같은 광망을 쏟아내는 사람.
이미 혼이 육신을 떠났음에도 적에게 가장 공포를 안겨주는 건곤무적이라는 독고해. 제천교도에게는 비왕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무서운 존재가 된 그였다.
"도, 독고해……."
제천교주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가 말을 할 여가는 별로 없었다.
독고해는 누구와 말을 하는 걸 즐겨하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은 다음이기 때문이다.
가공할 위력을 가진 일장이 대뜸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아니, 그 일장과 함께 그가 나타났다고 해도 좋았다.
"멈…… 크윽!"
제천교주는 피하려고 했지만 앞으로 달리던 상황이라 쉽지가 않았다.
그는 다급히 양손을 저어 독고해의 일장을 막아내려고 했다.
대막사왕이 쓰는 용권풍이었지만 그 위세는 대막사왕에 크게 못 미쳤다. 이미 심한 내상을 입은 것이다.
콰쾅!
폭음과 함께 그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그냥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튕겨나는 힘을 이용하여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였다.
그런 그를 향해 한효월이 날아들었다.
"포기하시오!"
말과 함께 그가 일장을 쳐냈다.
"크으으……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
피할 곳이 없자 제천교주는 이를 갈면서 신형을 빙글 돌려 양손을 도끼로 찍듯이 후려갈겼다.
한효월은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그와 부딪쳤다.
쾅!
폭음이 일었다.
"크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제천교주가 피를 토해냈다. 놀랍게도 뒤로 밀려나면서 피를 토해내는 것이 아니라 앞뒤로 몸을 흔들면서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무형의 손이 그를 움켜잡고서 앞뒤로 흔들고 있다고나 할까?
독고해가 그의 뒤에서 그를 쳤기 때문이다.
부활하여 강시가 된 그는 일단 손을 쓰면 조금도 사정을 보지 않았으며 상대를 죽이기까지 절대로 버려두지 않았다. 그러니 한효월과 맞선 제천교주를 그냥 둘 리가 없었다. 그에게 있어 강호 도의나 무인의 자존심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양대고수의 합격을 받게 된 상태에서 제천교주가 어찌 버틸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그는 이미 대막사왕에게서 타격을 받은 다음이었다.
"크으으……."
제천교주가 피를 게워내면서 주춤 뒤로 물러났다.
"포기하시오!"
한효월이 꾸짖듯 외치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전신의 모든 공력을 일으켜서 그를 견제하고 있으니 이미 중상을 입은 제천교주는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그가 포기할 리가 없다.
그런데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악도! 죽음을 받아라!"
한이 서린 고함과 함께 한 사람이 서릿발 같은 보검을 휘두르면서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검은 격심한 타격에 비틀비틀 물러나고 있는 제천교주의 목을 옆에서부터 사정없이 쳐버렸다.
제천교주의 목은 피분수를 쏟아내면서 허공에 떠올랐다.
세상에 목이 달아나고 살아 있을 사람이 있을까?
"흥!"
그의 목을 쳐 날린 사람은 검을 휘저어 허공으로 날아오른 제천교주의 목을 검끝에다 꽂았다.
제천교주는 그 자신도 자신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 듯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뜨고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다.
그 벌린 입에서 핏물이 흘러나옴은 불가사의.
그 광경은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간악한 자…… 드디어 원수를 갚았구나!"
그의 목을 검끝에 꽂은 채로 주자미는 날카롭게 웃었다. 그녀의 곁에는 무표정한 독고해가 서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
한효월은 어이가 없어서 그녀를 바라보면서 멍청히 서 있기만 했다. 이 자리에서 그를 죽여서는 안 된다. 그에게서 알아볼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를 죽여 버린 것이다.
피분수를 세차게 뿜어내면서 아직 걸어가려는 듯 주춤거리고 있던 제천교주의 시신이 그제서야 쓰러졌다.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사방은 위사들 천지였고 정화와 황엽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