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五首 개왕초현(王初現) (97/113)

第五首  개왕초현(王初現)

-개왕을 만나다

용화(龍華)의 비밀은 천하의 우환으로 자리하다

 하늘거리는 바람이 물결을 쓸어 올린다.

 찰랑이는 물결이 조용히 호변으로 밀려왔다가 부서진다.

 어둠에 잠긴 동정호는 그 거대함을 뉘이고 잠이 든 듯 조용하기만 했다.

 한효월은 황엽의 뒤를 따라서 호변을 달렸다.

 사안의 중대성에 비추어 두 사람은 수신호위와 유성까지 떼놓고 떠난 상태였다. 원래 있던 곳에서 사오십 리가량을 달려 호변에 이르자 갈대 숲 가운데 작은 배 하나가 정박해 있음이 보였다.

 황엽은 망설이지 않고 배에 올랐고 한효월도 그를 따랐다.

 배에는 늙은 어부 한 사람이 노를 잡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이 배에 오르자 늙은 어부는 아무 말도 없이 노를 젓기 시작했고, 배는 호심(湖心)을 향해 조용히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끼익, 끼익…….

 어부는 등을 돌린 채로 노를 저을 뿐, 아무런 말도 없다.

 "……."

 한효월은 묵묵히 강물에 비친 달을 보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가를 묻지도 않았다.

 어차피 약속한 사람이 황엽이니 때가 되면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었다. 그런 것에 궁금할 시간이라면 차라리 여러 가지 사안들을 궁리해 보는 것이 더욱 유익했다. 그에게 남겨진 시간이라는 것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이기에.

 그때였다.

 황엽이 입을 열었다.

 "물어볼 것이 있다면 지금 물어보시오."

 그 말에 어리둥절했던 한효월은 눈이 커져서 노를 젓고 있는 늙은 어부의 등을 바라보았다.

 '설마?'

 그런 표정으로 한효월은 황엽을 바라보았다.

 황엽은 미미하게 웃음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개왕이 바로 이분이시니 인사하시오."

 그 전설적인 인물 개왕!

 나이는 이미 백을 넘겼고 근 백여 년 이래 개방에서 가장 뛰어난 고수라고 알려진 사람이 그다. 그런데 그런 그가 한낱 어부로 변장하여 자신들을 위해서 노를 젓고 있다니!

 그가 이처럼 신출귀몰하니 제천교에서 궁가방을 쳐엎기 위해서 전력을 다하고 있음에도 꼬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알고도 남음이 있을 듯했다.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던 한효월은 그 자세를 변치 않고 입만 열었다. 여전히 황엽을 바라본 채였다.

 "이처럼 만나주시니, 감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 말에 어부에게서 냉정한 음성이 나직이 들려왔다.

 "동양(東陽)이 좋은 제자를 두었군."

 한효월의 눈빛이 달라졌다.

 "사부님을 아십니까?"

 "고우(故友)를 잊어버릴 리 있나? 그가 비명에 가지 않았다면 상황이 이처럼 어렵게 변하지도 않았을 것을……."

 늙은 어부, 개왕은 등을 보인 채로 나직이 탄식했다.

 "사부님께서는 어르신께서 현 상황에서 유일하게 제게 도움을 주실 분이라고 유언하셨습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제게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유일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

 배는 이미 호심으로 진입하여 갈대밭 사이를 비집고 있다.

 누가 배를 지켜보고 있다 하더라도 그들을 제대로 살필 수가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개왕은 신형을 틀어 한효월을 바라보았다.

 체구는 그리 크지 않았다. 얼굴에는 주름이 많았지만 봉두난발에 수염 또한 제멋대로 뻗쳤다. 그러나 그 가운데 자리한 두 눈은

 고리눈이었다. 부릅뜨면 만인을 질리게 할 위엄이 거기 숨어 있었다.

 나이가 얼핏 보면 육순쯤 되어 보이는데 또 자세히 보면 얼마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용화회를 감시할 호법존자들이 이미 사라지고 이젠 집법존자로서 연락이 가능한 사람은 내가 유일하니까 말이지……."

 그의 중얼거림에 한효월은 그가 용화회의 집법존자임을 알게 되었다.

 그의 가슴이 흥분으로 뛰었다.

 드디어 용화회의 핵심 인물을 직접 만나게 된 것이다.

 "사백께서 용화회 집법존자(執法尊者)란 말씀입니까?"

 오면서 한효월에게서 이야기를 대강 들었던 황엽이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그렇다. 네게는 말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용화회 규율 자체가 자신의 신분을 외부인에게 말하지…… 이건 용화회 내부 규율이니

 개방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래서 나 또한 겉으로 나를 드러내지 못한 것이지."

 "그러셨군요……."

 문득 개왕의 눈에서 무서운 신광이 불을 뿜었다.

 "그런데 그런 규율을 깨고 움직이는 자들이 생겼다! 더더구나 용화회의 회원들을 공격하면서까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사안!

 내 숨이 붙어 있는 순간까지는 결코 놈들의 생각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그를 보면서 한효월은 암중에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라고 할까? 이제 모호한 안개 속에서 헤매는 일은 벗어날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그들은 적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싸우기만 하고 적의 공격을 속수무책, 막아내기만 해야 했었다.

 그런데 이제 적에 대해서 알고 어떻게 싸워야 할지를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개왕, 용화회의 집법존자를 만남으로써.

 하지만 세상일이 마음대로 되는 것일까…….

 "용화회는 현세지선(現世之仙)이 되고자 서원(誓願)한 사람들이 천하십성을 따르면서 생긴 모임이다. 천하십성이 봉신방을 세우고

 사라진 이래 그들은 천하십성이 다시 나타나서 자신들을 이끌어주기를 바라고 기다렸지만……."

 개왕은 길게 한숨 쉬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기다리던 사람들은 모두 지쳤지. 많은 사람들이 늙어 죽었고…… 후대에까지 기다림이

 이어졌다. 그렇게 해서 결국 동요가 일어난 게다."

 "지금 사태의 책임자나 주모자가 누군지 짐작이 가지 않으십니까?"

 "그게 용화회의 맹점이자 장점인데……."

 개왕은 장탄식을 불어내었다.

 "천하십성은 자신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불어나자 고심 끝에 그들을 수용하되, 서로 만나지 못하게 했지. 파당(派黨)을 지어 혹시라도 분란이 일어날 것을 저어한 것이지. 해서 그들은 한 번도 한자리에 모인 적이 없었고 혹 모일 일이 있어도 서로의 신분을 밝히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니 전체를 아는 사람은 있을 수 없었고 그들을 감독하는 호법존자들도 그들이 맡은 사람만을 알 따름……."

 "호법존자가 그렇게 많았습니까?"

 황엽이 물었다.

 "처음에는 십여 명이었고 후일에는 서너 명 정도였지. 그 직위는 세습이 되지 않았으니까."

 "한 명이 얼마나 맡았길래……."

 "열 명 정도였다."

 "열……. 그럼 지금에 이르러서는 용화회의 인원이 삼사십 명 정도뿐이라는 겁니까?"

 "크게 벗어나지는 않겠지. 왜? 별게 아니라고 생각되느냐?"

 "그게 아니라……."

 황엽이 말끝을 흐렸다.

 가공할 만큼 거대한 존재, 용화회. 그들이 겨우 삼사십 명 정도라니…… 겨우 그런 숫자가 세상을 어지럽히는 공포의 실체라니!

 "간단한 숫자가 아닌 것 같군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사부님이나 선배님 같은 분이라면……."

 한효월이 덧붙이듯 말했다.

 잠시 숫자에 실망을 했던 황엽은 자신의 실수를 이내 깨닫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맙소사!

 개왕 혼자의 힘으로 궁가방을 만들었다.

 그는 그 힘으로 개방을 도와 놀랍게도 제천교와 맞서 싸우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개왕과 같은 존재! 혹은 비등한 능력을 가진 자들이 그만큼이나 한곳에 모여 있다면 실로 공포스럽다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니었다. 개개인이 불가일세(不可一世)의 능력자들이라 해도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뛰어난 분들이 있었겠지요?"

 한효월이 물었다.

 "물론이다. 어디나 뛰어난 사람들이 있지. 굳이 나서지 않아도 표가 나고 드러나는 존재들이 있지만…… 용화회는 다르다."

 "……."

 "왜냐면 그들 모두가 당대 최고였으니까. 설혹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미미할 뿐이고, 실제로 그 차이가 정말 차이가 있는지도 알기 힘들다. 스스로를 다 드러낸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었을 것이다. 명예를 쫓고 뭔가 드러내고 싶어야 일이 벌어지는데 모여든 사람들 자체가 이미 그것을 떠난 존재들이었으니……."

 그 말을 듣는 한효월에게서 난감한 빛이 얼핏 스쳐 갔다.

 이래서야 난감하다. 당금의 국면을 조성한 자에 대해서 아무런 짐작조차 가지 않는 것이다.

 "천하십성이 사라지고 나서 분란이 일었다면 그 기다림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분명히 뭐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 사람들 중에……."

 "정작 뭐라고 한 사람들은 대부분 다 고인이 되었다. 게다가 천하십성은 자신들이 돌아온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돌아오지 않으면 기다리지 말라고 했을 뿐이니, 그 기다림은 그야말로 기약없는 기다림일 뿐이었다."

 "돌아오지 말라고 하면서…… 왜 봉신지약을 남겼을까요?"

 "글쎄…… 장난이었을 수도 있고, 일부러 그랬을 수도 있겠지. 아니면 자신들이 만들어낸 길을 후대에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개왕은 눈을 빛내며 두 사람을 둘러보았다.

 "어쨌든 그들은 세상에 봉신지약을 남겼고, 봉신방을 찾아서 봉신지비를 풀지 않는 한 이 소용돌이는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보십니까?"

 "그렇다."

 "남아 있는 용화회원들을 다 모을 방법은 없습니까?"

 "없다."

 개왕은 한마디로 잘랐다.

 용화회가 상명하복의 어떤 조직이 아니라, 말 그대로 모여서 만들어진 임의 단체이기에 암묵적인 규율이 존재할 뿐 다른 방회(幇會)와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은 암투가 벌어져서 용화회원들이 반목하여 죽어가고 있는 판이었다. 누가 누구를 믿고 모임에 응할 수가 있으랴.

 "몇이야 모을 수 있겠지만 그건 의미가 없지. 오히려 암중에 숨은 자들에게 기회를 줄 뿐이다."

 "……."

 한효월은 문득 개왕의 모습을 보았다.

 누가 보아도 초라한 어부의 모습, 그러한 변장을 한 것은 어쩌면 암중에서 지켜보고 있을 용화회 변절자의 눈을 피하기 위한 것일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렵군요……."

 "쉬울 리가 없지. 네 사부가 그놈들에게 당하기 전에 나와 연락이 되었다면 이렇듯 답답하지는 않았을 텐데, 바깥 세상에 나와보니 이미 이런 지경이니……."

 개왕은 답답한 숨을 길게 토해내며 말끝을 흐렸다.

 "현재로선 놈들을 끌어내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그게 뭡니까?"

 "제천교주를 잡는 게다."

 "제천교주를?"

 "놈의 배후에는 그들이 있다. 놈을 잡으면 제천교는 흔들리게 될 것이고 그들은 전면에 나서지 않을 수가 없을 게다. 사실 이미 일부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 암중에 숨은 자들이 그 모습을 드러낸 자의 뒤에서 덫을 놓고 있겠지만……."

 "으음…… 그렇다면 일단은 제천교주를 잡고 나서 그들의 동태를 봐야겠군요?"

 황엽이 묻자, 개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한 가지만 여쭤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거라."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면, 막을 방도는 있습니까?"

 한효월의 말에 개왕이 주춤, 그를 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녀석이 정말 소문대로 생각이 깊구나. 옳다! 현 강호의 어느 세력으로도 그런 힘을 찾아내기는 불가능하지. 누구도 그들이 전력(全力)을 드러내면 당해내기 힘들 게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 그간 내가 만들어낸 것이 궁가방이다."

 "궁가방으로서 그런 힘을 낼 수 있습니까?"

 한효월이 다시 물었다.

 "……."

 개왕은 말 대신 그를 노려보다가 미미하게 씨익, 웃음 지었다.

 "고얀…… 가리는 게 없구나. 좋아, 말해 주지! 현재 드러난 궁가방의 전력은 전부가 아니다. 그리고 몇 사람의 친우들이 합세하면…… 그 힘은 그리 만만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군요."

 한효월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 말만 가지고 자신있다는 말을 믿을 수야 없다. 하지만 여기서 더 이상 따질 일은 아니다. 용화회 내부에서 법을 집행하는 집법존자라면 분명히 무엇인가 다른 점이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지금의 사태를 잘 알고 있을 그가 장담을 한다면 무엇인가 수단이 있을 것이 라고 믿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 더 여쭤보겠습니다."

 "……."

 "마교와 봉신지비는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명교(明敎)의 일부가 제천교에서 모습을 보이긴 했습니다만 그들은 당금 조정에 쫓기고 있을 뿐, 마교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요."

 "마교라면, 명옥마녀 때문이냐?"

 "그렇습니다. 제가 그간 조사한 바로는 봉신지서가 있는 한, 마교는 나타날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이 나와야 하는지……."

 "그것은 그들뿐 아니라, 천하십왕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니 특별하다고 할 것이 없다. 천하십성 중에 그들의 교주이자 지난 수백 년래에 가장 뛰어났다고 하던 마교의 종사(宗師)가 있었다. 원래 그는 천하십성과 겨루어 그들을 복속시키면서 마교천하를 이룰 생각이었는데 그들과 마주한 다음에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결국 그는 마의 궁극(窮極)을 찾아 천하십성과 같이 봉신방에 들었다. 그가 천하십성에 자리함은 매우 뒤늦은 일이라 마교는 그의 뒤를 대비할 시간이 없었지. 그가 설마 후계자조차 지명하지 않고 사라져 버릴 것은 누구도 상상치 못한 일이었으니까!"

 마교는 역대로 교주가 후계를 지명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본신의 능력으로 교주가 되어야만 했다. 그 과정은 피로 물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누구라도 힘으로 누를 수가 있어야 교주가 될 수 있는 것이기에.

 "그들의 장점이자 단점이 죽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거지. 미친 듯 대권을 잡기 위해서 싸워대다가 정영(精英)을 잃어버리고 절기들도 산실(散失)되어 흩어져 버리고 말았지. 그들로서는…… 이제 사라졌던 교주를 찾고자 염원할 수밖에."

 "마경을 찾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순간. 개왕의 안색이 달라졌다.

 "누가 마경 이야기를 하더냐?"

 한효월의 답을 들은 그는 미간에 깊은 주름을 잡았다.

 "으음…… 소문이 사실이었다는 건가?"

 "무슨 소문이?"

 "마교의 역사는 사실 무림 중에서 가장 오래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발원은 너무 아득한 옛일이라 이젠 그들 내부에서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하지. 전설로 전해질 따름…… 그 마교의 발원이 마경인데, 세상에 흐르는 마기의 근원이 그곳에서 비롯되어

 마정지지(魔精之地)라고 한다더군. 그런데 그 잊혀진 마역(魔域)이 실제한단 말인가……."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개왕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건 막아야겠군! 공일도가 그곳에 간다면……."

 "그곳과 봉신의 비밀이 무슨 관계라도 있는 겁니까? 마경이 그런 곳이라면 마교의 성지이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을 텐데요?"

 "그럴 수도 있지. 그러나 당시 천하십성을 찾아 천하를 헤맨 용화회에서 알아낸 것에 따르면……."

 그는 어둔 하늘을 쳐다보더니 미간을 찡그렸다.

 "봉신방은, 천하십성이 신선이 되기 위해서 은거한 곳은 선계와 마계가 교차하는 지점이라고 하였다."

 "선계와 마계가 교차?"

 얼떨떨한 빛으로 황엽이 물었다.

 "설마 정말 신선과 마귀가 산다는 곳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겁니까?"

 무림, 특히 무공의 고수들은 귀신을 믿지 않는다. 그 자신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르겠다."

 "그런데 선계와 마계는 무슨……."

 그때 한효월이 말했다.

 "마계가 마정지지고 그곳이 바로 마경이라는 의미입니까? 결국 마경을 찾으면 봉신방의 위치를 찾을 수 있다라는 그런 뜻인가요?"

 그 말에 황엽의 안색이 달라졌다.

 "그런……!"

 "잘은 모르겠다만, 공일도가 굳이 그렇게까지 마경이 있는 곳을 찾아내려 한 것은 아마도 그런 것을 알아냈기 때문이 아닌가 싶군.

 그는 봉신방의 위치를 찾기 위해서 가지고 있던 봉신지약까지 강호에 풀어낸 마당이니…… 누구보다 많은 생각을 했겠지. 그가

 아니라면 배후의 인물이라도."

 "으음……."

 황엽이 신음을 흘렸다.

 "……."

 한효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만약 봉신지약의 한쪽을 찾아내면 용화회가 움직이겠습니까? 암중의 그들이?"

 그 말에 개왕의 안색이 달라졌다.

 "다른 한쪽에 대해서 단서가 있느냐?"

 그의 심중 격동을 말하듯 주변의 물결이 놀라 출렁거렸다. 부지중에 기파가 쏟아져 나간 것이다.

 "사부께서 단서를 남겨주셨습니다."

 "단서라고? 동양이 나머지 한쪽의 단서를?"

 개왕이 미간을 찡그렸다.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던 그는 한효월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용화회원이라면, 누구라도 다 나타날 게다. 봉신지약 두 개가 나타났다는 것은 그 오랜 세월…… 기다림의 끝을 의미하니까!

 천하십성의 후예들도 모두 나서겠지! 지금 어디 있는지 아느냐?"

 "아직은 모릅니다. 하지만 찾기 시작한다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단서대로라면……."

 "그렇다면 모든 것을 젖혀두고 그것을 찾도록 하거라. 당금 천하의 혼란을 막을 유일한 열쇠가 바로 봉신지약이다!"

 "아닙니다."

 "아니라니?"

 "말씀하셨던 제천교주를 처리함이 먼저일 것 같습니다. 그를 처리하지 않고는 사태를 수습하기 어렵습니다. 만에 하나 소생이

 봉신지약의 나머지 하나를 요행히 찾아낸다 할지라도 배후의 용화회가 제천교를 조종하고 있으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예측하기

 힘듭니다. 그를 잡는 건 말씀대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로 판단됩니다. 그렇기에 개방에서도 전력을 기울여 그를 잡으려고 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으음……."

 개왕은 눈살을 찌푸린 채 머리를 긁적거렸다.

 "하지만 그처럼 신출귀몰, 교활한 자를 어떻게 잡을 수가 있겠소?"

 황엽은 쉽지 않다는 듯 머리를 저었다.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생각이? 그를 잡을 수 있단 말이오?"

 "그가 무슨 생각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예측이 불가능하지만 지금이라면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군요."

 "놈만 잡으면 뒤는 내가 맡으마."

 개왕이 말했다.

 부릅뜬 눈에서는 신광이 쏟아지고 있었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좋다! 이제 희망이 보이는 것 같군."

 개왕이 흡족한 표정으로 껄껄 웃었다.

 끼익, 끼익…….

 개왕이 젓는 노는 천천히 물속을 헤집어 잔잔한 포말을 배 뒷전으로 밀어내며 그의 말소리를 묻는다.

 그들의 머리 위에 뜬 달은 무심히 밝다.

 {c#}*   *   *

 장소는 달라도 달은 하나다.

 그 달 아래 산사(山寺) 하나가 있다.

 동정호 북단에 위치한 이 산사는 거뭇한 어둠 속에 묻혀 잠든 것처럼 보였다. 신도들의 향화도 이 시간에는 잠들 수밖에 없다. 조과(朝課)를 할 시간도 아직은 아니다.

 이따금 바람을 타고 흐르는 풍경 소리만이 산사의 고즈넉을 깨뜨릴 뿐…….

 돌이 깔린 길을 따라 대웅전을 지나 후전에 이르면 쭉 이어진 승방(僧房)이 자리한다. 산사의 규모를 말하듯 그리 크지 않은 이 승방도 모두가 잠든 듯 고요하기만 했다.

 그 승방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아예 뚝 떨어져서 암자 하나가 있는데, 주변은 이상할 만큼 적막하다.

 문득 그 고요 속에 한 사람이 암자의 앞에 나타났다.

 당당한 체구의 그 모습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남해용왕이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묘하게 웃음을 지었다.

 "역시…… 그처럼 급하게 달려오면서도 근거지는 만들고 있었군. 하기야 천하십왕은 누구 하나 쉽게 볼 수 없지……."

 그가 중얼거리자 암자 안에서 냉소가 흘러나왔다.

 "언제까지 거기 있을 참이오?"

 조금은 이상한 어조의 음성이다.

 "재촉하지 않아도 당연히 들어갈 거요."

 남해용왕은 낮게 웃으며 암자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암자의 내부는 뜻밖에도 작지 않아 본존불이 있는 불단 아래로도 제법 넓어 보였고 옆으로는 따로 출입구가 있었다.

 그 불단 바로 앞에 한 사람이 궤에 앉아 있는데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닌 서역법왕이었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남해용왕을 보면서 물었다.

 "그는 어디 있소?"

 "여기 오면 있다더니 그 노라마는 어디 있소?"

 답변 대신 남해용왕이 주위를 쓸어보면서 물었다.

 "당신이 말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당연히 나타날 거요."

 "저런, 저런…… 출가인이 이렇게 의심이 많아서야……."

 "다른 사람도 아닌 당신과 같이 손을 잡았는데 어찌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을 수가 있겠소? 봉신지비의 단서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그인데……."

 "하하…… 유일한 존재라구? 그럼 왜 본왕과 합작을 한 거요?"

 "그거야……."

 서역법왕은 미간을 찡그렸다.

 "시간만 끌 작정이오? 우리는 이미 이백 리 길을 달려왔소. 극비리에 그처럼 움직였어도 우리 뒤를 쫓는 자들이 있을 게요. 우리 열 사람은 누구도 상대보다 뛰어나다고 장담할 수 없는 데다가 제천교의 교주인 그자는 정말 교활하오. 우리에게 이 봉신지약이 들어오도록 방치한 데는 분명히 까닭이 있을 것이오."

 "까닭은 무슨 까닭! 봉신지약이 하나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까 뒤에서 어부지리를 챙기려고 눈을 부릅뜨고서 동정을 살피고 있겠지. 하지만 놈은 제 꾀에 속아넘어가고 말 거요. 그깟 놈이 생각하는 것을 본왕이 생각하지 못할 리가 없지 않겠소?"

 "그들의 힘은 무섭소."

 "우리 둘도 약하지 않지. 게다가 한두 명만 더 가세한다면 설사 용화회가 전면에 나타난다 해도…… 해볼 만할 거요."

 "으음……."

 서역법왕의 미간에 깊은 내천 자가 그려졌다.

 용화회라는 말 자체가 심한 부담을 주는 표정이다.

 "그를 데려오긴 한 거요?"

 그가 말을 돌렸다.

 "핫하…… 의심은. 노유(老儒)를 모시고 오너라!"

 그가 낮게 소리치자 그가 들어온 문이 열렸다.

 교자(轎子) 하나가 문밖에 나타났다. 두 사람의 장한이 앞뒤로 들고 있는 교자 위에는 나이를 짐작키 힘든 노유생 한 사람이 앉아서 졸고 있었다. 교자는 두 사람이 메는 것이지만 그들의 경공은 간단치 않아 행운유수처럼 문 앞에 당도했다.

 마치 학관에서 강의라도 하다가 온 듯한 차림인 노유생은 장한들이 부축해 주자 겨우 깨어나서 암자의 안으로 들어왔다. 눈살을 찡그린 채로 주위를 돌아보는 모습이 얼떨떨해 보이기도 하지만 서둘지 않는 모습이 세월의 연륜을 느끼게 한다.

 "멀구료……."

 그가 뱉은 첫마디였다.

 "그가 만박노유(萬博老儒)란 말인가?"

 그의 모습을 보고 서역법왕이 날카로운 음성으로 물었다.

 "아닐 것 같소?"

 "본불이 듣기로 그는 용화회의 회원이었던 걸로 아는데, 그런 사람이 아무려면 저렇듯 피폐한 모습일 수가 있겠소?"

 "흘흘흘…… 용화회의 회원이면 모두가 고수라야 한단 말이오?"

 노유생이 그를 보면서 낮게 웃었다.

 "초기 용화회원이면 나이만도 백 살이 훌쩍 넘었다. 그런 사람이 당신처럼 낡은 빗자루마냥 흐늘거린다는 겐가?"

 "버릇이 없군……."

 노유생의 말에 서역법왕의 안색이 달라졌다.

 그의 눈이 싸늘한 비수처럼 어둠을 뚫고 노유생에게 달려들었다.

 "감히 본불에게……."

 "당신이 서역에서 활불로 칭송되면서 무상의 권력을 누리고 있을지는 모르지. 하나 노부는 당신의 전전대 윗사람과 동시대를 누린 사람. 거기에 걸맞는 예우를 할지 모른다면 어찌 스스로 예우받기를 바란단 말인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늙은 노유생, 만박노유가 조목조목 들어 서역법왕을 논박(論駁)하니 서역법왕은 일시지간 말을 하지 못하고 이내 못마땅한 듯 냉소를 흘렸다.

 "당신 주위 사람은 말 못하는 자가 없군."

 "저런! 당신은 잘못 생각했소. 만박노유께서는 본왕에게도 윗사람이 되는 분이니 어찌 내 주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소? 본왕이 운이 좋아 노유를 만나게 되었으니 하하…… 그거야말로 천행이지. 노유가 계시지 않다면 어떻게 하나뿐인 봉신지약을 가지고 봉신방을 찾겠다는 망발을 꿈이나 꿀 수가 있었겠소?"

 남해용왕이 껄껄 웃었다.

 그때 서역법왕의 귓전에 남해용왕이 보낸 음성이 들려왔다.

 '언제까지 시간을 끌 작정이지? 당신이 가진 노라마나 내가 가진 저 늙은이나 어차피 소모품일 뿐이고, 봉신지비를 풀게 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자들이야. 대체 저런 자들과 맞대서 뭘 얻겠다고 신경전을 벌이는 겐가?'

 서역법왕이 바라보니 남해용왕이 웃는 가운데 사나운 눈빛으로 그를 질책하고 있었다.

 그랬다. 시간이 없는 것이다.

 서역법왕이 말을 끊고 가볍게 손뼉을 치자 옆쪽에 있던 문이 열리면서 라마 두 사람이 제대로 걸음도 걷지 못하는 노라마를 부축해서 안으로 들어왔다.

 "첸판 라마는 자신의 나이를 기억하지 못할 만큼 오래 살았지. 해서 기력이 많이 쇠했지만, 기억력만큼은 아직 쇠하지 않아서 서역 대장경의 모든 것을 외울 정도이니 만박노유와 함께 봉신지약을 연구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을 게요."

 서역법왕이 떨리는 걸음으로 겨우 자신의 옆에 와 앉는 노라마, 첸판을 보면서 말했다.

 "좋아, 이제야 제대로 일이 되는 것 같군."

 남해용왕은 머리를 돌려 만박노유를 바라보았다.

 "얼마쯤이면 단서를 발견해 낼 수가 있으시겠소?"

 "글쎄…… 검토를 해보지 않아 장담은 하기 힘들겠소. 노부의 배움과 저 라마의 고대(古代)에 관한 지식이 과연 어떤 결과를 낳을런지는 하늘만이 알 게요. 천하십성의 능력은 너무 뛰어나서 그들이 남겨놓은 유물이 처음부터 두 개라면 하나만으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오. 지금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우리가 연구하여 봉신방의 위치를 찾아내는 것 정도이고 과연 그곳에 당도하면 어떤 일이 생길런지는 아무도 알지 못할 일이겠지……."

 그가 말을 흐렸다.

 "흥! 첸판 라마는 봉신지약을 보기만 하면 반드시 단서를 찾아낼 수 있다고 장담을 했었소!"

 서역법왕이 코웃음을 치자 만박노유는 웃으며 말했다.

 "용왕께선 그에게 봉신지약을 보여주시오."

 그 말에 멈칫했던 남해용왕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라면 어림도 없을 이야기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는 이곳까지 오면서 제대로 살펴볼 시간이 없었지만 암중에 몇 번이나 만져 보고 들여다보면서 연구를 했었다. 그 또한 간단한 능력자가 아니지만 그렇게 하고서도 알아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차피 그렇게 봐서 알아낼 것으로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봉신지약의 비밀을 풀 사람을 찾았었고 서역법왕과 합작을 하게 된 것도 그 일환이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준비를 마친 그는 암암리에 서로를 견제하는 쟁탈전에 서슴없이 뛰어들어서 표적받이가 됨을 자초하였다. 물론 그들의 눈을 따돌리긴 했지만 뒤쫓는 자들의 능력이 워낙 뛰어나니 잠시도 안심을 할 수 없을 것이고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할 것이었다.

 그러나 만에 하나 봉신방이 있는 곳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그것이 문제일 것인가!

 …….

 봉신지약은 크기에 비해서 제법 무거웠다.

 하나 제 몸도 가누지 못하던 노라마는 봉신지약을 받자 눈을 빛내면서 그것을 쏘아보고 있었다. 꼿꼿한 자세라 조금 전까지 연극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

 노라마가 눈을 빛내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곤오자철(崑烏磁鐵)? 정말 그게 곤오자철이란 말이오?"

 그 말을 알아들은 만박노유가 옆으로 다가서면서 되물었다.

 '만박이라고 하더니 서장 말도 알아듣는 모양이군…….'

 남해용왕이 만박노유와 노라마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

 노라마가 연신 머리를 흔들며 중얼거리자 만박노유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와 뭔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대충 흘러나온 말은 그러하였다.

 곤오자철은 곤륜산 일대 지저(地底)에서만 난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세상에 거의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이유는 화산 깊은 곳에서 누만 년의 압력을 받아 생성되기 때문에 사람의 발길이 닿을 수가 없어서다. 유일한 가능성은 화산 폭발 때 분출되는 경우뿐.

 쇠는 쇠이되, 수만 년의 압력으로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진 쇠가 된다. 자체적으로 열기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강한 자성을 띠고 있다. 그러나 다른 자석과는 달리 쇠붙이를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곤오자철끼리만 서로를 당기게 되어 있다.

 한 덩이의 곤오자철을 둘로 나누어놓는다면 둘은 끊임없이 서로 끌어당기게 될 것이었다.

 "끌어당긴다고?"

 "일정한 거리에 있으면 상대를 찾게 된다는 의미요. 아마 봉신지약이 서로를 찾을 수 있도록 한 배려일 게요."

 만박노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거리가 얼마나 되는 게요?"

 "글쎄…… 그거까지는 잘 모르겠는데…… 혹시 이 라마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만박노유가 노라마에게 물어보더니 말했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고서에 서로 감응할 수 있는 거리가 대충 십 리 내외라고 한다는구료."

 "십 리?"

 미간을 찡그렸던 남해용왕은 문득 안색이 변해 물었다.

 "만약 서로 가까운 거리에 있게 되어 반응을 한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게 되오?"

 "자력이 반응하니 서로를 끌어당길 것이고 상대를 찾아서 빛을 낸다고 하는데 어떤 빛인지는 잘 모르겠소……."

 "맙소사!"

 남해용왕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전혀 그답지 않은 태도라 서역법왕이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는 게요?"

 "그, 그때! 그때…… 우리가 거기 있었을 때 그것이, 그것이 반응이었군! 그게 반응이었어!"

 "대체 무슨 소리요? 거기 있었을 때라니, 반응은 무슨…… 반응?!"

 서역법왕이 어찌 바보이겠는가?

 갑자기의 그의 안색이 달라졌다.

 "무슨 소리요? 그럼 그 용왕묘에 있을 때 반응이 있었단 말이오? 다른 봉신지약과의?"

 "그런 것 같소. 그게 아니라면 그때 일이 설명될 수가 없으니……."

 한효월이 느꼈던 것처럼 남해용왕도 품속에 있던 봉신지약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그럼 또 하나의 봉신지약이 정말 여기에 나타났단 말인가!"

 서역법왕이 실성한 듯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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