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四首 심탐마경(尋探魔境) (96/113)

第四首  심탐마경(尋探魔境)

-마경은 어디에

사모의 정(情)은 마녀의 길을 붙들건만……

 "괴이하군……."

 한효월은 미간을 찡그렸다.

 어둠 어디를 둘러보아도 괴괴한 적막뿐이다.

 그가 서 있는 곳은 높다란 바위다. 주변에 숲도 끝났고 눈에 들어오는 것은 넓게 펼쳐진 평야다.

 한쪽으로는 동정호가 바라보이는.

 누군가가 그곳에서 움직이고 있다면 한효월의 눈을 피할 순 없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

 중간에 두어 군데 의심스러운 움직임을 발견했지만 그건 어부들이 움직이는 것이라서 아무것도 아니었다.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풍도귀왕이라면 몰라도 그 수하들까지 단숨에 그의 시야를 벗어날 수 있다면 믿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일이 그의 눈앞에서 일어난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옷자락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린다. 고수가 경신법을 전개하여 움직이는 소리임을 안 한효월이 뒤로 시선을 돌렸다.

 황엽이었다.

 그가 어둠을 뚫고 달려오고 있었다.

 "방주님!"

 한효월을 보자 그가 반색했다.

 "귀왕의 종적은?"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역시…… 그들은 도관에서 나가지 않았소."

 "그건?"

 "뭔가 이상해서 도관을 살펴봤는데, 무너진 대전 밑에서 비밀 통로가 발견이 되었소. 먼저 지나간 자들이 무너뜨리고 가버린 바람에 뒤를 쫓아가기는 힘들 것 같지만……."

 "으음…… 또 놓쳤단 말인가!"

 한효월은 신음을 흘렸다.

 이번만은 반드시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또 놓치다니.

 "돌아갑시다. 본 방의 제자들을 모두 풀었으니 날개가 달려 이 일대를 벗어났다면 모르겠지만 주위 오십 리 이내에 있다면 반드시 찾아낼 수가 있을 것이오. 풍도귀왕이라면 또 몰라도 그의 수하들까지 종적을 숨길 수는 없을 테니."

 "그러지요."

 한효월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c#}*   *   *

 어둠.

 짙은 어둠이 드리운 곳이다.

 일렁이는 불빛이 간신히 그 어둠을 흔들어 쫓고 있을 따름. 괴괴한 침묵은 어딘지 괴기하고도 소름이 끼친다.

 길게 어둠을 끌고서 통로는 뻗어 있었고 한 사람이 그 통로의 끝에 우뚝 서 있었다.

 희미한 장명등에 비친 그의 모습은 귀기(鬼氣)가 충만하다.

 풍도귀왕이 거기에 있었고, 그의 시선이 미치는 곳에는 길이 칠 척가량의 석대 하나가 있다.

 지하인 이곳은 너비가 삼 장가량에 이르는 큰 석실이었다.

 그가 방금 들어온 문 좌우에는 두 개의 장명등이 희미한 빛을 뿌린다. 장명등의 크기로 보아 심지를 최대한 줄여 밝기를 조절한 것이 분명했다. 풍도귀왕의 시선이 미치는 그 석대는 장방형의 구조를 가진 석실의 끝에 자리한다.

 거기에 한 여자가 누워 있었다.

 일신에 흑의를 걸친 여인은 두 손을 가슴에 올린 채로 자는 듯 그 석대 위에 누워 풍도귀왕이 들어섰음에도 아무런 기척이 없다. 눈을 뜨지도 움직이지도 않아 마치 시체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아름다움은 죽은 것이 아니었다.

 맑고 투명한 아름다운 가운데 서린 귀기.

 그녀야말로 한효월이 찾아 헤매는 독고경이다.

 독고경의 앞에 이른 풍도귀왕은 천천히 손을 들어서 그녀의 얼굴을 쓸었다.

 차다.

 사람의 살갗이 아니라 잘 닦여진 옥을 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딱딱하지 않을 뿐.

 그는 천천히 그녀의 얼굴에서 손을 미끄러뜨려 그녀의 목덜미를 거쳐 그녀의 가슴팍 옷자락 속으로 손을 넣었다. 과년한 처녀의 몸이건만 그의 손길에는 거침이 없다.

 가슴에 모은 그녀의 손길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그의 손이 아래로 파고들어 흔들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눈을 뜨지 않았다. 아예 그것을 알지 못하는 듯했다.

 그녀의 젖가슴을 움켜잡은 그의 모습은 괴이했다.

 욕정을 느끼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하고 있는 짓은 파락호의 그것과 진배없다.

 대체 독고경은 왜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 그가 자신을 마음대로 유린해도 알지 못하는 것일까?

 그는 애무하듯 손을 움직였다.

 풍만하지만 팽팽한 그녀의 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던 그는 문득 힘을 주어 그녀의 가슴을 세차게 움켜쥐었다.

 눈을 감고 누운 독고경의 눈매가 묘한 떨림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녀는 미간을 가볍게 찡그린 채로 그대로 있을 따름이다.

 대신.

 "무슨 짓인가요?"

 싸늘한 질타가 그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부끄러운 짓을 하다가 들켰다. 그러나 풍도귀왕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천천히 독고경의 가슴에서 손을 빼냈다.

 그리고 그는 독고경을 내려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왜 처녀인 건가?"

 "……."

 그의 질문에 답은 없다.

 "왜 이 아이가 아직 처녀인지를 묻고 있지 않은가?"

 "나도 그 까닭은 모르겠어요."

 "이 아이의 명옥마공은 이미 십성지경, 대성을 한 상태다. 마경(魔境)에 들어 피를 즐기고 욕정(欲情)으로 양식을 삼아

 마화(魔化)해야 하거늘, 아직도 처녀라는 게 말이나 되나? 그러니 제 위력을 내지 못하고 한효월에게 쫓기는 게 아닌가!"

 "한효월이니까 쫓기는 것이죠."

 "……?"

 풍도귀왕은 신형을 틀었다.

 그의 뒤에 선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역시 흑의를 걸쳐 어둠에 동화된 모습, 검은 두건까지 써서 그 모습이 명확치 않다. 하지만 방금 들려온 음성은 여인의 것이었다.

 체형 자체도 여인의 것이니.

 "그게 무슨 소리지?"

 풍도귀왕이 미간을 찡그린 채로 물었다.

 "말 그대로예요. 다른 사람이라면 제 위력을 내는데, 한효월의 앞에만 가면 쥐약 먹은 쥐 꼴이 되고 말아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이 아이가 감정을 지녔다면 몰라도……."

 "지니고 있어요."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처음에는 나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었죠. 하지만 사실이에요. 이 아이는 한효월을 사모(思慕)하고 있어요."

 "사모?"

 풍도귀왕은 어이없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명옥마녀가 사모? 어떻게 감정을 지니고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것 때문에 명옥마공이 절정에 이르질 못했어요. 이 아이의 뇌리에서 한효월을 몰아내지 않고서는 진정한 명옥마녀가 될 수

 없어요."

 "……."

 풍도귀왕은 미간을 찡그린 채로 생각에 잠겼다.

 "한효월은 이 아이의 사숙이다. 그런데도 놈을 좋아한다는 건가?"

 "여자는 신분을 가리지 않아요."

 "너처럼?"

 "……!"

 흑의여인이 두건 속의 입술을 물었다.

 눈빛이 싸늘해졌다.

 "공일도는 어디 있지?"

 잠시 그를 노려보고 있던 흑의여인이 말했다.

 "봉신지약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대막사왕도?"

 "모르겠어요. 대막사왕과 그가 같이 움직이면 제천교가 북원과 관계가 있다고 대놓고 광고하는 꼴이니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겠죠. 그래선지 겉으로는 그와 연결하지 않고 있어요. 공일도가 대막사왕과 은밀히 연결하고 있다면 누구도 캐내기 힘들겠죠."

 "그들이 움직인다면 뭔가 단서를 캐낸 것일 수도 있지……."

 잠시 침음하던 풍도귀왕은 잠자듯 누운 독고경을 내려다보았다.

 "사모하기 때문에 대법을 거부하고 아직 처녀란 건가?"

 "생각이 있나요?"

 흑의여인의 말에 풍도귀왕은 음산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많이 담대해졌군……."

 그의 말에 흑의여인은 순간적으로 주춤했지만 차갑게 웃었다.

 "이미 죽음을 도외시했으니 무엇을 더 바라고 두려워할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음양교합(陰陽交合)을 하지 않았어요. 강제로 시킨다고 되는 일이 아니고…… 흡혈은 이미 시작했는데, 어떻게 그걸 참을 수가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군요. 한낱 사모의 정으로……."

 "피로써 목을 축이고 사내의 정(精)으로 양식을 삼아 명옥대법은 완성되며 하룻밤에 천 리를 부유하되 힘이 들지 않는다.

 그 경지에 이르러야지 비로소 마경(魔境)을 찾아갈 수 있으니, 그렇게 되어야 우리가 바라던 마교의 시원(始原)을 찾아낼 수가

 있다. 이 아이가 하지 않는다고 그냥 보고만 있었더란 말이냐?"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봤어요. 그래도 안 되니 당신을 부른 게 아닌가요?"

 흑의여인의 말에 풍도귀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심하군. 내가 독고해의 딸을 간음이라도 하라는 건가?"

 중얼거림.

 그 말에 흑의여인이 코웃음 쳤다.

 "못할 건 또 뭐죠?"

 그녀의 말은 음산한 웃음소리에 끊어졌다. 그리고 석실을 가득 채운 살기(殺氣)! 그녀의 전신이 그 살기에 돌덩이처럼 굳어졌다.

 전신이 수천 개의 칼날에 난도질당하는 것만 같아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석대에 누운 독고경이 번쩍 눈을 떴다.

 살기에 반응한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살기가 아니었다. 공포스러운 귀기이기도 했고 머리끝이 곤두설 공포로써 실제했다.

 "명옥대법은 사내의 정을 그냥 두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한다. 예외가 있을 수 없지! 더구나 첫 교합 상대는 전신의 기정(氣精)을

 모두 빼앗기고 죽거나, 설혹 살아난다고 할지라도 혼백을 잃은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알면서도 내게 저 아이를 취하라고?"

 풍도귀왕이 음산히 흑의여인을 노려보았다.

 "그게 아니라 그저……."

 무서운 살기에 흑의여인은 말을 더듬었다.

 "그저?"

 풍도귀왕은 냉소를 흘렸다.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캑!"

 흑의여인이 마치 누가 잡아 올린 듯 목을 움켜쥐면서 허공으로 불쑥 솟구쳐 오른 것이다.

 강력한 힘을 지닌 손이 그녀의 목을 움켜잡아 공중으로 치켜든 것만 같았다.

 그녀는 목을 움켜쥐고서 공중에 뜬 발을 버둥거렸다.

 "너를 죽이고 모든 염원을 묻어버릴 수도 있다."

 풍도귀왕이 음산히 중얼거렸다.

 비로소 흑의여인의 눈에서 공포의 빛이 흘렀다. 그렇게 버둥거리면서 그녀가 쓰고 있던 두건이 벗겨졌다.

 드러난 얼굴은 뜻밖에도 너무 눈에 익었다.

 봉설란.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녀가 여기 있는 것이다. 과연 그녀는 독고경의 명옥대법과 관련이 있었다.

 "왜, 왜애……?"

 "천하를 뒤덮던 본 교의 성세는 천하십성의 등장 이래 힘을 꺾어야 했다. 많은 고수들이 사라지고 숱한 힘들이 흩어졌다.

 제천교에 흡수된 본 교의 고수들은 근본마저 잊어버릴 지경이다. 너는 마교 부흥의 책무를 지고 있는 사람 중 하나다. 비록 명옥지체(明玉之體)를 발견하고 이 아이를 명옥마녀로 만드는 대공을 세웠다 할지라도…… 그 책무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십만 마교도의 염원이니까!"

 허공에 뜬 봉설란의 얼굴이 새하얗게,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빛 바래기를 계속했고 그녀의 눈망울이 금방이라도 퉁겨 나올 듯 커졌다. 버둥거리는 발짓이 급박해졌다.

 "그런데 감히 공을 믿고 본왕에게 맞서려 한단 말이냐?"

 "제, 제에바알……."

 봉설란이 허공에서 버둥거렸다.

 그녀의 무공은 세상에 알려진 것보다 더했다. 하지만 그런 무공으로도 결코 천하십왕의 무공에 비할 수는 없었다. 상대조차 할 수 없음을 그녀는 오늘 절감해야 했다.

 "……."

 잠시 그녀를 노려보던 풍도귀왕.

 그때 어디선가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개방에서 비밀 통로를 발견하고 무너진 곳을 뚫고 있습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으냐?"

 "반 시진 정도면……."

 순간, 허공에 뜬 봉설란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는 목을 감싸 쥐고서 잠시 숨을 헐떡거렸다.

 "이곳을 떠난다. 너는 공일도의 곁으로 돌아가라."

 "그, 그건?"

 헐떡거리던 봉설란은 놀라 튕기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 계집을 포기하고 이대로 떠난단 말이에요?"

 "어쩔 수 없다."

 "당신이 왜 개방을 무서워해야 하나요? 당신은 이미 모든 고수들을 이끌고 있어 충분히 그들과 자웅을 결할 만한데! 그 계집은

 마경(魔境)을 찾는 데 꼭 필요한 존재예요."

 "놈들의 뒤에는 개왕이 있다."

 "그 계집을 찾는 데 개왕까지 상대할 필요는 없어요. 그는 지금 여기에 있지 않으니……."

 "무리할 필요 없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말을 흐린 그는 고개를 돌렸다.

 "너도 같이 가거라."

 "저 말인가요?"

 뒤에서 주춤거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명부음희가 입구에 서 있었다. 이 석실에는 입구가 둘이나 있었다. 어쩌면 출구와 입구이리라.

 "네가 한효월에게 발각된 이상, 네가 다시 돌아가 있어야 제천교에서 이 아이를 감추고 있다고 그놈이 의심할 것이다."

 그가 명부음희에게 말했다.

 "무엇을 하시…… 려고?"

 봉설란이 목을 어루만지면서 어조를 바꾸며 물었다.

 "그사이에 본왕은 이 아이와 함께 마경을 찾으러 갈 것이다."

 그 말에 충격을 받은 듯 봉설란이 눈을 부릅떴다.

 "무슨? 그것은 명옥대법을 완성해야 가능한……."

 "마교의 무공은 넓고도 깊다. 내 비록 마교의 무공 중 귀문(鬼門)의 유학을 익혔을 뿐이지만 이 방면으로는 천하에 날 따를 자는

 아무도 없다. 명옥대법은 절로 마경에서 흘러나오는 마기에 반응할 것이니, 본왕은 지금도 이 아이를 이용하여 마경(魔境)을 찾을

 방도가 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봉신방의 유적(遺跡)도 찾을 수가 있을 테니 마교의 부활은 눈앞에 있는 것과 같다!"

 중얼거리듯 말하던 그는 봉설란을 바라보았다.

 "공일도를 감시해. 그에게서 용화회의 흔적을 찾아내야 한다.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 바로 봉신방을 찾아낸 순간일 테니,

 누가 먼저 찾는가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하지만 명옥대법은 아직 완성되지가 않았어요! 유일하게 희망을 두었던 전교(典敎)도 데려오지 못했는데……."

 "본왕이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할 것 없다! 우리가 다른 방도를 찾는 것처럼 봉신지약 하나만을 가진 자들도 무슨 방도를 찾아냈기에

 움직이는 것일 테니 지체할 수 없는 일이지. 일어나거라."

 풍도귀왕이 손을 내밀어 흔들며 하는 말에 석대에 누워 있던 독고경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눈빛은 망연하여 눈앞의 누구도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 눈은 오직 풍도귀왕의 손을 보고 있을 따름이다.

 그것을 본 봉설란은 놀라 눈을 부릅떴다.

 "세상에! 구혼적(句魂笛)의 지시 없이 어떻게?"

 "이제부터 너는 구혼적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 나를 따르거라."

 풍도귀왕의 말에 독고경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석대에서 슬쩍 날아올라 그의 곁에서 몸을 세웠다.

 풍도귀왕은 시선을 돌려 명부음희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길을 받은 명부음희는 부지중에 몸서리를 쳤다. 딸을 보는 아비의 눈이 아니었고, 아비를 보는 딸도 아니었다.

 "너는 본왕이 시킨 일을 하나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네 몸을 살라서라도 반드시 용화회의 종적을 알아내거라.

 알겠느냐?"

 "예, 하지만 교중에서는 이미 저를 의심하고 있어……."

 "방도는 네가 찾아라."

 "예."

 명부음희는 고개를 숙였다. 입술을 깨문 그녀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렇게 그곳에서는 인적이 끊어졌다.

 {c#}*   *   *

 한효월은 황엽과 같이 무너진 대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개방도들이 대전 아래쪽에서 작업을 하고 있지만 무너진 통로를 복구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일 수가 없다. 아무리 그들이 일반인과 다른 무림고수라고 할지라도.

 "교활하게 땅속으로 숨어 시선을 돌리다니……."

 중얼거린 황엽은 고개를 틀어 한효월을 보았다.

 "여기서 기다린다는 건 별로 의미가 없어 보이는데, 지금 가시겠소?"

 "그래도 되겠습니까?"

 "평범한 일이라면 굳이 그런 부탁을 내게 하지 않았을 테니 같이 가도록 합시다. 그 어른께서 외인을 절대로 만나지 않으려고 하긴 하지만 어떻게 해보면 되지 않겠소?"

 "고맙습니다."

 한효월이 그에게 포권해 보였다.

 그때 황엽이 갑자기 뭔가를 듣는 듯하더니 한효월을 바라보았다.

 "좀 전에 제천교도들이 호송하던 그 포대 말이오. 거기에는 사람이 들어 있었던 모양이오……."

 "사람?"

 "그렇소. 여인인데…… 한 공자가 알던 사람인 것 같소."

 한효월의 눈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황엽이 처음 떠났던 농가로 돌아왔다.

 그 농가 중 하나.

 흙벽에 너무도 평범한 농가의 방에는 나무로 만든 조잡한 평상이 침상을 대용하고 있었다. 그 침대 위에는 나무토막처럼 누워 있는 여인 하나가 보인다.

 파리한 얼굴.

 "홍 낭랑……."

 그녀를 본 한효월은 신음처럼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정말 뜻밖에도 그의 눈앞에서 홀연히 증발해 버렸던 그녀가 여기에 시체처럼 누워 있는 것이다.

 "정신을 차릴 수 없습니까?"

 "혈도를 짚인 게 아니라, 어떤 섭혼지술에 당해서 거의 심신이 황폐해진 것 같다고 하는데…… 시술자는 이 여인이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소."

 "제가 잠시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오."

 한효월은 홍 낭랑의 맥을 짚었다.

 괴이하다. 맥은 말 그대로 기식이 엄엄할 정도로 가늘다. 그럼에도 불규칙하지 않고 고르다. 그 말은 깊은 잠에 빠진 상태라는 의미다. 하지만 잠에 빠진 사람이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릴 리가 없다. 더구나 무림의 고수인 그녀가.

 게다가 개방의 유수한 사람들이 이미 그녀를 살펴보았을 터인데, 깨울 수 있었다면 그대로 내버려 두었을 리가 없었다.

 "역시 섭혼지법에 당한 것 같군요."

 한효월이 손을 거두면서 말했다.

 "깨울 수 있겠소? 그녀가 전에 한 공자에게 들었던 그 홍 낭랑이라면 가능한 한 깨우는 게 좋겠는데. 나로서는 가능하지 않을 것 같소."

 "한번 시도해 볼 수는 있습니다만……."

 "난점이 있소?"

 "제가 익힌 무공으로 이분에게 가해진 섭혼지술을 깨뜨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가능하다 할지라도 생명을 보장할

 수가 없을 듯합니다. 이 섭혼지술은 대뇌에 금제되어 매우 악독한 것처럼 보입니다. 아마 무엇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그녀를

 심하게 다루었던 것 같습니다."

 "역시 그렇군. 나의 생각도 그렇소. 그러니 제천교에서 과연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했는지를 알아볼 수 있다면 많은 도움이 될

 거요."

 "후우……."

 한숨을 내쉰 한효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보지요."

 한효월은 그녀를 부축하여 벽에 기대앉게 하고는 그녀의 백회에 손을 얹었다.

 부동명왕공을 운기하여 그녀의 섭혼지술을 깨뜨린다면 그녀는 아마도 얼마 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려는 것은, 그녀를 그대로 버려두어도 오래 살 수 없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겪은 고초는 너무 커서 이미 그녀의 생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이 보였다.

 그녀의 백회에 손을 얹은 한효월은 나직이 불가진언을 읊조리면서 천천히 부동명왕공을 운기했다.

 그의 신색이 장엄히 변하자 보고 있던 황엽은 묘한 표정이 되었다.

 '정말 나이답지 않게 박학다재(博學多才)하군……. 하늘이 그에게 저런 재능을 주고 수명을 줄인 것이 무슨 의미인지, 설마 하니

 그걸 공평하다고 할 것인가?'

 전신의 진기는 창통(暢通)하다. 하지만 머리에 이르자 옥침(玉枕)과 몇 군데에서 진기가 막혀 흐르지 않는다.

 그것도 완전히 막힌 게 아니라 아주 미세하게 흘러 뇌를 압박한다.

 한효월은 부동명왕공으로 그녀의 백회로 진기를 불어넣어 막힌 혈도를 타통(打通)해 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작업은 매우 위험하여 한순간만 실수해도 상대는 즉사를 면할 수 없다.

 "으음……."

 이윽고 나직한 신음이 홍 낭랑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뒤이어 그녀의 전신이 떨리기 시작한다. 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파닥거림이 전신으로, 그리고 뒤따르는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

 "저건!"

 황엽이 나직이 신음했다.

 홍 낭랑의 머리. 신정(神頂)에서 은빛의 머리카락처럼 가는 침이 솟아올랐던 것이다.

 "탓!"

 한효월이 나지막이 소리쳤다.

 순간 홍 낭랑의 코에서 검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며 한효월이 손을 떼자 그녀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한효월이 그녀를 부축했다.

 피가 그의 소매를 적셨다.

 "하나가 아니라 세 개라니……."

 한효월이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의 손에는 좀 전에 보였던 은침이 세 개나 놓여 있었다.

 "계산을 잘못해서…… 깨어날는지 모르겠습니다. 대뇌가 충격을 받았을 텐데……."

 그때였다.

 "나, 나는 마교의 장전교령(掌典敎令)이 아니…… 그, 그래요. 그분의 후손인 건 맞…… 아요. 장…… 전교령은 마교의 역사를

 관할하는 임무를 맡고 있지만…… 나는…… 나는 아무것도…… 몰라…… 몰라요…… 아아악!"

 갑자기 입을 연 그녀가 줄줄 말을 뱉어냈다.

 그리고는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미친 듯 발광을 시작했다.

 깜짝 놀란 한효월이 그녀를 잡았고 황엽도 주춤 다가왔다.

 홍 낭랑은 머리를 움켜쥐고서 악을 썼다.

 "그래요! 그래! 마경(魔境)에 관한 것은 들어본 적이 있어요. 찾아가는 길은…… 찾아가는 길은…… 나도 몰라…… 정말 몰……

 아아악! 말할게요! 말할게요!! 그래요…… 교장(敎藏)에는 있을 거예요. 쿨룩쿨룩…… 교장은…… 교, 교장의 위치는……

 꺄아아아-악!"

 머리를 움켜쥔 홍 낭랑은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발악을 했다.

 "깨어날 수가 없는 거요?"

 "깨어나야 할 텐데, 그전에 받았던 고초가 너무 큰 것 같습니다. 심신이 거의 파괴가 된 것 같군요……."

 한효월이 입술을 물었다.

 그는 맑은 빛이 감도는 자신의 손을 다시 그녀의 백회에 올려놓았다. 부동명왕공으로 그녀의 심신을 보호하려는 것이다.

 그녀의 지금 상태는 이미 심마(心魔)에 든 것과 다름이 없었다.

 한효월이 부동명왕공으로 그녀를 도와주자 학질이 들린 듯 덜덜 떨던 그녀의 전신이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

 "낭랑, 제 음성이 들립니까?"

 한효월이 그녀의 귀에다 전성지공(傳聲之功)으로 조용히 말을 건넸다.

 낮은 음성이지만 전음의 힘을 이용하여 말한 것이라 보통 때 소리친 것과 같은 효과가 있었다.

 눈을 감은 그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리고는 거짓말처럼 그녀가 눈을 떴다.

 하지만 그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제가 보이지 않습니까?"

 한효월이 다시 물었다.

 그녀가 미간을 찡그린 채로 귀를 쫑긋거리더니 연신 눈을 끔벅거렸다.

 "설마…… 한…… 공자?"

 갈라진 그녀의 입술, 쏟아진 피로 젖은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예! 접니다. 한효월입니다."

 그녀의 눈이 떨어졌다.

 희미한 눈빛. 영롱하고 당차던 그 눈빛은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늘지고 피폐하기 이를 데 없는 그 눈은 한효월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듯 끔벅거린다. 참괴(慙愧)하여 마주 보기조차 힘들다.

 "어떻게 나를 찾…… 쿨룩!"

 억지로 말을 뱉어내던 그녀의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무리하게 말하지 마십시오."

 한효월이 자신의 몸에 피가 묻는 걸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부축하자 가쁜 숨을 몰아쉰 홍 낭랑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무리하지 말라고……."

 미간을 찡그린 채 머리를 흔들던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 는…… 이미 바람 앞의 촛불과 같아요. 모든 힘이 다하여……."

 "누가 이렇게 낭랑에게 모진 짓을 했습니까?"

 순간.

 사나운 빛이 홍 낭랑의 얼굴에 드러났다. 원독에 가득한 얼굴.

 "그자…… 그 인면수심의……."

 그녀의 입에서 핏물이 쏟아졌다.

 "그게 공일도입니까?"

 한효월의 다급한 물음에 그녀가 쿨럭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저와 같이 있다가 사라지신 것은 그가 나타났기 때문인가요?"

 "맞아…… 쿨럭! 그가 나타나서……."

 그녀가 입을 벌리자 연신 피가 쏟아졌다. 양이 많지도 않았다. 하지만 검붉은 피는 뭉클뭉클 거품처럼 게워져 나왔다.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소, 한 공자!'

 황엽이 전음으로 한효월을 채근했다.

 안쓰럽게 보지 말고 빨리 물어볼 것을 물어보라는 것이다. 냉정한 말이지만 이 순간에는 가장 필요한 말이기도 했다.

 "그는 낭랑과 나쁜 관계가 아닌 듯했는데, 왜 낭랑을 이처럼 혹독하게 다루었습니까?"

 "그건……."

 토막토막 끊어지는 말로 설명을 한다.

 모든 인과를 제대로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아니, 불가능했다. 입만 벌리면 피 거품이 게워지고 정신이 제대로 깨어나지 않아 말을

 하다가도 정신이 아득히 멀어지니 어찌 제대로 된 설명을 바랄 수 있을 것인가.

 몇 번 입을 뻥긋거리다가 홍 낭랑은 포기를 하고 만다. 그 얼굴에 드리운 것이 죽음의 빛이라는 것을 한효월도 알고 황엽도 안다.

 보다 못한 황엽이 입을 열어 재촉을 하려는 순간.

 돌연 그녀가 눈을 번쩍 떴다.

 "마경(魔境)! 그가…… 그가 마경을 찾아가지 못하게 막아야만……."

 그녀는 한효월의 가슴팍을 잡아 쥐며 그에게 매달릴 듯한 모습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디서 난 힘일까?

 그녀의 눈에서 불이 뿜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를 막아줘요. 안 그러면 모두가 파멸……."

 "마경이 뭡니까?"

 "마경은…… 마교의 시원(始原)이 되는 곳……. 하지만 극악한 마기…… 아무나 갈 수가 없는…… 교장(敎藏)에는 아마도……."

 "교장이란 게 마교의 경전을 모아둔 곳입니까?"

 황엽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급히 말을 이어갔다.

 "교장에는 마경의 위치가 있을……. 봉신(封神)의 비밀…… 교장, 교장은 중조산(中條山) 응수(鷹愁)…… 내가 준…… 신물(信物)!"

 쥐어짜듯 말을 토해내던 그녀의 눈에서 돌연 빛이 꺼졌다.

 그리고는 그녀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마치 거짓말을 하듯 천천히…… 그럼에도 그녀는 한효월의 가슴팍을 거머쥔 손가락을 풀지

 않았다.

 한효월은 조용히 그녀를 뉘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가락을 풀며 말했다.

 "낭랑의 원한을 갚아드리지요. 말씀하신 곳이 어딘지 알아보고 가볼 테니 이만 눈을 감으십시오."

 신기하게도 한효월의 조용한 말에 그녀의 움켜쥔 손가락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가 쓸어 내리는 손길에 그녀는 눈을 감았다.

 소리도 없이……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눈꼬리에서 흘러내린다.

 속절없이 흘러내린 그 눈물은 바로 그녀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존재였을는지도.

 이제, 그녀의 본명이 홍지문(紅芝雯)임을 아는 사람도 없다. 그저 강호에서 홍소군으로 불렸던 것을 기억할 사람이 있을 따름.

 그녀가 마교의 경전을 모아 보관하며 관리하는 일을 하는 유일한 존재였던 장전교령의 손녀라는 것을 말해 줄 사람은 더 더욱

 없으리라.

 유난히 총명했던 그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준 장전교령은 그로 인해 자신의 손녀가 평생을 통해 참혹하게 살아야 할 것을

 알지 못했고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그녀의 삶이 평탄치 못하여 홀로 살 수 밖에 없으리라는 예측을 하였기에 자신의 뒤를 잇게 했건만.

 실제로는 그 일로 인하여 그녀의 평생이 일그러졌음을 그가 어찌 짐작이라도 할 수 있었을까.

 교장을 노리면서 그에게 접근해 온 자에게 겁탈을 당하고 순정을 사기당했다.

 후일 그것을 알게 된 그녀의 절망감은 스스로를 죽음에 이르게 했지만 그녀가 목숨을 끊으려 하자 그는 그녀에게 백 번을

 양보하면서 늘 참회의 빛을 보여왔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것을 정말로 믿었던 그녀에게 또다시 덮쳐 온 것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배신.

 그녀의 삶은 오직 한 사람, 공일도라는 존재를 만나면서 그처럼 무참히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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