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10首 고목생화(枯木生花)
-절망 속에 빛이 있다.
음모는 아직 드러나지 않으니 의문만 더하다.
동정호는 오늘도 호호탕탕(浩浩蕩蕩) 드넓은 물결로 넘실거린다. 고깃배는 여전하고 석양의 금빛 물결 또한 변함없다. 이곳저곳을 넘나드는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의 모습이야 언제라도 변함이 있을까.
여기저기서 그물 거두어들이는 소리가 요란하고 저 멀리 어촌에서는 하나둘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올라 평화롭다. 저 연기를 바라보면서 그물을 거둬들이는 어부들의 손길은 더욱 바빠진다.
그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의 반김과 따듯한 저녁을 생각하며.
그러나 그러한 자연스러움과 어딘지 모르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배.
그것도 아주 큰 배 하나.
왠지 이런 곳에는 어울리지 않는 듯한 그 배는 뭍에 닿아 있었고 배에 이르는 호변 주위로는 작은 배가 호위하듯 떠 있다. 특이한 것은 그 작은 배들이 모두 군선(軍船)이라는 데 있었다. 뿐만 아니라 뭍에서 배에 이르는 곳에는 경비들이 서서 주위를 경계하는데 그들 또한 모두가 갑주를 갖춘 정예병들이라 기세가 삼엄했다.
누가 감히 그 옆으로 접근이라도 하겠는가.
"놈을 아직도 찾아내지 못했나?"
노한 음성이 들려왔다.
선창(船艙).
호화로운 장식이 되어 있는 그 배의 내부는 거대하고 그중 깊숙한 곳에 위치한 선실에는 정화가 앉아 노한 눈으로 앞에 늘어선 사람들을 휘둘러본다.
"금의위부터 시작해서 지방 관아의 모든 자들을 동원하고 있습니다만, 그날 이후의 행방이 묘연합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놈은 이곳을 벗어나지 않았어. 그런데도 종적조차 못 찾고 있단 말인고!"
"죄송합니다만…… 동정호는 너무 넓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꺼냈던 자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넓으니까 포기하고 그냥 있겠다 이건가?"
"그, 그게 아니라……."
그의 얼굴에 아연 긴장이 감돈다.
"가라. 가서 당장 놈을 찾아와! 내일까지 아무런 단서를 찾아오지 못한다면 가서 쉬어도 좋다."
"대, 대인!"
"가기 싫은가?"
"아, 아닙니다! 가겠습니다!"
천호라는 높은 신분을 가진 무장은 황급히 뛰쳐나갔다.
"무슨 일을 이따위로 처리한단 말인가! 놈을 쫓고 있던 비선(秘線)들은 다 어디로 가서 처박힌 거란 말이냐?"
"제천교주를 쫓고 있던 비선들 모두가…… 연락이 끊겼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추적 중입니다만…… 모두…… 죽은 것 같습니다."
"모두 당했다고?"
정화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그런? 비선은 모두 추적과 은신의 달인들이 아니냐? 게다가 여기 투입된 숫자가 칠십이나 되는데, 그들 모두가 당했다는 게 말이 된단 말인가?"
"제천교주를 뒤쫓던 자들은 서른둘이었습니다. 모두 그중 뛰어난 자들이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로 끊임없이 연락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마 당세에는 그들을 소식조차 보내지 못하고 사라지도록 할 자는 없으리라 믿고 있었습니다만, 모두……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그런……."
정화는 믿기지 않는 듯 신음을 흘렸다.
그들이 있기에 그는 자신있게 제천교를 쫓고 있었고, 지난번에도 그들의 종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한꺼번에 몰살을 했단 말인가?
한 군데 있는 것도 아니고, 흩어져 있다. 게다가 그들은 싸움이 목적이 아니라 적의 종적을 쫓고 정보를 보고함이 목적이라 설사 능력이 된다 할지라도 낌새만 이상하면 무조건 도주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 그들을 소리도 없이 모두 죽였다는 건가?
"놈은 이곳을 벗어나지 못했다. 어떻게 되었든 여기에 봉신지약이 있는 한, 이곳을 벗어나지 않을 테니까! 봉신지약은 지금 누구 손에 있나?"
"명확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확인된 것은 남해용왕이었는데, 그가 부상을 입고 용선으로 퇴각한 후로는…… 괴이하게도 종적이 묘연합니다. 더욱이 괴이한 것은 그들 십왕들이 모두 일정 거처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독왕도 마찬가지라 그가 수하들을 시켜 뿌리고 있던 독의 살포도 중지된 상태입니다. 물론 개방의 방주가 해약을 제조하여 뿌리는 것과 함께 중지된 거라서 그것과 연관이 어떤지는 단정하기 힘듭니다만……."
"십왕은 몇이나 나타났나?"
"대막사왕과 요동검왕, 고려검왕, 서역법왕, 남해용왕, 독왕, 독고해까지 합한다면 일곱입니다."
"일곱이라…… 귀왕이나 북해빙왕, 천축마왕까지 나타나면 백여 년이래 처음으로 그들 십왕이 다 모이는 성회(成會)가 되겠군!"
"빙왕과 귀왕은 이미 당도했소."
냉정한 음성이 들려왔다.
"누구냐?"
사람은 보이지 않고 음성만 들려오자 정화의 앞에 부복하고 있던 무장들이 일제히 일어서면서 정화의 주변을 둘러쌌다.
"되었다. 모두 나가보거라."
"대인!"
"내가 기다리던 사람이니 신경 쓸 것 없다."
"옛!"
누구의 영이라고 거역할 것인가.
무장들은 일제히 선실을 나섰다. 선실을 나선 그들은 밖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발견할 수 없었다.
정화는 자신의 앞에 나타난 사람을 보고 웃음 지었다.
"불러도 오지 않더니 무슨 바람이 불었소?"
"주변을 물리시오."
"핫하하…… 천하의 고려검왕의 앞에서 무장 해제를 하란 말인가? 그건 곤란하지. 저들은 나의 그림자이니 신경 쓸 것 없다!"
정화가 껄껄 웃었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방금 그의 앞에 나타난 고려검왕을 제외하고는. 하지만 그들의 말로 보건대 암중에 숨어 있는 사람들이 있는 듯했다.
정화의 말투가 달라짐을 느낀 고려검왕은 싸늘한 눈길로 정화를 노려보았다.
그의 신분으로 누가 감히 그의 앞에서 이런 말투를 사용하랴.
하지만 정화는 태연히 그의 눈길을 받았다.
그의 주변에서 살기가 들끓는 가마솥 뚜껑을 열었을 때처럼 폭사되어 일어났다. 거대한 살기의 덩어리가 형체를 이루며 정화를 둘러싸는 것 같았다.
"대단한 그림자들이군."
그럼에도 고려검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싸우러 온 거요?"
정화가 팔짱을 끼면서 물었다.
"싸우기 위해서라면 당신을 찾지 않았을 것이오. 내가 당신을 공격한다면 당신은 아무 죄 없는 우리 백성들을 괴롭힐 것이니 어찌 감히 당신을 공격할 수 있겠소?"
"하하하…… 그런가?"
정화는 다시 껄껄 웃었다. 그는 늘 대범해 보였고, 거만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충분히 거만했다.
"조선의 왕에게 명했었지. 이 일을 돕도록 당신을 보내라고. 그 점만 잊지 않는다면 우리 사이는 아무 일 없을 것이다."
정화가 못을 박았다.
"한 가지 잊고 있는게 있구료?"
고려검왕이 차갑게 말을 꺼냈다. 그의 신색에는 그 어디에서도 위축된 기색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잊고 있다고?"
"나는 당신이 원의 잔당을 찾아 소멸하는 일을 돕기 위해서만 움직일 거라는. 그 외에는 어떠한 일로도 당신은 나를 부리거나 도움을 요청할 수 없다는 걸! 나는 고려의 유민(流民)일 뿐, 불쌍한 백성들이 괴롭힘당할 거라는 위협이 아니었다면 나는 당신의 일을 도우러 나서지 않았을 것이오."
"어차피 그게 그거겠지. 결과는 마찬가지니. 좋다. 놈들의 행방은 알아냈는가?"
"악양성 중에 있소."
"악양? 악양성 중에 있다고?"
어이없는 듯 정화가 입을 벌렸다.
악양이라면 동정호 일대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다. 그런데 거기에 제천교주가 숨어 있단 말인가?
"놈을 공격할 수는 없었나?"
"혼자가 아니오. 독왕이 그와 같이 있고 수많은 고수들이 같이 있는 데다가 부근에 대막사왕까지 있소.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데, 실제로 그가 그 자리에 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소."
"으음……."
정화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런 정도의 힘을 모으고 있다면 공격하기도 쉽지 않다. 일반 병정들이야 소리나 지르지 무림고수들을 상대로는 싸움 자체가 성립이 되지를 않는다.
"가서 놈들의 동정을 살펴주시오. 곧 사람들을 풀 테니."
그의 말투가 다시 달라졌다.
"알았소."
고려검왕은 소리없이 사라졌다.
그의 행적은 표홀하여 신법의 놀라움은 형언키 어렵다.
"군주마마께 빨리 연락해라. 이리 오시도록!"
"알겠습니다!"
그의 뒤에서 대답이 들렸다.
'천하십왕 중 둘, 그리고 금의위를 비롯한 관부고수 칠백에 정병만을 동원하겠다. 그 그물을 빠져나갈 수 있을는지 보자 놈……. 그도 부족하다면 개방도 뒤를 받치게 하겠다.'
정화는 이를 악물었다.
* * *
고려검왕 김호민(金護民).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라고 이름조차 호민이라 하였다. 그들, 수호신문(守護神門)의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이름을 그렇게 짓는다. 이름뿐 아니라 그들의 삶 또한 평생을 수도자처럼 살며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도록 되어 있다.
그것은 수천 년 이래 끊임없이 이어져 온 대한수호신문의 전통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왜 이곳에 왔을 것인가.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새로 나라의 주인이 된 조선의 왕이 한 부탁이다. 그가 나서주지 않는다면 그들이 지성으로 섬기는 대국에서 그냥 있지 않을 것이라는 호소를 물리칠 수가 없었다. 백성들에게 무슨 죄가 있을 것인가.
'봉신지약을 얻는다면, 봉신방을 찾을 수 있다면…….'
동정호의 까맣게 가라앉아 가는 석양의 잔재를 바라보면서 고려검왕 김호민은 생각한다.
그럴 수만 있다면 천하의 판도를 바꾸어놓을 수 있으리라.
옛 영광을 재현할 수도 있으리라.
무심한 바람이 불어와 그의 옷자락을 흔들어놓는다.
그의 그러한 고뇌를 비웃듯 저 멀리 보이는 정화의 거대한 배는 당당하고 오연하기만 하다.
길게 한숨 쉰 고려검왕 김호민은 땅을 박차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쳐든 칼끝.
날카롭게 곤두선 도첨(刀尖)은 은은히 흘러내리는 달빛을 튕겨내면서 고요하다.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세워진 칼끝은 억겁의 세월이 흘러도 그 자리에 그렇게 있을 듯 고요하게 숨을 머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언제인가부터 칼끝에서는 달빛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니, 달빛이 아니라, 신비로운 달무리가 칼끝에서 피어올라 주위를 덮어가고 있었다.
그 칼끝이 쏘아보고 있는 것은 일 장여 밖에 있는 한 그루의 갈대.
천 년의 세월을 간직한 거목도 아닌 한낱 갈대는 칼끝에서 피어오른 달무리에 휘감긴 채로 건들거리고 있다.
달무리가 이는 대로 이리저리…….
칼끝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천천히 위로.
추욱 처져 있던 갈대가 허리를 세운다.
칼끝이 점점 올라가 머리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 칼을 쥔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감천형.
그가 수중의 패도를 정말 힘겹게, 어린아이가 거암(巨巖)을 들어 올리는 것처럼 그토록 힘겹게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 몸짓에 따라 갈대가 금방이라도 땅에서 뽑혀 나올 듯이 곤두섰다. 온몸으로 곤두섰다고 함이 옳을까.
어느 순간, 감천형이 손에 쥔 패도에 불끈 힘을 주는 것 같았다.
팍!
그러자 갈대가 마치 면도날로 벤 듯 위에서 아래로 두 조각이 났다.
뿐만 아니라 흐늘거리면서 좌우로 넘어진 갈대는 바닥에 닿자 산산이 가루로 화해 부서져 버렸다.
"후우……."
그것을 보면서 감천형은 호흡을 조절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의 수중에 들린 패도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손에 힘을 주는 것이 느껴졌을 뿐인데 경기가 일면서 갈대는 갈라졌고 아예 가루로 화해 버렸던 것이다.
그때였다.
"정말 놀랍군! 그사이에 뇌정(雷霆)의 수발을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니……."
칭찬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사숙?"
흠칫한 감천형이 고개를 돌렸다.
정말이었다.
한효월이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고 있는 유성.
그들의 모습에는 한가로움이 묻어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력을 기울여 돌아온 듯 피곤한 빛이 보인다.
"돌아오셨습니까? 소식을 전하셨길래 내일쯤 오시는 줄 알았었습니다만."
감천형이 반갑게 한효월을 맞았다.
"그사이에 정말 열심히 수련한 것 같군. 내가 남겨준 것의 정수(精髓)를 얻은 것 같으니…… 나머진 시일이 좌우하겠지."
"모두 사숙의 덕분입니다."
한효월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별로 안 보이더군?"
"모두 정세 파악에 나섰습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 같아서요."
"심상치 않다고?"
"예. 아무래도 천하십왕들 사이에서 뭔가 암중 묵계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은밀한 접촉들이 이루어지고 있고, 귀왕도
이미 당도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북해빙왕 냉천추까지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문이 있지만 종적을 전혀 찾을 수가 없어서 백방으로
사람을 풀어놓고 있는 중입니다. 개방에서도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습니다."
"봉신지약은 누구의 손에 있지?"
"그게 정말 애매합니다. 십왕의 손에 있지 않습니다."
"십왕의 손에 있지 않다고?"
"예. 어제까지 확인된 바로는 십왕이 아니라, 단혼장(斷魂掌) 섭생의 손에 있다고 하는데…… 그는 십왕 중 누구와도 관련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의 무공 정도는 어떻지?"
"고수이긴 합니다만 소질을 당해낼 수 없을 겁니다."
"지금의 감 사질을 말하나? 아니면 전의 감 사질 이야기인가?"
한효월의 물음에 어색한 웃음을 지은 감천형은 정색을 했다.
"지난날에도 힘들었을 것이고 지금의 저라면 더욱 어려울 겁니다."
"그렇다면 정말 이상하군. 그런 자가 봉신지약을 가지고 있도록 십왕이 방치하고 있다니…… 그가 봉신지약의 의미를 아나?"
"모르는 것 같습니다. 동정호 일대에는 기보가 나타난다는 소문이 자자하고 그래서 그자도 달려온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런 자에게 봉신지약이 들어가고 사흘 동안 그걸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해하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슨 생각들일까?'
한효월은 궁금해졌다.
그처럼 무섭게 달려들더니 지금은 서로 가지고 있지 않으려 한다. 누가 가지고 있는가?
그저 눈치만 보고 있는 것이다.
"……."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한효월이 다시 말했다.
"다른 움직임은 없나?"
"다른 것이라면 어떤?"
"경아에 대한 것. 그리고 뭔지 모르게 이상한 어떤 움직임. 대국과는 상관없다고 느껴지지만 그래도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어떤 것이 있었는가를 묻는 거야. 경아 문제로 형수님께서 보구회를 제대로 움직이지 않고 계시는 것도 그렇고……."
"현재로써는 눈에 띄는 움직임은 없습니다. 제천교주와 그 세력들까지 거의 찾아내기 어려울 정도로 숨어버려서 오히려 움직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재삼재사 유의해 보도록 해. 뭔가 이상한 움직임이 있을 거야. 찾아내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찾아내고도 천하십왕에 신경 쓰느라고 놓쳐서는 안 될 어떤 것이."
"알겠습니다."
"천하십왕의 소재는 파악되고 있나?"
"그렇지 못합니다. 남해용왕조차도 부상에서 어느 정도 회복하자 용선에서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해서 그들의 움직임을 잡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듯합니다. 공개적으로 돌아다니지를 않으니까요."
"그렇겠지……."
잠시 생각에 잠겼던 한효월이 물었다.
"좌백은?"
"이쪽으로 옮겨와 간호하고 있습니다. 계속 혼자 떠나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사람을 붙여서 감시하고 있는 중입니다. 심정을 이해 못하는 거야 아니지만……."
감천형이 말끝을 흐렸다.
무림고수가 무공을 잃어버리면 더 무기력하다.
그는 좌백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지만 실제로 좌백이 무엇 때문에 머물기를 괴로워하고 떠나려는 것인지를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어디 있지?"
"호수가 보이는 쪽으로 거처를 마련해 줬습니다."
* * *
쏴, 쏴아아…….
물소리가 귓전을 친다.
주변은 갈대. 또 갈대로 가득하다.
삶은 누구의 것이며, 죽음은 또 어디 있으랴.
장부로서 생을 바쳐 이루고자 한 일 허사되니 더 무엇을 바랄 것인가…….
어둠은 나래로써 천하를 덮으니 새벽빛은 언제 힘을 얻을까.
욕된 삶이 세월을 더하면 장차 어이하리, 어이하리.
어디선가 저상(沮喪)한 음성 한 가닥이 들려왔다.
한 사람이 갈대 사이에 우뚝 서 금빛 물결로 출렁이는 동정호를 보고 있었다.
황금을 풀어놓은 듯 번쩍이던 동정호의 석양은 이제 끝이다. 붉다 못해 이젠 검붉어진 동정호의 석양은 그 자체로 절경이지만 보는 사람바다 감회가 어찌 같으랴.
채 서른이 되지 않은 나이.
풀어헤친 머리카락을 그저 뒤에서 한 번 묶었다.
그리고는 풀먹이지 않은 무명옷을 입은 그의 어깨는 아래로 축 처져있으나 호수를 바라보는 그의 가라앉은 눈매는 여전히 차다.
그때다.
"그 시는 누가 지은 거죠?"
난데없이 짤랑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허름한 옷을 입은 여인. 머리에는 대로 만든 반쯤 부서진 갓을 쓰고 팔을 걷은 옷소매는 도무지 여염집 여인답지 않다. 그녀는 햇볕에 탄 가무잡잡한 피부에 흰 이를 드러내고 있어 건강미가 넘친다. 나이는 불과 스물이 될까 말까?
"도무지 맥이 빠져서 사내의 시답지가 않군요. 당대의 이하(李賀)도 아마 그런 시를 짓지는 않았을 거예요. 하긴 비슷하기도 한가? 뭐 어쨌든 당신은 그와는 다르죠! 아직 이렇게 팔팔하게 살아 있잖아요?"
이하는 당대(唐代)의 뛰어난 시인으로 채 서른이 되기 전에 요절했고, 염세적인 시로서 유명했다.
사내, 좌백은 굳은 얼굴로 자신의 곁으로 온 여인을 바라보았다.
"날 그냥 두라고 하지 않았소?"
"저런, 저런! 그건 훗날 당신이 건강을 되찾고 난 다음에 할 말이에요. 아교(阿嬌)가 할아버지께 받은 명령은 당신이 건강을 되찾을 때까지 당신을 어린애처럼 돌봐주라는 것이었어요. 생각해 보세요. 아교를 이만큼 키워준 게 할아버지요, 우리 엄마 아빠이신데, 내가 할아버지 말씀을 들어야 하겠어요, 아님 당신을 말을 들어야 하겠어요?"
단숨에 말을 쏟아낸 여인은 눈을 반짝였다.
"뭐 하긴, 당신 말을 들을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로군요."
"그건 뭐요?"
부지간에 그녀의 말에 끌려 들어간 좌백이 물었다.
"내가 당신에게 시집을 가게 되는 경우죠!"
"그, 그런……."
어이가 없는 듯 좌백이 입을 벌렸다.
"그렇죠? 말이 안 되죠? 그러니 아교는 당신의 말을 들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은 건강해질 때까지 내 말을 들어야 되구요!"
말과 함께 그녀는 좌백의 팔을 꼈다.
"자, 가자구요. 밥 먹을 때예요."
"이것 놓으시오."
좌백이 인상을 차갑게 굳혔다.
그러나 이 아가씨에게는 도무지 먹히지를 않았다.
"그런다고 놓아주면? 그럼 종일 물이나 보고 있다가 한숨이나 쉬고 차라리 물에 뛰어들까, 하는 궁리나 할 건데 그걸 내가 두고
봐야겠어요? 속 터지지……. 안 그래도 델구 가지 않으면 밤이 되어도 달이 기울어도 돌아오질 않으니 허기가 져서 죽겠단
말이에요!"
질질…….
말 그대로 좌백은 여인에게 질질 끌려간다.
난감한 표정이지만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닌지 체념한 표정이다.
아무리 무공을 잃어버렸다지만 천하의 좌백을 저렇게 만들 여인이 존재하다니…….
"누구야?"
한효월이 감천형을 보고 물었다.
"대단하죠? 하하…… 동정어은 종 선배의 손녀딸인 종소교(鐘小嬌)입니다. 장래에 대단한 여걸이 될 재목인데, 종 선배께서
계집애가 무슨 무공이냐고 기본만 가르치고 말아서 정말 아깝습니다."
감천형이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답했다.
"임자를 만난 것 같군요. 저러기 쉽지 않은데……. 소옥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한 거 같지 않군요……."
유성도 곁에서 중얼거렸다.
전이라면 좌백이 기척을 느꼈을 것이지만 지금은 무공을 상실하여 감각이 떨어지니 그들이 숨어서 보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한효월은 낙백상혼하여 있을 좌백을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종소교라는 아가씨가 그를 간호하고 있음을 보자 마음이 조금 놓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보다 더한 적임자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때론 남자에게 있어 천하제일의 보약은 바로 여자일 수도 있었다.
허전한, 생에 의욕을 잃어버린 좌백과 같은 처지라면 더 더욱.
"다행이군……."
한효월이 중얼거렸다.
"내가 먹는다니까!"
좌백이 소리를 질렀다.
"아, 글쎄 먹여줄 땐 그냥 있어요! 어차피 한두 번 먹여준 거도 아니잖아요? 그제까지 계속 먹여줬는데 뭘 새삼스럽게 그래요?"
종소교가 눈을 흘겼다.
좌백은 그녀의 수저에 담긴 엄청난 크기의 밥덩이를 보곤 기가 질려서 말했다.
"꼭 그걸 먹여야만 하겠소?"
"그럼요. 그래야 다시는 밥상 앞에 놓고 딴소릴 안 할 거 아니에요? 이 쌀 한 톨, 밀 한 톨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농부들이
힘드는 줄 알아요? 피라미 한 마리를 잡기 위해서 우리네들은 종일 물속을 헤집어요! 물고기는 그냥 자라나는 줄 아세요? 그놈들도
치열한 생존……."
"알았소. 알았으니 그만 하시오. 먹으면 될 게 아니오?"
좌백은 체념을 하고 입을 벌렸다.
"호호호…… 그래야, 착하죠! 진작 그럴 것이지."
자신이 넣어준 밥덩이를 억지로 우걱우걱 씹고 있는 좌백을 보면서 종소교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볼이 터질 듯하고 밥풀이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올 지경이었다.
아마 사내가 그런 짓을 했다면 좌백이 아무리 힘이 빠졌다고 할지라도 일단 사생결단을 내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여자이니 어찌할 것인가.
그저 한숨만 내쉴 밖에.
그녀를 내치기 위해서 별짓을 다했다.
그런데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뭐라고 하든 그녀는 하고 싶은 대로 했고, 좌백을 그녀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야만 끝을 냈다.
결국 포기 상태에 이르러 이 모양이 되고 말았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괴이한 일이었다.
평소의 그라면 차라리 그 자리에 엎어져 죽을지언정, 그녀가 하라는 대로 할 그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난감한 표정으로 당하고 있는지는 그도 몰랐다.
평상(平床) 하나.
거기에 밥상이 차려지고 푸성귀에다 물고기를 곁들인 저녁이다.
솔솔한 바람이 불고 갈대에 바람 스치는 소리, 물결치는 소리가 들리는, 실제로는 평화스럽기 이를 데 없는 저녁 무렵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살아도 좋은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눈앞에서 웃고 있는 종소교를 보면서 뇌리를 스치는 것을 느낀 좌백은 깜짝
놀라 눈을 끔벅였다.
대체 내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그 삶에 어느새 종소교를 끼워 넣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 것이다.
만난 지가 며칠이라고…….
그때였다.
"정말 맛있어 보이는 저녁이군. 혹시 나도 한자리 낄 수가 있을까?"
담담하고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런 음성이 누구의 것인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사숙!"
좌백은 크게 당황하여 허둥거렸다.
종소교가 막 쌈을 그의 입에다 밀어 넣고 있던 때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허둥거리는 그를 향해 한효월은 웃으며 말했다.
"천천히 먹어. 급하게 먹으면 체해."
말과 함께 그는 급하게 평상에서 일어서는 종소교를 향해 웃어 보였다.
"수고가 많으시군요, 사질을 잘 돌봐주어 고맙습니다."
누구라도, 그를 처음 대하는 사람이라도 그를 보면 기품을 느낄 수가 있다.
"혹시, 한 공자이신가요?"
"그렇습니다. 내가 한효월입니다."
"그렇군요! 이렇게 당대의 영웅을 직접 뵙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어요. 정말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종소교는 활짝 웃었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가린 손 사이로 드러나는 흰 이가 눈부시다.
'활달하되, 천박하지 않군.'
한효월은 그녀를 보는 것으로 그녀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었다.
좌백으로서는 정말 다행한 일이다.
활발한 것이 지나쳐 너무 대가 세던가, 풍정(風情)이 짙다면 곤란했다. 그러나 곁에 와서 보니 흠 잡을 데가 없는 아가씨다.
그녀의 이러한 태도는 아마 좌백이 마음에 들어서일 것이다.
"생각보다 좋아 보여서 다행이구나."
한효월은 웃음기 어린 얼굴로 좌백을 보면서 말했다.
"사숙, 그게 아니라……."
좌백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되었다. 굳이 설명할 것이 어디 있겠느냐? 종 소저가 잘 돌봐주셔서 네 건강이 많이 좋아진 것 같다. 마음이 죽으면 몸도 죽는다.
용기를 잃지 말아라. 종 소저."
한효월이 자신을 돌아보자 종소교는 황급히 답했다.
"예, 한 공자."
"붓과 먹, 종이를 좀 가져다 주시겠소?"
"문방사보를 말씀인가요? 예, 알겠습니다."
종소교는 얼른 일어나더니 방으로 달려가 쓸 것을 가져왔다.
그리곤 먹을 듬뿍 찍어서 한효월에게 내밀었다. 그 앞에 종이가 펼쳐졌음은 물론이다.
"고맙소. 돌아오면서 내내 네 증상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녀에게 고마움을 표한 한효월은 좌백에게 말했다.
그의 손에 들린 붓이 백지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확신을 가질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처방대로 네가 노력하고 꾸준히 약재를 복용한다면…… 그럼 가능성이 있을 것 같구나."
한효월이 몇 장의 그림을 동반한 붓달리기를 그치며 한 말에 좌백의 얼굴에 일순 흥분의 빛이 떠올랐다.
"정말입니까? 정말 무공을 회복할 수가 있겠습니까?"
"확신은 하기 힘들다. 하지만 가능성은 매우 높다. 물론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겠지만."
한효월은 종소교를 바라보았다.
"한 가지만 물어도 되겠소, 종 소저?"
"예."
"무공을 배우고 싶소?"
"제, 제게 무공을 가르쳐 주실 건가요?"
종소교의 얼굴에 뜻밖이라는 빛이 떠올랐다.
한효월은 당대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다. 소문에 들려오는 그의 풍채를 한 번만 봤으면 죽어도 원이 없다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인물이 자신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겠다는 건가?
가슴이 뛰지 않을 수가 없다.
"아니오. 배울 의향이 있는가를 묻는 것이오."
"배울 생각이야 있지만……."
"그럼 되었소. 사질, 종 소저에게 내일부터 무공을 전수해라."
"사숙!"
"여인에게 적합한 무공이 있을 게다. 여기 네게 남긴 글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테고. 종 소저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일은 네
무공 회복에 많은 도움이 될 게다. 왜 그런지는 네 스스로로 노력하다 보면 알게 될 테니 그대로 시행해 보도록 해라."
말과 함께 한효월은 정색을 했다.
"어차피 버린 인생이라고 생각했었지? 버린 인생이라면 다시 한 번 노력해 보는 것도 손해날 일은 아니지 않겠느냐?"
"……."
좌백은 입술을 물었다.
지금 살펴보아도 단전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그런데 그것이…….
"알겠습니다."
좌백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래야 좌 사질답지!"
말과 함께 한효월은 일어섰다.
"종 소저, 좌 사질을 잘 부탁드리겠소."
"별말씀을,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인데요!"
종소교가 황급히 마주 그에게 예를 표했다.
그녀를 향해 미미하게 웃음 지어 보이던 한효월은 문득 좌백을 바라본다.
좌백도 그를 보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 만남은 이것이 마지막일런지도 모르겠다."
"사숙……."
"사람이란 늦고 빠름이 있을 뿐, 만나면 헤어짐이 정한 이치니 섭섭하게 생각할 것도 안타까워할 일도 없다. 부디 멀리서나마
풍운을 질타하는 너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마."
한효월은 그에게 웃어 보이면서 그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좌백은 그럴 수 없었다.
가슴이 무엇으로 쥐어짜는 듯 답답해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부디, 부디……."
말을 맺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한효월이 놓고 간 종이를 움켜쥐었다.
그 눈빛이 달라졌음을 종소교는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좌백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있는 것만 같은…….
* * *
밤이 되었다.
밤이 되면 동정호도, 하늘도, 사람도 모두가 잠이 든다.
하지만 악양성은 그렇지 않은 듯했다.
성내 관제묘(關帝廟).
성내에 있다고는 하지만 외진 곳에 있어서 빈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이다. 반쯤은 허물어져 퇴락한 빛이 역력하나 앞쪽은 멀쩡해서 낮에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든다. 그들을 맞이하는 도사들도 있었다. 그 도사들도 밤이면 앞쪽에서 잠이 든다.
그런데 불도 켜지 않은 그 관제묘의 후원.
거기에 한 사람이 있었다.
길쭉한 말상의 얼굴. 녹청색 도포를 입었다. 나이는 50쯤? 염소수염이 길게 뻗어 있어서 얼굴이 더욱 길어 보인다. 차가운 눈빛은 보는 사람의 심금을 얼려 버릴 힘을 가졌다. 그러나 그 눈도 지금은 불안하고 초조했다.
"도대체 왜 지금까지 안 오는 게야?"
그는 고개를 빼밀고 문밖을 건너본다.
누군가를 기다리는데 오지를 않는 모양.
불빛이 새 나갈까 두려운 나머지 불도 켜지 않았고 어디서 구해왔는지 두터운 담요를 창마다 둘렀다.
"망할!"
그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주변을 확인하고는 한쪽을 들췄다.
그러자 불빛이 새어 나왔다.
화덕이 하나 있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풀무였고 대장간의 화덕이었다.
그처럼 엄밀히 주위를 막은 것은 그 불빛이 새어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함인 듯했다.
"대체 어디 쓰는 물건인지 알 수가 없으니……."
그는 품속에서 보자기에 싼 물건 하나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그 무서운 자들이 탐을 내는 걸 보면 분명히 천하의 기보(奇寶)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말이지…… 대체 난 왜 한 번도 이 물건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일까?"
그때였다.
똑똑…….
낮은 문 두드림.
"……!"
그의 얼굴에 아연 긴장이 감돈다.
황급히 물건을 품속에 간직하고 문 옆으로 붙어 선다. 바람 소리나 옷자락 스치는 소리조차 나지 않으니 보기 드문 고수임에 분명하다.
살기를 드리운 그가 손에 공력을 운집하고 있을 때 문밖에서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뭘 해요?"
화가 난 듯한 음성은 뜻밖에도 여인의 것.
"왜 이리 늦었어?"
그가 문을 열면서 질책했다.
그래도 목소리는 어디로 새어 나갈까 저어하는 낮은 음성이다.
두터운 휘장을 젖혀주자 엉성한 문을 열고 한 사람이 들어섰다. 그 사람은 흑의를 입은 여인이었고 여인의 어깨에는 포대 하나가 메어져 있었다.
흑의여인은 신경질적으로 포대를 땅에다 내팽개치면서 말했다.
"이 빌어먹을 놈이 계집질하느라고 정신이 없잖아? 평소 가던 계집이 아니라 다른 계집에게 가는 바람에 찾아 헤매느라고 시간이 갔어요."
포대 속에서 얕은 신음 소리가 들렸다.
포대를 풀자 안에서 몸집이 작은 노인 한 사람이 굴러 나왔다. 혈도를 짚인 모양인지 꼼짝도 못하던 노인은 도포인이 혈도를 풀어주자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소리쳤다.
"누, 누구……!"
하지만 그는 채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입을 벌린 채로 굳어졌다.
"한마디만 더 하면 넌 죽는다. 너뿐만 아니라 네 가족들까지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 알겠지? 고개만 끄덕여!"
도포인에게서 무서운 기세가 느껴지자 왜소한 노인은 겁에 질려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무, 무슨 말씀이든지, 무슨 말이든지……."
"이걸 봐라. 네가 당대 최고의 장인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이게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알아내면 널 살려주겠다. 여기 도구와 화덕까지 준비했으니 허튼짓은 용납하지 않겠다!"
말과 함께 도포인은 손에 쥔 주머니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예! 예. 예……."
그는 연신 예예를 연발하면서 주머니를 열고 안의 물건을 꺼냈다. 검은빛이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한다.
"이, 이게 뭐에 쓰는 물건입니까?"
"명인이란 자가 그걸 모른단 말이냐? 어디다 쓰는 물건인지 알면 노부가 왜 네놈을 잡아온단 말이냐? 네놈이 명인이 맞긴 맞느냐?"
"소, 소인은 공예를 전문으로 하는……."
"제대로 살펴봐! 뭐든지 알아내지 못하면 네놈 목숨은 오늘로 없을 테니까……."
도포인이 음산히 위협하자 왜소한 노인은 황급히 손에 쥔 물건을 살피기 시작했다.
화덕을 가렸던 것을 치운 다음이라 화덕의 불빛이 일렁이면서 노인을 비추니 그 형상은 심히 괴기스럽다.
"으음……."
잠시 그것을 살펴보던 노인이 신음을 흘린다.
"뭐냐? 뭔지 좀 알아보겠느냐?"
"이런 물건이라면…… 학식 높은 선비들도 계실 텐데……."
"그 허접쓰레기 같은 놈들이 알긴 뭘 알아? 몇 놈에게 물어도 답을 아는 놈이 하나도 없어서 모조리 목을 분질러 죽이고 말았다!"
그 말에 노인은 미간을 찡그렸다.
"흐음…… 봉신지약을 어찌 일반 선비가 안다고 죄없는 자들을 죽인단 말인가?"
"봉, 봉신지약!"
도포인이 부르짖었다.
"안, 안단 말이지? 이게 뭔지 안단 말이지?"
"알다마다. 봉신지약! 길이 네 치 일곱 푼. 무게 다섯 근. 오금정동(烏金精銅)으로 만들어져 불에 넣어도 녹지 않으며 오직 절세고수가 내가의 삼매진화로서만 단련할 수 있는 기보지. 천하제일의 비밀과 관련이 되어 있으며 관련자가 아니라면 설사 운 좋게 가졌다 할지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물건이기도 하지."
노인에게서 술술 물건의 내력이 흘러나온다.
"너, 넌 누구냐?"
주춤 도포인이 뒤로 물러나면서 외쳐 물었다.
긴장된 모습이 역력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방금까지 겁에 질려 벌벌 떨던 그 노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술술 내뱉는 말은 일개 장인이 해댈 수 있는 수준의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태도는 또 어떠한가?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저, 저놈이 누구야?"
"나, 나도 몰…… 그냥 공방에 있는 것을 잡아온 건데……."
여인이 그의 곁으로 붙어 서면서 머리를 저었다.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왜소한 노인이 피식, 웃더니 천천히 봉신지약을 주머니에 담아 품속에다 넣으려 했다.
"가, 감히 네놈이 노부의 물건을 가로채다니!"
단혼장 섭생은 노해 노인에게로 달려들었다.
"필부는 죄가 없지만 보물을 가진 게 죄지……."
노인은 단혼장 섭생의 손이 자신을 치는 것을 보면서도 피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봉신지약이 든 주머니를 자신의 품속에다 넣으며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네놈이 감히……!'
단혼장 섭생은 속으로 이를 갈면서 손을 휘둘렀다.
그의 단혼장이란 이름은 그냥 생긴 것이 아니었다. 결코 이처럼 아무렇게나 얕볼 공력이 아닌 것이다. 상대가 심상치 않아 보여 잔뜩 긴장해 내심 다음 변화를 준비했던 단혼장 섭생은 그가 피하지 않자 내친 김에 전력을 다해서 노인의 가슴을 쳐버렸다.
펑!
"크윽!"
단혼장 섭생이 무서운 반진력을 이기지 못하고 손목을 움켜잡고서 비틀거렸다.
놀랍게도 그는 지독한 타격에 물러나야 했는데 정작 노인은 파리가 스쳐 지난 듯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그게 소위 단혼장이라는 건가? 한심한 놈들이 강호의 고수라고 설치고 있으니……."
노인이 혀를 찼다.
"다, 당신은 누구요?"
단혼장 섭생이 놀라 주춤주춤 물러나면서 물었다.
그때였다.
노인이 문득 고개를 좌우로 크게 돌렸다.
우두둑 소리와 함께 그의 전신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왜소한 모습이었던 그는 순식간에 당당한 체구로 탈바꿈했다. 검은 수염이 드리운 모습은 누가 봐도 당당하고 압도적이다.
"나는 남해에서 왔지. 들어본 적이 있나?"
그러자 단혼장 섭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서, 설마…… 남해용왕?"
"흐흐…… 그래도 귀동냥한 건 있나 보군. 맞다. 그나마 알아보는 것이 가상하니 시신만은 온전히 보존해 주마."
"도주해!"
말과 함께 단혼장 섭생은 반대쪽 벽으로 튀었다.
그곳은 두터운 휘장이 드리운 곳이었지만 실제로는 부서진 창문이 있는 곳이라 바로 밖으로 뛰쳐나갈 수가 있었다.
"하하…… 네 마음대로 갈 수가 있다면 천하십왕이란 신분을 세상이 다 우습게 여길 게 아닌가?"
노인, 남해용왕은 냉랭히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튀어가던 단혼장 섭생이 캑! 하는 소리와 함께 마치 거대한 손에 잡힌 파리처럼 허공에서 주춤하더니 훌쩍 날아가 활활 불을 피워 올리고 있던 화덕에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다.
"와아악!"
처절한 비명.
화덕에 전신이 묻혀 겨우 다리만 내놓고 허우적거리는 모습은 참혹했다.
"그대로 있었다면 시신은 보존해 줄 수 있었을 텐데…… 감히 본왕의 앞에서 도주하려 했으니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나?"
"으, 으으으……!"
입도 제대로 열지 못하고 흑의여인은 공포에 질려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이미 남해용왕이 쳐놓은 무형의 강기막에 걸려서 도주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다.
간단히 단혼장 섭생을 죽여 버린 남해용왕은 그녀의 모습을 보다가 가볍게 혀를 찼다.
"본왕의 신분으로 어찌 계집을 죽일 수야 있겠나? 게다가 본왕을 멀리 업고 오기까지 했으니 그 공을 봐서 살려주마. 가거라."
그가 손을 내젓자 여인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문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녀는 태풍에 휘말린 가랑잎과 같이 팽팽 돌면서 마당으로 굴러갔다.
"……!"
그녀를 던져 버리고는 천천히 문을 나서던 남해용왕은 흠칫, 그 자리에 굳어졌다.
한 사람.
달빛 아래 한 사람이 마당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는 수레에 깔린 쥐새끼처럼 널브러진 여인을 살펴보다가 혀를 찼다.
"쯧쯔…… 살려준다고 하더니 이렇게 집어 던져 전신의 근골이 다 문드러지게 만들어놓는단 말인가? 과연 악독하군! 악독해……."
그는 연신 혀를 찼다.
"누구냐?"
남해용왕은 심상치 않은 상대가 나타난 것을 알고 물었다.
그러자 상대가 고개를 들었다.
쏟아지는 달빛 아래 상대의 얼굴이 드러났다.
『대풍운연의』 제10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