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首 봉신지약(封神之중)
-놀라운 비밀
죽어도 죽지 않으니, 진실(眞實)은 안배에 드러나다
한효월과 유성은 다시 삼 일에 걸쳐서 남하했다.
전보다 더 먼 거리를 돌아가는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한효월이 정상인 상태라서 그 속도는 거의 비슷했다.
그렇게 해서 나흘이 흘렀을 때, 그가 도달한 곳은 막부산(幕阜山) 경내 초입.
이곳이라면 동정호에서 그리 멀지 않아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른다. 자연 조심스러울 수밖에.
밤낮없이 달려온 그들인지라 옷에는 먼지가 가득하고 행색은 꾀죄죄할 수밖에 없었다. 반짝이는 것은 눈밖에 없었다.
유성은 지친 모습이 역력하다.
"저기서 좀 쉬어갈까?"
한효월이 말했다.
그가 가리키는 곳은 길가에 세워진 주막이다.
주기(酒旗)가 펄럭이고 주막은 길가에 세워졌다.
그 옆으로 차양이 펴진 가운데 나무로 된 탁자 세 개. 나무 밑동을 썽둥 잘라놓은 통나무 의자가 놓여 있는 그런 전형적인 주막이었다.
"그, 그러죠!"
파김치가 된 유성이 반색을 했다.
유성은 책 상자까지 짊어져서 영락없는 선비의 종자였다. 한효월은 섭선 하나까지 사서 들고 있으니 유람을 나선 선비의 모습이다. 다만 먼 길을 온 듯 피곤한 모습이 드러나 보일 뿐이다.
"어서 오십셔∼ 뭘 드릴까여?"
종일 굶고만 살았는지 비쩍 마른 주막 주인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나이는 마흔쯤?
"뭐가 됩니까?"
"뭐든 다 됩니다. 만두, 소면. 술…… 다 됩니다."
"만두, 소면, 술 세 가지만인가요?"
"에헤헤…… 맞습니다! 그 세 가지 중에서 뭐든 됩니다. 특별 요리로는 오리 구이도 있습니다요."
주인이 뒷머리를 긁으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오리 구이 하나하고 만두, 그리고 술 한 병 주면 되겠소. 오래 걸리겠소?"
"아닙니다! 아니에요. 금세 됩니다! 어이, 어이∼ 들었지? 당장 만들어! 에헤헤…… 저희는 음식을 만들어두었다 팔지 않아서 시간이 좀 걸립니다. 좀만 기다려 주시면……."
주인이 탁자를 훔치면서 주방 쪽을 보면서 소리를 질렀다.
고개를 내민 뚱뚱한 여자.
아마도 주인의 부인이 주방일을 하는 것 같다. 음양의 조화란 참 묘한 것이다. 이곳도 예외없이 마른 남자와 사는 뚱뚱한 여인을 보다니, 라고 유성은 생각을 굴렸다.
그때 한효월이 물었다.
"청송곡(靑松谷)이 어디쯤인지 혹시 아시오?"
"청송곡? 청송…… 아, 그 나무꾼들이 모여 사는 곳 말인가요?"
"그렇소."
"거기라면…… 좀 깊은 곳이라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군요. 가끔 들르는 나무꾼들의 말을 들어보면 저 산 너머에 가서 고개 두엇을 넘어가면 푸른 소나무 숲이 둘러싸인 곳을 볼 수 있다는데 나무꾼들이 많으니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긴 선비께서 무슨 일로?"
호기심이 빛나는 눈으로 되묻는 주인이다.
"내 아저씨뻘 되시는 분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시면서 그곳으로 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길래 정말 거기 계신지 이번 여행길에서 한번 찾아뵈려고 하는 건데, 찾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소."
"흐음…… 벼슬하시던 분이 나무꾼이라?"
주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무꾼이 아니라 그 근처 절에 출가를 하셨다고 들었소."
"아하……."
그제서야 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햇! 빨랑 와서 가져가지 않고!"
천둥 같은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주방에서 예의 여인이 고개를 내밀고서 고함을 치고 있었다.
"화이고, 저눔의 마누라가 요 며칠 냅뒀더니 기가 살아가지고, 원…… 오늘 밤에 아예 쥑여 버려야지……."
기겁을 하고 펄쩍 뛰어 주방으로 달려갔던 주인은 투덜거리면서 양손에 음식을 들고 쫓아왔다.
"크크…… 쥑이기는, 네놈 양물이 제수씨 몸에서 힘이나 쓰겄냐? 번데기가 갉작거려 보니 간지럽기만 하지……."
누군가가 쿡쿡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언 놈이……."
얼굴이 시뻘게진 주인이 홱 고개를 돌리자 건너 탁자에 앉아 있던 장사꾼 차림의 사내가 이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러자 그와 같이 있던 사내 둘이 박장대소를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 이런 죽일 놈이! 너 오늘 명년 제삿날인 줄 알아라!"
주인은 노발대발해서 한효월 앞의 탁자에다 음식을 내려놓고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술병을 탕! 놓더니 냅다 달려갔다. 어느새 집어 들었는지 옆에 있던 몽둥이 하나를 들고 있었다. 금방 살인이라도 날 듯한 분위기였다.
"음, 무척 시끄러운 동네로군요."
유성이 난감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날 듯 한바탕 시끄럽던 그 자리는 이내 욕설과 웃음소리가 어우러져 주인과 객들이 한데 어울리는 자리가 되었다. 오가면서 서로 친구 사이가 된 사람들인 모양이다.
"저것도 사람 사는 모습이지……."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던 한효월이 중얼거렸다.
특별한 맛은 없었지만 먹을 만한 음식이었다.
원래 소식(素食)을 하는 한효월인지라 맛을 음미하듯 천천히 음식을 먹고는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일어섰다.
아직 해가 지려면 시간이 남아 있었으니 청송곡을 찾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터이다.
한효월의 나이 열 살가량이었으니 이미 십 년여가 지난 일이다.
사부와 그가 사는 곳으로는 아무도 찾아온 적이 없었다. 그런데 단 한 사람이 찾아온 적이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우곡으로 찾아온 것이 아니라 곡 밖으로 사부를 따라 나가서 만난 것이지만.
그 사람의 이름이 사해초부(四海樵夫)였었다.
"껄껄껄…… 이놈 영특하게 생겼구나! 네 사부를 졸라서 언제 이 아저씨에게 놀러 오너라! 네게 막부산의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마!"
말 그대로 나무꾼처럼 생긴 수염투성이 노인 한 사람이 한효월의 머리를 쓰다듬었었다. 커다란 도끼까지 등에다 메고 있으니 그가 나무꾼이라는 것을 누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막부산에 사세요? 나무꾼 아저씨?"
"으헛헛헛…… 이 내 몸의 이름이 사해초부이니, 어딘들 가서 나무를 못하겠느냐? 다만 차후 정착을 하게 되면 그곳에 하게 될 것이니 너는 청송곡으로 찾아오면 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고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하긴 십여 년이 흐르면서 한 번도 이야기가 된 적이 없으니 어찌 그것을 생각할 수가 있을 것인가.
그런데 사부가 불망초부라는 글자를 남겨두자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그 사람이 기억 속에서 떠올라 온 것이다.
사부와 같이라면 단 한 사람만을 만났었다.
어쩌면 그것 또한 오늘을 염두에 둔 사부의 포석이 아니었을까. 후일을 대비하기 위한.
왜 진작 그를 떠올리지 못했을까!
한효월은 길을 오면서 내심 계속해서 자책했다.
산에서 살았던 그들인지라 청송곡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말 그대로 푸른 소나무가 산을 가득 덮고 장관을 이루고 있으니 찾는 것에 어려움이 있을 리 없었다.
다만 산의 중턱을 넘어가는 곳이라서 산세는 제법 험했다.
깎아지른 절벽에다 계곡을 가로질러 쏟아지는 급류는 젊은 수룡(水龍)이 고함을 치면서 쏟아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런 곳에 어떻게 만들었는지 아슬아슬하게 사다리와 덩굴로 얽어서 다리를 만들었고 절벽의 바위가 무너져 떨어질 것을 대비하여 아름드리 나무를 베어내어 담[柵]을 만들어 길을 유지한다.
그렇게 해서 청송곡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어떻게 보자면 촉의 잔도(棧道)를 방불케 하니 이거야 누가 쳐들어와도 어떻게 공격해야 할지 난감한 천연의 요새였다.
녹림의 산채라 해도 이보다 대단할 리는 없을 터이다.
그러나 녹림과는 달리 이곳은 말 그대로 나무꾼들의 산채인지라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고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저녁때가 되기 전인데도 산속임을 말하듯 이미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좀 있으면 저 연기 저 너머로 서산에 지는 붉은 석양이 조화로울 것이었다.
"보기 좋은 곳이네요."
유성이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오는 내내 뭐 이런 곳이 있어라고 투덜거리던 그였다. 그러나 이 광경을 앞에서 보자 절로 감탄하고 마는 것이다.
"그렇구나."
산채는 대략 4, 50호 정도에 이르러 규모는 작지 않았다.
한효월과 유성이 천천히 걸어서 산채에 이르자 개들이 짖었고 덩치가 우람한 산 사람 하나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떻게 오셨소?"
그가 한효월을 위아래로 내려다보면서 물었다.
너희들 같은 사람이 올 곳이 아니라는, 무언의 시위라고나 할까.
"여기 사시는 분이오?"
한효월이 태연히 묻자 40대 장한인 그는 한효월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만, 누구를 찾아오셨소?"
"사해초부란 분을 찾아왔습니다."
그 말을 듣자 장한의 안색이 조금 달라졌다.
"사해초부 어르신을 말씀이오?"
"그렇습니다. 그분께서 찾아오라고 말씀하셔서…… 조금 늦었지만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계십니까?"
"허…… 그렇군요. 어쩌나?"
장한의 난감한 태도에 내심 가슴이 덜컥한 한효월이 급히 물었다.
"무슨……."
"사해초부 어르신께선 이미 돌아가셨소."
"뭐라구요?"
한효월의 안색이 달라졌다.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무, 무슨 소리예요? 그분이 왜 돌아가신단 말예요?"
유성이 달려들듯이 물었다.
"사람이 죽는 게 정해놓고 죽겠소? 우리도 그처럼 정정하시던 분이 돌아가셔서 늘 가슴이 아팠지만 이미 6년이나 지난 일이니
누가 뭐라고 하겠소?"
"그분의 묘소가 있습니까?"
"묘소? 묘소를 찾아가 보겠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여기까지 왔으니, 묘에 참배라도 하고 가야지, 어떻게 그냥 갈 수가 있겠습니까? 저에게 한번 찾아오라고 하셨었는데
미리 찾아오지 못했으니 사죄라도 드리고 가야지요."
"으음……."
장한은 잠시 고민하는 눈치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소. 여기서 잠시 기다리시오. 내 가서 촌장 어른과 한번 상의를 해보고 오겠소. 이놈들, 어서 돌아가지 못할까!"
그는 뒤를 돌아보고 눈을 부라렸다.
어느새 애들 대여섯이 몰려들어서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아이들이 놀라 우르르 흩어졌다. 애들 뒤에서 한효월을 바라보고 있던 개들이 놀라 짖어댔다.
한효월이 잠시 서 있자 안으로 사라졌던 장한이 나타났다.
"잠시 안으로 드시겠소? 촌장 어른께서 모시라는데."
"그러지요."
한효월은 그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목책 안으로 십여 채의 집이 자리하고 그 뒤로 다시 집들이 있는 구조라 산의 계곡을 따라가면서 지은 태가 역력하다.
촌장의 집은 그 집들 중 안쪽에 위치해 있었다.
통나무로 지은 집은 밑은 비어 있고 조금 들어 올려서 위에다 지은 루(樓)의 형태다. 그렇다고 이층이라기보다는 통나무 계단을
놓아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모양이었다.
장한의 안내를 받아 들어가니 50대 후반의 노인이 대청 탁자에 앉아 있었다.
대청이라고 해야 통나무집 안쪽이니 그리 넓지는 않고 그 대청의 좌우와 뒤로는 문이 하나씩 있어서 방이 셋 정도는 있는 듯했다.
나무꾼 출신임을 말하듯 무명옷을 입은 체구는 단단해 보였다.
얼굴이 구릿빛으로 그을은 촌장은 한효월이 들어가도 앉은 모습 그대로 그를 살펴보기만 할 뿐, 입을 열지 않았다.
"모셔왔습니다."
"자넨 그만 가보게."
"예."
장한은 촌장이 손을 젓자 밖으로 나가고 문을 닫았다.
닫되, 반쯤 닫아 방 안의 동정을 밖에서 볼 수 있도록 해둠을 잊지 않아 외인에 대한 경계심을 비친다.
"어른을 찾아오셨다고?"
촌장이 한효월을 바라보면서 묻는다.
"그렇습니다."
"무슨 까닭으로?"
"오래전에 소생이 살던 곳으로 놀러 오셔서 꼭 다녀가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번에 밑으로 내려오면서 그때 말씀대로 한번 뵙고
가려고 왔습니다."
"흐음…… 그분은 이미 돌아가셨는데, 굳이 묘소를 찾아가야만 하겠소?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만, 안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건 약소합니다만……."
한효월은 은자를 꺼내 탁자에다 올려놓았다.
"넣어두시오. 그 어른은 이곳을 만든 분이신데, 그분의 손님에게 이런 걸 받는다면 말이 안 되지. 흐음…… 혹시 실례지만 공자의
존명을 물어봐도 되겠소이까?"
"소생은……."
한효월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름을 밝혔다.
"한효월이라고 합니다."
"한…… 효월…… 한 공자이시구료."
촌장은 그의 이름을 음미하듯 잠시 되뇌어보더니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무식한 나무꾼의 느낌보다는 역시
오래 산 사람의 경험과 연륜이 묻어 나오는 태도였다.
"혹시…… 그분께 후인은 없었습니까?"
"후인이라?"
"그렇습니다. 후손이 없었던가를 묻는 겁니다."
"글쎄……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돌아가셨을 때까지 늘 홀로 사셨던 분인지라…… 음, 어쨌든 꼭 가보시겠다면 따라오시오."
말과 함께 노인은 일어나 앞장섰다.
한효월과 유성은 하릴없이 그 뒤를 따라야 했다.
그냥 돌아설 수가 없어서 따르긴 하지만, 묻기도 했지만, 그가 죽고 없는 마당에 그의 묘소를 찾아가 본들 또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한 가닥 단서가 이렇게 허무하게 끊기고 말 줄이야!
사해초부의 묘는 산채의 뒤쪽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묘는 다 여기에다 쓰는 듯 아래쪽으로도 적지 않은 숫자의 묘가 보인다.
사해초부(四海樵夫) 곽공(郭公)이라는 비석의 글자가 뚜렷이 보인다.
그 아래로 몇 글자가 더 있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야 명백한 것이 아니랴.
그처럼 침착한 한효월도 막상 묘를 목도하자 맥이 빠졌다. 단서는 사해초부의 죽음과 함께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한효월은 잠시 시간이 흐른 후에, 묘를 향해 정중히 절을 올렸다.
"진작 찾아뵈었더라면 한번 뵈올 수 있었을 것을……. 이런 일로 찾아뵙게 될 줄이야, 소생이 어찌 생각이라도 했겠습니까? 이도
하늘의 뜻인 듯하니……."
한효월은 길게 읍하고 예를 마쳤다.
그때, 한효월의 낙백상혼(落魄喪魂)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촌장이 안쓰러웠던지 물었다.
"혹시, 그분께서 찾아오라고 하시면서 맡기신 물건 같은 게 있소이까?"
"물건?"
"그렇소. 혹시라도……."
"……."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한효월은 품에서 죽간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건네주자 촌장은 그 죽간을 내려다보면서 눈을 빛냈다.
"정말…… 정말 사해간(四海簡)이구나."
그는 감회가 서린 눈빛으로 그 죽간을 쓰다듬었다.
그의 태도가 심상치 않자 한효월은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죽간을 쓰다듬고 있던 촌장은 길게 숨을 내쉬며 숨을 가다듬더니 말했다.
"실례했소. 나는 곽도(郭島)라 하고, 사해초부께서는 나의 종조부(從祖父)가 되시오."
"그, 그럼?"
"그 어른께서 언젠가 이 사해간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에게 주라고 맡기신 물건이 있소."
"그렇습니까?"
더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지옥 속에서 부처님을 만난 듯한 기분이었다.
"아니, 그러시다면서 왜 아까는?"
유성이 참지 못하고 항의하듯 물었다.
촌장 곽도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면서 조금 더 살펴보기 위함이었다네."
무슨 의미인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다. 그들이 과연 말을 해도 괜찮을 사람인가를 더 따져 보았다는 의미다.
"그 물건은 저 바위 아래에 있소."
촌장 곽도가 묘에서 7, 8장가량 떨어진 바위를 가리켰다.
"저 바위입니까?"
"그렇소. 종조부께선 6년 전 잠시 밖에를 다녀오셨었소. 그때 심한 부상을 입고 돌아오셔서……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며칠 뒤에
돌아가셨소. 숨을 거두시기 전에 나에게 이 자리에 묘를 만들고, 혹 사해간을 가지고 누가 찾아오면 저 바위 아래에 있는 물건을
가져가도록 하라고 말씀을 하셨소이다."
좀 전에는 그냥 넘겼었다.
하지만 6년 전이라면 한효월의 사부인 경월선인이 무우곡을 떠난 시기와 일치한다.
그도 어딘가로,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서 떠났다가 죽었단 말인가.
"……."
한효월은 무거운 표정으로 시선을 돌려 그 바위를 바라보았다.
소위 말하는 집채만한 바위다. 다만 조금 다른 점은 묻혀 있는 것이 아니라 놓여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뿐이다.
"움직일 수 있겠소?"
"해보지요."
한효월이 바위를 향해 다가가자 촌장 곽도는 흐음, 하는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도와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눈치임을 유성은 알아보고 속으로 웃음을 참지 못했다.
'어디 얼굴이 어떻게 변하나 한번 볼까?'
한효월은 바위 앞으로 다가가 양손을 바위에다 댔다.
바위를 부수거나 굴려 버린다면 일은 간단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바위를 굴린다면 바위가 아래로 굴러가면서 천둥이 치는 요란한 소리가 날 것이었다.
그게 그리 바람직한 일일 리는 없다.
그가 공력을 운기하자 바위가 들썩거리더니 천천히 위로 들어 올려졌다.
"으음……."
부지간에 촌장 곽도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한효월이 저 바위를 저처럼 쉽게 들어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이 도와줘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저처럼 간단하게 들어 올리다니!
'저 나이에 상상키 어려운 고수로구나!'
바위를 들어 올리자 그 밑에 쇠로 만든 철궤가 하나 묻혀 있었다.
"꺼낼까요?"
유성이 빠르게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한효월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성은 철궤를 꺼냈다.
구궁…….
미미한 진동과 함께 바위는 다시 그 자리에 놓여졌다. 누군가가 유심히 보지 않는다면 바위를 움직였는지조차 알기 힘들었다.
촌장 곽도는 묘한 눈빛으로 철궤를 보았다.
그도 안에 뭐가 있는지는 모르니 궁금할 것이다.
한효월은 그에게 포권을 했다.
"폐를 끼쳤습니다."
"아니, 그냥 가시겠단 말이오?"
"예,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그럴 수야! 여기까지 온 손님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소? 가십시다. 저녁이라도 한 끼 대접해서 보내야지, 안 그러면
종조부님의 호통을 어찌 감당할 수가 있겠소?"
"죄송합니다. 일이 바쁜 데다가 저희가 머물게 되면 혹여, 피해가 갈런지도 몰라서 사양하는 것이 옳을 듯싶습니다."
한효월이 완곡하게 거절했다.
"피해? 헛허…… 그 무공으로 겁나는 것이 있단 말이오?"
"소생의 무공이야 뭐 대단한 게 있겠습니까? 하지만 산채에는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있으니, 만에 하나 그들에게 피해가 간다면
제가 무슨 낯으로 후일 사해초부 어른을 뵈올 수 있겠습니까?"
"허어……."
한효월의 말에 상황이 그리 간단치 않음을 눈치 챈 촌장 곽도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럼 더 이상 잡지는 않겠소이다. 멀리 배웅치 않겠으니 부디 살펴 가시오."
그의 얼굴에는 아쉬운 빛이 역력했다.
순박한 인심이다. 밥 한 끼 대접하지 못하고 보내는 그 마음이 느껴지니…….
한효월은 그에게 포권해 보였고, 그사이에 유성은 철궤를 등에 지고 있던 책 상자에다 담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그 자리를 떠났다.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있던 촌장 곽도도 그 자리를 떴다.
밤바람이 제법 서늘하다.
건량을 씹으며 유성이 중얼거렸다.
"아무도 모를 건데…… 그냥 밥이나 먹고 올 걸 그랬나 봐요. 이노무 건량은 매일 씹으니 어금니가 다 아려요."
"누가 칼 들고 쫓아오지 않으니 심심하냐?"
한효월이 피식, 웃었다.
머리 위로는 달이 휘영청하다.
날이 맑아 밤이라 해도 달빛이 밝다. 산속이라 하나 그들은 어둠을 그리 느끼지 못했다.
산채를 떠난 한효월은 바로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오히려 산을 내려가는 듯하다가 더 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고 앉은 상태였다. 주막에서 요기를 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유성은 앉자마자 다시 건량을 꺼내 씹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은 방금 한효월에게 건네준 철궤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철궤는 오랜 세월 묻혀 있었음을 의미하듯 녹이 조금 슬어 있었다. 길이는 한 자에 조금 모자라는 듯 보이고 너비는 반 자도 채 되지 않았다.
자물쇠가 있었지만 한효월이 비틀자 그대로 떨어졌다.
철궤가 열리자 안에는 가죽 주머니 하나와 봉서가 들어 있었다.
<애자 효월 친전(愛子 曉月 親展).>
봉서 위에 쓰인 글자는 그가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부의 친필이다.
가죽 주머니와 봉서를 번갈아 보던 한효월은 이렇듯 고심하여 자신에게 글을 남긴 사부의 고뇌를 느낄 듯하여 가슴이 무거웠다. 이미 오래전에 남긴 듯 편지는 빛 바랜 상태였다.
<효월 보거라.
네가 여기까지 와서 이 글을 보게 된다면, 네가 세상에 나왔으며 또한 세상사의 시비에 깊숙이 관여하게 되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결국 너를 시비에 휩쓸리게 하였으니 네 부모에게 무슨 낯으로 사죄하여야 할는지 알지 못하겠구나…….>
'부모?'
한효월은 깊은 주름이 잡힌 눈으로 사부의 편지를 보았다.
크면서 지금까지 그는 스스로가 버려진 고아로 알았었다. 사부가 주워다 기른 것으로. 하지만 사부가 남긴 금낭에서나 지금 글에서
본다면 그에게는 신세 내력이 따로 있는 것 같았다.
과연 그것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용화회의 호법존자 중 하나다.
용화회에는 세 명의 호법존자가 있으며 그들은 용화회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감시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만에 하나
용화회가 세상에 드러나거나, 용화회의 회원으로서 세상사에 관여하는 자가 있다면 집법존자와 함께 그를 논죄(論罪)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용화회가 지닌 바 힘은 세상을 덮고도 남음이 있어 누구도 그 힘을 악용할 수 없으며,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누구도 그 힘을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이제 그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해서 나는 그 일을 막고자 네 사형을 세상에 내려 보냈다.
하지만 네 사형의 능력으로는 그것을 막기 힘들 것임을 나는 안다. 저들은 너무 강하고 너무 교활하니 일개인이 그 행사를 어찌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 사형의 능력이라면 그들을 표면에 드러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니, 그들을 추적할 실마리를 찾을 수는 있게 될 것이다.>
'사형이 겨우 미끼였더란 말인가?'
여기까지 읽던 한효월은 내심 신음한다.
천하를 호령하던 그 위엄으로서도 미끼밖에 되지 못했다면 대체 적은 어떤 존재라는 것일까?
<그들이 모습을 드러낸다면 용화회가 움직이게 된다.
그들이 용화회와 관련이 있다면 용화회는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호법존자가 불법(不法)을 판정하면 집법존자가 움직여야 한다.
그렇게 되면 용화회의 회원이라면 누구라도 그 명을 받아야만 한다. 그것은 바로 봉신지서(封神之誓)에 바친 용화회 회원들의
서원(誓願)인 것이니, 누구도 그것을 거역할 수 없다. 만에 하나 거역하는 자가 나타난다면 용화회 전체가 일어나 그를 공격하리니
설사 당금 천하를 지배하고 있는 조정이라 할지라도 버틸 수 없다.>
엄청난 자부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효월은 대체 그 자부심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가 궁금했다. 사부가 이런 글을 남겼다면 그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런
용화회가 과연 어떤 모습인지 더 궁금한 그이기도 했다.
<너의 능력이라면 지금쯤 용화회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았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내가 너에게 소식을 보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간에 흘러 나간 용화회의 힘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세상을 통틀어 가장 강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열 사람.
천하십성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현세지선(現世之仙)으로서의 서원을 세우고 봉신의 서를 맺으면서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모여
용화회가 결성되었다. 그들 또한 천하십성과 더불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여 서원을 세웠고, 세월이 흐르면서 필연적으로
하나의 규율이 정해졌다.
그들의 힘이 너무 거대하므로 결코 세상사에 간섭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만에 하나, 그들이 천기를 누설하거나 간섭을 하게
된다면 모든 것이 그들의 의도 하에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다.
용화회에 모여든 사람들은 너무 거대했고 너무 강했다.
그것은 단순히 무공의 고수들만이 아니라 각 분야의 최고가 모두 모여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천하십성이 존재할 때에는 누구도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관심조차 없었다. 세속의 권한이야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가질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그들이었으니 그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천하십성이 신선이 되기 위해서 사라진 다음에 발생했다.
천하십성이 다시 돌아와 그 배움으로 자신을 끌어주기를 기대하고 있던 사람들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어 죽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동요가 일었다.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무작정 기다릴 것이 아니라 찾아 나서야 한다는 사람들이 생겼고 그것은 이내 규율을 깨뜨릴 지경에 이르렀다. 그들이 세상에 나서면서부터 용화회는 이미 천외천(天外天)이 아닌 것이다.
그것을 막고 있는 사람들은 자연히 신변이 불안해졌다.
그들이야말로 용화회가 세상에 나서는 것에 대한 결정적인 걸림돌이었다. 집법존자가 숨어들고 호법존자가 모습을 감추었다. 그들의 행방은 누구도 알지 못했고 그로 인해 용화회의 회원들은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나 또한 그러한 이유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이젠 더 이상 숨어 있을 수 없게 되었다.
호법존자와 집법존자들 간의 은밀한 연락이 끊어지면서 그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호법존자나 집법존자를 공격했다면 이미 모든 준비가 끝이 났다는 것. 이제 더 이상 숨어 그들을 견제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졌다. 해서 나는 강호로 나가 그들의 행태를 조사하여 그들을 단죄할 수 있을지 알아보고자 한다.>
'이렇듯 고심을 하고 있었음에도 적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면 정말 대단한 자들이 아닐 수 없겠구나!'
한효월은 내심 신음했다.
허를 찔리는 것이야 그렇다고 하지만 준비를 하고 있음에도 흔적을 찾을 수 없다면 어둠 속의 적은 정말 대단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암중에 걸림돌인 호법존자 등을 없애기까지 한다면…….
만에 하나 제천교의 뒤에 용화회가 있다면 그 힘은 더욱 거대할 것이다.
천기선생이 그 힘을 등에 업고 세상을 뒤집겠다고 한다면 천하는 다시 한 번 병란(兵亂)의 소용돌이에 빠져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허우적거려야 할 것이었다.
어쩌면 다시금 천하를 호령하는 대몽고를 보게 될런지도.
<용화회의 조직은 특이하다.
일단 용화회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출가할 때처럼 지난날의 모든 고리를 버려야 하고 자신의 신분을 밝힐 수 없다. 파당을 짓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얼굴 또한 가면을 써야 하므로 서로를 알지 못한다. 그것은 호법존자를 비롯한 누구라도 마찬가지였다.
그 규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바로 용화회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천하십성뿐이다.
그런 까닭에 나로서도 그들을 조사하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물론, 그들 또한 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을 알아내기는 쉽지 않았을 터이지만 손을 쓰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 이미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 세력에 가입이 되어 있을 것이 분명하다.
서로를 모른다고는 하지만 오랜 세월 접촉하다 보면 친분이 생기는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네가 이 글을 본다는 것은 나를 비롯한 저지 세력이 무너졌음을 의미한다.
당세에는 어느 누구도 그들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뿐, 그것은 너에게 남긴 봉신지약(封神之중)을 가지고 천하십성이 있는 봉신방(封神榜)을 찾아가는 것이다.>
"봉신지약이라고?"
한효월은 악연실색, 얼굴을 들었다.
그는 부지간에 철궤 속에서 봉서와 같이 나온 가죽 주머니를 보았다. 사슴 가죽인 듯 보이는 허름한 가죽 주머니는 그를 보고 소리 내어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뭘 그렇게 보나? 궁금하면 열어보지?
한효월은 떨리는 손으로 가죽 주머니를 열었다.
안에는 일곱 치가량의 크기를 가진 동갑(銅匣)이 하나 있었다.
달깍.
자물쇠가 없는 동갑을 열자 오금빛이 번뜩인다.
길이가 반 자가량의 열쇠 생김의 물건.
용의 형상을 닮았으되, 용은 아니다. 무엇인지 알기 힘든 묘한 생김으로 휘어 올라간 형상의 그 열쇠 모양의 중앙에는 봉신(封神)이란 글자가 유난히 선명하다.
"봉신지약……."
한효월은 그것을 보며 신음을 흘렸다.
제아무리 그라고 할지라도 이 마당에 신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옆에서 못 본 척하고 주변을 살피던 유성도 한효월의 중얼거림에 토끼눈이 되어 한효월의 손에 들린 봉신지약을 보고는 입을 딱 벌렸다.
"그, 그게 워째 고기에 있답니까?"
더듬는 말이 제대로 표현조차 되지 않는다.
유성도 당시 봉신지약을 보았었기 때문이다.
그날 그 향적사에서 한효월의 손에 들렸던, 불상의 뱃속에서 나왔던 그 봉신지약이 대체 어떻게 지금 한효월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인지 유성은 물론이고 한효월 본인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만에 하나 그 봉신지약이 가짜라면 결코 남해용왕이나 서역법왕 같은 사람들이 속아 넘어갈 리가 없었던 것이다.
한효월이 유성의 말에 대답할 겨를이 있겠는가.
그는 다시 사부가 남긴 글을 읽었다.
<봉신지약은 천하십성이 수도한 봉신방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단서다.
봉신방을 찾게 된다면 누구도 그에 거역할 수 없다.
하지만 네게 남겨준 봉신지약 하나만으로는 봉신방을 찾을 수 없다. 다른 하나의 봉신지약이 있어야 봉신지약은 비로소 봉신지약의
역할을 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
그렇다면 지난날 그가 보았던 것과 지금 그가 보고 있는 이 봉신지약이 모두 진짜라는 것인가?
<봉신지약은 음양의 두 개다.
네게 준 것이 음인지 양인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두 개가 합쳐져야 비로소 봉신방의 위치를 알 수 있으며, 설사 봉신방의 위치를 알 수 있다고 할지라도 두 개가 함께 있지
않으면 봉신방을 열 수가 없다.
현재로써는 그것이 비석과 같은 것인지 아닌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지만…….>
한효월은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처럼 귀중한 봉신지약을 왜 천기선생 공일도가 군웅들에게 휴지처럼 내던졌던 것인지.
그것은 단순히 군웅들을 유인하여 몰살하기 위한 차도살인지계가 아니었다. 봉신지약을 내놓으므로써 또 하나의 봉신지약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던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그림이 맞추어지자 모든 것이 선명하다.
<남해초부는 나의 유일한 친구였다.
그는 용화회의 사람은 아니지만 강호상의 숨은 기인이었었고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믿을 만한 사람이니 그에게라면 봉신지약을 맡길 수 있어 여기에 마지막 희망을 남겨두기로 하였다.
제자야, 네가 해야 할 일은 너무도 힘들다.
네가 여기서 그만둔다고 한들 누가 뭐라고 하겠느냐?
외유내강한 네 성품을 내 잘 아니 이런다고 네가 그만두지 않을 것도 잘 안다. 네게 이런 글을 남기면서 이런 말을 하니 이 사부도 어이가 없다. 하지만 이 사부는 네가 그 무서운 자들과 맞설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프고 미안하여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중략)
만약 변을 당하지 않았다면 네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를 찾아가 상의를 해보거라.
그의 이름은…….>
기나긴 사부의 편지는 끝이 났다.
마지막에 남겨둔 이름.
그 뜻밖의 이름 하나 외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