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首 불망초부(不忘樵夫)
-적을 피하다
추억(追憶)은 살아서 현세로 돌아오다
"누구요?"
한효월은 천천히 몸을 돌리면서 물었다.
그 돌리는 행동과 함께 손에 들고 있었던 봉서는 품속으로 넣고 있었다.
곡 내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문밖에는 유성이 지키고 있었다.
누가 쳐들어온다면 유성의 무공이라면 기척이라도 들렸어야 했다. 그런데 이렇듯 아무런 소리도 없이 자신의 뒤에 나타난단 말인가? 가슴이 덜컥! 하고도 남을 뜻밖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태도는 침착했고 누가 보면 태연자약하다고 감탄할 만했다.
몸을 돌리자 연단실 입구에서 한 사람이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백발의 노인이다.
동파건(東坡巾)을 쓰고 학창의를 입었다.
손에는 부채 하나를 들고 유유자적한 모습이라 마치 시종을 거느리고 유람을 나온 노선비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를 보는 순간에 한효월은 다시 보기 힘든 강적을 만났음을 직감할 수가 있었다.
동안학발(童顔鶴髮)이라는 말이 잘 어울릴 그 노인은 노인의 눈답지 않은 청수한 눈빛으로 한효월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동양(東陽)의 고제(高弟)답구만. 그 나이에 불가능한 성취를 이루었군. 대단해, 대단하이……."
그는 친구의 후대를 본 듯 아주 자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뉘십니까?"
한효월이 다시 물었다.
"나? 노부는 선무기(宣无奇)라고 하지. 들어본 적이 있나?"
"들어본 적이 없군요."
"음, 자네 사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단 말이지? 그런 섭할 데가!"
그는 정말 섭한 듯이 혀를 끌끌 찼다.
말을 하면서 그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밖에 있던 아이는 어떻게 하셨소?"
한효월이 안색을 굳히며 물었다.
"하하, 후생소배에게 노부가 어찌 독수를 쓰겠나? 그저 잠시 재웠을 뿐이니 밖으로 나가 깨우면 될 것이네. 가보게나."
그는 한효월이 지나가라는 듯 조금 옆으로 물러났다.
"여긴 어떻게 들어오셨는지? 이곳은 소생의 사부께서 거처하시던 곳이라 폐쇄해 두었었는데, 문을 깨뜨린 것은 당신입니까?"
그 말에 노인은 미간을 찡그렸다. 곤란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 점은 미안하네. 문이 안 열려서 조금 힘을 과하게 썼더니 문이 깨지고 말더군. 너무 오래 닫혀 있어서 그런지…… 나이가 들면
힘 조절이 힘들어서 말이지……."
그의 말에 한효월은 내심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내부로 들어와 숨어서 자신을 지켜보았다는 의미인데, 그것을 알지 못했다면 상대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 알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이다.
난잡하게 사방을 어질러 놓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는 대강 살펴보아도 먼지 하나 이상한 것을 놓치지 않을 안목을 지녔고,
그것에 대해서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신도 용화회의 사람입니까?"
한효월의 말에 노인은 눈을 크게 떴다.
"호오, 용화회를 아나?"
그는 미간을 찡그렸다.
"하긴, 요즘이야 쓸데없이 아는 인간들이 많은 세상이니 동양의 제자가 아는 것이 뭐 그리 이상할 것이 있겠나? 이리 주게."
그가 손을 내밀었다.
"……."
한효월이 그를 바라보자 그가 미간을 찡그렸다.
"옛 친구의 제자이니 내 어찌 아이들을 데리고 괴롭혔다는 말을 듣겠나? 좀 전에 향로에서 꺼낸 것을 내게 준다면 노부는 너를
괴롭히지 않으마."
그의 온화하던 얼굴에 위엄이 어렸다.
단지 그것뿐임에도 강한 기세가 절로 느껴진다.
"당신은 선배를 자처하면서도 염치를 모르는군요?"
"뭐라?"
"그렇지 않다면 뭡니까?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탐해 후배를 핍박하고 있으니 어찌 염치를 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으으음…… 네가 감히 노부를 훈계하려는 게냐?"
노인이 눈을 부릅떴다.
"선배로서 선배답지 못한 행동을 하니 충고를 드리는 것일 뿐."
"안 되겠군! 내 동양이 제자를 잘못 가르친 벌로 훈계를 할 밖에."
말과 함께 노인은 한 걸음을 한효월에게로 다가왔다.
순간 그의 손에 들렸던 섭선이 하나로 합쳐지더니 불쑥, 앞으로 날아들었다.
한효월은 일찍이 소용왕 부해교가 펼친 선초(扇招)를 본 적이 있었다. 무림일절이라고 불릴 만했다.
하지만 그것과 이것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었다.
슬쩍, 내민 듯한데 섭선은 한 자루의 판관필처럼 한효월의 미간을 향해 날아왔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번쩍 하는 사이에 한효월의 미간을 뚫고 지나 버릴 정도였다.
그림자를 그 자리에 남겨두고 반 바퀴쯤 몸을 돌린 한효월은 한소리 호통과 함께 손을 들어 섭선을 든 노인의 팔을 내려쳤다.
마치 밤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호오?"
감탄인지 경호성인지 모를 소리를 흘리며 노인은 손을 살짝 움츠리는 사이에 섭선을 쫙, 펴면서 그 기세로 오히려 한효월의 손을 잘라 버리려고 했다.
한효월은 안색이 급변하여 팔을 거두면서 뒤로 물러났다.
"핫하하…… 세상에서 아무리 위세를 떨치는 무공이라 할지라도 용화회 내에서는 한낱 잡기에 불과하니, 너는 오늘 하늘 밖의
하늘을 보게 될 것이다!"
노인은 낭랑히 웃으며 바람처럼 한효월을 덮쳐 갔다.
도무지 변화라던가 아니면 현란한 움직임 따위가 없었다. 그저 섭선을 접었다 폈다 하는 단조로운 형태로 찔러오기만 하는데
도무지 피할 방법이 없었다.
한효월은 일시에 승기를 놓치고 물러나기에 급급했다.
강호에 출도하여 그의 무공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져서 이처럼 일방적으로 몰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좋아, 이제 내놓거라!"
노인이 껄껄 웃으며 섭선으로 한효월의 가슴을 헤집었다. 그대로라면 한효월의 가슴이 갈라지거나, 아니면 거기에 넣었던 봉서가
튀어나와야만 할 것이었다.
물러날 곳도 없었다.
"핫하…… 넌……!"
의기양양하게 한효월을 몰아붙이고는 웃음을 터뜨리던 노인의 안색이 달라졌다.
구석에 몰린 한효월이 한쪽 발을 구르자 막 앞으로 발을 내밀던 노인의 발 밑이 들썩 위로 솟구쳤던 것이다.
바닥에는 긴 장대가 몇 개 놓여져 있었는데 그중 하나를 한효월이 발로 쳐 올렸기 때문이다.
장대의 끝을 누르면 그 반대쪽이 올라감은 너무도 당연한 일.
"흥! 이까짓 잡술로 감히……."
노인은 코웃음 치는 순간에 발에 공력을 가해 신형을 안정시키면서 더 빠르게 섭선을 찔러갔다.
이미 공력을 발동한 듯 섭선에서는 무서운 예기가 칼날과 같이 뻗어나고 있었다.
그 공력은 놀라워서 연단실 전체가 그의 섭선의 장악 하에 들었다.
구석에 몰린 한효월은 정말 피할 곳이 없었다.
게다가 노인의 일격은 이미 살의를 품고 있었다.
그런데, 노인이 발에 힘을 주자 그 장대의 가운데가 뚝! 부러졌다. 힘주어 장대를 누른 노인의 신형이 조금 앞으로 기우는 듯했다.
그런 노인의 섭선을 향해 한효월이 조금 앞으로 나서면서 손을 쳐냈다.
손으로 섭선의 진격하는 기세를 막아내려는 것이다.
"핫핫하…… 그까짓 걸로!"
코웃음을 치던 노인의 안색에 경악이 서렸다.
붉은 빛이 번쩍 하더니 쾅! 하는 폭음이 일었다. 놀랍게도 한효월의 손에서 무서운 지력이 쏟아져 그의 섭선을 쳐낸 것이다.
그럼에도 섭선은 완전히 튕겨 나간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섭선을 뒤집어서 다시금 한효월을 휘감아 버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섭선을 막아낸 한효월은 이미 손을 거두고서 앞으로 번개처럼 전진한 뒤였다.
그리고 그의 손은 이미 노인의 가슴을 후려치고 있었다.
쾅!
그 폭음은 처음 그가 섭선을 수인지력으로 치던 것과 같은 순간에 일어났다. 도저히 막아낼 겨를이 없었다는 의미다.
설마 하니 그처럼 몰리던 한효월이 맨손으로 섭선을 막아낼 능력이 있으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었던 그였다.
그런데다가 그 찰나간에 역습을 해올 것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의 가슴을 친 이 웅장한 역도(力道)는 또 어떠한가!
"우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는 뒤로 튕겨져 나갔다.
"게 서시오!"
한효월은 차갑게 소리치면서 그를 뒤쫓아 몸을 날렸다.
과단성있는 그였다. 처음부터 그는 상대의 무공이 쉽지 않음을 계산하고는 약세를 보여 상대를 유인했던 것이다.
상대가 아무리 미리 와서 이곳을 둘러보았다 한들, 장소적인 면에서 그곳에서 살았던 한효월보다 나을 수야 없다.
그런 장소적인 이점에다 결정적으로 노인은 한효월의 능력을 너무 과소평가했다.
하기야 그는 그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도록 한효월은 처음부터 그를 유도하고 있었으니 그런 심모(深謀)를 노인이 알아차릴 수야 없는 일이었다.
한효월을 처음 본 사람이라면 설마 하니 그 나이에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를 똑똑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종종 범하는 함정에 노인도 예외없이 빠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노인은 피를 토하면서 전력으로 달아났다.
한효월이 그처럼 무섭게 쫓아올 것 또한 그의 예상에 없었던 일이다.
'저눔이 날 정말 아예 죽이려고 작정을 했구나!'
가슴이 서늘해진 노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죽을힘을 다해서 달아났다.
처음 나타났을 때의 위세를 생각한다면 한심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는 일이기도 했지만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야 머리끝이 곤두설
일이었다. 대체 뭐가 잘못되어 이렇게 되어버린 것인지 그는 돌아가서도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고민을 해야 할 것이었다.
얼마나 급하면 그는 피진거의 문을 나서면서 그 옆에 쓰러져 있는 유성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죽어라 도주를 할 뿐이었다.
한효월이 그의 뒤를 바짝 쫓고 있었기에.
나타났던 때의 위세를 생각하자면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쾅!
노인이 번개처럼 신형을 틀자 그가 지나던 수백 년 묵은 소나무가 굉음을 울리며 중동이 뚝 부러져 튕겨져 나갔다.
무슨 갈대가 태풍에 휘말려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신형을 트는 게 조금만 늦었더라면 박살나는 건 그였을 것이다.
'뭐 저런 지공(指功)이 있단 말이냐?'
노인은 기절초풍, 죽을힘을 다해서 내달았다.
그의 경공은 놀라워서 찰나간에 무우곡에서 사라져 버렸다.
한효월은 더 이상 그를 쫓지 않았다.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호흡을 조절한 그는 주위를 날카롭게 살펴보고는 피진거 입구에 쓰러져 있는 유성에게로 다가갔다.
"일어날 수 있느냐?"
"……."
유성은 답이 없다.
하긴 혈도를 짚여 쓰러진 자가 말을 하고 움직인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말이 되지 않는 일이 일어나니 만약 노인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자신의 눈을 의심했으리라.
"쯧쯔…… 아직 이혈지공(移穴之功)을 터득하지 못했더란 말이냐?"
한효월이 혀를 차면서 손을 내미는 순간에 쓰러져 있던 유성이 벌떡, 일어났던 것이다.
"그 늙은이가 손을 워낙 매섭게 썼어요. 하마터면 그냥 당하고 말았을 거예요. 보통 늙은이가 아닌데, 역시 공자께는 안 되는군요.
터진 상갓집 개새끼처럼 꼬리를 말고 도망갔으니…… 흐흐……."
"어서 떠나자. 따라오너라."
말과 함께 한효월이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성이 그 뒤를 따르며 물었다.
"왜요? 그 늙은이를 따라가게요?"
"따라가기는, 그가 돌아오기 전에 빨리 여길 빠져나가야 한다. 그가 다시 돌아온다면 쉽지 않을 게다."
"그게 무슨……? 그자는 이미 피를 토하면서 도망가던데요?"
"그가 돌아올 때는 혼자가 아닐 게다. 그의 무공은 천하십왕과 비교해서 그리 하수가 아니다. 그가 나를 얕보지 않고 제대로
싸웠다면 한참을 싸웠어야 승부가 날 상대야. 만약 그런 자가 몇이 나타난다면 우린 상당한 곤란을 당해야만 할 거다."
"으음……."
유성은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원래 한효월은 곡 내의 상황을 보고는 이미 누가 다녀갔든지 아니면 곡 내부를 누군가가 감시하고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것을 조사하고 있을 상태는 아니었다.
해서 그는 안으로 들어가면서 유성에게 전음으로 당부했던 것이다.
누가 나타나면 상대가 살수를 쓰려고 하지 않는 이상, 무조건 반항하지 말고 쓰러지도록.
유성은 이미 한효월에게 이혈지법(移穴之法)을 전수받은 적이 있어서 잠시간은 혈도를 옮길 수가 있었다.
해서 그가 나타날 때부터 한효월은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셈이었다.
한효월과 처음 상대하는 사람은 나이 어린 그가 이처럼 생각이 깊을 것이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를 이길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당하고 난 사람은 본능적으로 그에게 어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어서 그를 상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다면 천기선생 공일도가 굳이 자신의 정체까지 밝히면서까지 나서서 그를 처리하고자 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한효월과 유성은 비밀 통로를 빠져나와 바람처럼 달렸다.
그리고는 주위를 조금 돌아서 한곳에 몸을 숨겼다. 무우곡이 잘 보이는 곳이었다.
지세를 아는 것으로 말하자면 누가 그들 두 사람을 따를 수 있을까?
채 일각이 지나지 않아 서너 개의 그림자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타났다.
그들의 모습은 실로 놀라울 정도로 빨라 한 가닥 희미한 그림자가 허공에 그어지는 것만 같았다.
'무서운 경공이네요…….'
그것을 보고 유성이 혀를 빼물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좀 전에 상갓집 개처럼 얻어터지고 도주한 그 노인임을 알아보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들이 바람처럼 곡 내부로 진입하는 것을 본 한효월은 유성에게 손짓을 해 보이고는 바람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뒤따르던 유성이 의아해 물었다.
아래로 내려가야 하는데 아래가 아니라 오히려 산을 타고 북상(北上)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를 찾지 못한다면 필시 아래를 수색하겠지. 지금은 시끄러움을 피할 때야. 우선은 그들의 추적을 피하고 그들이 누군지를
알아보는 게 옳을 게다."
한효월의 태도는 전에 없이 신중했다.
그의 표정을 본 유성은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중조산에서 북상하면 횡기령(橫舒嶺)을 지나게 된다.
그리고 나면 같은 중조산에 속한 대반산에 이르고 그 위로 북상하면 태악산과 태행산으로 빠지게 되니 아예 산맥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렇게 멀리 갈 필요까지야 있을까.
한효월은 단숨에 이백여 리를 벗어나자 숲 속에 깊이 숨었다.
그들처럼 산속을 통해 이동하면 누구도 그 뒤를 추적할 수가 없다.
비록 야밤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깊은 숲을 나무꾼처럼 헤집고 사라지니 누가 그 뒤를 쫓을 수가 있겠는가.
잠시 숨을 고른 한효월은 품속에서 봉서를 꺼냈다.
기름종이로 싼 봉서의 안에는 뜻밖에도 검은빛으로 반짝이는 짧은 죽간(竹簡) 하나가 있었다.
죽간의 앞에는 작은 글씨로 섬세하게 넉 자가 새겨져 있다.
<불망초부(不忘樵夫).>
그리고 뒤에는 무슨 표기(標記)인 듯 물결 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그것이 다였다.
옆에서 건너보는 유성도 글이야 읽을 수 있다.
초부(樵夫), 나무꾼을 잊지 말라는. 하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는 오리무중이다.
그와 같이 나뭇가지 사이에 앉아 그 죽간을 들고 보는 한효월만 아는 글귀다.
"불망, 불망이라……."
누구를 잊지 말라는 것일까?
"그렇군."
한효월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죽간을 품에 간직하곤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곧 출발할 테니 빨리 체력을 회복하라는 말과 함께.
유성이 운기조식에 들어가자 한효월은 눈을 떴다. 그의 무공으로는 이 정도 달려왔다고 해서 숨을 가다듬을 필요까지는 없다.
유성을 배려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
'용화회란 말이지?'
다른 말이었다면 그 노인을 끝까지 쫓아가서 그의 정체를 밝혀냈을 터이다.
그리고 그 노인과 같이 누군가가 오는 것을 보고 그대로 그 자리를 벗어나 도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노인이 용화회라는 말을 내뱉자 상황은 달라졌다.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보자면 용화회는 당금 강호 정세에 직접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다.
사부 또한 아마도 그 용화회의 사람일 것이다.
그가 알고 있는 용화회라면 누구라도 쉬운 상대가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노인의 무공으로도 증명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의 무공이라면 당세 강호에서는 누구도 그를 얕잡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곳에서 나온 사람이라면, 그가 사부의 뒤를 쫓다가 한효월을 추적하여 이곳까지 온 것이라면 분명히 그를 상대할 계책을
세워두고서 찾아온 것이 분명할 터.
제천교도 아니고 용화회에서 그를 쫓고 있다면, 그 내면의 상황이 어떤 것인지 한효월은 알고 난 다음이라야 대책을 세울 수 있었다.
그들이 상대하기 쉬웠다면 사부가 이처럼 어렵게 뜻을 전달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어쩌면 사형도, 사부도 궁극적으로 상대하려던 것은 제천교가 아니라 용화회였는지도 몰랐다.
'용화회라고?'
한효월은 문득 괴이한 생각에 미간을 찡그렸다.
제천교가 아니라, 용화회라고?
그렇다면 지금 적당의 수괴인 천기선생은 누구란 말인가? 그도 용화회의 일원일까?
그처럼 심모원려를 지닌 사람이 누구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되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그랬다.
어쩌면 당금의 대국(大局)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얽힌 것인지도 몰랐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지금 그가 쥐고 있는 이 죽간이 유일한 단서였다.
사부가 그에게 남긴 것은 과연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