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首 해구독상(解求毒傷)
-다시 돌아가다
사부(師父)의 유품을 발견하다
한효월은 한 번도 물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물은 끊임없이 갈아 부어졌고 오래된 물은 밑으로 빠져나갔다.
계속해서 약초가 첨가되었고 불길은 활활 타올라 가히 초염지옥(焦焰地獄)이었다.
하지만 그는 신음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조용히 선정에 든 고승처럼 눈을 감고 있을 뿐이다.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목상을 물속에다 담가놓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놈이 이처럼 놀라운 정력(定力)을 지니고 있다니!'
그것을 보고 활염라 조과는 놀라 내심 혀를 내둘렀다.
수십 년을 산사에서 수도한 고승이라고 할지라도 뼛속 깊이 스며든 삽혈고를 뽑아내기 위해서 받는 참혹한 고통에는 치를 떨
것이고 몸서리를 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안색도 변하지 않고 저렇듯 버티고 있다니.
하루가 지났다.
한효월은 죽은 듯 보였다.
감은 눈을 뜨지도 않았고 숨을 쉬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그렇게 조용히 눈을 감은 채로 거기 있었다.
어지간한 송옥교도 어떻게 된 게 아니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그녀에게 고개를 저어 보이는 활염라 조과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로서는 이처럼 정력(定力)이 강한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산속의 고승이라 할지라도 제깟 놈들이 뭐 별거야? 라고 가소롭게 코웃음치던 그였지만 한효월의 이러한 정력을 보고는 말 그대로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한효월의 곁을 떠나지 않던 서문운하라고 다를 바가 없다.
"어때요?"
서문운하가 손짓으로 활염라 조과를 불러내어 물었다.
"저런 지독한 놈은 첨 보네. 저렇게 돌부처처럼 앉아 있는데 삽혈고 아니라 지랄고 할애비라도 쫓겨 나오지 방법이 있겠나? 독기는
거의 빠져나온 것 같다. 마지막으로 약초를 바꾸고 불을 한 번만 더 때주면 전신의 탁기가 모조리 다 빠져나가서 저놈의
체질이라면 오히려 이득을 얻을 수도 있을 거야. 다만 너무 원기를 소진한 상태일 테니 그것을 도와주기만 하면 되겠지."
"해주실 거죠?"
"흐음…… 지금 나더러 저놈 보약까지 지어 먹이란 이야기냐?"
"조 숙부∼"
서문운하가 눈을 흘기자 활염라 조과는 연신 손을 내저었다.
"되었다, 되었어! 해주면 될 거 아니냐! 원, 아플 때는 애처로워서 못 보겠더니 이젠 아주 불여우의 모습이군 그래!"
"무슨 뜻이우? 설마 하아를 보고 여자 생각이 난다는 거야?"
갑자기 어디선가 송옥교가 나타나자 활염라 조과는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다 큰 계집애가 애교를 부리니 보기 싫다는 뜻이야! 뭔 여자는 여자야?"
말과 함께 그는 성큼성큼 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엉큼한 늙은이 같으니……."
그런 그의 뒷모습을 송옥교는 사납게 노려보았다.
"참내……."
그 광경에 피식 웃던 서문운하가 물었다.
"준비는?"
"끝났다. 그런데 넌 정말……."
"그만두세요.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에요."
서문운하는 머리를 저어 보이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한효월은 말 그대로 무아지경에서 노닐고 있었다. 이미 육체의 고통이란 굴레는 그를 속박하지 못했다.
그를 억압했던 삽혈고의 독기는 다 빠져나간 상태였다.
그것뿐만 아니라 그의 체내에 있던 탁기(濁氣)마저도 빠져나가 그의 몸은 그 어느 때보다 충실하게 되었다.
정신은 고통 속에서 맑아 지난 이틀간의 고통은 이미 지난 일이었다.
온몸이 산산조각으로 분해되는 것 같던 고통도, 전신의 근육에서 뼈가 흩어지고 핏줄이 뽑혀 나가는 것 같았던 그 극통마저도
이제 까마득히 멀어져 잊어버렸다.
그의 정신은 까마득한 높이의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비비상처(非非想處)에 가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았다.
그 또한 사람이었다.
고통을 참기 쉬울 리가 없고, 고통을 느끼면 누구라도 괴로울 수밖에 없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고결한 정신을 가졌고 아무리 그 배움이 높다 한들, 느껴지는 고통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데 그는 단순히 고통을 참아내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즐기는 쪽을 택했다.
고통 속에 자신을 맡겨 버리고 버려두었던 많은 것들을 돌아보았다.
무공을 되새기고 자신을 돌아보고 깨달음을 살펴보았다.
그런 가운데 고통은 지속되지만 그는 그 고통 속에 안주하지 않고 고통을 버려둔 채로 많은 것을 생각하고 관조(觀照)할 수가
있게 되었다.
부동명왕공이 떠오른 것은 그가 욕조에 든 지 반나절가량이 흐른 다음이었다.
그로부터 그는 부동명왕공에 빠져 버렸다.
고통을 참는 것은 가장 훌륭한 수련이다.
그 속에서 다시 부동명왕공을 참오(參悟)하는 것은 번개 치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절벽 위 고송(古松)에 앉아 선정(禪定)에
든 것과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점점 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하늘을 보았다.
먹장구름 낀 하늘.
자신의 손가락조차 보이지 않는 흑암(黑暗)의 짙은 어둠 속에서 치는 번개를!
천지를 뒤덮었던 먹장구름이 갈라지고 하늘이 나타나는 그 장엄함을 보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머리로써 느꼈다.
부동(不動)이라 하여 어찌 움직이지 않을쏜가.
명왕(明王)이라 하여 어찌 밝은 세상에만 있을 것인가.
모든 것이 한눈에 드러났다.
활염라 조과의 말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즈음이었다.
"자냐?"
고통이 얼마나 클지 잘 아는 그였다.
식촛물에다 사람을 담그고 고약과도 같은 약효를 내는 약초를 거기에 풀었다.
그리고는 불을 때어 사람을 삶아대니 어찌 인간으로서 견딜 고통이겠는가?
울고불고, 악을 써야 정상이다.
보기 드문 사내대장부라 할지라도 고통에 치를 떨면서 이를 앙다물어야 했고 이를 갈지 않더라도 신음은 내뱉어야만 사람이다.
그런데 이놈은 아예 자는 것 같았다. 아니, 정말 죽어버린 게 아닌가 의심이 된다.
"자냐?"
그가 다시 물었다.
그러자 한효월이 눈을 뜨고 그를 보았다.
"되었습니까?"
"허……."
어지간한 활염라도 그만 입을 벌렸다.
'이건 정말 보통 놈이 아니군……. 정말로 할 말이 없구만.'
암중으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어댄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네 눈으로 봐라."
그의 말소리는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부드러워져 있었다.
한효월이 눈을 들어보니 물빛이 맑았다.
붉은빛이 끊임없이 솟아나던, 그 삽혈고의 지독함도 더 이상은 견디지 못하고 끝이 나버린 것이다.
촤아악…….
그가 몸을 일으켰다.
이틀 반 만이다.
"음……."
벌떡 몸을 일으킨 그가 잠시 비틀거렸다.
현기증이 이는 것이다.
"어지러운 게 당연하다. 삽혈고란 놈과 함께 네 몸의 피도 왕창 빠져나왔으니, 보통 사람이라면 정상이 되기 위해서 보름은
누워서 조리를 해야 겨우 돌아다닐 수 있을 게다."
"그렇게 만들지는 않으시겠지요?"
한효월의 말에 멍청해졌던 활염라 조과는 코웃음을 쳤다.
"뻔뻔스러운 놈 같으니……."
그는 한마디를 내뱉고는 휑하니 몸을 돌려 문밖으로 나가 버렸다.
쓴웃음을 지은 채로 한효월이 주위를 둘러보니 언제 가져다 놓은 것인지 욕조 하나가 더 있다.
맑은 물이 찰랑찰랑하고 희미한 김이 오르는 것으로 보아 물을 데워놓았음이 분명하다.
게다가 은은한 향이 풍겨 나오는 것으로 보아 한효월의 몸에 배었을 식초 냄새를 없애기 위해서 배려한 것인 듯했다.
입고 있던 속옷을 벗고 새 욕조에서 몸을 씻고는 아차! 하고 머리를 들었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정갈하게 새로 만들어놓은 옷.
물에서 나와 옷을 들어보니 언제 만든 것인지 언제 잰 것인지 그의 치수에 맞춘 옷이다.
흰 비단으로 만들어진 옷은 전혀 요란하지 않았고 그저 소박하고 기품이 있었다.
요대 또한 아무런 장식을 박아놓지 않았어도 가운데 수놓은 몇 송이 문양으로 인해 고급스럽다.
누가 만들어둔 것인지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언제 바느질을 배울 시간이 있었을까?'
그녀의 정성이 한 올 한 올 느껴져 한효월은 내심 가슴이 더 무거웠다. 그러다 그는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옷을 입은 그가 급하게 밖으로 나서자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활염라 조과였다.
"그녀는 어디에……?"
그가 말끝을 흐리며 서문운하가 있던 방문을 바라보자 활염라 조과가 턱으로 방을 가리켰다.
"들어가 봐라."
한효월이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섰다.
때는 아침결이다.
창을 통해서 들어오던 달빛은 황금 실타래와 같은 햇살로 바뀌어 온 방 안을 가득 보듬었다. 하지만 따듯하기보다는 찼다.
아니, 서늘한 기운이 방 안을 온통 채우고 있다고 함이 맞을 터이다.
거기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텅 빈 탁자에 우두커니 놓인 봉서 하나.
"……."
멍하니 그 자리에 있던 한효월은 천천히 걸어가 그 봉서를 집어 들었다.
<상공(相公) 친전(親展).>
누가 남긴 것인지는 굳이 뜯어보지 않아도 알 일이다.
잠시 봉서를 내려다보던 한효월은 봉서를 집었다.
봉서의 안에는 얇은 비단이 들어 있었고 글씨는 바로 그 비단에 고아(古雅)한 예서체로 가득 남겨져 있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당신 곁을 끝까지 지켜 드리지 못하고 먼저 떠나는 소첩을 용서하세요. 해독이 되면 어차피 떠나실 듯하여 차마 그 떠나는 등을
바라볼 용기가 없어 먼저 떠납니다.
내일 세상이 어찌 된다 한들, 어찌 당신의 하루 삶보다 소중할까요?
소첩은 당신이 스스로를 소중히 하여주기를 재삼 간절히 바랍니다.
부디 보중하세요.
…….
차마 더 쓸 수가 없네요.
부디, 부디 당신을 다시 볼 수 있기를…….
천첩(賤妾) 운하.>
길지 않았다.
그리고 특별한 말도 없었다.
하지만 한효월은 그 속에 담긴 사랑을 읽었다. 차마 맘속의 말을 적지 못하여 떨리는 그 손길을 붓끝에서 느꼈다.
보중(保重)이라는 말을 쓰면서 흰 비단에 떨어뜨린 그 눈물방울의 흔적을 보았다.
"후우……."
가슴이 답답했다.
옷을 지으면서 가슴 졸였을 그녀를 생각하니 더 그러했다.
"사치다."
문득 그가 중얼거렸다.
그러했다.
내일이면 죽을 그가 그 날이 얼마 남았다고 여인과 사랑을 이야기한단 말인가?
무슨 자격으로 그녀를 괴롭게 할 것이란 말인가.
편지가 그의 손아귀에서 구겨졌다.
그의 마음도 구겨졌다.
'하늘의 인연이란 참으로 공교하기도 하지. 그 장난을 어찌 인간이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활염라 조과는 뒷짐을 진 채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답답한 가슴은 시원해지지 않았고 가라앉지 않았다. 무거운 돌덩이를 올려놓은 듯 답답하기만 했다.
"언제 떠났습니까?"
한효월의 음성이 뒤에서 들려왔다.
"어젯밤. 네 독상이 거의 회복되었음을 보자 굳이 고집을 부려 송 파파와 함께 떠났다. 그 게으름뱅이도 같이 갔지."
"그렇군요."
한효월은 떨리는 걸음으로 등을 돌렸다.
"네 이노옴! 물을 게 고작 그거뿐이냐?"
갑자기 활염라 조과가 고함쳤다.
"예."
한효월이 등을 돌린 채로 답했다.
"예? 예라구?"
휙!
세찬 바람이 일며 한효월의 앞에 활염라 조과가 나타났다.
선풍도골의 그 모습이지만 눈을 부릅뜬, 대노한 얼굴은 흉신악살에 못지않다.
"겨우 예란 말이냐? 그 계집애가, 그 몸으로 네놈을 살려보겠다고,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길을 떠났는데 겨우 그거뿐이라고?"
한효월은 흠칫, 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말리셨어야 합니다."
"말렸어야 해?"
"예."
"이런 빌어먹을 놈! 말린다고 들을 놈이냐? 그놈이 말린다고 들어?"
"불가능한 일인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잘 아시는 분이 말리지 않고 소생에게 화를 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녀를 찾아가
잘 돌봐주십시오. 죄송합니다."
한효월은 진심으로 그에게 깊게 머리를 숙였다.
그 마음을 느꼈음인지 잡아먹을 듯 그를 노려보던 활염라 조과는 길게 장탄식을 터뜨리곤 말했다.
"탁자에 대보탕(大補湯)이 있다. 단순한 십전이니 뭐니 하는 놈들하고는 차원이 틀린다. 먹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공자!"
안에서 고함 소리가 들리자 슬그머니 들어와 봤던 유성이 한효월을 발견하고는 반색을 했다.
"그래……."
유성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던 한효월이 문득 비틀거렸다.
"공자, 왜 이러십니까? 아직도 독상이……."
"아니다. 지쳤을 뿐이니 잠시 쉬면 된다."
한효월은 고개를 저었다.
한효월은 종일 운기조식했다.
체력은 급속도로 회복되었고, 저녁때가 되자 소식을 들은 감천형이 찾아왔다.
그는 지난 며칠간 두어 번 찾아왔고 그때마다 한효월의 상태를 듣고는 떠나갔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었다.
그는 세력을 키우고 적의 동태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어서 정말 눈코 뜰 사이가 없었다.
창백했던 한효월의 얼굴에 은은히 혈색이 도는 것을 본 그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돌았다.
"다행이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그의 말에 한효월은 미미하게 웃음 지었다.
"다 활염라 조 선배의 배려 덕분이야. 단계에 맞춰서 회복될 수 있게 처방을 해두셔서 가능한 일이었지."
"그렇습니까?"
"여기서 사흘간 약을 복용하면서 쉬면 완벽하게 될 거야."
"다행이군요. 정말 고마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어디 계십니까?"
"낮에 떠나셨어요. 제게 약을 맡겨두시고."
유성이 대답했다. 활염라 조과는 한효월이 깨어난 것을 보고는 말도 없이 이미 떠나간 것이다.
"음. 뭐 그렇다 할지라도 약을 남겨두고 갔다니 별문제는 없겠군요. 하기야 사숙의 의술도 발군이시니……."
"난 지금 떠날 거네."
"예?"
어지간한 감천형도 눈을 크게 떴다.
"좀 있다가 밤이 되면 바로 출발을 할 거야."
"말도…… 말도 안 됩니다. 겨우 독상에서 회복되신 마당에 회복도 안 된 상태에서 강적과 만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지금
동정호 일대는 수없이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피가 튀고 있습니다."
"적과 싸우기 위해서 가는 게 아니야."
"절대로 안 됩니다."
"시간이 없어. 왜 이런 국면이 조성되고 있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그건 중조산에 가야만 알 수가 있다."
그 말을 하면서 한효월은 문득 서문운하가 떠올랐다.
당시 그는 의문이 있었다.
바로 지금과 같은 의문, 그 의혹을 그녀에게 묻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혹시 그녀라면 알는지 모르니까.
하지만 그녀에게 그것을 묻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 알아내고 싶었다.
어떤 경우라도 그녀를 이용하고 싶지 않은 것이 그의 마음이었다.
그것이 필요에 따라 무엇이나 이용하는 자와 곧은 마음의 소유자, 대인(大人)의 기품을 가진 자와의 차이였다.
"대체 왜 그러십니까?"
감천형이 으르렁거렸다.
그는 한 번도 한효월에게 무례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정말 화난 모습이었다.
"사숙께서는 개인의 몸이 아닙니다. 사숙께 강호의 안녕이 달려 있음을 모르십니까? 사숙께 무슨 일이 생기면 저 혼자서는 이
국면을 끌고 갈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아무리 있으면 뭘 합니까? 능력이 따라주질 않습니다. 십 년쯤 지난 다음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감천형은 너무나 힘이 없습니다! 도대체 소질에게 뭘 어쩌라고 이러시는 겁니까? 이러다 사숙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어쩌라는……."
"그때는 사질이 뒤를 맡아라."
너무도 간단한 말.
이미 기정사실화된 말을 하는 듯한 그 어조에 일순 멍청해졌던 감천형이 신음하듯 한효월을 바라보았다.
"사숙……."
"군자의 복수는 청산에 나무가 있는 한 십 년이 지나도 늦지 않다고 하였다. 와신상담(臥薪嘗膽)한 부차(夫差)와 구천(九踐)의
복수가 어찌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던가? 오늘 힘이 없다면 힘을 기르면 될 것이니 어찌 힘이 모자란 것을 알면서도 부딪쳐
옥쇄(玉碎)하기를 바랄 것인가?"
한효월은 말과 함께 침상 옆에 있던 봉서를 집어 감천형에게 내밀었다.
"잘 간직해 두었다가 내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하면 그대로 시행해. 개방의 황 방주는 믿을 만한 사람이니 봉서를 본 다음, 그를
찾도록 하고…… 나머지는 두 사람이 의논하면 대차는 없을 거야."
"사숙,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겁니까?"
"내 좀 전에 천기를 짚어보니 일이 진행되려면 몇 달은 더 걸릴 거야. 만약 그전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즉시 모든 힘을 은폐하고
지하로 숨도록 해. 그 다음부터는 역시 봉서에 적힌 것을 참고하여 움직이면서 힘을 기르게."
"말씀해 주십시오! 왜 이게 필요한 겁니까?"
"……."
한효월은 문 옆에 석상처럼 지키고 서 있는 유성을 힐끔 바라보고는 말했다.
"성아는 예전부터 짐작하고 있던 일이지만, 그래…… 지금쯤 감 사질도 알고 있는 게 좋겠지. 나는 지병으로 오래 살지 못해. 이미
오래전에 죽었을 몸인데 억지로 버티고 있었으니 오래 버틴 셈이지. 이제 그 시기는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
감천형의 얼굴이 해쓱하게 질렸다.
그도 바보는 아니다. 아니, 누구보다 명민한 사람이니 아무런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면 말이 아닐 터이다. 그러나 이렇게 본인에게
이런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듣고 있으니 어찌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있겠는가.
"잘하면 내년까지, 아니라면 금년을 넘기기 어렵겠지……."
금년이라면 몇 달이 남지 않았다.
"……."
감천형은 묵묵히 있었다.
자신보다 어린 사숙.
그런 사숙이 이제 곧 죽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알았으면 막지 마라. 내게 시간이 없으니……. 그만 나가주겠나? 떠나기 전까지 체력을 회복해야 하니까."
"……."
감천형은 묵묵히 있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그는 포권 대신 그에게 깊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등을 돌렸다.
그리고 막 문에 도달했던 그는 한효월을 돌아보고 말했다.
"황 방주에게서 전언이 왔는데 약선 백 노선배께서 해약을 만들기 위해 재료를 찾고 계신다고 합니다."
한효월이 보낸 해약의 분석이 끝났다는 의미다.
"다행이군."
한효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끝내고도 감천형은 머뭇거렸다.
그리고는 그가 입을 열었다.
"제가 따라가면 안 되겠습니까?"
"안 되는 걸 알잖나? 할 일은 많은데 사람은 부족하지."
한효월은 간단히 말을 잘랐다.
"알겠습니다."
감천형이 무거운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섰다.
"감 사질!"
"예, 사숙."
"우리가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오도록 하게. 전해줄 것이 있으니."
"예."
* * *
감천형이 다시 돌아온 것은 이경가량이 되었을 때였다.
하지만 유성이 지시가 있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여 그는 유성과 함께 한효월이 부를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한효월이 그를 부른 것은 그로부터 한 시진이나 지나서였다.
"받아."
촛불을 밝혀놓고 서탁에 앉아 있던 한효월이 그에게 두루마리 하나를 건네주었다.
방금까지 작성했던 것인 듯 그의 옆에는 종이와 붓, 벼루에 먹이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
"이건……?"
"이번에 치료를 하면서 얻은 심득(心得)을 정리한 거야. 본 문의 무공을 사형이 왜 강하게 변모시켰는지도 이해를 할 수 있었고
차후를 위해서도 그렇고 해서 이걸 만들었네. 시간이 모자라 제대로 정리를 하지는 못했지만 감 사질이라면 충분히 알 수 있을
걸세."
"사숙……."
감천형은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 마당에 더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을 것인가.
가슴만 답답할 따름이다.
그저 한마디.
"소질이 못나서 청정하던 사숙의 수도를 깨뜨리고 이젠 짐만 되는군요.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미안하다는 한마디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입을 열자 한마디가 아니라 끊임없이 미안하다는 말이, 죄송하다는 말이 쏟아져 나온다.
"내가 원하지 않았다면 감 사질이 사흘을 두고 빌었어도 나는 나오지 않았을 거네. 내가 원한 일이니 누가 누구에게 미안할 일이
있겠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틈틈이 그것들을 수습하게."
"절대로 사숙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감천형은 한효월이 건넨 두루마리를 두 손으로 받든 채로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일어나게."
"간뇌도지(肝腦塗地)! 감천형은 오늘 이후, 단 한 순간도 스스로를 위한 삶을 살지 않겠습니다."
한효월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탁자에서 일어나 감천형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단 한 순간이란 게 말이나 되나? 사람이 어떻게 한순간도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을 수 있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밥도 먹지 말아야
하고 잠도 자지 말아야 할 게 아닌가?"
"그건……."
"되었어. 자, 우린 이제 길을 떠나겠네. 성아, 준비는 되었느냐?"
"예, 간단하게 건량하고 몇 가지 준비를 다 해두었습니다."
"그럼 가자."
한효월이 일어섰다.
"지금 가시겠습니까?"
"오래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유성과 한효월이 감천형의 배웅을 받으면서 길을 떠난 것은 삼경이 가까워올 무렵이었다.
활염라 조과의 처방은 신효(神效)했고 비록 하루가 채 안 된 상황이긴 했어도 한효월은 거의 정상을 회복할 수 있었다.
거기에는 고통 속에서 깨달아낸 부동명왕공도 한몫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동정호에서 중조산까지는 가까운 길이 아니다.
빨리, 무사히 다녀오려면 말썽을 피해야 한다.
한효월과 유성은 달빛을 받으며 산길을 가로질렀다.
유성의 무공도 일취월장하면서 이젠 나뭇가지를 밟고 몸을 날리는 경신술이 경지에 이르러 일류고수에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관도(官道)를 달리려면 말을 타고 달리는 게 피로를 줄일 수 있다.
하지만 남의 눈을 피하거나 길을 가로질러 가려면 말을 타고 갈 수가 없다.
이런 밤에 관도로 말을 재촉하여 길을 달리면 남의 눈을 끌 수밖에 없으니 할 일이 아니다.
한효월은 이미 노정을 계산해 둔 듯이 낮에는 잠시 쉬면서 몸을 돌보고 오후부터는 마차를 빌려 길을 갔다.
그리고는 어둡기 시작하면 길을 재촉했으니 말 그대로 밤낮없이 길을 재촉한 꼴이다.
배를 이용하여 황하를 넘어 중조산에 도착한 것은 삼 일째 되던 날이었다. 한효월 혼자라면 더욱 빨랐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가 몸을 돌봐야 했으니 어차피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쨌든 모두가 혀를 내두를 만한 빠른 시간 내에 중조산에 도착한 셈이었다.
지난번 경험이 있어서 한효월은 매우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제천교에서 아직 무우곡을 살피고 있을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가 목표로 하여 가는 곳은 바로 그가 살았던 무우곡이었다.
천무가 폐관수련하고 있는 곳은 무우곡의 후곡이지만 지금은 지난번 일 이후로 통로 자체를 폐쇄하여 버렸기 때문에 안에서 문을
열고 나오기 전에는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다른 방법은 오직 하나, 한효월이 정해둔 방법으로 긴급 신호를 보낼 때뿐이다.
그때는 모든 것을 젖혀두고 천무는 폐관을 깨고 나올 것이었다.
무우곡에 이른 한효월은 다시 주위를 세심히 살펴보았다.
진세는 여전한 듯했다.
그 말은 누가 곡 내로 진입한 적이 없다는 의미다.
"들어가자."
한효월이 앞서고 유성이 뒤따랐다.
진세를 폐쇄시켰다고는 하지만 길을 아는 한효월이니 굳이 진세를 파괴하지 않고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진세와 상관없는 비밀 통로를 통해서.
곡 안으로 들어서자 정겹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얼마 전에 보고 가슴 벅차하던 그 모습들.
그런데 아니었다.
어딘지 모르게 전과 달라 보였다. 그 흐트러진 형상을 보는 순간에 한효월은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미 정상을 회복한 그인지라 그 속도는 말 그대로 질풍과 같았다.
찰나간에 한효월이 당도한 곳은 그가 머물던 초옥이 아니라 그 뒤에 자리한 암벽이었다.
그 암벽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데 원래는 교묘한 모습으로 동혈(同穴) 하나가 자리했다.
그 동혈은 일찍이 석문으로 막아두었고 오랫동안 누구도 가까이 가지 않았다.
그 석문 위쪽으로는 희미하게 <피진거(避塵居)>라고 석벽에 새겨진 글자가 보였다.
그런데 그 석문이 쪼개져 있었다.
봉쇄한 것을 강제로 열어젖힌 것이다.
한효월은 전신의 감각을 최대로 열면서 안으로 진입했다. 바깥은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각이라 햇살은 창창하게 빛난다.
그 빛만으로도 동굴 안쪽은 밝았다.
게다가 한효월이 손을 젓자 동굴 문 좌우에 있던 등에 불이 켜졌다. 누구보다 동굴 내부에 대해서 잘 아는 그였다.
"공자!"
"주변을 경계해라."
한효월이 안으로 들어서면서 말하자 유성이 눈을 빛내면서 석문 옆에 붙어 섰다.
석동 안은 의외로 넓었다.
천연의 동굴을 손질한 석동은 높이가 1장 반쯤 되었다. 너비는 한참 넓어서 3장가량이나 되고 깊이는 4장도 넘어 보였다.
앞쪽은 그리 넓지 않았지만 반 장가량 안쪽부터 하나의 석청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었고 타원형의 그 석청 내부에는 두 개의 방[石室]이 있었다.
하나는 침실이고 다른 하나는 연단실이었다.
이 석동이야말로 그의 사부 경월선인이 거처하던 곳이다.
그가 떠난 후에 한효월은 이곳을 봉쇄하고 그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렸었다.
그런데 이곳이 파괴되어 있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한차례 주위를 쓸어본 한효월의 얼굴에 괴이한 빛이 떠올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분명히 바깥은 파괴가 되어 있었는데 안쪽으로는 아무것도 손을 댄 흔적이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이지?'
한효월은 주변을 살피면서 미간을 찡그렸다.
이곳이 무슨 저잣거리의 여염집도 아니다. 도둑이 들 리는 없고, 그렇다고 산짐승이 저 석문을 파괴하고 들어올 리도 없다.
들어왔다면 뭔가를 노렸다는 의미일 것이고 그렇다면 뒤진 흔적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
"……."
잠시 생각에 잠겼던 한효월은 천천히 연단실로 들어갔다.
연단실에는 먼지 앉은 커다란 단로(丹爐) 한 개가 있었다.
그 옆으로 작은 단로가 몇 개 더 있었고 불을 지필 수 있는 화덕이 장치되어 있다. 그 뒤쪽으로 향로(香爐)가 있었다.
한효월은 잠시 감회 어린 빛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사부는 그를 위하여 늘 이곳에서 연단하였었다.
몇 달씩 그를 위하여 약초를 찾아오고 그것을 또 다리고 환을 짓고 하는 생활을 했었다.
철이 들면서 그도 여기서 살면서 불 다루는 방법을 배우고 약초를 가릴 줄 알게 되었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열지 말라던 곳.
거기에 섰으되, 돌아올 것이라던 사부는 여기에 없다.
'향전지도…….'
한효월은 입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눈앞의 향로를 살폈다.
세 개의 발이 달린 그 향로는 오래된 청동 향로였다. 먼지를 쓴 그 향로의 표면에는 오돌토돌한 돌기가 솟구쳐 있다. 한효월이 가볍게 진기를 일으키자 경기가 일면서 먼지가 모조리 날아갔다.
높이가 한 자 반가량이나 되는 제법 큰 향로의 표면에 새겨진 것은 용이었다. 비늘이 오돌토돌하게 일어나 있는 생생한 모습을 한 용이 구름 속에서 꿈틀거리면서 향로를 휘감고 있었다.
한효월은 긴장된 모습으로 향로를 천천히 돌렸다.
그러던 그의 시선이 한군데 멎었다.
비늘.
용의 비늘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뻥 뚫렸다기에는 좀 이상하고 둥그스름한 모습의 비늘 하나가 없었다.
'역시…….'
한효월의 눈에 가벼운 흥분의 빛이 흘렀다.
몇 년 전이던가?
사부가 떠나기 몇 개월 전쯤에 한효월은 이곳에서 연단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사부가 아끼는 그 향로에 흠결(欠缺)이 있음을 발견하고는 왜 그런가를 물었었다. 사부는 어디 한 군데가 이지러져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 성미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자 사부는 웃으며 답했었다.
"후일 네 스스로 그 까닭을 알게 될 것이니 잘 기억해 두도록 하려무나."
한효월은 품을 더듬어 작은 동전 모양을 한 것을 꺼냈다.
바로 그의 목에 있던 금낭 속에서 나온 동전이었다.
한효월은 그것을 그 비늘 구멍에다 맞추어보았다. 한쪽이 안 맞는 듯하여 조금 돌려보자 그것은 정확하게 맞았다. 그러나 그것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잘못 생각한 거란 말인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한효월은 자신이 맞춘 비늘이 다른 곳에 비해서 조금 솟아 올라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엄지로 그것을 누른 순간.
덜컹!
향로 밑에서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흠칫, 보니 향로 밑 부분이 열리면서 그 안에서 접힌 봉서 하나가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과연!"
한효월은 감탄하면서 그 봉서를 집어 들었다.
그 비늘은 기관을 작동하는 열쇠였던 셈이다. 그가 아니라면 누가 그것을 알고 열 수가 있겠는가. 하기야 굳이 기관이라고까지 평할 것도 아닌 평범한 것이기도 했지만 지금 이 순간, 그것이 가진 의미는 정말로 컸다.
그런데 그 순간이다.
"교묘하군! 교묘해……. 거기에 그런 장치가 되어 있었을 줄이야!"
탄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한효월을 놀라게 하기에 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