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六首 연기해경(緣起駭驚) (88/113)

第六首  연기해경(緣起駭驚)

-놀라운 진실

어떤 참혹(慘酷)함도 우리를 가로막지 못하리

 "빨리!"

 배를 젓는 것을 보고 있던 감천형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노를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는 공력을 이용하여 물을 밀었다.

 물이 갈라지면서 무섭게 배가 앞으로 튕겨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는 배를 몰아 앞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보이는 갈대밭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 옆에서 노를 젓고 있는 흑의무사 또한 이미 명을 받아 노를 틀어 배가 선회하면서 갈대밭 쪽으로 가도록 돕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섬을 벗어난 작은 배는 날듯이 갈대밭 쪽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배가 갈대밭으로 들어가자 감천형은 모두에게 입을 다물도록 지시했다.

 소리를 내지 않도록 지시하고는 공력을 이용해서 그들이 갈대밭 속으로 들어선 흔적을 감추었다.

 그리고는 조금씩 안쪽으로 숨어들었다.

 찰랑찰랑…….

 주변은 물소리만이 이따금 들릴 뿐, 고요 속에 잠겨들었다.

 하지만 그 고요는 오래가지 않았다.

 소리도 없이 달빛이 비친 물 위를 가르며 그들이 방금 떠나온 섬을 향해 날아가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

 '그녀잖아!'

 그것을 본 유성이 눈을 크게 떴다.

 독고경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은은한 피리 소리가 그녀의 뒤에서 그녀를 호위하듯이 들려왔다.

 '정말 나타났군…….'

 감천형은 모두에게 손짓을 하여 숨소리까지 죽이게 했다.

 바람처럼 방금 그들이 떠나온 곳으로 향했던 독고경은 이내 다시금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놀라운 신법은 갈대밭 속에 숨어 있는 사람들이 절로 숨을 죽이게 하게끔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들은 왜 한효월이 그처럼 빨리 섬을 떠나도록 재촉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허공을 훨훨 날아다니면서 수색을 했고, 물을 밟으면서 이곳저곳을 살폈다.

 물론 그 살핌에는 갈대밭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갈대밭을 살피면서 다가오자 감천형 등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녀의 눈이 어둠 속에서 싸늘한 비수처럼 빛을 발하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눈빛은 마치 형상이 있는 것처럼 새파랗게 뻗어 나오고 있었다.

 제아무리 어두운 곳이라도 그 눈빛을 피해낼 성싶지 않았다.

 '죽을힘을 다해 한바탕 악전을 각오해야겠구나!'

 감천형은 암중에 신음을 흘리면서 이미 뽑아 들고 있던 패도에 힘을 주었다. 다가오면 전력을 다한 일격을 가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그녀의 위력을 본 다음이지만 그대로 죽음을 맞이할 수야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녀는 어딘지 주춤거리면서 수색을 했다.

 잔뜩 긴장한 기색이고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는 이따금 독촉하듯 피리 소리가 들려오면 그때마다 떠밀리듯이 신형을 날렸다.

 이제 그녀는 물 위를 날아 갈대밭 위에 도달해 있었다.

 그것을 보는 감천형과 유성은 심장이 금방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듯했다.

 긴장이 극에 달해 절로 침이 고인다.

 움켜쥔 주먹, 손가락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손등으로 튀어나올 듯했다.

 한효월은 혼절한 상태는 아닌 듯했다. 하지만 그는 그 이후로 눈을 뜨지 않고 호흡만 고르고 있었다.

 어차피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을 알기에 스스로를 돌보고 있는 것이다.

 무심한 피리 소리만이 그들을 조롱하듯이 호면을 흘러 다가온다.

 하늘의 달은 무심하게도 구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어 주위를 비춘다. 차라리 숨어버린다면 그나마 나을 텐데 하필이면 이때 구름 밖으로 나온단 말인가.

 바램은 헛되어 구름은 점점 더 물러날 뿐이다.

 독고경은 옷자락을 펄럭이면서 이미 갈대밭 위에 도달해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날카로운 소성(嘯聲)!

 그리 크지 않은 듯한데도 고막을 찔러오는 힘을 가진 소성이 강물을 흔들며 들려왔다.

 그 힘은 놀랍기 그지없어서 거대한 노가 강물을 친 듯 강물 전체가 출렁거리는 듯했다.

 흠칫한 독고경은 고개를 돌렸다.

 강물을 밟으면서 달려오고 있는 사람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7, 80장 밖 까마득히 있었던 그 사람의 모습은 급속도로 빨리 다가왔다.

 놀라운 경공이었다.

 그 소리가 들려오자 피리 소리가 급해졌다.

 우우우∼

 어디선가 다시금 장소성(長嘯聲)이 들리더니 반대쪽에서 강물을 밟으면서 또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렇게 되자 독고경은 잠시 머뭇거리는 것 같더니 그들과 반대쪽으로 몸을 날려 사라져 갔다.

 하지만 나타난 사람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독고경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정말 믿기지 않는군…….'

 그 광경을 보고 있던 감천형은 신음을 흘렸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등평도수(登萍渡水)의 경공은 강물을 밟고 서 있을 수 있는 절세의 경공이다. 그러한 경공은 이제 감천형도 시전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저들과 같이 강물을 밟고서 훌훌, 평지와 같이 움직인다는 것은 이미 차원이 틀렸다.

 천하십왕이라면 또 모를까?

 '대체 어디서 저런 절세고수들이 나타난 것이란 말인가?'

 그는 암중에 신음을 흘리다가 전음으로 명했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자!'

 수하가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지금 움직이다가는 방금 나타났던 고수들에게 발각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명을 할 시간이 있을 리 없다.

 감천형은 그들을 재촉하여 죽을힘을 다해 노를 저어서 갈대밭 속을 미끄러져 갔다.

 다행히 그 배에는 수로를 잘 아는 사람이 있어서 물길을 잡았기 때문에 길을 잃지 않고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십여 리 이상을 벗어나서야 감천형은 안도의 숨을 내쉴 여유를 얻었다.

 적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서 갈대밭 속에서도 이리저리 길을 둘러온 그는 수하에게 노를 맡기면서 말했다.

 "정말 위험했군……. 본타로 가자."

 그의 이마에는 진땀 한 방울이 맺혀 있어 방금의 상황이 실제로는 극도로 긴박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배에 타고 있는 것은 모두 일곱 명.

 감천형과 한효월, 그를 부축한 유성을 제외한 사람들이 모두 달려들어서 노를 저었다.

 감천형은 긴장된 기색을 감추지 않고서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서 바로 그 자리를 떠나온 것은 나타난 사람들이 상상을 불허하는 고수들이라는 데 있었다.

 그들은 독고경을 따라갔지만 그녀를 잡지 못했다면 반드시 돌아올 것이고, 그렇다면 지금처럼 그냥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세심한

 수색을 할 것이 분명했다.

 그들의 무공으로 보아 발각되지 않는다는 것은 기적.

 그들이 적인지 아닌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렇게 기다린다는 것은 차라리 모험을 하는 것보다 위험이 더 컸다.

 해서 그는 전력을 다해 그 자리를 떠나온 것이다.

 갈대밭 속을 뚫고 배를 젓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어디가 어딘지 방향 잡기가 힘들고 앞으로 나아가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다시 십여 리를 가자 갈대밭 속에서 배 한 척이 나타났다.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던 동정어은이 몰고 온 배다. 감천형이 한효월과 유성과 같이 그 배로 옮기자 두 배는 다시 갈라졌다.

 혹시라도 뒤쫓을 자가 있을까 저어하여 마지막 연막을 치려는 것이다.

 그곳에서 갈대 숲을 다시 오 리쯤 전진하자 섬이 하나 나타났다.

 묘하게 생긴 형태였다. 분명히 육지에서 떨어진 섬이긴 하지만 갈대로 이루어진 물길이 전체를 덮고 있어서 밖에서 보자면 그냥

 갈대가 우거진 곳에 불과했고 실제로는 육지와 연결된 곳이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갈수기에는 육지와 연결된 곳이고, 홍수기에는 섬이 된다는 구조다.

 그 연결을 덮고 있는 것이 바로 무성한 갈대다.

 사람의 키를 덮고도 한참을 남는 그 갈대는 어떤 은폐물보다 더 훌륭한 은신처를 제공하고 있었다.

 "다 왔습니다."

 섬에 도착하자 감천형이 눈을 감고 있는 한효월에게 말했다.

 그러자 한효월은 눈을 떴다.

 "수고했군."

 한효월은 지체하지 않고 눈을 뜨면서 그의 말을 받았다.

 "공자, 괜찮으세요?"

 "괜찮다. 다시 폐를 끼쳤습니다."

 눈을 뜬 한효월은 유성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 동정어은을 향해서 포권해 보였다.

 창백한 얼굴에 푸르스름한 얼굴의 한효월이다.

 동정어은은 햇볕에 그을린 주름 많은 얼굴을 들어 그를 보더니 미간을 찡그렸다.

 "많이 좋지 않은 듯하니 감 맹주가 어서 안으로 모시도록 하시오."

 "전 맹주가 아니라니까 그러십니다."

 "무슨 소리요? 재삼 말하지만 어떤 곳이든, 우두머리가 확실하지 않으면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소. 설마 감 맹주는 우리들을

 모아놓고서 모두 불구덩이에다 처박아 버릴 셈이오?"

 "그게 아니라……."

 "선배의 말씀이 옳아. 감 사질은 위상을 확고히 세워야 할 걸세. 사형께선 비록 움직이고 계시지만 생기 끊어진 몸으로 남의

 지시를 받는 꼭두각시에 불과해."

 "사숙이 계시지 않습니까? 저는 지금 대행을 할 뿐이지, 전체 대국을 이끌어 나갈 능력이 없습니다."

 "감 사질은 본인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군! 상황을 판단하고 결단을 내리고 실행에 옮기는 능력은 아무나 가진 게 아니야.

 좀 전에도 감 사질은 자신의 판단을 주저없이 실행했지? 그건 타고나는 거지 훈련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야.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여 남을 무겁게 보지 말게, 감 사질."

 "사숙……."

 감천형은 나직이 신음했다.

 한효월이 떠나라고만 하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옳아! 감 맹주에겐 남을 끌고 가는 힘이 있지. 자, 자……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오. 한 공자는 빨리 조섭(調攝)을 해야 할

 것처럼 보이는데!"

 갈대와 수풀, 그리고 나무들로 이루어진 섬에는 지형지물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집들이 지어져 있었다.

 바로 지금 감천형이 사람들을 이끌고 있는 본타였다.

 황량한, 버려진 섬으로 보였던 그곳에는 백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 섬 주위로 농가와 어부들이 모두 그들의 눈과 귀였다.

 이미 그것으로도 감천형이 짧은 시간 내에 쉽지 않은 세력을 이루어놓았음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한효월은 그중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집에 자리했다.

 그가 방에 들어서 침상에 자리 잡고 앉자 모두는 자리를 비켜주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한효월은 품속에서 병 하나를 꺼냈다. 바로 약선 백장주가 그에게 던져 주었던 자기 병이었다.

 <독룡단(毒龍丹).>

 작은 글자가 아로새겨져 있다.

 "독룡단……."

 한효월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는 이 글자가 의미하는 것을 안다.

 "이독치독(以毒治毒)…… 결국 이 방법밖에는 없는 것이란 말인가? 이렇게 해야 내 목숨을 조금이라도 연장할 수가 있단 말이지?"

 한효월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독치독!

 그러했다.

 그 자기 병 속에 든 것은 극독이었다. 그것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극독. 보통의 독은 한두 가지 자연산 그대로 이루어진다.

 그것만으로도 사람을 죽이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독룡단은 독을 제련하여 만들어낸 독의 정수(精髓)라고 불릴 만한 것이었다.

 약선 백장주가 그에게 이것을 준 것은 마지막 순간에 사용하라고 준 것임에 틀림없었다.

 과연 지금이 그 순간일까?

 "……."

 한효월은 잠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갈등의 빛이 어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에 미련을 두지 않으려 생각했던 그였지만 독룡단을 쓴다는 것은 그가 가진 모든 잠력을 끌어낸다는

 의미였고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진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과연 그래야 할까?

 "아직은……."

 한효월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병을 품속에 간직했다.

 문득 그 손에 물건 하나가 걸렸다.

 바로 회의노인이 죽음으로 그에게 전해준 봉서였다.

 그것을 만져 본 한효월은 길게 한숨 쉬고서 눈을 감았다. 배를 타고 오는 동안 내내 조섭을 해서 들끓는 기혈을 안정시켰다.

 하지만 그의 상태는 여전히 크게 좋아진 것 같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독고경을 상대하면서 너무 무리를 했었다.

 그녀를 죽이기 위해서, 그녀를 상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를 제압하기 위해서 다름 아닌 부동명왕공을 펼쳤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한효월에게 제압을 당할 뻔했던 것이다.

 한효월이 정상이기만 했더라도 그녀를 제압할 수 있었을 터이다.

 그런데 불행히 그가 정상이 아니었고 그사이에 그녀는 너무 강해져 있었다.

 그렇게 되자 한효월은 무리를 해서라도 그녀를 제압하고자 했었고 그로 인해서 상세는 더욱 심하게 되었다.

 전력을 다해서 들끓는 상세를 안정시키고 회복해야 했다.

 봉서를 먼저 보고 마음이 흔들리게 된다면 그도 옳지 않은 일. 모든 일은 힘을 회복함이 최우선이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것을 알기에 그는 궁금함을 참고서 조식에 든 것이다.

 불안초조한 감천형이 주변으로 수하들을 풀고, 동정을 정탐하는 가운데 한효월은 반나절이나 지난 축시경에서야 눈을 떴다.

 창백한 얼굴에는 푸르스름한 빛이 떠올라 있어 누구라도 그에게서 병색을 느낄 수 있었다.

 연락을 받고 달려온 감천형을 향해 한효월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밖은?"

 "갑자기 동정호 일대가 소란스러워졌는데, 수많은 고수들이 횡행하면서 충돌이 크게 일고 있답니다. 일단 수하들을 모두 물려서

 관망은 하되, 충돌하는 일이 없도록 단속하고 있습니다. 좀 어떠십니까?"

 "견딜 만하군."

 한효월이 미미하게 웃어 보이자 감천형은 길게 숨을 몰아쉬었다.

 "뭔지 모르지만 상황이 급하게 돌아갑니다. 사숙께서는 존체를 보중(保重)하셔야 합니다. 지금 사숙께 무슨 일이 생긴다면 강호

 전체가 위태롭게 될 겁니다."

 "무슨 강호까지…… 어차피 큰 그림으로 보자면 일과성이니 크게 신경을 쓸 일이야 아니겠지……."

 "……?"

 무슨 소린지 몰라 감천형이 눈이 동그래서 한효월을 쳐다보았다.

 "누가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어차피 당대의 일이니, 세월이 지나면 또 평가야 달라지지 않겠나? 성아, 문을 닫거라."

 한효월이 요령부득의 말을 하면서 유성에게 명했다.

 "……."

 감천형은 무거운 눈빛으로 한효월을 바라보았다.

 그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다만 한효월이 너무 범인을 초월하기에 그의 뛰어남이 빛을 발하지 못할 뿐이었다.

 그런 그이기에 한효월의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하는 중얼거림의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어 마음이 무거웠다.

 어차피 당대의 일…….

 결국 그는 자신이 죽고 난 다음, 세월이 바뀌면 지금의 그 가치가 또 어떻게 바뀔는지 모른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적이 그때에는 정의가 될는지 세상의 일을 어찌 알겠느냐는 의미다.

 '그런데 왜 그렇듯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고서 혹사를 합니까? 현재의 일에 절대의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면서도…….'

 차마 입을 열어 물어볼 수는 없다.

 그러나 입속까지 물음이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그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한효월이 웃으며 말하지 않는가.

 "지금은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지. 어차피 육신이야 죽고 나면 한 줌 티끌이니 뭐 그리 아까울 게 있을까?"

 말과 함께 그는 품속에서 피 묻은 봉서를 꺼냈다.

 "안 보셨습니까?"

 감천형의 질문에 한효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집안 식구끼리 같이 봐야지. 일단은 몸을 회복함이 급선무였으니까."

 '역시 대단한 인내력…….'

 감천형은 내심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걸 두고도 어떻게 그냥 보지 않고 운기조식에 들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효월이 봉서를 개봉하려 하자 유성은 문밖으로 나가려 했다. 주위를 경계하려 함이었다.

 "너도 같이 있거라."

 "예?"

 "나는 늘 너를 동생처럼 생각했었다. 너도 외인일 리 없으니 너도 같이 있도록 하려무나."

 한효월은 감천형을 보면서 말했다.

 "이 아이를 잘 부탁하네. 이 녀석의 자질이 괜찮으니 곁에 두고 부리면 많은 도움이 될 거네. 동생으로 삼을까 했었는데 그렇게

 되면 감 사질과의 호칭 문제가 생기니 내 기명문도(記名門徒)로 삼을까 해. 사제로서 보살펴 주게."

 "사숙……."

 무슨 의미인지를 느낀 감천형이 신음을 흘렸다.

 "공자!"

 명민한 유성도 가슴이 저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너를 정식 문도로 삼은 것은 아니니 구배를 올리지 않아도 된다. 권왕 선배께서 너를 어여삐 보고 계시니 후일 그분의 문하에 들

 수 있다면 큰 복이 될 수 있을 게다. 일어나거라."

 "싫습니다! 공자! 전 공자의 곁에서 죽어도 떠나지 않을 겁니다."

 "녀석, 어린애 같기는. 지금 당장 너를 떠나라고 하지 않을 테니 어서 일어나거라."

 말과 함께 한효월은 봉서를 뜯었다.

 뜯자마자 봉서의 한쪽이 가루가 되어서 흘러내렸다.

 "아!"

 감천형이 탄성을 흘렸다.

 "그 노인의 가슴에 있을 때 명옥수에 스친 모양이군……."

 "스쳤는데 이런 위력이 있군요."

 "명옥마녀는 마교의 전설이야. 결코 쉬운 상태가 아니지. 그렇게 쉽다면 그 존재가 만들어지는 것이 뭐 그리 어려웠겠나? 그런

 만큼 절정에 이르고 나면 가히 상대가 없다고 하더군. 부드러운 경력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공하여 강철도 두부처럼 부서지는

 것이 명옥마공이니……."

 한효월이 말하면서 조심스럽게 봉서를 펼쳤다.

 반쯤은 상한 듯하니 내용도 손실되었을 것이 분명했고 그렇다면 정말 어렵게 당도한 서찰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렸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피 묻은 봉서에서 꺼낸 서찰은 매우 간단했다.

 <사(死).>

 다급히 흘려 쓴 행서 한 글자.

 그것이 다였다.

 아랫부분이 조금 삭아 내린 상태이지만 못 알아볼 리가 없다.

 "이건……."

 한효월이 신음을 흘렸다.

 보는 순간에 무슨 뜻인지를 직감했기 때문이다.

 "사조 어르신께 무슨 일이 생겼다는 뜻입니까?"

 확인하듯 감천형이 물었다.

 "그런 것 같다."

 한효월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그는 말하면서 품을 뒤져 목에 걸고 있던 금낭을 꺼냈다.

 그 속에서 작은 금낭 두 개를 꺼낸 그는 그중 <나의 생사에 의문이 생기거든……>이라고 적힌 첫 번째 금낭을 꺼내 들었다.

 "늘 이 금낭을 개봉할 시기를 찾고 있었는데 아마도 지금이 그때인 듯하군."

 말과 함께 한효월은 금낭을 개봉했다.

 금낭 속에는 작은 동전 하나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접힌 작은 쪽지 하나.

 <향전지도(香傳之道).>

 단 네 글자가 거기에 적혀 있었다.

 향(香)으로 도를 전한다? 향기에 실어서 길을 보여준다?

 도무지 요령부득이다. 설사 누가 있어서 한효월 몰래 이 금낭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한들, 무엇을 어떻게 알아낼 것인가?

 "……."

 한효월은 생각에 잠긴 듯 아무 말 없이 그 쪽지만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는 금낭에서 나온 오랜 세월을 느끼게 하는 동전이 들려 있다. 살피고 또 살펴보아도 단순한 동전은 아니다.

 매우 오래된 것이라는 느낌에다 일반에서 사용된 동전 형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잠시 중조산에를 다녀와야 할 듯하군."

 한효월이 말했다.

 "아시겠습니까?"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 나 외에는 이게 무슨 뜻인지 알 사람은 당세에 아무도 없을 거야. 나를 위해서 만들어진 단어이니."

 한효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되었네. 유성과 둘이 다녀오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번에는 절대로 그냥 보내 드릴 수 없습니다. 지금 사숙의 몸 상태로는 너무 위험합니다."

 그때였다.

 "당주님!"

 밖에서 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유성이 급하게 튀어 나갔다.

 "한 당주입니다."

 유성이 금세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일인가?"

 감천형이 밖으로 나가 물었다.

 "그래? 알았어. 잠시 기다리게."

 말과 함께 감천형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 얼굴은 조금 긴장된 빛이 역력하다.

 "사숙을 찾는 사람이 있답니다."

 "나를?"

 "예, 그런데 찾는 분이 여자라고 합니다."

 "여자?"

 "예, 서문운하라고…… 어떻게 알았는지 저희 분타에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하게 하고 저나 사숙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는군요.

 급한 일이라고 하면서…… 아시는 분입니까?"

 '그녀가 어떻게?'

 잠시 신음을 흘리던 한효월이 물었다.

 "지금 어디 있다던가?"

 "도화사(桃花寺)라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머물고 있답니다. 어떻게 할까요? 이리 모셔올까요?"

 한효월의 안색을 본 감천형은 그녀를 부르는 호칭이 달라졌다.

 "내가 가지."

 "사숙!"

 "되었어. 위험한 사람이 아니야. 나를 찾아왔다면 필시 중요한 일일 테니 내가 가보는 게 옳을 걸세. 그렇다고 그녀를 이곳까지

 오게 하는 것은 너무 위험 부담이 크지. 아직 이곳은 모든 것을 갖추지 못했으니까. 지난번에 내가 남겨둔 도면대로 모든 것을

 완성하고 체계를 갖추기 전까지는 외부에 공개하는 것은 위험할 거야."

 "그렇더라도 지금 움직이실 수는 없습니다."

 "병자 취급을 하는군. 난 아직 움직일 수 있네. 독기가 준동하고 있긴 하지만 어느 정도 잡아두었으니 남과 동수(同手)할 수도

 있네."

 "좋습니다. 그럼……."

 감천형은 그의 고집에 질렸다는 듯 머리를 젓더니 말했다.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어. 성아와 같이……."

 "더 이상 양보는 하지 못하겠습니다. 사숙께서 이곳의 주인은 소질이라고 말씀하셨으니, 제 말에 따라주십시오."

 "……."

 한효월은 미미하게 웃음 띤 얼굴로 그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어쩔 수 없겠군. 그렇게 하지."

 "지금 떠나시겠습니까?"

 "그러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알고 준비를 하겠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말과 함께 그가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에게 더 이상 무슨 말을 한다면 사족이 되리라.

 한효월은 천천히 한숨을 내쉬면서 문득 미간을 찡그렸다.

 그녀가 어떻게 이곳을 찾아낸 것일까? 아니, 자신을 찾아 이곳까지 온 것은 무슨 까닭이란 말인가?

 문득 의혹이 구름처럼 일었다.

 그 모든 것은 그녀를 만나보아야 알 수 있으리라.

*   *   *

 도화사(桃花寺)라는 이름을 얼핏 들으면 절 이름인 듯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작은 시진(市鎭)이었고 요로(要路)에 있어서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이었다.

 자연히 객잔이나 상점들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

 서문운하는 바로 그 객잔 중 하나인 복래객잔(福來客棧)에 머물고 있었다.

 그리 크지 않았지만 후원에는 독립된 특실이 있다.

 하나뿐인 그 후원 특실은 방 셋에 대청 하나가 자리한다. 서문운하가 있는 방은 바깥에 있는 정원이 바라보이는 곳이다.

 그 정원 한쪽 구석에는 오불관언 종무연이 졸고 있을 터이다.

 밤하늘의 별들은 조금 걷힌 구름 사이로 은가루를 뿌린 듯 빛난다.

 서문운하는 묵묵히 그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뭘 그렇게 오래 쳐다보고 있니?"

 뒤에서 묻는 소리가 들렸다.

 한시도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던 날수독심 송옥교다. 그런 그녀가 무엇 때문인지 서문운하의 곁을 떠났다가 다시 여기 있었다.

 "조 숙부는 어디 계세요?"

 "건넛방? 건넛방에서 네가 시킨 일을 하느라고 정신이 없지. 왜 그러느냐?"

 "준비가 끝났는지 봐주세요. 그분이 곧 당도할 거예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을 듯하군요."

 송옥교가 놀란 눈으로 서문운하를 바라보았다.

 "그노옴…… 그가 올 걸 어떻게 알았니?"

 "그냥 올 때가 된 것 같아요."

 서문운하의 말에 송옥교는 그녀와 밤하늘의 별을 번갈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천문지리에 성복(星卜) 어쩌고들 하더니 별을 보는 것으로 그런 것까지 알 수가 있단 말이냐?"

 "다 가능한 일은 아니죠. 비영(秘影)으로부터 상황을 보고받고 천기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나머지 상황들을 종합하여 결론을

 내리는 거니까 크게 틀릴 이유는 없겠지만."

 말이야 간단하다.

 하지만 그게 과연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일까?

 게다가 그녀가 말한 것은 무슨 의미인가.

 비영으로부터 상황을 보고받는다?

 "무리하지 말거라. 이 근래에 너는 너무 과로하는 것 같구나. 노신은, 노신은…… 네가 걱정되어 죽겠구나."

 송옥교는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저곳입니다."

 감천형이 말했다.

 그와 한효월, 유성. 거기에 길 안내를 위한 고수 한 사람이 동행을 한 마당이다.

 다만 길 안내를 맡았던 자는 복래객잔 앞에 이르자 몰고 있는 마차의 속도를 늦추어 천천히 그 옆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마차가 담을 돌아 객잔의 뒤쪽으로 가게 되자,

 "가지."

 한효월은 망설임없이 몸을 날렸다.

 그들은 평범한 마차를 타고 여기까지 이르렀다.

 그리고는 마차에서 몸을 날려 객잔의 후원을 날아 넘는 것이다.

 마차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그냥 천천히 그 자리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한효월 등 세 사람은 야행인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다만 곧 날이 밝아올 것을 감안하여 회색 옷을 입어 배려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움직이는 모습은 어둠 속에서 그리 눈에 잘 띄지

 않았다. 한효월은 조금도 거리낌없는 모습으로 객잔 후원으로 날아들었다.

 "여기가 후원 특실인 것 같군요."

 주위를 둘러보고는 감천형이 말했다.

 "그런 듯하군."

 한효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아, 네가 가서 통보를 하거라."

 그러자 퉁명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망할…… 통보는 무신…… 제 맘대로 다 들어와서는."

 느닷없이 어둠 속 한곳에서 들려온 소리.

 "그간 별래무양하십니까?"

 하지만 한효월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어둠 속을 향해서 포권해 보였다.

 어둠 속, 후원을 덮고 있는 정원 고송(古松) 위에 흑의인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무성한 나뭇가지로 인해 그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굳이 부연할 필요는 없다.

 "……."

 어둠 속에서 희번덕거리는 것이 언뜻 보인다.

 귀찮다는 듯 그가 손을 내젓고는 나뭇가지에서 몸을 돌려 누워버린 것이다.

 흡사 달게 자던 잠을 방해받아 짜증이 난다는 모습이다.

 오면서 한효월에게서 그들의 습성을 대강 설명 받은 감천형이지만 묘한 눈길로 그를 보았다.

 강호상에는 저런 기벽(奇癖)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가지."

 한효월의 말에 유성이 잽싸게 앞섰다.

 중간에 한효월, 그리고 그 뒤를 감천형이 따르면서 혹시나 모를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유성이 문 앞에 이르러 가볍게 기침을 하면서 문을 두드리려고 하자 문은 기다렸다는 듯 두드리기도 전에 열렸다.

 "들어와."

 열린 문 안에서 냉랭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유성과 한효월의 뒤를 따르면서 슬쩍 뒤를 돌아본 감천형의 눈에 놀란 빛이 스쳐 갔다.

 방금까지 소나무 가지 사이에 누워 있던 오불관언 종무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연 강호삼괴의 명성은 허명이 아니었군…….'

 대청에는 불이 밝혀져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불이 밝혀져 있지 않은 것과 다름없었다. 희미한 촛불 하나. 

창문에는 모두 두터운 휘장을 쳐두어 밖에서는 불빛을 감지하기가 어려웠다.

 그 대청의 중앙에는 송옥교가 우뚝 서 있었다.

 흔들리는 촛불을 받으며 서 있는 그녀의 얼굴은 섬뜩하게 보였다.

 "왔군."

 그녀가 내뱉듯 말했다.

 "죄송합니다."

 한효월이 그녀에게 포권을 해 보였다.

 "……."

 착잡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던 송옥교가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서 있는 그녀를 향해 한효월은 다시금 목례를 하고는 문 안으로 들어섰다.

 탁.

 그가 들어서자 문이 닫혔다.

 그녀의 성품으로 보면 한효월이 들어선 후에 문 앞을 가로막았으리라.

 한효월이 전음을 보내두지 않았다면 감천형과 유성이 그냥 있지 않았을 것이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한효월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묵묵히 송옥교와 눈싸움을 하고 있을는지도.

 방은 어두웠다.

 불을 켜지 않은 채 창가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서문운하.

 그녀는 한효월이 들어섬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렁이는 눈빛이 창문으로 스며드는 달빛에 흔들리고 있음이 보인다.

 "잘…… 있었소?"

 한효월이 먼저 입을 열었다.

 중조산을 떠나온 다음 처음이다.

 하지만 그들이 헤어진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어쩌면, 어쩌면 이번 만남이 끝일런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들은 다시 만났다. 그것도 생각보다 훨씬 빨리.

 "전…… 당신은 좋아 보이지 않는군요."

 서문운하가 말했다.

 "그리 좋은 편은 아니오."

 한효월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머쓱한 표정이라고나 할까. 조금은 난감한 표정이었다.

 그녀의 앞이 아니라면 뒷머리라도 벅벅 긁어댈 형용이라면 과할까.

 "앉으시겠어요?"

 서문운하가 탁자 앞으로 걸어와 의자를 내놓았다.

 한효월은 말없이 그 탁자에 앉았다.

 쫄쫄쫄……. 한효월의 앞에 찻잔이 놓이고 거기에 미리 놓여 있던 차호가 둥실 서문운하의 손에 들려 솟아올랐다가 조용히 아래로

 굽어 찻물을 떨구어내었다.

 맑은 찻물.

 하지만 정작 찻잔에 담긴 찻물은 탁했다. 그리고 묘한 냄새까지 났다.

 "드세요."

 서문운하는 찻잔을 한효월의 앞에다 밀었다.

 뜻밖에도 그 찻잔은 일반 찻잔보다 매우 컸다.

 한효월은 잠시 그 찻잔을 내려다보다가 두 손으로 조용히 찻잔을 들었다. 검은 찻물이 탁하게 일렁인다.

 끓여낸 물이 아니라 무슨 진흙탕을 섞어 흔들어놓은 것만 같았다.

 입을 대는가 싶더니 그는 서슴없이 찻물을 한 번에 다 마셔 버렸다.

 그것을 보자 서문운하는 피식, 웃었다.

 "다법에 어긋나는 음용법이군요."

 달깍.

 찻잔을 내려놓은 한효월은 잠시 미간을 찡그렸다가 미미하게 웃음을 보였다.

 "이것이 차가 아니니, 다법을 적용시킬 수야 없지 않겠소?"

 "많이 쓴가요?"

 "조금, 뭐 약이야 워낙 오랫동안 많이 먹어봤으니 이게 제일 쓰다고 말하긴 어렵겠고…… 이게 정말 차였다면 팔리기 쉽지 않겠소."

 "왜 물어보지 않죠? 이게 뭐냐고?"

 "설사 독약이라 한들, 당신이 내게 마시라고 준다면 내가 어떻게 그것을 사양할 수 있겠소?"

 한효월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

 서문운하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

 한효월도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창문 밖에서 나뭇가지 사이를 달빛이 비집고 스며든다.

 고즈넉한 어둠과 침묵이 두 사람을 감쌌다.

 "왜죠?"

 문득 서문운하가 입을 열어 물었다.

 "왜 내가 주는 것이라면 독약이라도 사양하지 않을 거죠?"

 "……."

 한효월은 잠시 침묵한다.

 그녀는 답을 재촉하듯 그렇게 그를 보았다.

 그녀의 등 뒤로 다가온 달빛이 한효월의 얼굴을 덮고 몸을 덮었다. 달빛에 드러난 그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 보였다.

 그러나 그 눈에 서린 총기마저 달빛이 가릴 수는 없다.

 한효월은 잠시 곤혹스러운 빛이다가 입을 연다.

 "나도 모르겠소. 그저, 당신에게는 그래야 할 것 같을 뿐이오."

 "당신과 같이…… 밤을 지낸 여자라서? 그런가요?"

 한효월의 얼굴에 미미한 웃음이 번져 갔다. 그것은 훈훈함이라 이름하여야 할 것이었다.

 "당신도 알지 않소? 그게 아니라는 걸……."

 서문운하는 입술을 물었다.

 갑자기 가슴이 북받쳐 올라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그저 반갑게 만나 반갑게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는데…… 왜 이렇게 어렵게 말을 풀어간다는 말일까?

 "언니는 잘 있어요."

 불쑥,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

 "그렇소?"

 한효월은 담담히 그 말을 받았다.

 "언니는 당신 생각을 많이 해요……!"

 말을 하던 서문운하는 말을 멈추었다.

 한효월의 손이 탁자를 건너와 그녀의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피폐했던 손.

 깡말라 겨우 가죽만 남았던 그녀의 손은 이제 아름다운 여인의 것이었다.

 피와 살을 새로 얻은 듯 은은한 윤택이 감돌아 가히 섬섬옥수라는 단어에 부끄럽지 않은 손이었다.

 서로 살을 섞은 몸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손을 잡자 벼락이 온몸을 치고 나가는 것만 같았다. 숨이 막히고 심장이 터져 나가는 것만 같다.

 놀란 그녀가 한효월을 보자 한효월은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그녀는 나의 누이요. 더 이상 그녀에게 짐으로 남고 싶지 않소. 그처럼 고운 여인이 나로 인해 청풍명월(淸風明月)을 벗삼아 한

 세상을 지내는 걸 보고 싶지가 않소. 당신이 그녀를 보살펴 주오."

 그녀는 보았다.

 이 일세의 기재, 한효월의 눈 깊은 곳에 스며 있는 절망(絶望)을!

 그리고 그 어둠으로 인해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묻어버리려는 그 모습을.

 가슴 한편이 칼로 저며내는 듯 아려왔다.

 그녀는 그저 다른 한 손을 들어 자신의 손을 잡은 그의 손을 부둥켜 잡았을 뿐이다.

 사흘간의 혼수 끝에 겨우 깨어나 집이 불타고 부모님이 돌아가셨음을 알았을 때에도, 원수에게 쫓겨서 하루하루를 쫓겨다녔을

 때에도 이렇듯 가슴이 아프지는 않았었다. 이렇듯 주체할 수 없도록 눈물이 가슴을 치면서 흘러내리지는 않았었다.

 …….

 이 불행한 한 쌍의 천재들, 한 쌍의 연인들은 그저 그렇게 어둠 속에서 달빛을 빌어 서로를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한효월은 조용히 손을 내밀어 그녀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당신답지 않소."

 "뭐가 나다운 거죠?"

 "그 오랜 세월 동안 고통을 이기며 살아왔던, 강한 사람이 당신이오. 당신이라면 이렇게 어린애처럼 울어서는 안 되는 게 아니겠소?"

 한효월이 조용히 말했다.

 "바보!"

 그녀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한효월은 팔을 벌려 그녀를 안아 보듬었다.

 "바보! 바보…… 으흐흐흑……."

 그녀가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이러고 싶지는 않았었다. 이러기 위해서 먼 길을 달려온 것이 아니었다. 흐트러진 모습이 아니라 아름다운 내 모습을 보여주고팠다. 그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싶었었다.

 그런데 그를 본 순간에 모든 것이 무너져 버렸다.

 "휴우우……."

 눈을 부릅뜨고서 문을 막은 채로 서 있던 송옥교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한번 들어가더니 쥐 죽은 듯 조용하다.

 게다가 뭔가 말소리가 들린 듯 만 듯하니 감천형으로서는 괴이쩍기 짝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는 판에 방 안에서 여인의 흐느낌이 들려온다.

 그제서야 그는 뭔가 복잡한 상황이 된 것을 알고 머쓱, 긴장을 풀고 반 걸음쯤 뒤로 물러났다.

 유성도 마찬가지인 듯 묘한 표정으로 방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인의 눈물은 참으로 가공할 위력을 지닌다.

 서로의 어색함도, 두 사람의 사이에 있던 서먹함도 그 모든 것을 눈물 한 방이 다 날려 버렸다.

 두 사람은 그윽한 눈길로 서로를 바라본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이미 그 탁자는 안중에도 없다.

 "……."

 창턱을 넘어 슬그머니 두 사람의 사이로 끼어들었던 달빛이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조금씩 미끄러지다 중심을 잃고 탁자 

아래로 떨어지고, 그도 모자라 창문으로 조금씩 물러난다.

 "왜 아무것도 묻지 않죠?"

 서문운하가 다시 입을 열어 물었다.

 "해야 할 이야기라면 당신이 할 테니."

 한효월이 간단히 답했다.

 그러자 서문운하는 그를 눈흘겼다.

 "언니가 말하길, 당신은 어릴 때부터 애늙은이 같았다고 하더니 정말 그런가 보군요."

 "……."

 한효월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때 서문운하가 정색을 했다.

 "내가 당신을 찾은 것은, 당신이 중독되었다는 소식을 들어서예요. 그렇지 않았다면 난 아직 산에 그대로 있었을는지도 몰라요."

 "좀 전의 그 쓴 차가 삽혈고의 해독제요?"

 "그래요. 그것만으로는 힘들겠지만 해독제는 맞아요."

 "역시……."

 한효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를 마신 후부터 전신의 기혈이 준동하고 있었다. 사방에서 충돌을 벌이고 있다고나 할까?

 "이제부터 기혈이 들끓을 것이고 그것을 배출해야만 해요. 활염라 조 숙부가 그 준비를 하고 있어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당신에게 몇 가지만 말을 할게요."

 서문운하는 암암리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조금 특별한 신분으로 태어났어요."

 이미 짐작한 부분이었다.

 특별한 신분을 지니지 않았다면 어찌 강호삼괴가 목숨을 바쳐서 그녀를 지키고 키우고 있겠는가?

 "내 외가는 대원(大元)의 적통(嫡統)이었어요. 어머님이 황통(皇統)을 이은 공주이셨다고 해요. 난 그렇게 해서 태어나면서부터

 몽고의 황족으로 자랐죠……."

 이어지는 그녀의 말은 놀랍기 그지없다.

 그녀가 쫓겨 나간 몽고, 그 대원의 후예란 건가.

 "……."

 그럼에도 한효월은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듣기만 한다.

 "나의 삶은 매우 고달팠어요. 이용하려는 사람들과 죽이려는 사람들로 인해서 늘 쫓겨야 했어요. 그냥 내버려 두어도 오래 살 수

 없었을 텐데…… 잠이 들면서 늘 곤혹스럽고 두려웠었어요. 오늘 잠이 들면 과연 내일 깨어날 수 있을 것인가?"

 강호삼괴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오래전에 백골이 되었으리라.

 "그분들은 내 어머님과 아버님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를 지켜주기로 약조하고 평생을 내 곁에서 보내고

 있어요."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송옥교는 그녀의 어머니와 자매와 같았다. 송옥교가 서문운하의 어머니에게 유명(遺命)을 받고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 머물자

 나머지 두 사람도 같이 머물게 되면서 묘한 여러 가지 일들이 얽히게 되었었다.

 나머지 두 사람은 늘 송옥교의 뒤를 따라다녔었기에.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했다.

 "근래 제천교의 행적 중 열에 다섯, 아니, 중요한 일들은……."

 서문운하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아마 거의 내가 세운 계획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아요. 삼 년 전에 몇 달간 정신이 맑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숙부의

 요청에 따라 복원지계(復元之計)를 세운 적이 있었어요. 끝을 못 내고 혼절하는 바람에 전 삼부 중 중원지계(中原之計)만 숙부가

 가져갔지만……."

 늘 침착한 한효월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 말을 듣고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뜻밖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숙부가 누구요? 설마……."

 "맞아요. 제천교주. 전대의 봉황문주였던 그분."

 "으음……."

 한효월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천재라고 불리는 그로서도 정말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그럼, 당신이 지금 제천교에 속해 있단 말이오?"

 "아뇨. 필요 시에 필요한 인원을 부릴 수는 있지만 직접 속해 있지 않아요. 만약 그랬다면 당신을 만났을 때, 그들과 싸울 리가

 있었겠어요? 깨어 있는 날보다 정신을 잃고 있는 날이 많은데 가능하지 않은 일이죠. 다만 숙부가 가져간 복원지계에 대해서

 이따금 숙부에게 조언을 하긴 했었어요. 숙부 또한 뛰어난 분이셨기에 그 복원지계 속에서 다시 몇 가지를 더 얽어내어 당금의

 국면(局面)을 만들어낸 거죠."

 너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말들이 그녀의 입에서 술술 흘러나온다.

 누가 상상이라도 했던 말인가?

 그녀가 세운 계획에 따라 당금의 국면이 조성된 것이라니, 그녀의 말이 아니었다면 누구라도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장난처럼 만들어본 계획이었죠. 침상에 누워 병서(兵書)를 보면서…… 설마 하니 이처럼 무서운 결과로 나타날 것으로는 생각도

 하지 못했었어요. 숙부 또한 제천교를 운영하고 있다는 말은 꺼내지도 않았으니…… 나중에 알게 되면서는 신기하기도 했었죠.

 내가 만들어둔 것들이 정말 시행되고 있음을 알고서……."

 말꼬리를 흐리는 그녀의 얼굴이 문득 어두워졌다.

 "내가 아는 건 내가 만들었던 것들이 정말 시행되고 있구나! 그런 감정뿐이었어요. 세상을 다녀볼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상태에서 세상을 보니……."

 제천교의 행태는 도를 넘었다.

 독을 뿌려대고 그것이 지나쳐 일반인들까지 그 독에 절어 신음하고 죽어가고 있었다.

 가히 천인공노라고 하여도 마땅한 일이었다.

 그것이 그녀를 괴롭게 했다.

 "연환오계(連環五計) 중에 독이 들어 있긴 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는데…… 너무 심하더군요. 어쩌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어떻게 그걸 이렇게 무섭게 바꾸어놓은 것인지……."

 그녀가 미간을 찡그렸다.

 "연환오계의 끝은 무엇이오?"

 한효월의 물음에 그녀가 무거운 표정으로 답했다.

 "말살(抹殺)이에요."

 "말살…… 모두 죽인다는 말이오?"

 "생각할 수 있는 존재들, 사회를 이끌어갈 수 있는 지식층을 모두 없애고 지배층을 바꾸는 작업. 의식의 말살이죠. 영원히 종속될

 수 있는 의식 구조를 만들어가는 작업…… 그건 완성된 게 아니었어요. 만들다가 다시 의식을 잃어버렸으니까요. 그 복원지계는

 미완성인 채로 내가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에 숙부가 가져갔어요. 뒤를 어떻게 했는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그 연환오계가

 완성되려면 중원지계뿐만이 아니라, 몽고 내부를 개혁해야 해요. 그런데 그건 전혀 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럼 지배층이

 사라지게 될 텐데 무슨 생각인지……."

 무차별한 독의 살포.

 그 배경에는 그러한 생각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내 나라, 내 신민(臣民)이 아니니 모두 죽여도 좋다. 그리고는 다시 정복하겠다. 이번에는 문화의 종속이 아니라 그 문화를

 복속(服屬)시킬 복안을 가지고서.

 달깍.

 서문운하가 탁자 위에다 작은 병 하나를 올려놓았다. 흰색 자기 병.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자기 병이었다.

 "지금 독왕이 뿌린 독의 해독제예요. 분량이 작아 사용할 수는 없지만 약선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그 내용을 알아내어 같은 것을

 만들어낼 수 있을 거예요."

 "약선이 해독약을 만들고 있음도 그들이 알고 있소?"

 "그래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서문운하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가 어디 있는지도 곧 찾아낼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되면 독왕의 독을 해독할 사람은 사라지게 되겠죠……."

 "그가, 그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고 있소?"

 "누구? 숙부 말인가요?"

 "그렇소."

 "왜요? 그를 찾아가려구요?"

 "필요하다면."

 "그만두세요.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는 주도면밀하여 언제라도 흔적을 남기지 않죠. 설사 나라고 할지라도 그의 행적은 알지

 못해요. 그가 연락을 해오기 전에는."

 그때 밖에서 송옥교의 음성이 들려왔다.

 "준비가 되었다."

 서문운하가 그를 바라보았다.

 "시기를 놓치면 어렵다고 하더군요. 삽혈고는 살아 있는 독이라…… 어서 가세요."

 "돌아갈 거요?"

 한효월이 물었다.

 무슨 의미인지 안다.

 "그 말을 했다는 것. 저 해약을 구해온 것으로 답이 되는 걸 알면서 왜 묻죠?"

 "그저……."

 마주 선 두 사람.

 한효월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희미한 달빛이 비치는 어둠. 그 어둠 속에서 눈과 눈이 서로를 담아놓으려는 듯이 바라본다. 그들은 알고 있다.

 이것이 어쩌면 그들 생애에 마지막 만남인 것임을.

 "미안하오……."

 한효월이 진심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가만히.

 그녀가 그의 가슴에다 자신의 이마를 묻었다.

 풋풋한 머리 향이 한효월의 코끝을 스친다. 무슨 향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렇게 그녀와 가까이 있어본 적은 사실상 없는 그였다.

 그녀를 느끼면서 문득 그녀와 함께 남은 생을 보내고 싶은 욕망이 치밀어 올랐다.

 얼마 남지 않은 생…….

 그 생을 불피풍우(不避風雨)하면서 도검이 난무하고 귀계(鬼計)가 판치는 강호를 전전해야만 하는 것일까?

 과연 나는 옳은 선택을 한 것일까.

 생각은, 고뇌는 길지 못했다.

 "하아야……."

 밖에서 송옥교의 재촉이 다시 들려왔던 것이다.

 흠칫, 찰나가 영원과도 같았던 그 순간을 뒤로하고 서문운하는 한효월의 가슴에 대었던 머리를 떼었다.

 바로 그 순간, 한효월은 그녀를 격렬하게 끌어안았다.

 송옥교의 재촉에 막 고개를 들던 그녀는 부지불식간에 그의 가슴에 얼굴을 부딪치면서 놀라 입을 벌렸다.

 가슴이 으스러지는 것 같고 전신이 그의 몸속으로 함몰되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

 "미안하오……."

 한효월은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다시 한 번 그녀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는 신형을 돌려 문을 향해 걸어갔다.

 "……."

 서문운하는 얼떨떨한 눈으로 조용히 그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 눈에는 이내 슬픔이 가득 차 올랐다.

 한효월이 문을 열고 나오자 문 옆에는 송옥교가, 출입구 쪽으로는 감천형과 유성이 서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공자!"

 한효월이 나옴을 보자 유성이 얼른 다가왔다.

 "녀석, 아직도 공자냐?"

 한효월의 말에 유성은 머쓱한 표정이 되었다.

 한효월은 시선을 돌려 감천형을 보았다.

 "지금 당장 황 방주를 만나주게."

 "지금 말입니까?"

 "지금."

 한효월은 말과 함께 손에 들고 있던 병을 그에게 내주었다.

 이게 뭐냐는 표정의 감천형을 향해 한효월이 전음으로 말했다.

 '제천교가 뿌리고 있는 독약의 해약이야.'

 그 말에 감천형이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이게 말입니까? 라는 표정.

 '시간을 다투는 일이니 최대한 빨리 그를 만나게. 해약을 약선 백장주 선배에게 전하고 그걸로 해약을 만들도록 전하게. 연단처가

 발각될 가능성이 있으니 은신처를 옮기도록 말을 전해.'

 "알겠습니다."

 감천형은 사태를 직감하고는 약병을 받아들여 품에 간직했다.

 "사숙께서는?"

 "난……."

 "아직도 안 기어들어 오고 뭘 하는 겐가?"

 문이 벌컥, 열리면서 한 사람이 건너편 방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활염라 조과였다.

 그가 문을 열자 방 안에서는 약 냄새가 강렬하게 풍겨져 나왔다.

 "……!"

 얼떨떨한 감천형에게 한효월이 말했다.

 "난 이곳에서 잠시 머물면서 해독하게 될 것 같군. 그러니 어서 가도록 해."

 무슨 뜻인지 상황을 대충 알게 된 감천형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한효월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송옥교와 활염라 조과에게

 가볍게 포권을 하고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성아, 넌 바깥을 지키도록 해라. 신호가 있을 때까지 외인이 들어오면 곤란할 게다."

 "알겠습니다!"

 유성도 바람처럼 빠져나갔다.

 "제 맘대로군."

 한효월은 송옥교의 투덜거림은 못 들은 듯 금방 문을 열었다 닫아버린 활염라 조과가 있던 건넛방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침침한 방에는 촛불 두 개를 켜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방 안을 가득 메운 약향.

 그 약향은 그리 강렬하지는 않았다. 코를 찌르는 신맛이 견디기 어려울 뿐.

 '식초…….'

 한효월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눈앞에 커다란 나무통, 욕조가 놓여 있고 거기에는 물이 가득 담겨 김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그 욕조 안에는 여러 가지 풀들이 무슨 늪지처럼 얼기설기하다. 하지만 그 욕조에서 오르는 김에서는 강한 신내음이 코를 찌른다. 물에다 식초를 들이부은 것인지, 아예 욕조 전체가 식초인지는 알기 어렵지만 물에다 대강 식초만 조금 섞은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마셔!"

 활염라 조과가 불쑥 잔 하나를 내밀었다.

 잔이라기보다는 대접과 같은 생김, 그 속에는 하나 가득 핏물이 찰랑거리고 있다.

 한효월은 아무 말 없이 잔을 받아서 안에 든 핏물을 마셨다.

 비린내가 입 안에서 진동한다.

 "빨리 들어가라."

 잔을 낚아채면서 활염라 조과가 턱으로 욕조를 가리켰다.

 잠시 망설이던 한효월은 겉옷을 벗어놓고 속옷만 걸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먹은 해약은 몸속 삽혈고를 들끓어오르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마신 것은 약초를 섞은 핏물이다. 삽혈고를 왕성하게 만들어 그 독기를 약초를 담근 식촛물에다 쏟아내게 할 생각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욕조는 매우 커서 어른이 들어가 앉으면 머리까지 들어갈 크기였다. 그 둥근 욕조에는(사실은 둥근 나무통이라고 해야 옳았다. 당시에는 거기에 물을 데워 간이 욕조로 쓰긴 했지만) 물이 가득 채워져 한효월이 들어가 앉아 겨우 목만 나올 정도였다. 물이 턱까지 찰랑찰랑하게 찼다.

 그렇게 그가 욕조에 앉아 활염라 조과가 말했다.

 "불을 뗄 거다. 대단히 고통스러울 게야. 죽을지 살지는 네놈에게 달렸지."

 그 말에 한효월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빠르면 이틀 정도, 늦으면 사흘은 걸려야 될 거예요. 삽혈고의 지독함은 골수에 스며들기 때문에 골수에 들어간 독기를 빼내려면 보통의 방법으로는 어림없어요."

 서문운하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들어왔는지 그녀가 사뿐사뿐 걸음을 옮겨서 한효월이 몸을 담근 욕조로 다가왔다.

 물속에 앉아서 보니 그녀의 귀 끝에 매달려서 찰랑거리는 구슬이 유난히도 영롱하다.

 "많이 힘들 거예요."

 "괜찮소."

 "……."

 말이 끊어졌다.

 "운기를 해서 놈을 배출시켜야 한다. 전신의 피가 쏟아질 테니 그 피에 놈을 쏟아내야 하고 기회는 그리 많지 않을 게다. 정신 바짝 차리고 끊임없이 운기조식해야 할 게다. 잠도 잘 수 없고 쉬는 시간도 없다. 얼마나 버틸 수 있느냐고 문제이겠지."

 활염라 조과가 말했다.

 말투는 냉정하지만 그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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