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五首 재견마녀(再見魔女)
-소식이 당도하다
명옥(冥玉)의 무서움은 하늘을 찌르나 부동(不動)이 있다
감천형은 교자(轎子) 하나를 가지고 왔었다.
하지만 한효월은 그 교자를 물렸다. 대신 그 교자에 좌백이 타고 오도록 배려했다.
지금 당장 좌백이 움직이는 것은 무리인만큼 운신이 가능하면 바로 감천형이 마련한 안거(安居)로 가게 될 것이었다.
이미 서산 너머로 해는 졌다.
하늘이 어두워지면 감시하는 눈은 둔해지고 움직이는 사람은 편해진다. 물론 그럴 능력이 있을 경우지만.
한효월과 감천형은 바로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인지라 그들이 움직이는 것에는 아무런 장애가 있을 수 없었다.
있던 곳을 떠난 한효월은 감천형의 안내를 받아 몇 군데 길을 돌고 가로지르는 가운데 바람처럼 동정호에 도달했다.
어둔 밤하늘.
갈대는 팔을 한껏 벌려 온몸을 흔들어댄다.
달은 이따금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지만 한순간일 따름. 어둠이 내린 동정호의 물빛은 그윽하기보다는 먹물처럼 짙게 검었다.
지형지물에 의지, 종적을 숨기면서 이동해 온 감천형은 호변에 도달해서 잠시 기척을 살피고는 낮게 손뼉을 쳤다.
그리 크지 않은 소리였지만 이내 조금 떨어진 갈대밭이 갈라지면서 작은 배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갈대밭에 숨어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배였다.
요즈음 동정호 일대는 말 그대로 보보살기(步步殺氣), 처처(處處)에 함정이고 기인이사(奇人異士)가 사방에서 속출하여 한시라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자연히 그들의 움직임도 은밀할 수밖에.
배는 그들을 태우고 금세 갈대밭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것과 함께 그들이 있던 갈대밭에서는 또 하나의 작은 배가 나타나 감천형과 같이 왔던 호위 무사들을 태우고 뒤를 따랐다. 하지만 그들은 같은 길로 오지 않았다. 노를 젓는 사람은 동정호를 샅샅이 알고 있어서 그들은 물길을 더듬어 소리없이 우회하여 앞선 배를 따르고 있었다.
만에 하나 뒤쫓는 자가 있다 할지라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일사불란하군……."
그들의 움직임을 본 한효월이 중얼거렸다.
"아직 부족합니다. 사람은 어느 정도 모이고 있지만 고수의 숫자가 모자랍니다."
"곧 충원될 수 있을 거야. 서두르지 말고 저들과 부딪치지도 말아. 지금은 저들과 싸울 때가 아니라 힘을 비축할 때이니까. 아무래도 여러 가지 상황이 심상치 않으니……."
"극도로 조심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힘든 상황이 계속된다고 들었는데, 예정대로 힘을 모으는 것이 가능하겠나?"
"사숙께서 이미 대계(大計)를 세워두지 않으셨습니까? 소질은 그 계획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으니 차질은 없을 겁니다."
"감 사질."
한효월은 마주 앉은 감천형에게 정색을 했다.
"예, 사숙!"
"내가 정해둔 대로만 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모든 일에는 변수가 돌발하기 마련인데, 원안(原案)대로 고집한다면 크나큰
차질이 발생할 수도 있어. 언제라도 잊지 마라. 이 일의 주장(主將)은 바로 감 사질, 자네라는 걸! 그건 필요에 따라 상황을 수정
보완해야 하는 책임자가 바로 자네라는 것을 의미하는 거야."
감천형의 얼굴이 굳어졌다.
"알겠습니다."
"무림맹은 사형의 죽음과 함께 무너졌지만 정기수호(正氣守護)의 정신은 감 사질, 자네가 지켜야 해."
"사숙께서 도와주셔야 가능합니다."
"감 사질답지 않은 소리군."
그 말에 감천형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낮은 철썩임 소리. 노를 젓는 솜씨는 절정이지만 아예 물소리를 없앨 수는 없다.
강물이 고요히 출렁이고 있었고 갈대밭을 비집으면서 작은 배는 조용히 미끄러져 가고 있는 중이었다.
'적이 너무 강합니다. 소질은 본신의 능력을 잘 알고 있습니다. 소질의 지금 능력으로는 저들과 정면으로 싸울 힘이 없습니다.
그간 조사한 바에 따르면 개방이 그중 가장 강한 듯하지만, 저희에게는 그런 힘조차 없습니다. 그들과 연수를 한다면 몰라도…….'
다른 사람이 들을까 저어한 듯 감천형은 전음으로 바꾸어 한효월에게 말을 전했다.
'연수를 하게.'
'예?'
'때가 되면 그쪽에서 먼저 이야기를 할 거야. 그럼 그때 손을 잡으면 될 테니 미리 준비를 해두게.'
'때라니……?'
'지금은 그렇게만 알아도 될 것 같군. 그때까지 감 사질이 할 일은 힘을 기르는 거지. 힘을 비축하고 강호의 정세를 예의 주시하게. 기회가 오면 그동안의 답답함을 날려 버릴 수 있도록.'
"……."
묘한 빛으로 감천형은 한효월을 본다.
쓰러졌다 겨우 일어난 사람이다. 자신이 찾아갔을 때에는 기식이 엄엄하여 정신조차 차리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새 개방 방주와 만나서 무슨 말을 해놓은 것일까? 그의 흉중에는 과연 무엇이 담겨 있기에 이처럼 막측한 것일까…….
한효월의 나이를 감안한다면 이 일은 참으로 불가사의라고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젊다는 것은 혈기방장(血氣方壯)함을 의미하고 그것은 일을 처리함에 있어 감정이 앞서기 쉽다는 의미인 까닭이다.
그런데 그는 전혀 달랐다.
결국 그는 암암리에 한숨을 몰아쉴 수밖에 없었다.
'사람마다 하늘이 주는 그릇이 틀린 것을…….'
그는 누구에게도 자신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실제로 그는 주위에서 기재(奇才)라는 소리를 듣고 자라난 사람이었다.
그런데 한효월을 만나면서 그 자부심은 산산조각으로 흩어져 아침 햇살에 밤하늘의 별들이 없어진 것과 같았다.
한효월이 다시 입을 열어 물었다.
"경아의 소식은 듣지 못했나?"
"예. 사람을 풀어 찾고 있는데…… 아직 종적을 찾지 못했습니다. 사모께서도 이곳에 도착하여 사매를 찾고 계신 듯한데 성과가
없으신 듯합니다. 다만, 한 가지 단서는……."
감천형이 암암리에 한숨을 몰아쉬었다.
"동정호 일대에서 원인 불명의 사체(死體)가 몇 군데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은밀히 사람을 파견하여 조사해 봤는데
이미 오래전에 죽은 사람처럼 시신이 매우 괴이하다고 합니다."
"피가 빨린 것 같다고 하던가?"
"그런 자도 있고 정혈(精血)이 고갈된 것처럼 보이는 자도 있답니다. 해서 소질이 직접 한 사람을 봤는데……."
감천형이 말끝을 흐렸다.
갑자기 주변이 숨을 죽이는 것 같았다.
노 젓는 소리, 뱃전에 부서지는 물살의 찰랑이는 소리뿐…….
유성은 암암리에 숨을 몰아쉬었다.
고고하고 차갑지만 어딘지 모르게 매력이 있던 여인, 검끝에 맺힌 서리와 같은 아름다움을 간직한 미녀 독고경을 그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지금 어떠한 처경에 있는지를 그도 잘 알고 있기에 숨을 죽이고 감천형의 뒷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명옥마녀가 흡혈을 한다면 과연 어떻게 되는가? 그 내용을 그도 안다. 어찌 숨을 죽이지 않겠는가.
"전신의 모든 피가 하나도 없어진 참혹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반항의 흔적도 보이지 않더군요. 부릅뜬 두 눈은 공포에 질려
있었지만 전신의 피를 모두 쏟아내고도……."
"피를 쏟아냈다면 피가 주변에 흘러 있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피가 흘렀다고?"
한효월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가 아는 한 그럴 수는 없다.
정혈을 흡수하기 때문에 모든 피는 흡혈되고 불순물은 그대로 모공을 통해서 배출된다. 해서 사람의 몸 안에 있는 피를 다 마신다 할지라도 실제로 체내에 남는 것은 그리 많은 게 아니었다. 그런데 그 피가 상당 부분 체외로 흘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죽은 사람은 어떤 신분이었나?"
"남자가 둘이고 여자가 하나인데, 여인은 열일곱 정도의 처녀였고 악양성 내 부호의 딸이었다고 합니다. 침실에서 발견되었고 남자 둘 중 하나는 서른 정도의 선비였고 다른 한 사람은 무림 중의 고수였습니다. 진악검객(鎭嶽劒客) 송진우라는 자인데 역시 서른 정도로 모두 미혼이라는 게 공통점입니다."
"음……."
한효월이 나직이 신음을 흘리며 입을 다물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마공은 극단적으로 순수한 것을 원한다.
다만 여인, 그것도 처녀를 취했다는 것은 뜻밖이다. 명옥마공은 원양(元陽)을 보조로 삼기 때문에 여인의 순음(純陰)을 취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한효월이 입을 다물자 다른 사람도 모두 입을 다물었다.
…….
침묵 가운데 작은 배는 갈대 숲을 헤치면서 매우 빠르게 전진했다.
하늘의 달은 숨었다 고개를 내밀었다를 반복하지만 전반적으로 일대는 어두운 편이었다. 남의 눈을 피해서 움직이기에는 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천기다.
개방이 있던 곳을 떠나서 몇 다경이 흘렀고 배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도 제법 걸렸다. 하긴 동정호가 수백여 리의 대호이니 그 거리는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가고 있는 곳은 지난번의 그곳이 아님은 별의 위치를 보면서 느낄 수 있었다.
침묵이 내려앉고 한효월은 조용히 눈을 내리감고 운기에 들었다.
조금이라도 힘을 회복해야 하고 또 체내의 독상을 다스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할 일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복잡하고 어렵기만 했다.
"다 왔습니다."
한 식경가량이 더 지난 다음에야 감천형의 나직한 음성이 들렸다.
경색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갈대밭을 헤집고 한참을 들어가다가 다시 강으로 나오니 앞에 섬 하나가 보였다.
섬 주변도 갈대가 무성하지만 이곳은 제법 위치가 은밀했다. 호변이 그리 멀지 않았지만 갈대밭으로 둘러싸여 수로(水路)를 잘 아는 자가 아니라면 찾아오기도 그리 쉽지 않아 보였다.
"수로연맹에서 분타로 쓰고 있던 곳입니다. 초소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분타는 여기서 십여 리 떨어진 섬으로 옮겼습니다."
섬을 보면서 감천형이 말했다.
"은밀한 곳이군. 여기에 날 기다리는 사람이 있나?"
그 말에 감천형은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어떻게 묘하게도 말을 꺼낼 기회가 되지 못하여 오면서도 왜 그를 데리고 오는지에 대한 말을 하지 못했었다.
게다가 한효월은 그것에 대해서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그런데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것처럼 물으니 역시라는 말이 나올 만했다.
"사숙께서 좌 사제와 같이 떠난 다음에 한 사람이 찾아왔었더랬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사숙을 찾아 동정호 일대에 사람을
풀었었는데 좀 늦고 말았었습니다."
"누군가?"
"저도 모릅니다."
"몰라?"
한효월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감천형은 신중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 때문에 자신을 찾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필유곡절이 아닐 수 없다.
"……."
한효월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말을 해보라는 의미다.
"그는 신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말한 내용이 놀라워서 사숙을 찾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사조님의 소식을 가져왔다고 하였습니다."
"사조?"
한효월의 눈빛이 확 달라졌다.
"사부님이란 말인가? 사부님의 소식을 가진 사람이 날 찾아왔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스스로를 용화회에서 왔다고 하였는데, 처음에는 사숙을 찾다가 안 계시니 전해주라고 하여 봉서만 남기고
사라졌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오늘 다시 찾아왔습니다. 상황이 다급하니 시간을 지체하면 일을 돌이킬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여 제가 사숙을 찾아갔던 겁니다."
그냥 사기꾼이나 허튼 자라면 감천형을 속여 넘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것도 아닌 사부의 소식이라니…….
한효월은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 봉서는?"
"그가 직접 말하겠다면서 봉서를 받아갔습니다. 위험은 일단 넘겼다는 걸로 보아, 아마 사숙이 함정에 빠질 걸 알고 그걸 막기
위해서 봉서에다 내용을 썼던 모양입니다. 봉서를 회수한 그는 다른 소식을 전해야겠다면서 상황이 다급하여 오늘 내로 사숙을
만나지 못하면 떠나야겠다고 하는 바람에 무리인 줄 알면서도 이렇게 사숙을 뫼시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가야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한효월이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그랬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실종된 사부를 찾는 일이다. 그처럼 애를 써도 소식 한 톨 얻을 수가 없더니 절로 찾아오다니…….
바로 그때였다.
앞쪽에서 난데없이 비명(悲鳴)이 들려왔다.
처절하고 날카로운 비명!
"으아악!"
이어 한차례 싸우는 듯한 소리…….
하지만 그것은 너무 순간적이었고 그 뒤로 이어지는 것은 비명, 그리고 또 비명이었다.
그것은 너무도 촉급하여 한효월은 물론 감천형까지 모두가 놀라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가 있는 곳입니다!"
감천형이 소리쳤다.
순간.
한효월이 몸을 튕겨냈다.
감천형이 신형을 날렸고 유성과 무사들이 연이어 그 뒤를 따랐다.
섬까지는 4, 5장가량이 남았었다.
하지만 그 거리는 한효월과 같은 고수에게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한효월이 허공을 가로질러 섬까지 도달하자 거의 동시에 감천형도 이르렀다. 뒤를 이어 유성도 날아들었다.
작은 길이 있었다.
그리고 그 길로 꼬불꼬불 십여 장을 가면 몇 채의 목옥(木屋)이 자리했다. 수채의 분타였음을 의미하듯이 은밀한 데다 방책(防柵)도 수풀 사이로 보였다.
거기 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한효월은 그의 상태를 살펴보지 않고 몸을 날려 방책을 넘었다.
또 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아니, 하나가 아니었다. 방책을 넘자 대여섯 명이 이리저리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한눈에 강적을 만나 방어하다가 그대로 일패도지한 형국이다.
그들 또한 장기판의 졸은 아니었을 터이다.
그런데도 저런 형국이라면…….
"으악!"
목옥의 뒤쪽에서 다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족히 십여 장은 떨어진 곳이다.
주위를 살펴볼 겨를도 없이 한효월은 다시 몸을 날렸다.
땅을 차고 올라 목옥의 지붕으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지붕을 차고 거대한 야조(夜鳥)와 같이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날아갔다. 주변은 온통 갈대와 대[竹]가 빼곡히 들어차 누가 숨어 있어도 알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미 비명이 어느 쪽에서 들려온 것인지를 아는 한효월인지라 그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고, 그의 뒤로는 감천형과 유성이 바짝 따르고 있었다. 나뭇가지를 밟고 잎을 차면서 날아가자 그 속도는 그야말로 질풍과도 같았다.
언제 부상을 입었는가 싶은 몸놀림이었다.
경색(景色)이 눈앞에서 빠르게 갈라졌다.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호변이 나타났다. 대숲을 이루었던 대나무들이 죽죽 밀려났고 잡초들이 사방을 덮었다. 호수의 물빛은 저 멀리서 넘실대지만 섬은 높이가 서너 장가량의 절벽을 깎아 물길을 막아두었다. 이쯤 보자니 밖에서는 공격하기 어렵고 안에서는 방어하기 쉽다. 천혜의 요지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곳에다 분타를 설치한 사람의 안목도 고명하다 해야 하리라.
그곳에 한 사람이 있었다.
잡풀 사이로 기암괴석들이 울멍줄멍 툭툭 불거진 그 사이로 한 사람이 연신 뒤로 물러나고 있었고, 그 머리 위쪽에서 너울거리는 검은 그림자 하나가 그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본 순간에 한효월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경아, 멈춰라!"
외침과 동시에 그는 전력으로 몸을 날렸다.
슉!
그의 신형이 무서운 속도로 허공을 갈랐다.
전신을 휘감은 것은 검은 너울과도 같은 능라(綾羅). 그 가운데 떠오른 얼굴은 창백하리만큼 희고 거울처럼 맑다. 깎은 백옥을 명장(名匠)이 다시금 곱게 다듬은 듯 서리서리 흰 얼굴은 검은 능라의 물결 가운데 솟아올랐다 사라진다.
훌훌 흐드러지는 검은 너울의 춤사위 가운데로 언뜻 백옥과도 같은 투명한 빛을 발하는 옥수(玉手)가 드러난다.
팡! 파파파…….
"크흐윽!"
참으려 해도 절로 입술을 비집고 신음이 터져 나온다.
거대한 암반에 짓눌린다 해도 이렇지는 않을 터이다. 그런데 이 부드러운 경력은 전력을 다해 막았음에도 기혈을 타고 올라와 가슴을 친다. 막아도 소용이 없었다.
그의 눈에 공포의 빛이 드러났다.
밀려드는 공포의 힘을 피해 힘을 비틀어 끊고 전신을 날렸었다. 하지만 채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그의 머리 위에 이미 그 공포의 검은 그림자가 날아와 있음을 보았던 까닭이다.
검은 능라가 어둠의 날개와 같이 공중에 뜬 마녀의 온몸을 휘감은 채로 훨훨 너울거린다.
그 가운데 자리한 얼굴, 그 눈은 얼음처럼 차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손에 한 치의 사정도 두지 않고 있음에도 살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환영(幻影)을 보는 것만 같았다.
거미줄에 걸린 파리가 이런 느낌인 것일까?
그러나 이대로 모든 것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명옥마녀가 현세(現世)하다니!"
그는 한소리 부르짖으며 발꿈치로 땅을 밀었다. 마침 작은 돌 하나가 튀어나와 있었다. 그 돌을 미는 순간에 그는 누가 잡아당긴 듯 일 장가량을 훌쩍 위로 솟구쳐 나갔다. 그것과 함께 그는 양손을 가슴에 모아 물살을 긁어내듯이 위에서 아래로 그어내렸다.
30년 전, 세간에 신룡조경(神龍爪勁)이라 이름했던 무공이 거대한 갈퀴와 같이 덮쳐 오는 흑의마녀를 휘감아갔다. 공격이 아니라 그녀가 펼친 명옥수를 쳐 밀어내고 틈을 얻기 위한 일격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지를 못했다.
흑의마녀는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와 같이 그가 전력을 다해 쏟아낸 신룡조경을 뚫고 날아들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는 관 속에 든 시신과 같이 차렷한 무방비 상태로 눈을 부릅뜬 채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양손을 모아 전력으로 아래로 긁어내면서 쭉 뻗은 발로는 바닥을 차고 위쪽으로 올라가는 형국에 가슴으로 손이 날아들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때 달려온 소리.
"경아, 멈춰라!"
말과 함께 한줄기 경력이 두 사람의 가운데로 날아들었다.
파팡!
맹렬한 바람이 일었다.
그럼에도 흑의마녀의 한 수는 그대로 목표를 향해 쏘아졌다.
하지만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경풍이 이는 가운데 속도는 느려졌다.
그 찰나적인 순간에 목표였던 회의노인은 경풍에 몸을 싣고서 팽이처럼 몸을 돌려 옆으로 굴러갔다.
팟!
회의노인이 있던 자리의 바위가 대신 경풍에 쓸렸다.
놀랍게도 흑의마녀의 백옥수는 경력을 쳐내면서 쏘아져 갔지만 목표물을 잃어버리자 슬쩍,
손목을 뒤집어 바위를 치는 대신에 그대로 신형을 돌려 팽이처럼 몸을 굴리는 그 회의노인을 향해 되짚어 날아갔다.
그 신법의 영교(靈巧)함은 가히 유령과도 같았다.
"손을 멈추지 못하겠느냐?"
호통과 함께 한 사람이 그녀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가 정면으로 그녀와 맞서는 순간에 뒤에서 다시 준엄한 호통 소리가 터졌다.
"정신 차려라! 무슨 짓이냐!"
천둥 같은 호통.
동시에 뼈를 깎을 듯한 도기가 그녀를 뒤에서 엄습했다.
그처럼 무섭던 그녀도 이 양면 공격에는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앞으로 뻗어내던 손을 슬쩍 휘저어 회수했다.
길다란 검은 소맷자락이 너울거리면서 그녀의 옥수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것과 함께 그녀의 신형은 너울거리는 능라 비단을 휘감은 채로 불쑥 일 장여 그 자리에서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렇게 되자 앞으로 날아들었던 한효월의 공세와 뒤에서 그녀를 공격했던 감천형의 일도는 단 한 수에 모두 허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저, 정말 사매, 사매 너로구나……."
그녀의 모습을 본 감천형이 신음을 흘렸다.
훌훌 날아오른 그녀.
검은 능라로 전신을 휘감은 그녀의 백옥 같은 얼굴이야말로 독고경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신음을 삼켜야 했다.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던 흑의마녀, 독고경이 한줄기 질풍처럼 쏘아져 내렸기 때문이다.
"경아!"
경호성과 함께 감천형은 수중에 뽑아 들었던 패도를 휘둘러 내어 그녀를 쳐갔다.
그녀가 이미 전설 중의 마녀가 되었음은 짐작하지만 그래도 차마 독수를 쓸 수는 없어 수중에 어느 정도 사정은 남겨둔 일격이다.
그러나 그것은 큰 착각이고 그의 실수였다.
그녀는 이미 지난날의 그녀가 아니었고, 지금의 감천형이 전력을 다해도 상대하기 어려운 절고(絶高)한 고수였던 것이다.
감천형은 일도를 쳐내어 그녀와 맞닥뜨리는 순간에 그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고수의 대결에 있어 한 수는 운명을 좌우한다.
"네가 정녕!"
감천형은 노호를 터뜨리면서 수중의 패도에 진력을 끌어 올렸다.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하자 정면으로 맞닥뜨리려는 것이다.
패도에서 푸른 도기가 쭈욱 뻗어나 강기를 형성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릴 위세였지만 독고경은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무심한 눈길로 그를 보면서 백옥과도 같은 옥수를 들어 그를 쳐올 따름이었다.
누구도 저렇듯 불똥이 튀는 듯한 감천형의 패도를 보면서 손으로 그것을 마주쳐 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조금도 망설임없이 맨손으로 감천형의 패도를 잡아오고 있었다.
그 손은 그냥 손이 아니었다.
맑고 투명하여 손의 내부가 다 드러날 정도였다. 세상이 말하는 빙기옥부(氷肌玉膚)가 바로 그녀의 손이었다. 그런 가운데 은은하고 맑은 옥빛이 밝게 쏟아져 나오니 옥으로 깎아 만든 손 안에다 등불이라도 켜놓은 것만 같을 지경.
탕!
그녀의 손이 슬쩍 움직이면서 손등으로 감천형의 그 무서운 패도의 도신(刀身)을 쳤다.
대체 어떻게 그 삼엄한 도광을 뚫고 들어갔는지 아연실색할 일.
감천형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거세무비의 힘은 분명히 아닌 듯했다.
그럼에도 그녀의 한 수에 팔이 쩌르르…… 저려오면서 괴기한 기운이 패도를 통해서 팔로 밀려오는 것이다. 그 섬뜩함은 괴이하여 감천형은 하마터면 패도를 놓쳐 버릴 뻔했다.
"대단하군!"
감천형은 소리침과 함께 패도를 움켜잡으며 신형을 빙글 반 바퀴 돌렸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가 발출한 경력을 흘려내고 다시금 위치를 잡고자 함이었다.
그가 본 이래 그녀는 한 번도 땅으로 내려서지 않았다.
사람이라면 제아무리 무공이 높아도 땅에 발을 딛지 않고서는 계속해서 진기를 운용할 수 없으며, 신법을 전개할 수도 없다. 그렇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가 있었다면 곤륜의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이 어찌 천하의 절기로 손꼽힐 수가 있었겠는가?
그렇게 힘을 흩트리면 그녀 또한 숨을 돌리기 위해서 땅으로 내려서야 할 테니 그때를 맞춰 다시금 정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나 그는 다시 착각을 한 것이다.
상식의 범주에 속한다면 어찌 그처럼 무섭다 하랴.
신형을 돌려 세우면서 패도를 고쳐 쥔다. 그리고 패도를 쓸어내는 것은 다르면서도 한 동작이었다. 고수다운 변초였지만 독고경의 명옥수는 이미 그런 것을 넘어서 너울너울 그의 가슴에 도달해 있었다. 허공을 평지처럼 밟고서.
'이럴 수가!'
감천형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팡! 파팡…….
가슴에 세운 패도가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이 춤을 춘다.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 감천형의 얼굴은 창백한 가운데 붉게 충혈되어 기괴할 정도였다.
순간.
"경아! 멈추지 못하겠느냐!"
준엄한 호통이 터져 나왔다.
파앙!
맹렬한 폭음.
"윽!"
감천형이 비틀거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한 가닥 경풍이 휘모는 가운데 그 바람을 타고서 독고경은 너울너울 몸에 감은 능라를 휘날리면서 허공에 둥둥 떴다.
그녀는 그런 모습으로 자신을 막은 사람을 보았다.
한효월.
창백한 빛이 어린 그는 두 눈을 부릅뜬 채로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경아, 나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겠느냐?"
한효월이 다시 소리쳤다.
그의 외침은 특이했다.
단순히 고함을 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진기가 충만한 절세의 내공이 깃든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심금을 파고드는 외침에 무심했던, 절대무심(絶對無心)으로 고요했던 독고경의 투명한 눈에 처음으로 미미한 흔들림이 일었다.
그녀는 온몸을 휘감은 능라의를 흩날리면서 공중에 둥둥 떠 있었다.
실로 불가사의 한 일!
사람이 그저 허공에 떠 있는,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할 일이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절정의 경공이라 일컫는 능공답보(凌空踏步)와도 또 틀린 모습이었다.
휘유우우우…….
한 가닥 바람이 주위를 쓸고 지나갔다.
푸스스…….
좀 전 그녀가 살짝 짚고 지나갔던 그 바위가 먼지로 화해 바람에 흩날리는 것을 본 회의노인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는 부지중에 암벽에 몸을 붙이면서 신음을 흘렸다. 그 손이 자신을 쳤으면 어떻게 되었을는지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도 알 일이었으니까.
'알려진 것보다 더 무섭군…….'
그는 내심 이를 악물었다. 그가 입은 상세는 생각보다 매우 엄중하였다.
"경아……."
한효월이 다시 그녀를 불렀다.
그의 음성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음성에는 심금(心琴)을 두드리는 기묘한 울림이 있었다. 깊은 밤 홀로 잠 못 이룰 적에 들리는 풍경(風磬)의 맑은 소리라고나 할까?
그녀의 눈빛이 다시 흔들렸다.
절로 너울거리던 그녀의 검은 능라의가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눈빛 깊은 곳에서 묘한 빛이 일었다.
"누…… 구……?"
물끄러미 한효월을 바라보던 그녀의 투명한 입술이 열리며 웅얼거리는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나다! 한효월! 나를 보거라, 경아!"
한효월이 그녀에게로 한 걸음 다가가면서 말했다.
그의 신색은 참으로 묘했다.
창백했던 얼굴이 온화롭게 변했고 그 얼굴은 어둠 속에서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장엄하게까지 보였다.
"이리 내려오너라. 경아! 거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이리 내려오너라, 이리 오너라. 경아……."
한효월이 그녀에게로 손을 벌리며 다시 되풀이하듯 말했다.
물끄러미 그를 보고 있던 독고경의 미간에 곤혹스러운 빛이 떠오르는가 싶더니 묘한 파도가 물결처럼 인다.
"사…… 숙?"
"그래, 나다. 나를 알아보겠느냐?"
한효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럴 수가? 명옥마녀가 이지(理智)를 가지고 있다니?'
그 광경을 보고 있던 회의노인이 놀라 눈을 부릅떴다. 있을 수 없는 일이 그의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당신…… 당신이…… 한…… 효월이라구요? 당신이……."
"그래! 내가 한효월이다, 경아!"
한효월이 그녀를 향해 머리를 끄덕였다.
"한…… 효…… 월…… 한…… 효…… 월……."
그녀가 다시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 깊은 곳에서 감정처럼 보이는 흔들림이 일었다. 아득한 기억 저편의 무엇인가를 꺼내려고 할 때의 빛.
그녀의 미간에 괴로운 빛이 떠오른 것도 그때였다.
"아니야!"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몰라! 난 당신이…… 당신이 누군지 몰라…… 몰라!"
그녀가 다시 외쳤다. 머리를 심하게 흔들어대는 그녀는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격심한 갈등이 이는 것이 분명했다.
"몰라…… 몰라……."
그녀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고통스러운 빛이 역력했다.
공중에 둥둥 떠 있던 그녀의 신형이 누가 잡아당긴 듯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거의 반 장가량이나 허공에 떠 있던 그녀의 신형은 어느새 바닥에 닿을 듯했다.
"경아! 너를 보거라! 너는 건곤무적 독고해의 딸 독고경이다! 네가 누구인지를 너는 잊지 말아야 한다. 네가 바로 독고경이다!"
한효월이 종소리 같은 음성으로 질타했다.
"아아아……."
머리를 움켜쥔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고통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경아!"
한효월은 왼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움찔한 독고경이 머리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고통에 가득 찬 그 눈은 한효월의 고요한 빛을 뿜는 눈과 마주치자 전신이 마치 벼락을 맞은 듯 뒤흔들렸다.
"……."
말은 없다.
하지만 한효월은 조용히 그녀를 향해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종종 그러한 경우를 본다.
말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침묵을, 그 몸짓을…….
그녀의 얼굴에, 눈에 서렸던 고통의 빛 깊은 곳에서 희미한 안도의 빛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바로 그 순간이다.
어디선가 묘한 음색의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예전에도 들렸던, 바로 그 소리였다.
'호혼지곡(呼魂之曲)!'
그 소리를 들은 순간에 한효월의 안색이 달라졌다.
찰나,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일그러져 있던 독고경이 갑자기 날카로운 외침과 더불어 손을 들어 한효월을 쳤다.
팡!
미처 피할 수조차 없었다.
두 사람의 거리는 너무 가까웠고 그녀의 공격 또한 창졸간이었다.
그나마 한효월은 그녀의 어깨를 잡으면서도 나름대로 대비를 하고 있었기에 오른손을 들어 그녀의 장세를 막아낼 수가 있었다.
아니, 막으려고 했었다.
그는 그녀의 빛을 뿜는 명옥수를 쳐냈지만 그녀의 손씀은 너무도 빨라서 그가 그녀의 손을 밀어내는 순간에 그녀의 손은 이미
한효월의 가슴을 치고 있었다.
펑!
"우욱!"
한효월의 입에서 피분수가 쏟아져 나갔다.
그러고도 모자라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비틀거리면서 대여섯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사숙!"
대경실색한 감천형이 땅을 박차고 날아왔다.
"공자!"
유성이 놀라 부르짖으며 달려왔다.
"아니야! 난, 아니야!"
한효월을 일격에 날려 버린 독고경은 미친 듯 머리를 흔들었다.
그 서슬에 그 삼단과 같은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어 그녀의 얼굴을 덮고 주위를 휩쓸었다.
휘유우우우웅…….
놀랍게도 그 몸짓에 일대에 돌개바람이 일었다.
머리카락이 닿은 나뭇가지가 뚝뚝 부러져 나갔다.
"사숙! 괜찮으십니까?"
감천형은 그녀가 재차 공격하지 않음을 보고 한효월에게로 날아가 그를 부축했다.
"되었다. 난…… 괜찮아."
그는 머리를 저어 보이곤 앞으로 나섰다.
"경아! 네 자신을 바로…… 바로 보거라.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너는 너일 뿐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잊지 말거라. 너,
너는…… 너는 너일 뿐이라는 것을! 너는 위대한 아버지 건곤무적 독고해의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 독고경이다. 누구도 너를
꼭두각시로 부릴 수는 없다! 너는…… 너는 독고경인 것이다……."
한효월은 가슴을 움켜잡은 채로 크게 소리쳤다.
그의 음성은 장중했고 방금 독고경의 경세일격(驚世一擊)에 피를 토한 사람 같지 않았다. 입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눈을 부릅뜬
모습은 당당했고 눈에서는 신광이 불칼같이 쏟아져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독고…… 경……."
그녀가 중얼거리자,
"그래, 네가 바로 독고경이다!"
한효월은 결연히 외쳤다.
"아냐…… 아냐……."
그녀가 이를 갈면서 중얼거렸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피리 소리가 살기를 띠고 뛰논다.
순하게 가라앉던 독고경의 눈빛이 사납게 일었다. 그리고 그 눈빛은 얼음과 같이 차갑게 변했다.
살기에 불타는 얼음이라고 하면 그 모습을 형용할 수 있을까?
"잊지 말아라! 너는 명옥마녀가 아니다! 너는 독고경이야!"
"아니야! 닥쳐!"
갑자기 그녀가 소리쳤다.
그리고는 사납게 발을 구르더니 한효월을 향해 바람처럼 덮쳐 갔다.
뼈를 깎는 삭풍이 불어오는 것만 같았다. 그 삭풍은 매섭고도 빨라 번쩍 하는 사이에 이미 세상을 온통 다 휘감아버렸다.
그런데도 한효월은 눈을 부릅뜨고서 그녀를 쏘아보고 있을 뿐,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를 향해 앞으로 나아갔다.
"호생지덕(好生之德)으로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하도다! 삿됨이 마음에 있으니 내 어찌 그를 버려둘 것인가? 하늘이 너를 괴임을
잊지 말며, 삶의 근본이 네 안에 있음을 또한 잊지 말지어다! 마(魔)가 득세한들, 한때의 도장(道障)일 따름이니 어찌하여 나를
잊어버리려 하는가……. 잊지 말라, 잊지 말거라…… 네가 너임을!"
그가 어깨를 출렁이면서 무슨 말인지 알기 힘든 말을 내뱉었다.
한 걸음을 나아가고 또 한 걸음을 비켜서고 소매를 쳐내고 소맷자락 사이로 손을 쓸어내어 독고경을 공격한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춤사위처럼 보여 공격하는 것이 아닌 듯 보이기도 하였다.
둘의 모습이 기묘하게 엇갈렸다.
독고경이 사납게 한효월을 덮쳤다.
"물러가거라!"
감천형이 참지 못하고 호통을 치면서 날아들어 수중의 패도를 쳐냈다.
"조심!"
유성도 메고 있던 검을 이미 뽑아 들고 있었다. 그도 고함치면서 번개처럼 검을 쳐내어 그녀를 공격했다.
영원과도 같고 찰나와도 같은 시간이 장내를 휩쓸었다.
그 가운데 그녀는 감천형의 패도를 손가락으로 튕겨냈고 유성의 검세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대로 한효월을 향해서 직격(直擊)해 들어가 누구도 그를 구할 수는 없어 보였다.
팡! 파파팡!
맹렬한 폭음.
그리고는 고막을 찌르는 비명!
이어 송곳을 세워 쑤시는 듯 날카로운 웃음소리,
그 소리의 여운이 장내를 휘모는 질풍에 묻혀 스러질 때에 그녀의 모습은 이미 장내에서 보이지 않았다.
주춤, 한효월의 앞에서 한 사람이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회의노인.
바로 그였다.
그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가슴을 움켜잡은 채로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주르륵, 한 가닥 핏줄기가 그의 입에서 땅으로 쏟아지듯이 흘러내렸다.
비틀, 한효월도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그는 한 손으로 땅바닥을 짚으며 앞으로 기어가 노인을 부축했다.
"왜 그런 무리를……."
"괜찮은…… 가?"
"괜찮습니다."
한효월은 그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으니까.
"다, 다행이군……."
하지만 회의노인은 한효월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억지로 눈을 뜨는 그 얼굴에는 이미 죽음의 빛이 깔려 있었다.
"자네가…… 자네가 한효월. 맞는가?"
"맞습니다."
"다행이군, 다행이야…… 살아서 보게 되다니…… 쿨럭!"
그의 입에서 거품 섞인 핏물이 흘러나와 그의 말을 막았다.
"노선배……."
그의 상태를 알아본 한효월이 손을 쓰려 하자 회의노인이 머리를 저었다.
"그만두게. 쓸데없이…… 힘을 소모할 필요가 어…… 어디 있겠나? 자네 또한 쉽지 않은 처지…… 힘을 아껴야 할 거야. 놈들은
이대로 물러나지 않을 테니 어서 이곳을 벗어나게. 난 이미 마녀의 명옥수에…… 심맥이 끊어졌으니…… 으윽, 반 각도 버티기
힘들어……."
풀풀, 그의 입으로 핏물이 흘러나왔다.
실로 전광석화와 같은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독고경이 달려들고 있음에도 한효월은 물러나지 않았다. 무섭게 빛나는 눈으로 그녀의 눈을 노려보면서 오히려 그녀에게
달려들었었다. 그런 상황에서 감천형과 유성이 전력을 다해 뛰어들었지만 오히려 늦은 감이 있었다.
그때 날아든 것이 그 회의노인.
그는 한효월 대신에 독고경의 일장을 맞고 쓰러졌다.
그 순간에 한효월은 손을 내밀어 독고경을 쳤고 그녀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람처럼 그 자리를 떠나갔다.
그것이 이 일의 경과였다.
그 상황의 진전은 참으로 놀랍도록 빨라서 누구도 그 상황을 제대로 보기 힘들었다.
그러니 회의노인이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한효월이 독고경과 한차례 손속을 마주친 것을 누가 제대로 볼 수가 있겠는가.
"자네…… 사부에게 말을 들었…… 과연 자랑할 만한 제자로군……. 내 눈으로 부동명왕공을 보게 되다니……."
"사부님을 아십니까?"
한효월이 격동한 빛으로 물었다.
"그는…… 용화회…… 호법장로(護法長老)…… 그는……."
회의노인은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미 말이 되지 않았다.
그는 안타까운 빛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면서 안간힘을 썼다.
다급한 한효월은 그의 가슴을 더듬었다.
봉서 하나가 거기 있었다. 기름종이로 단단히 싼 봉서는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다행히 무사했다.
한효월이 자신의 품에서 봉서를 꺼내는 것을 본 회의노인은 안도의 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내가 할 일은 다 했……."
말과 함께 그의 머리가 떨구어졌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이라 그를 부축하여 힘을 보태주려던 감천형은 멍청해졌다.
"노선배!"
그가 소리쳤지만 죽은 사람은 대답을 할 수 없는 것이 천고의 진리.
한효월은 한숨을 내쉬면서 그의 눈을 감겨주었다.
그리곤 빠른 어조로 말했다.
"어서 이 자리를 떠나자."
"예?"
"빨리! 나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다……."
말과 함께 한효월은 그 자리에 쓰러졌다.
"사숙!"
"공자!"
감천형과 유성이 놀라 일제히 소리쳤다.
"어서 이곳을 떠나."
한효월은 그 말과 함께 눈을 감았다.
창백한 얼굴.
그의 상태는 결코 좋아 보이지 않았다.
감천형은 비로소 약선 백장주가 하던 말을 떠올릴 수가 있었다. 그곳을 떠나면 안 된다고 하던 그 말.
그리고 한효월이 아직 채 회복되지 않았다는 것을.
한효월이 너무 비범하여 사람들은 종종 그도 사람이라는 것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잊곤 했다.
지금의 감천형이 그러하였다.
그는 한효월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비로소 사태가 심각함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의 눈앞에서 한효월이 쓰러지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그는 한효월을 위대했던 사부와 같은 높이에다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격전을 벌일 상태가 아니었다.
"모두 이곳을 떠난다! 유성, 사숙을 맡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유성은 한효월을 부축해 업으면서 바닥에 쓰러진 노인을 보았다.
"그럼, 이 노인은……."
"안타깝지만 다른 사람을 시켜서 돌보도록 하자. 사숙이 이처럼 재촉하는 것을 볼 때, 여기에는 단 일 각이라도 더 머물지 않는 게
좋겠다. 앞서라. 내가 뒤를 맡으마."
감천형이 재촉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느낀 유성은 한효월을 부축하고는 쏜살같이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타고 왔던 배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 뒤를 감천형과 무사들이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