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四首 청풍명월(淸風明月) (86/113)

第四首  청풍명월(淸風明月)

-달빛은 밝기만 하다

여심(女心)은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눈물짓다

 황엽은 갔다.

 한효월은 그와 헤어져 한곳으로 가고 있었다.

 그가 있던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바로 거기에 한 사람이 있다.

 좌백.

 목숨을 바쳐 한효월을 구하려 했던 그가 요양하고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숲길을 따라 조금 더 간다면 약선 백장주가 숨어 약을 연구하는 계곡이다.

 별다른 이름조차 없는 그 계곡은 가장 은밀히, 가장 엄중하게 경계되고 있었다.

 희미한 어둠이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지만 아직은 석양의 잔재가 남았다.

 초가 세 채가 옹기종기 모인 그 자리는 아늑해 보였다.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는 그 초가들의 모습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평화로움에 다름이 아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 어디에서도 이상함을 느낄 수 없을 테니까.

 그 초가들의 가장 뒤쪽에 있는 초가에 좌백이 있었다.

 한효월은 그곳에서 자신을 막아선 한 사람을 보았다.

 "비켜주세요, 한 공자세요."

 어느새 한효월의 뒤를 쫓아온 심소옥이 손사래를 치며 나섰다.

 앞을 막아섰던 장한은 말없이 물러나 숲 속으로 사라졌다.

 "기다리고 있거라."

 초가의 문 앞에서 한효월이 말했다.

 한효월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고 심소옥과 유성이 남았다.

 유성은 따라 들어가려다가 멈칫, 묘한 모습이 된 심소옥을 보면서 투덜거렸다.

 "계집애가 쓸데없이 쫓아와서는……."

 "뭐라고?"

 심소옥이 유성을 쏘아보았다.

 "아냐? 네가 안 쫓아왔으면 난 여기 서 있지 않았을 거야!"

 "이게 정말……."

 "허…… 이러니 널 공자께서 못 들어오게 하신 거야. 잔소리 말고 거기서 보초나 서. 공자께서 기다리라고 한 말의 의미를 몰라?"

 "죽치고 있으란 소리잖아!"

 "쯧쯔…… 계집애 아니랄까 봐 소견머리 하곤, 하긴 그래야 너답지……."

 "뭐라고?"

 심소옥의 눈이 도끼눈이 되었다.

 "잔말 말고 보초나 서."

 유성이 몸을 돌려 싸리담에 어깨를 기댔다.

 네가 뭐라건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저걸 그냥…….'

 심소옥은 잡아먹을 듯 유성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이 마당에 성질을 부리면 될 것도 안 된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성질을 부릴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아무리 제멋대로라고 할지라도 그 정도는 아는 그녀였으니까.

 이미 불을 밝혀놓았다.

 하지만 환자에게 밝은 불빛이 그리 필요한 것은 아닌지라 불빛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넓지 않은 방.

 그 침대에 누운 좌백을 볼 수 있었으니까.

 "사숙……."

 한효월을 보고 놀란 듯 좌백이 몸을 일으켰다.

 한효월은 내상이 심할 뿐 외부의 상처는 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몸으로 그를 막아냈던 좌백은 외상이 상당했다.

 거기에 내상까지 덧들었으니 그가 중태라는 말은 그냥 전해진 게 아니었다.

 한효월은 그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얼른 그를 잡았다.

 그가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버둥거린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냥 있어."

 한효월의 말에 좌백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는 누운 채로 눈을 감았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그런 말을 하나?"

 "죄송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입을 다물었다. 눈도 다물었다고나 할까.

 한효월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앞에 앉았다.

 …….

 침묵이 소리없이 흘러갔다.

 묵묵히 있던 한효월은 손을 뻗어 좌백의 맥을 잡았다.

 좌백은 움찔했지만 입을 열지도 눈을 뜨지도 않았다.

 잠시 그의 맥을 잡고 상태를 살피던 한효월은 그를 보면서 말했다.

 "무공을 회복하기 쉽지 않겠다. 대법을 통해 격발시켰던 잠력을 발산하면서 다시 수렴하여 후일을 기약해야 하는데, 그 잠력을 다

 써버렸으니 진원지기(眞元之氣)까지 손상이 되어 어쩌면……."

 말끝을 흐렸던 한효월은 다시 말을 이었다.

 "영원히 무공을 회복하지 못할런지도 모르겠구나."

 "……."

 좌백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여전히 눈을 뜨지 않고 그저 눈을 감고 있을 따름이다.

 길게 한숨을 내쉰 한효월은 다시 말했다.

 "하지만 영약과 함께 고수가 내력을 도운다면 진원지기를 보충하여 무공을 회복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능하다면 최선을

 다해서 알아보겠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한 가지만 물어보지. 왜 나를 구했느냐?"

 "……."

 다시 침묵.

 잠시 기다리던 한효월은 다시 입을 열었다.

 "좌백, 내게만 말을 해다오. 너에 대한 말은 아무에게도 하지 않겠다."

 그 말에 미미한 떨림이 좌백의 몸에 일어났다.

 "좌백."

 다시 부르자 좌백은 눈을 떴다.

 그 눈은 깊이 침잠해 있었다.

 "그래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

 문득 쓴웃음이 좌백의 얼굴에 떠올랐다.

 "하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저 한 손으로 눈을 가리려는 몸부림에 불과할 따름…… 어차피 세월이 흐르면 세상이 모두

 다 알게 될 것을……. 부질없는 욕심, 헛된 망상일 따름인 것을."

 "넌 우리를 배신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다른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배신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런데 왜 나를 구했지?"

 좌백의 얼굴에 괴이한 빛이 흘러간다.

 "나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사숙이 그대로 죽는 것을 보고 있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순히 그래서였기만 했을까?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일까?

 그래, 그때였다.

 적을 앞둔 상태에서 한효월의 전음지성(傳音之聲)을 듣던 그 순간.

 '뭐 산속에 들어가서 조용히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하면 좋겠지……. 하지만 그렇게 죽으나 싸우다 죽으나 죽은 다음에야 마찬가지가

 아니겠나? 나의 죽음으로 다른 사람들의 행복과 맞바꿀 수 있다면 그것도 의미있는 일일 테니 좋겠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던 한효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좌백은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괴이하달 정도로 일그러진 얼굴로 한효월을 바라보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격동에 찬 신색(神色)으로!

 늘 신비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미미한 웃음을 머금은 그 초연한 모습을 본 좌백은 가슴이 뭉클, 저며옴을 느껴야 했다.

 냉철(冷徹)한 사람들은 대개 냉정(冷情)하다. 그래서 감동이라는 것을 잘 하지 않는다. 좌백도 마찬가지였다.

 가슴으로 느끼기 전에 머리로 분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갑자기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말문이 막혀 말이 나오지를 않았던 것이다.

 위대한 사부였다.

 그를 속이면서 그의 밑에 있었음은 그가 죽은 지금에 이르러서 늘 후회스러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건곤무적 독고해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는 영웅이었고 호한(好漢)이었다.

 그의 제자 된 사람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그를 존경하고 목숨을 걸고 따를 수밖에 없다. 그의 인품에 심복(心服)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좌백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최후의 순간까지 독고해를 속였었다. 그가 뻔히 죽을 것을 알면서도……. 아니, 그가 설마 죽어 돌아올 줄은 몰랐었다. 너무도 위대했던 사람이었기에.

 하나 그도 사람이었었다.

 칼을 맞으면 죽는…….

 또 한 사람.

 그의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을 죽게 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로 인해서였을까? 일단 생각을 먹자 좌백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을 알면서도 그는 있는 모든 힘을 다 짜내어 한효월을 구해냈다.

 그리고 그는 이 자리에 한효월과 같이 있었다.

 움찔, 좌백의 어깨에 떨림이 일었다.

 한효월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있었다.

 "너는 스스로의 잘못됨을 버릴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어린 나이였을 때의 네가 설사 남에게 이용당했다 할지라도 누가 그것을

 욕할 수 있겠느냐? 나는 좌 사질이 그간 얼마나 심한 마음 고생을 했는지 누구보다 더 잘 느낄 수 있겠다……."

 "……."

 좌백의 눈꼬리가 떨렸다.

 꽉 다문 입술은 격동으로 인해 가늘게 떨린다. 입을 열어 말을 하기도 그렇고 그냥 있기도 그랬다.

 그저 격(激)할 뿐이다.

 "아무도 알지 못한다. 너와 나를 제외한다면."

 한효월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 않아도 그 말의 의미를 모를 바보는 이 방에 없다.

 그러나 좌백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고맙다. 좌 사질……."

 한효월이 말했다.

 그리고 그는 등을 돌렸다.

 "저를, 저를 떠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좌백의 음성이 그를 붙잡았다.

 한효월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핏기없는 얼굴은 창백했고, 한효월을 보는 좌백의 눈은 깊고 어두웠다.

 "네 스스로 떠날 수 있을 때까지는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제천교주가 너를 그냥 두려 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그 손을 벗어날 수 없을 겁니다. 빠르고 늦음이 다를 뿐이니,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무공까지 상실한 마당이다. 무슨 수로 그 손길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네 무공은 완전히 상실된 것이 아니다."

 일순 좌백의 눈에 한 가닥 빛이 반짝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는 이내 머리를 저었다.

 "헛된 희망은 갖고 싶지 않습니다."

 "헛된 희망이 아니야,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

 좌백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다.

 "우선은 상처를 회복하도록 해라. 스스로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에서 어디로 떠날 수가 있겠느냐?"

 한효월의 말에 좌백은 입술을 물었다.

 그랬다.

 그는 이제 폐인과 같았다.

 무공을 익혔던 사람이 무공을 버리게 되면 더 힘든 상태가 된다. 그런데 그는 심한 외상까지 겸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아직도 기식이 엄엄한 상태였을 그런 중상(重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스스로의 힘으로 걷기는커녕, 침상에서 내려오기조차 힘들었다.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힘든 상황이니 오죽할 것인가.

 어둠이 그의 얼굴로 방으로 내려앉았다.

 그런 좌백을 두고 한효월은 무거운 얼굴로 방을 나섰다.

 한 사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급하게 달려온 듯 상기된 얼굴이었다.

 그의 무공으로 저처럼 상기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은 큰일이 있거나 혹은 대단히 급한 일이라 전력을 다해 달려왔음을 의미한다.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감천형이었으니까.

 "깨어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한효월이 방에서 나오는 순간에 때마침 그 자리에 당도한 감천형이 그를 향해 미처 예도 갖추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걱정을 끼쳤네. 왔다 갔었다고?"

 "그렇습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 옆을 지켜 드리지 못했습니다."

 "별말을."

 한효월이 미미하게 웃었다.

 여전히 표연(飄然)한 모습.

 그리고 그는 물었다.

 "무슨 일인가?"

 "지금 움직이실 수 있습니까?"

 "지금?"

 "예."

 필유곡절(必有曲折)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감천형이 그런 말을 한다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일임을 한효월은 잘 안다.

 "가지."

 한효월이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앞섰다.

 "안 돼요!"

 그 앞을 한 사람이 막고 나섰다.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막고 선 사람. 다른 사람이 아닌 심소옥이다.

 "무슨 짓이야?"

 유성이 눈썹을 곤두세웠다.

 "절대로 안 돼! 약선께서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도록 엄명을 내리셨어. 이곳을 떠나면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죽도록 버려두고

 싶으면 가는 걸 그냥 둬도 좋다고 하셨단 말이야! 그러니 난 절대로 대가를 보낼 수가 없어!"

 "그……."

 유성이 멀뚱한 표정으로 한효월과 그녀를 번갈아 보았다.

 "소옥, 비켜라."

 "안 돼요!"

 "비키라고 했다. 내가 정말 간다면, 우리 셋을 네가 막을 수 있겠느냐?"

 심소옥이 주춤하더니 갑자기 유성에게 빽, 소리쳤다.

 "바보! 넌 대가가 어떻게 되든 그냥 따라만 다닐 거니? 그 때문에 대가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그, 그건……."

 유성이 주춤거렸다.

 "난 괜찮다. 걱정할 것 없다."

 "누가 그래? 걱정할 게 없다고?"

 창노한 음성이 사납게 들려왔다.

 한 사람이 성큼성큼 숲 속 길을 질러 그들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약선 백장주였다.

 여전히 팔을 둥둥 걷어붙인 모습이고 흉흉한 기세다.

 그는 한효월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밤바람을 쐬면서 싸돌아다닌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바람이 좋군요."

 "당장 돌아가!"

 "떠나겠습니다."

 "뭐라?"

 "지금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베풀어주신 은혜, 두고두고 잊지 않겠습니다. 갚겠다는 말씀은 드리지 못하겠군요. 죄송합니다."

 "못 가."

 "……."

 한효월은 말없이 그에게 머리를 숙였다.

 그 몸짓에 서린 고집을 읽었는지 약선 백장주는 두 눈을 부릅뜨고서 감천형을 바라보았다.

 "이놈이 어떤 처경인지 알고 데려가려는 겐가?"

 "무슨……."

 "당장이라도 쓰러지면 그걸로 끝이야.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어. 그걸 알고 이놈을 데려가려는가 말이다!"

 "그……!"

 감천형은 안색이 달라져 한효월을 돌아보았다.

 "사숙, 이게 무슨 말입니까? 어느 정도 회복되신 게 아니었습니까?"

 "회복되었다."

 "회복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저 안에 자빠져 누운 놈보다 더 심한 상태인데도 그게 회복인가?"

 그가 눈을 부릅뜨자 사람들은 아연실색했다.

 그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험악한 어투도 놀랍다.

 하지만 그보다는 거의 기식이 엄엄한 상태에서 겨우 목숨을 건지고 아직 침상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는 좌백보다도 더

 위험하다니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렇게 멀쩡하게 다니는데 어떻게……."

 심소옥이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물었다.

 "계집애가 알 일이 아니다."

 약선 백장주는 그녀의 말을 자르고는 한효월을 쏘아보았다.

 "당장 돌아갈 텐가? 아니면 내가 눕혀주랴?"

 "지금 약선께서 하실 일은 저를 돌보는 게 아니라, 천하를 구하는 일입니다."

 한효월이 정색을 하고 약선을 바라보았다.

 "제천교에서 뿌린 독은 천하의 극독이지만, 약선께서 해독하지 못할 것은 아닐 겁니다. 너무 다량으로 뿌리다 보니 절독한

 독물(毒物)의 성분이 그리 많이 섞여 있지 않으니 그 기간은 더욱 단축되겠지요. 게다가 그 독은 즉사를 할 수 있는 독성(毒性)은

 묘하게 피하고 있으니 어느 정도의 시간을 벌 수 있기도 합니다. 그런 그들의 의도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가기도 하지만…… 문제는

 이런 독이 천하에 만연하면 그 피해를 보는 것은 죄없는 일반 백성들이라는 점입니다. 약선께서는 한 사람을 위해 소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네놈이 나를 훈계할 작정이뇨?"

 약선 백장주가 다시금 노해 눈을 부릅떴다. 그의 의도(醫道)는 천하제일이라 하나 무공은 그리 높지 않은 듯 알려졌다.

 하지만 흩어진 백발이 올올이 곤두서는 것은 실로 놀라운 내공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니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그의 진신무공은 많이 잘못 전해진 듯했다.

 "그럴 리가."

 한효월은 다시 가벼이 고개를 숙였다.

 "소생은 일의 경중(輕重)을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이 일은 단순히 감정으로 처리할 일이 아닙니다."

 "누가 널 키웠느냐?"

 "제 사부님에 대해선 알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만."

 "경월선인이란 이름을 누가 알아!"

 눈을 부릅떴던 그는 갑자기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놈들! 세상이 싫어서 떠났으면 그대로 기어나오지 말 것이지, 뭘 난데없이 튀어나와서 이렇게 지랄들을 떠는 겐가!"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린 그는 한효월을 쏘아보았다.

 "꼭 가야 하겠느냐?"

 "죄송합니다."

 "땅바닥을 기는 한낱 미물조차 삶을 위해 모든 걸 바쳐 투쟁하는데 제깟 놈이 뭐 그리 잘났다고 모든 걸 초연한 척……

 눈꼴이 셔서 못 보겠군!"

 갑자기 그는 성큼 앞으로 나섰다.

 "황가 놈이 재삼재사 부탁하지 않았더라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게다! 놈의 사부를 봐서 널 보러 왔을 뿐이지."

 말과 함께 그는 한효월의 품에 약병 하나를 안겼다.

 "언제 쓸지는 네놈이 판단해."

 그는 한차례 발을 구르고는 홱, 몸을 돌렸다.

 "감사합니다."

 한효월은 숲 사이로 사라지는 그를 향해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의 손에는 자기로 만든 약병 하나가 들려 있었다.

 밀봉이 된 자기병은 자그마했지만 약선 백장주가 준 것이라면 범상한 것은 아닐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한효월은 그 약병이 어떤 것인지 안에 뭐가 들었는지도 확인하지 않고 품속에다 간직했다.

 "가지."

 한효월이 말했다.

 "사숙!"

 "혼자 왔나?"

 "아닙니다. 호위대 열과 같이 왔습니다."

 "그들에게 일러 좌백이 조금 호전되면 옮기도록 하지. 거처할 곳은 마련할 수 있을까?"

 "물론입니다. 당연히 옮겨야지요. 워낙 일이 급해서 그냥 갔었습니다만, 고비를 넘겼다면 당연히 우리가 돌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좌 사제의 상태는……."

 "옮겨도 별 탈은 없을 걸세. 가면서 이야기하지."

 "대가!"

 그의 앞을 심소옥이 막아섰다.

 "비키거라."

 "절대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그렇게 못해요. 이렇게, 이렇게 가면 잘못될 걸 뻔히 알면서…… 알면서 대가를 보내 드릴 수는

 없어요! 그렇게는 못해요!"

 심소옥이 도리질했다.

 희미하게 덮어오는 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에 찰랑찰랑 눈물이 피어올라 흩어지고 있었다. 격렬하게 흔들리는 얼굴.

 그 얼굴에서 번져 가는 격정(激情)은 그녀의 나이답지 않았다. 누구도 그것을 말릴 수 없어 보였다.

 오죽하면 유성조차 멀뚱하게 그녀를 보고만 있었을까.

 그녀를 보던 한효월은 가볍게 머리를 젓더니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 손을 그녀의 어깨에 얹었다.

 "여기까지로 하자."

 말과 함께 그의 입에서 전음이 흘러 그녀의 귀로 들어갔다.

 '내게는 이미 아내가 있다.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런 그녀조차 버리고 세상에 나왔다. 나는 너를 그저 어린 누이로

 생각할 뿐이니 더 이상은 나를 괴이지 말거라.'

 "난……."

 심소옥이 입술을 물고서 발딱 고개를 들었다.

 '그만. 그리고 난 금년을 넘길 수 없다.'

 그 말에 심소옥은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마치 커다란 쇠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게 무슨……?"

 '더 이상은 알 필요가 없다. 나는 남은 생을 준비해야만 한다. 여자 문제로 신경 쓸 여유가 없는 사람이야. 너의 마음은 고맙다만

 그것은 그 시절에 겪을 수 있는 마음의 동요에 불과하니 이제 더 이상은 나를 따르지 말거라. 오늘 이후, 네가 다시 지금과 같다면

 난 너를 더 이상 보지 않겠다. 잊지 말거라. 넌 나의 착한 누이동생이다.'

 말과 함께 한효월은 그녀의 어깨를 한번 두드려 주고는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냉정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다.

 그녀는 그를 잡지 않았다.

 그저 목상이 된 듯 그저 그렇게 우뚝 서서 멍하니 서 있을 따름이다.

 마치 넋을 잃은 듯 눈도 깜박이지 않고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

 유성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암암리에 길게 한숨 쉬고는 그녀를 스쳐 지났다.

 그들 모두가 사라질 때까지 심소옥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그렇게 묵묵히 서 있기만 하였다.

 스산한 바람이 몇 번이고 불어와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 흔들어도 그녀는 그저 그렇게 서 있기만 했다.

 누가 본다면 그녀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어 버린 것이 아닌가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다만 그녀의 얼굴에서 흐르는 두 줄기 눈물만이 지금 그녀가 격렬한 고통을 겪고 있음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쯧쯔…… 어쩌자고 그런 큰 놈을 마음에 둬가지고…….'

 그 광경을 보고 있던 한 사람이 암중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독행신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다.

 젖먹이 그녀를 키웠던 사람이 그였다. 젖동냥을 해가면서 키웠던 아이다. 가슴이 아프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름대로 그녀를 훌륭히 키웠지만,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녀를 거지로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 어찌할 것인가?

 거지 계집아이.

 비록 개방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녀로서 어찌 당대 최고의 기남(奇男)이라는 한효월을 넘볼 수가 있을

 것인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무림이 신분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허참…… 어지간해야 어떻게 해보지…….'

 그는 어둠 속에 숨은 채로 혀를 찼다.

 한효월의 지금 상태를 모르는 그인지라 어떻게 해볼 수 없을까를 열심히 궁리를 한다.

 만에 하나 한효월의 시한부 생명을 알았다면 그가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겠는가.

 몽둥이로 줘 패서라도 한효월에게서 떼어놓을 것이었다.

 죽으면 모든 게 끝난다라고 믿는 그였다.

 그의 그러한 생각들은 들려오는 소리에 끊어졌다.

 "욱…… 욱……."

 가슴을 끊어 삼키는 소리.

 석상처럼 서 있던 심소옥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쪼그리고 앉아서 가슴에 얼굴을 묻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았다.

 울고 있다.

 차라리 서럽게 통곡을 하면 덜할 텐데…….

 어둠 속에서 그것을 보는 독행신개는 가슴이 아렸다.

 하지만 평생 사랑다운 사랑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그인지라 이 마당에 어떻게 해야 할런지 알지 못하고 그저 가슴만 태울 뿐이다. 그저 쓸데없이 쑥대밭처럼 헝클어진 머리카락만 긁어댈 따름이었다.

 풀풀 속절없이 비듬이 눈가루처럼 떨어지는 가운데 어둔 숲 위로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달빛만이 무심히도 아스라이 차다.

 재천원작비익조(在天願作比翼鳥),

 재지원위연리지(在地願爲連理枝),

 천장지구유시진(天長地久有時盡),

 차한면면무절기(此恨綿綿無絶期)라…….

 하늘에 태어난다면 부디 비익조1)가 될 것이며

 땅에 태어난다면 연리지2) 되기를 원하노라.

 하늘과 땅이 다할 날이 있을지라도

 이 한(恨)만은 영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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